150화. 사형대에 오르다 (1)
힐데아 폰 힐링턴의 재판일.
아니, 재판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실상 처형일이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모여 있는 귀족들의 낯은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이곳에서 오로지 의연한 사람은 황후, 데자이아 그녀 혼자인 것 같았다.
“정말 이대로 진행되어도 괜찮은 것입니까?”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힐링턴과 벨키우스조차 가만히 있는 것을.”
귀족들 몇이 입술을 깨물었다.
특히, 경직된 자세로 침묵하고만 있는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 그리고 힐링턴 공작가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은 조각상이라도 된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침묵하고 있었다.
귀족들의 눈에 비애가 스쳐지나갔다.
“딸의 처형식이나 마찬가지인데, 힐링턴 공작 각하께서…….”
“……다들 보지 않았습니까. 황후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을. 그 이능이라면 우리 모두가 죽을 수 있습니다. 힐링턴도, 벨키우스도, 남은 가족들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축언 도둑에 당하면 축언과 이능만 잃는 것이 아니었다.
필시 죽을 것이다.
‘빠져나갈 곳이 없구나.’
그때였다.
황후가 우아하게 두 팔을 벌리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모인 이들을 향해 인사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주어 감사하군요. 이는 제국의 고귀한 황제 폐하를 대신한 인사랍니다.”
다들 검에 찔린 듯한 표정을 했다. 황후의 가증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황후가 가리킨 황제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황제는 지금 감금되어 있었다.
황제의 지지자였던 황녀, 라피이아의 행방 역시 오리무중.
그러나 황후의 상황도 기묘했다. 당연히 앞으로 내밀 것으로 생각했던 황태자, 벤자민이 보이지 않았다.
실종되었다는 말이 있던데 정말이었는가 싶으면서도, 귀족들은 추측들을 삼키며 눈을 굴렸다.
설마. 설마 황후가 직접……?
황제가 되려는 속셈인가?
“오늘의 재판은 제국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최고 신관님이 맡게 될 것이랍니다.”
“크라이스입니다. 오늘, 공정한 재판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창백해 보이지만 평소처럼 우아한 최고 신관 크라이스가 황후의 손짓에 따라 귀족들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허어, 어찌…….”
그것을 보며 다들 할 말을 잃었다. 최고 신관이라니.
최고 신관, 신을 가장 사랑하는 자.
가장 고귀한 축언과 이능의 소유자.
그게 바로 최고 신관이란 자인데, 황후의 부름에 따라 이런 비열한 재판에 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설마 최고 신관이 황후의 사람이었단 말인가?
아니면 황후의 손에 신전마저 들어갔다는 뜻일까.
후자라면 더 비참한 현실이었다.
“그럼 죄인을 불러올까요? 힐데아 폰 힐링턴 영애를 데리고 오라.”
황후는 짐짓 인자하게 말하고 있지만, 호응하거나 웃는 자들은 없었다.
재판장에 깔린 것은 공포였고, 모두의 시선이 보란 듯이 내걸려 있는 처형대의 모습에 쏠렸다.
어떤 재판도 이렇게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감옥에 갇혀 고초를 겪었을 텐데도 여전히 찬란히 빛나는 은발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모두 감탄했다.
‘힐데아 폰 힐링턴.’
누가 봐도 억울하게 끌려 온 힐데아 폰 힐링턴은 보란 듯 놓여 있는 사형대를 보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도리어 고개를 빳빳이 들어 황후와 시선을 마주쳤다.
“…….”
그뿐인가.
위축되지 않고 담담한 표정이나, 천천히 걸어오는 그 움직임조차도 남달랐다.
모두가 탄식했다.
오늘 애꿎은 목숨이 지겠구나.
* * *
황후는 입술을 잔인하게 비틀었다.
‘그래, 순순히 고개를 숙이지 않을 줄은 알았건만.’
이런 상황에도 오만하게 수그러들지 않는 눈빛을 하는 계집이 참 가증스러웠다.
벌벌 떨며 죄를 고하거나 살려 달라 청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이것이 다 너 때문이다.’
저것으로 인해 그녀는 아들을 잃지 않았던가.
역시 처음부터 짓밟고 치워버렸어야 했는데.
하지만 늦지 않았다.
드디어 오늘, 힐데아 폰 힐링턴의 최후가 될 것이다.
그리고 벨키우스와 힐링턴 역시 그 오만한 콧대가 꺾이며 그녀의 앞에 조아리게 될 것이다.
아니, 이 제국 전체가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절망에 빠져 우는 자들을 보기 전에 여유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지.
황후는 여유롭게 죄인을 응시했다.
“힐데아 폰 힐링턴. 그대가 오늘 이 자리에서 선 이유를 압니까?”
치열한 시선이 오갔다.
“모릅니다, 황후 폐하.”
담담한 그 목소리에 황후의 눈썹이 확 치솟았다.
하지만 아직 저것이 뻗대는 중이구나,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곧 벌벌 기며 울게 될 터이니.
제 아들이 저것에게 매달려 넋이 나갔던 시간처럼!
“그대는 두 가지의 죄목으로 이곳에 섰습니다. 첫째, 그대는 축언 도둑 사건의 진범으로 그 불길한 축언을 이용하여 수없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증인이나 증거에 대한 이야기는 쏙 뺐다.
감히 이 자리에서 자신에게 그것을 따질 수 있는 자는 없으리라.
황후는 벨키우스와 힐링턴 쪽을 바라보며 쾌감을 느꼈다.
저 오만한 것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꼴이라니! 힘이 좋긴 좋구나, 조소하면서도 열심히 입을 놀렸다.
“뿐인가. 그대를 잡으려 움직였던 이들 중, 내 아들이 있었지요.”
황후는 짐짓 굉장한 충격을 받은 척 숨을 골랐다.
“그대를 좋아한다 열렬히 고백했던 내 아들, 황태자 벤자민 말입니다.”
“……그것이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황후는 코웃음을 쳤다.
상관이 없다?
“그대는 참으로 뻔뻔하군요. 내 아들이 그대에게 얼마나 잘했는지 귀족들 중 모르는 이들이 없을 것이건만. 어째서 내 아들을 죽였나요?”
하나를 얻으니 하나가 더, 그것을 바라니 그보다 더 큰 것을 바라게 되었다.
“내 아들은 축언 도둑 사건의 범인이 그대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도 배려하고자 하였어요.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였죠?”
사실 황후 쪽에서 아들의 시체를 찾으라는 명령을 내렸다가 곧 거두었다.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기 때문이다.
저 힐데아 폰 힐링턴으로 인해 엇나가고 말을 듣지 않았던 벤자민을 생각하면 더더욱.
황제의 자리에 앉혀 놨는데 아들이 저를 배신하기라도 하면?
그럴 바엔 차라리…….
“그대 때문에 내 고귀한 아들, 황태자 벤자민이 죽었으니 그대는 곧 황족을 시해한 죄인입니다. 황족 시해에 해당하는 범죄자는 삼대를 멸하고, 그 자리에서 즉결 사형을 해도 모자랄 터.”
황후는 보란 듯이 눈물을 닦아내며 아들을 잃은 어미의 비통함을 분노로 치환했다.
“그러니 내가 그대에게 보였던 배려도 끝입니다. 저 사형대가 보이나요?”
황후는 사형대를 가리켰다.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는 그대를 보니 참을 수가 없군요. 힐데아 폰 힐링턴, 그대는 저 사형대에 오르게 될 겁니다. 바로 지금!”
목에 핏대가 서고 목소리가 점점 고조되었다.
‘뭐지?’
그런데 왜일까.
쏘아붙이듯 내뱉고 있는데도 이상했다.
황후는 점점 불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뭔가…….’
당장이라도 저것의 목을 처형대 위에 올리라 할 수 있건만, 유리알같이 투명한 눈동자가 불쾌할 정도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혀 겁에 질리지 않은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찌.’
황후는 잇새에 꽉 힘을 주며 주먹을 쥐었다.
증거는 모두 조작해두었고, 우긴다고 하여 책잡힐 일도 없었다.
이쪽은 최고 신관 크라이스의 경악스러운 이능이 있다.
황후 자신이 손짓만 하면 이 자리에 모여 앉은 이들 중 절반은 죽일 수가 있다.
그러니 완벽하다. 누구도 자신에게 거스를 수 없다.
그런데도 어째서?
괜히 알 수 없는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찌 저리 당당하지?’
황후는 노려보듯 벨키우스와 힐링턴을 훑었다.
제 악혼녀에게, 딸에게 쏟아지는 모욕에 딱딱히 굳은 얼굴에는 여유라곤 없어 보였다.
그래, 아니다. 역시 그녀가 만든 이 자리는 완벽했다.
여기서 황후는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였다.
“황후 폐하, 저는.”
침묵을 지키던 힐데아 폰 힐링턴이 입을 열다가, 갑자기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시선 끝에 있는 것은 제 가족들이라.
그 모습을 보는 황후의 마음에 그제야 안심의 기색이 피어올랐다.
하.
‘그러면 그렇지. 멀쩡한 척을 했던 것이로군.’
그래, 네 가족의 목숨줄이 이 손에 있단다, 오만한 것아. 그러니 살려달라, 잘못했다 빌어야지.
물론…… 살려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축언 도둑 같은 흉악한 이를 더 살려둘 수는 없을 터. 이 자리에도 이렇게 제국의 중요한 축언과 이능의 소유자들이 모여 있으니!”
황후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손짓을 읽은 황궁 기사들이 힐데아의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잘 벼려진 기사들의 검은 당장이라도 힐데아를 찔러버릴 듯했다.
그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검이 되어.
황후의 눈이 잔인하게 번뜩였다.
그때였다.
쥐죽은 듯 있던 힐데아 폰 힐링턴의 입이 열린 것이.
“황후 폐하, 발언을 요청합니다.”
……뭐라?
황후의 눈썹이 경련했다.
* * *
나는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승리자가 된 듯 눈을 빛내는 황후와 시선이 마주쳤다.
말로는 비운에 잠긴 어미인 척하고 있지만, 그 눈에는 열망과 탐욕만 느껴졌다.
황후는 자신이 직접 황제의 자리를 가질 생각인 모양이었다.
쓴물이 올라왔다.
축언과 이능을 빼앗고 죽일 수 있다는 것으로 귀족들을 협박해서 얻은 권력이 얼마나 갈 수 있으려고. 왜 그걸 모를까?
나는 내게 꽂힌 수많은 시선을 의식하며 허리에 힘을 주었다.
“저는 공작가의 영애로서 이런 식의 재판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