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에필로그
나는 악몽을 꾸었다.
마지막의 순간, 내가 이능으로 황후의 독약 병을 막지 못한 악몽이었다.
나는 꿈속에서 울부짖었고, 창백하게 질려 쓰러진 가브리엘에게 달려가 그의 심장에 힘을 쏟아 부었다.
떠나지 말아요. 나만 두고 가지 마. 나는, 가브리엘. 나는 이제 당신 없이는 살 수가 없어요…….
“안 돼, 가브리엘!”
미친 듯이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때,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다정한 미소를 짓는 가브리엘은 아니었다.
“크, 라이스?”
꿈이었어?
“악몽을 꾼 모양이군요.”
“왜 여기에……. 아니 내가 왜.”
“황후를 막은 뒤 잠드셨어요. 그렇게 힘을 쓴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무리하셨던 모양이에요. 푹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그제야 정신이 제대로 돌아왔다.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이 크라이스라는 것을, 그리고 오늘 정신이 없는 이는 그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크라이스, 당신은 괜찮아요?”
“……당신은 변함없이 다정하시군요. 제가 당신을 아프게 했는데도.”
“뭘 아프게 해요. 다 잘 끝났는걸요.”
“정말 배신한 줄 아셨지 않습니까. 그때의 표정은…… 잊히지 않을 것 같군요.”
그가 아프게 웃었다.
어쩐지 그 모습을 보는데 내 일을 마주한 것처럼 같이 욱신거렸다.
그가 나를 배신했다고 여겼을 때도 어쩌면 하는 희망을 끝까지 놓지 못했었다.
그만큼 나는 그를 소중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연애의 감정과는 달리.
비유하자면…… 꼭 내 혈육인 것처럼. 그럴 리가 없는데도.
“많은 것들이 궁금하시겠지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힐. 앞으로 볼 수 있을지 자신할 수가 없어 마지막으로 당신을 보러온 것이니.”
다정하게 내뱉는 말이 따끔거렸다. 나도 그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몰랐다.
최고 신관으로 행해서는 안 될 일에 가담했고, 그것이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었다는 건 분명했다.
그래도 황후의 손을 끝까지 잡지 않았고, 결정적인 순간 증인이 되어 과거의 잘못을 토로했으니까.
“최대한 도와볼게요.”
“아니요.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째서?
나는 얼른 도리질을 쳤다.
그리고 다급하게 그의 손을 맞잡았다.
지금도 이상할 정도로 그에게는 신뢰가 갔다. 그가 웃었으면 좋겠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비록 그의 과거가 무척이나 아픈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
“아뇨, 도울 거예요. 당신이 이능을 직접적으로 사용해서 해친 것은 아니잖아요.”
“어찌 사용될지 알고 주었습니다. 그러니 다르지 않지요. 황후가 제 이능이 담긴 독약으로 시험을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요. 저는 당신도 처음부터 이용하려는 생각으로 다가왔던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나는 크라이스, 당신으로 인해 많은 위로를 받았고, 용기를 가졌어요. 모두가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손을 뻗어준 사람이 당신이었는걸요.”
그는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손을 잡은 내 손을 바라보다가, 떨리는 손길로 손등을 토닥였을 뿐이었다.
“힐데아, 당신 덕분에.”
“크라이스.”
“아주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것을 놓았고, 감정이라는 것도 제대로 느끼면서 살 수 있었어요. 그전까지는 복수에 미친 사람밖에 없었는데…….”
그의 눈이 너무 다정해서 어쩐지 눈물이 핑 돌았다.
“힐, 당신 덕분에 다른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어요. 그래서 감사하다는 말부터 드리고 싶습니다.”
“그게, 뭐예요. 앞으로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난은 괜찮습니다. 복수의 끝을 상상했을 때, 항상 좌절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무척 후련합니다.”
크라이스는 나를 돕겠다고 해준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건 모두 당신 덕분이에요, 힐.”
“나는,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당신을 위해서요. 알잖아요.”
“아니요, 많은 것을 하셨습니다.”
보는 순간 신뢰를 알게 해준 사람이었다.
“아십니까, 힐? 누군가가 믿는다고 단호히 말해줄 때, 얼마나 큰 용기가 나는지.”
“…….”
“당신의 그 한마디가 저를 살렸습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을 때에도 그의 옆에서는 아주 다정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스스로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숨 쉴 수 있었어요. 오로지 당신 덕분에.”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상냥했기 때문에 더 슬펐다.
“당신을 알고 아침의 공기가 상쾌하고, 웃는 소리가 아름다우며,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심장이 뛴다는 행복을 알게 되었지요.”
크라이스, 그가 다가왔다.
“그래서 당신은 제게 신이나 다름없고.”
아주 정중하고, 그리고 불쾌하지 않을 만큼 고요히 내 이마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모든 것을 사랑스럽게 볼 수 있게 해준 기적입니다.”
“크라이스, 나는…….”
멍하니 바라보는데 크라이스가 웃었다.
햇살처럼 아름다운 미소였다.
“어떤 사이든, 저를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을 압니다. 비록 벨키우스 공작 각하를 볼 때와는 아주 다른 시선이겠지만.”
“크, 크라이스?”
“이것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 당신이 밝게 웃고 있어서 어떤 내일이 오더라도 저도 웃을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러니까 잊지 마세요.”
그가 깔끔하게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언제든, 어디서든 행복하셔야 합니다, 힐.”
뻐끔거리는 입술을 열고, 끔찍하게 쉬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나도 그래요.”
기어코 그의 눈에서도 떨어지는 눈물을 보며 나는 내가 울고 있는 기분을 느꼈다.
“나도 당신의 행복을 빌게요, 크라이스.”
아주 애틋하고, 아주 슬펐다.
이상하게도 크라이스를 보며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당신이 나처럼 느껴졌어요.’
아직도 제대로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모든 것을 내버려 둔 채 좌절하고, 절망하다……. 혼자 풍화되었을 전생의 내 모습이.
‘애틋하고 소중했어요.’
그가 나처럼 되지 않기를.
“그곳이 어디라도 언제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야 해요. 그걸…… 절대 잊지 말아요. 알았죠?”
“……네, 그러겠습니다, 힐.”
그래서 웃을 수 있기를.
내 소중한 친구, 크라이스가.
나처럼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 * *
크라이스가 나간 뒤 잠시 멍하게 창밖을 바라봤다.
해가 지는지 하늘이 점점 변해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처럼 내 마음을 짙게 물들였다.
가브리엘. 그가 보고 싶어.
이제는 그가 날 찾아오기만을 기다리진 않을 생각이었다.
나는 잠시 휘청거렸지만 힘주어 일어나 겉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뛰듯이 걸어 나갔다.
아니, 나가려다가 침대로 돌아와 서랍을 열었다.
얇은 봉투가 하나 있었다.
그것을 확 움켜쥔 뒤 다시 뛰어나갔다.
가브리엘.
그가 이곳에 있을 것 같았다.
분명히 날 생각하면서 그도 이 주변을 서성이고 있을 것 같았다.
“너무 보고 싶어.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
“누구를 말씀입니까?”
아.
“리엘!”
고개를 확 들었을 때, 정원 쪽에서 걸어오고 있던 백금발의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깨셨습니까? 너무 곤히 잠드셔서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손님이 오더군요.”
이제는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그 보라색의 눈동자가 너무나 어여뻐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리엘, 나는, 당신을 찾고 있었어요.”
그 끔찍했던 악몽 속에서 당신을 살리려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어.
나는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처럼 그대로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힐?”
“너무 보고 싶어서요.”
그가 낮게 웃는 소리가 기분 좋게 흘러들었다.
쿵, 쿵, 귓가에 닿은 그의 심장에서 뛰는 소리가 달콤하다.
살아 있어. 우리 둘 다.
“저도, 저도 당신이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힐. 가끔은 당신이 앞에 있어도 그립습니다…….”
묻고 싶었다.
지금 무슨 기분이에요?
크라이스처럼 복수를 마쳐 후련한가요?
아니면 혹시 허탈한가요?
하지만 그런 말들보다도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에.
“리엘, 꼭 줘야 할 게 있어요.”
따뜻한 품에서 떨어졌다.
온기가 멀어져 아쉬운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더는 미룰 수가 없어서 손에 쥐고 있던 것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건…….”
그는 직감적으로 안 모양이었다.
내가 내민 것이 편지라는 것을.
아니, 알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가 전쟁터에 있을 때 나와 주고받은 일상적인 서신과 같은 형태였으니까.
내가 쓰는 그 편지 봉투에, 그때 보냈던 것처럼 담은 편지 속에는 내 모든 마음을 담은 말들이 적혀 있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의 가족이 되고 싶어요.
당신은 내 기적이에요.
사랑해요, 가브리엘.
앞으로의 날들도 내게 주세요.
내 시간 역시 당신에게 줄게요.
그러니까 우리.
“지금 당장 읽고 싶지만.”
가브리엘의 입술이 덜덜 떨리는 것이 보였다.
“보지 않아도 절 한없이 기쁘게 하는 말들이겠군요.”
겁에 질린 듯, 볼품없다고 할 수 있을 만한 모습도 그가 하니 다 아름다웠다.
감동으로 일렁거리며 축축해지는 눈망울도, 그가 구겨질까 소중히 편지를 품에 넣는 행동까지도 다 소중했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나는 웃었다.
“같이, 같이 행복해져야죠. 연애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딱 한 방울. 한 방울 흘러내린 그의 눈물을 닦아내며 나는 바보처럼 울었다.
원작이 끝났다.
원작에 매달리던 세월은 지나갔지만, 그래도 그와 나를 묶고 있던 사건의 챕터가 이제 끝났다.
앞으로의 시간은, 앞으로의 일들은 오로지 그와 내가 만들어가는 시간일 것이다.
함께.
“다시는 도망치지 않을게요. 먼저 뒤돌거나, 섣불리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최선을 다해서 리엘,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내 용기를 모두 담아서.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술을 훔쳤다. 쪽, 하고 발칙한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울려서 그와 내 얼굴이 동시에 새빨갛게 변했다.
함께 웃음이 터졌다.
가브리엘은 그 웃음을 담고서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제 가족이 되어주신다고 하셨지요.”
떨리는 눈.
그의 긴장감이 고스란히 드러난 표정은 꼭 예전에 날 볼 때마다 경직되던 것과 닮아 있었다.
꽉 깨문 치아가 꼭 화난 것처럼 보이게도 하는.
하지만 이제 그 표정이 귀여웠다.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저와.”
끔찍하게 쉰 목소리로 그가 나를 갈망했다.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그때는 닿지 못했던 말이 정확히 화살이 되어 내 심장에 꽂혔다.
말을 내뱉는 것도 사치였다.
나는 다시 까치발을 들고 이번에는 그의 멱살까지 잡아 고개를 내렸다.
자꾸 심장 멎게 하는 이 입술을 막아버려야지.
맞닿은 입술이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것을 알면서, 키스로 대답을 대신했다.
열기와 함께 웃음을 삼키며 생각했다.
이후의 일들은 꽉 막힌 해피엔딩일 것이다.
날 붙잡은 이 품이 이렇게 따뜻하고, 또 다정하니까.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