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54화 (154/155)

154화. 사형대에 오르다 (5)

다 끝났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나는 속으로 안도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크라이스가 찾아온 이후, 우리가 준비했던 대로 황녀 라피이아가 이끌고 온 군대까지도 움직였다.

황후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녀의 가장 큰 패였던 크라이스조차 배신했다.

이제 황후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나는 가브리엘과 시선이 마주쳤고, 서로 안도의 뜻을 교환했다.

그때, 홀로 동떨어진 사람처럼 흔들리던 황후의 눈빛이 납처럼 검게 변했다.

그녀의 시선 끝에 걸린 것이 바로 황녀의 손짓에 따라 죄인처럼 질질 끌려 들어오던 인물 때문이었다.

나도 그를 보았다.

내게 오만하게 지껄이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형편없는 몰골이 된 사람을.

“베, 벤자민?”

“……어마마마.”

그건 황태자, 벤자민이었다.

‘역시 죽지 않았었구나.’

크라이스만 혼자 돌아온 것이 이상하다 했었는데, 크라이스와 황녀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 계획이 있었구나.’

그때 벤자민을 끌고 오게 한 황녀가 고개를 들다가 나와 마주쳤다.

여유롭게 손까지 흔들며 내게 윙크하는 황녀에게 한숨을 쉬어 보인 뒤, 나는 황후를 주시했다.

“네, 네가 어찌?”

“……결국 어마마마께서 원하셨던 것은 그 자리셨군요.”

벤자민은 꼭 죽은 사람 같았다.

오만하게 번들거리던 시선도, 가시처럼 삐죽 올라오던 열등감도 모두 잿가루가 되어 사라진 사람 같아 보였다.

그러나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그저 그렇구나 싶었다.

황후가 한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당연히 죽었을 줄 알았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는데도 어머니도, 그 아들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의 시체조차 찾지 않았고, 아들 역시 그 모든 행태를 보았을 테니까.

“자아, 이제 다 포기하세요.”

내 주변에 있던 기사들의 검끝도 모두 황후에게로 향했다.

패배자가 되어 기력조차 잃은 황태자 벤자민이나, 꼭 자신이 재판대에 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퀭해진 황제 디트로이아나.

‘가브리엘도, 크라이스도, 우리 아빠의 복수도 모두 이뤄진 셈이겠구나.’

비정하지만 그랬다.

황가는 끝장났다.

그러니 황가의 오만함으로 인해 사람을 잃고, 사랑을 잃고, 많은 것을 잃어야 했던 가브리엘, 크라이스, 그리고 아빠의 복수가 이루어진 셈이다.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며, 황후가 저런 일들을 저지르기까지 황제가 모를 리 없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황제의 권력 역시 이전과는 다를 것이라는 점이었다.

‘곧 새로운 황제를 볼 날도 머지않을 거야.’

제국의 미래를 위해 다행인 것이라면 축언과 이능 따위와 관계없이 얼마든지 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야심가, 황녀 라피이아가 있다는 것.

나는 차가워진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 그런 것들은 아무 상관도 없었다. 내 시선은 오로지 백금발의 남자에게 향해 있었으니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내가 가브리엘의 마음속까지 읽을 순 없지만, 그는 이 순간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을 텐데.

‘옆에 있어주고 싶어.’

지금이라도 당장 가브리엘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손을 꼭 잡아주고 싶어.’

그가 나약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허탈할 것이 분명한 저 사람 옆에서 손을 꼭 잡아주고 싶었다.

그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아니까.

“다 끝났소. 거기까지 하시오, 황후. 나 또한 모든 것을 인정할 터이니.”

황제의 말이 그렇게 뚝 떨어졌을 때, 기력을 잃고 시들어버린 식물처럼 툭 떨어지려던 황후의 눈빛이 되돌아왔다.

“그렇게 말하면 다 끝날 줄 알아, 디트로이아? 다 끝났다고? 웃기지 마.”

한순간의 일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분노의 시발점이 처음부터 황제였다는 것처럼.

대체 어디서에서 그런 힘이 났던 것일까 싶을 만큼 황후가 재빨리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쥐어있던 독약 병이 누군가를 향해 확 뿌려졌다.

검게 번지는 액체가 그 누군가에게 닿을 찰나가 무척이나 느리게 보였다.

황후가 악의를 가질 수 있는 사람. 끝까지 해하려고 물고 늘어질 자. 나는 그 사람이 바로 나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가브리엘!”

내가 아니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가브리엘의 눈이 천천히 떠지는 것이, 그리고 모두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귀에 파고들었다.

안 돼.

절대.

찢어지는 듯한 내 비명과 함께 손을 뻗었다.

준비하고 있었던 이능을 마음껏, 아니. 과하게 뿌렸다. 가브리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어버릴 것처럼.

황후가 깔깔 웃는 것이 보였다.

“가브리엘, 황제가 그리 아꼈던 네놈만이라도 끌고 내려가 주마! 다시는 그 오만한 콧대를 들지 못하도록! 다 잃고, 죽어갈 것이다!”

최고 신관의 이능은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이능.

그러니 어떤 이능도 깰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아니.

아니야.

절대 안 돼.

절대, 저 사람을 다치게는 못해.

내 눈앞에서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어.

심장이 뜨거웠다.

강한 확신이 들었다.

나는 저걸 막을 수 있어.

환한 빛무리가 폭탄처럼 터졌다.

그 빛에 모두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렸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나는 온몸에 있던 힘이 쑥 빠져나간 것 같은 현기증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어떻게 된 거지.

가브리엘은?

손이 미친 듯이 떨렸다.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설마 그가 축언과 이능을 잃어버린 거야? 내가 지키지 못 했어……?

눈물이 왈칵 터져 나오려고 했을 때였다.

“힐.”

낮고 그윽한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당신이 저를 구했습니다.”

“……리엘? 다, 다치지 않았어요? 내가, 내가 제대로.”

“네, 제대로 하셨습니다. 너무 훌륭할 정도로 확실히 막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말, 정말이죠? 지금 나 안심하라고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몇 번이든 말씀드릴게요, 힐. 당신께서 최고 신관의 이능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두 없애버리셨습니다.”

“내가…….”

아. 지켰어. 내가, 지켰어.

아까와는 다른 감각으로 온몸에 힘이 풀렸다.

흐릿한 시야로 기사들에 의해 거칠게 연행되는 황후가 보였다.

그녀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모습도,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것처럼 푹 꺼져 보이는 황제의 모습도.

그리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나를 보며 웃고 있는 크라이스도.

최고 신관의 이능은 가장 높은 등급의 것이라고 했는데, 어째서 내가 그의 것을 완전 소멸시킬 수 있었을까.

내 이능은…… 치유의 이능이 맞는 것일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아무래도 어떤가 싶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손을 뻗어 가브리엘의 뺨을 움켜쥐듯 잡았다.

그리고 흐릿한 시야를 거칠게 문지르고 또렷하게 보이는 가브리엘의 모습을 허겁지겁 눈에 담았다.

그래, 무사해.

아무 데도 다치지 않았어.

황족들의 일이나,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나, 일의 처분 같은 것들은 지금 다 상관없었다.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이 사람만 있으면 돼.

나는 가브리엘의 품에 강하게 끌어 안겼다. 안도의 숨을 푹 내쉬며 그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이제 우리, 행복할 일만 남았어요. 세상 모두가 질투할 정도로 행복하게만 살아요.

그리고 그 전에 내가 꼭 그에게 주어야 할 것이 있었다. 그걸 받으면 어떤 얼굴을 할지.

두근거리는 설렘으로 말을 내뱉고 싶었지만, 생전 처음 내재된 힘을 폭발하듯 썼던 부작용일까.

가물가물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잠들면 곤란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가브리엘의 품이 너무 단단하고 넓어서 이성적인 사고를 하기 힘들었다.

가까이 다가와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은 목소리가 무척이나 익숙했는데도 괜찮다는 듯 토닥거리는 가브리엘의 손길에 결국 완전히 눈이 감기고 말았다.

리엘, 우리.

우리 잠시 뒤에 제대로 이야기해요.

내가 당신에게 줄 것이 있단 말이야…….

* * *

모두가 보았다.

그 찬란한 빛을.

괄시하고 경멸했던 힐데아 폰 힐링턴이 사실은 그들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치료사 힐이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무려 최고 신관의 이능을 소멸시킨 치유의 이능이라는 것이 더 놀라웠다.

대체 저것이 어찌 가능한가?

어떻게?

최고 신관보다 높은 이능이라면 대체…….

모두 혼란에 빠져 있을 때였다.

그대로 잠든 연인을 훌쩍 품에 안아든 벨키우스 공작이 오만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가까이 다가왔던 황녀 라피이아의 얼굴이 떫은 감 씹은 듯 변한 것도 그 순간이었다.

아니, 그녀뿐 아니라 둘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동시에 똥 씹은 표정을 했다.

“정말 정떨어지는 표정이군요.”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황녀 전하.”

둘 사이에 번개가 튀었다.

“바로 내빼시려고?”

“뒷마무리까지 해드려야 합니까.”

“어머, 끝까지 훌륭한 마무리할 수 있게 짠하고 등장해줬는데……. 그따위 말밖에 못하는 그대가 참으로 재수없다고 생각하는데.”

“흥, 일부러 극적인 순간을 노리고 들어왔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 뻔뻔하기 그지없다는 말부터 드리고 싶군요. 그리고 제 약혼녀에게 자꾸 윙크하지 마십시오. 눈에 뭐 꼈습니까? 짜증나게.”

“하! 뭐?”

“막지 말고 비켜주시죠, 황녀 전하. 황위 주워 드시려면 바쁘실 것 같은데.”

“……어디로 갈 것인데? 힐데아는 좀 괜찮은지 궁금한데.”

“어디겠습니까? 관심 끄시죠.”

재수 없는 새끼.

황녀는 이를 갈면서도 곤히 잠든 힐데아 폰 힐링턴을 바라보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한 놈은 재수 없지만, 어쨌든 잘 어울리는 한 쌍이긴 하였으니.

부디 저 생각 많고 고민 많은 영애가 오늘만큼은 곤히 잠들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멀어지는 가브리엘의 뒷모습을, 그들을 따라 이동하는 힐링턴의 사람들을 바라보던 황녀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제 명만 기다리고 있는 자들에게 느긋한 웃음을 뿌렸다.

이제 제국의 태양이 바뀔 것이다. 라피이아는 느긋하게 웃었다.

“자, 긴 하루가 끝났으니 이제 정리하도록 하죠?”

황녀의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살아남은 자들이 멍한 시선으로 서로를 보았다.

그랬다.

살아남았다.

그리고 긴 하루가, 정말 끝난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