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모종의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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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모종의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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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모종의 거래
2022.10.13.
“여인……이라고요?”
그레고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중얼거렸다. 꽤 깨어 있는 지식인이었기에 여인의 능력을 무시해서 나온 반응은 아니었다. 다만 예상치 못한 사실에 놀랐을 뿐이었다.
“전하, 여성 보좌관을 채용하시는 건……?”
카에론의 눈치를 살피며, 그레고리가 슬쩍 그의 의중을 떠보았다.
평소 여인을 가까이 두지 않는 대공이었다. 원체 타인에게 무관심하기도 했지만, 대공의 마음을 얻고자 갖가지 방법으로 육탄공세를 펼치는 여인들에게 시달린 결과였다.
현 황제의 친형이자 유피테르 제국의 유일한 대공인 그에게 쏠리는 관심은 상상을 초월했다.
황관만 쓰지 않았을 뿐 막강한 부와 권력을 가졌으며, 찬란한 외모까지 겸비한 미혼의 대공이었다.
그의 환심을 사려 귀족 가문의 영애들은 하루가 멀다고 초대장과 연정이 담긴 편지를 보내 왔다. 예의상 답장을 쓰는 일을 대신하며, 그를 향한 레이디들의 절절한 마음을 지겹도록 잘 알고 있었다.
‘초대장이나 편지만 보내면 다행이지…….’
지난달에 대공의 마차에 몰래 숨어들어 와 있던 어느 영애가 생각나 그레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부러 부채나 손수건을 흘려도 밟고 지나가는 무심한 대공의 관심을 받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이었다.
이 답안을 쓴 아이델이라는 여인도 전하에게 빠져 정신을 못 차리면 곤란한데……. 그레고리가 잠시 턱을 쓸며 고민했지만, 이 정도의 학식이 있는 여인이라면 사리 분별이 가능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누구인가.”
한참을 답안지를 보며 말이 없던 카에론이 드디어 입을 뗐다. 그의 물음에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레고리가 교수에게 눈짓했다. 뜻을 알아들은 니첸이 지원자 인적 사항 서류를 뒤적였다.
“136번……. 아, 여기 있습니다.”
민첩한 동작으로 니첸이 서류 한 장을 빼서 카에론에게 공손하게 건넸다. 지원 서류 안에는 이름만 남기고 갔던 여인에 대해 식별할 수 있는 정보가 담겨 있었다.
‘아이델 플루에르……?’
여인의 성을 확인한 카에론의 눈이 살짝 커지며 이채를 띠었다. 첫 만남부터 시작해서 여러 의미로 자신을 놀라게 하는 여인이었다.
‘백작 가문의 레이디라니…….’
수수한 옷차림에도 가릴 수 없던 여인의 귀태가 이해가 갔다. 플루에르 백작가는 남부 쪽의 대영지를 소유한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가문의 여인이 제국 대학에 시험을 보다니…….
게다가 그레고리가 수선을 떨 만큼 답안지도 훌륭했다. 굳이 흠을 찾자면 직접적인 경험에서 나오는 실용적인 사례가 없다는 것 정도였다. 책만 읽은 학자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단점이지만, 그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수준 높은 논술이었다.
카에론이 답안지를 위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생각에 잠겼다.
대체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불필요한 감정을 일으키는 여자였지만, 동시에 계속 곱씹게 되는 여자였다.
“이 지원자는 합격인가?”
“저 역시 여성 지원자인 걸 알고 놀랐지만…… 다른 답안을 비교해 봐도 명백히 뛰어납니다.”
“그럼 합격이라는 말이군.”
“그렇죠. 이 정도면 행정학부 수석 합격이라 할 만한 성적입니다.”
니첸 교수가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를 지켜보던 제퍼슨 학장이 대공의 물음에 긴장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공 전하. 혹시 이 지원자에게 무슨 문제라도……? 제국 대학은 드물긴 해도 여학생도 선발하고 있습니다.”
“아니. 별문제는 없네. 그럼 합격 안내는 어떻게 하나?”
“통상적인 절차를 거쳐 우편으로 안내됩니다. 수도 기준으로는 일주일 후에 합격 증서가 동봉되어 도착할 겁니다.”
“그럼 지금 바로 쓰게. 그 합격 증서.”
대공의 지시에 제퍼슨 학장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 * *
아이델은 평소답지 못했다.
무릎 위에 올려 둔 책을 펼치지도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곁에서 수를 놓고 있던 비엔이 힐끔힐끔 살폈다.
그 좋아하는 책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아가씨라니……. 게다가 마음만 먹으면 하루 만에도 책 한 권을 다 읽는 아가씨가 거의 일주일째 같은 책을 잡고 있었다.
“아가씨, 무슨 걱정이 있으세요?”
“아…… 별일 아냐.”
결국 비엔이 참지 못하고 염려스럽게 물었다. 아이델은 희미하게 웃으며 별일 아니라고 했지만, 여전히 책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제국 대학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이 문제가 있는 걸까……. 아가씨는 책을 바라보며 이따금 작은 한숨을 쉬거나,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많이 어려운 책인가……?’
상당히 두꺼운 책이긴 했다. 제목도 자신이 가볍게 읽는 소설과는 달라 보였다. 백작님의 서재에서나 볼 법한 어려운 내용이 가득할 테니, 아가씨가 힘들어하는 이유도 조금은 이해가 갔다.
한편 비엔의 추측과는 다르게, 아이델을 고민에 빠트린 건 책 내용이 아니었다. 이 책을 보면 떠오르는 한 남자 때문이었다.
‘엘리오스 대공…….’
도서관 서고에서 그와 마주쳤던 순간이 잊히지 않고 생생하게 떠올랐다. 대공의 로열 블러드는 붉지 않고 푸를 것이라 할 만큼 빈틈없고 냉엄한 성미는 제국에서 유명했다.
하지만 그날 처음 본 그의 모습은 소문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의 행동은 무례하다 느껴질 만큼 집요했고, 그의 시선은 맹렬하다 느껴질 만큼 사납고 거셌다.
아이델은 그에게 잡혔던 손목 안쪽을 쓸어내렸다. 그날의 일을 상기하자 그의 손이 닿은 부분이 덴 듯 뜨겁게 느껴졌다.
왜 자신에게서 향기가 난다고 말했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을 따라가다 보면 언제나 끝에 남는 건 그의 푸른 용암 같던 눈동자였다. 이성을 잃은 듯 타오르던 짙푸른 눈동자가 떠오르자 아이델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가씨! 아가씨!”
깊은 상념에 빠져 있던 아이델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소식을 전하러 왔는지 문가에 서 있는 하녀와 함께 비엔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무슨 일이야?”
“큰일 났어요! 지금…… 오고 계신대요!”
제국 대학에서 합격자 발표가 나올 시기였다. 백작가로 도착하는 우편에 주의를 기울였지만, 아직 기다리던 소식은 없었다.
우체부가 오면 알려 달라고 했던 차라 혹시 그 소식인가 했지만, 어쩐지 다급한 표정을 보아하니 아닌 것 같았다. 우체부가 아니라면…….
“혹시 아버지께서 돌아오시는 거야?”
아버지의 귀환 역시 기다리던 차였기에 아이델이 반색하며 물었다. 그녀의 말에 비엔은 어쩐지 울상이 되었다.
“아뇨……. 그게…… 샬레 후작께서 아가씨를 보러 오신다고…….”
“아……!”
순식간에 표정이 굳은 아이델이 낮게 탄식했다. 하필 이 시점에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백작 부인이 넌지시 샬레 후작의 방문을 준비하라고는 했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미처 몰랐다.
“마님께서 얼른 단장하시고 애프터눈 티타임에 참석하시라고…….”
“……그래. 준비해야지.”
합격 증서가 도착하고 아버지를 설득한 이후였다면 좋았겠지만……. 나중에 파혼을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 할 인물이었다.
아이델은 의상실에서 새로 맞춘 옷으로 갈아입었다. 급히 눈대중으로 골랐지만, 치수를 미리 알려 줬던 터라 알맞게 수선되어 있었다.
거울 앞에선 아이델은 비엔의 손길이 닿으며 평소보다 화사하게 변모하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비록 거울에 비친 눈동자는 생기를 잃어 쓸쓸하기 그지없었지만…….
솜씨 좋은 비엔은 꽃꽂이하듯 조화롭게 그녀의 아름다움을 끌어냈다. 중심이 되는 메인 꽃 주변의 필러를 배치해서 강조하듯, 채도가 낮은 색감의 드레스는 아이델의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수고했어. 비엔.”
“아가씨…….”
분명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비엔은 차마 그 말을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원치 않는 상대를 만나러 가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저 표정이 사라진 아가씨가 조용히 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층에 있는 응접실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자 어귀에 서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구불거리는 적갈색 머리카락을 풀어 내린 로젤린이었다. 로젤린은 내려오는 아이델을 빤히 바라보았다.
“평소보다 훨씬 예쁘네요, 언니!”
로젤린이 눈매를 접으며 과장된 어조로 감탄하듯 말했다.
“과연 예비 신부다워요. 샬레 후작님께서도 언니를 보면 기뻐서 어쩔 줄 모르실 거예요.”
‘몸이 달아서 어쩔 줄 모르실 거예요.’라는 속말을 숨기며 로젤린이 의미심장하게 웃음 지었다. 비록 향기 없는 조화라도 화병에 꽂아 넣으니 눈을 현혹할 만했다. 그 조화가 비싼 값에 팔려 나갈 생각을 하니 즐겁기 그지없었다.
‘후작이 어떤 인물인 줄도 모르고…….’
백작 부인을 통해 전대 후작 부인들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이유를 알고 있는 로젤린은 입꼬리를 올려 더욱 싱긋 웃었다.
로젤린이 저런 웃음을 지을 때면 어김없이 자신에게 불행이 찾아오곤 했다. 그 사실을 여러 번 겪어 익히 알고 있는 아이델은 미세하게 눈을 찌푸렸다.
“샬레 후작님께서 이미 응접실에 계세요. 언니와 함께 들어가려고 기다렸어요.”
유난히 들떠서 기분이 좋아 보이는 로젤린이 그녀를 이끌고 응접실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백작 부인과 샬레 후작으로 추측되는 마른 체구의 중년 남성이 앉아 있었다.
샬레 후작과 묘한 눈빛으로 웃으며 이야기를 주고받던 백작 부인이 걸어오는 둘을 발견했다.
“드디어 오는군요. 로젤린은 지난번에 인사를 드려 아실 테고…… 옆에 있는 아이가 바로 첫째 아이델이지요.”
로젤린이 화려하게 만개한 장미라면, 그 옆에 있는 아이델은 이제 막 피어난 순결한 백합을 떠오르게 했다. 순종적이며 단아한 여인. 그가 원하는 유형의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 위에서 마음껏 군림하고 짓밟을 생각을 하며 후작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마주 보는 자리에 앉은 아이델은 그런 샬레 후작의 불편한 시선을 고스란히 받았다. 얼굴부터 목과 쇄골, 어깨까지 이어지는 데콜테 라인을 샅샅이 훑는 음험한 눈빛에 소름이 돋았다.
“기대 이상이군요.”
마치 물건을 품평하는 듯한 말투였다. 만족스러워하는 샬레 후작의 얼굴을 보며, 백작 부인과 로젤린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들이 나누는 모종의 분위기를 읽었지만, 이 순간 아이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직은 기다리던 때가 아니었다. 그녀가 거북한 시선을 버티려는 듯 테이블 밑에 모아 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얌전히 집 안에만 있어서 때가 타지 않은…… ‘순결’한 아이지요.”
순결을 강조하는 백작 부인의 의도를 알아챈 샬레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부인의 말을 잘 알아들었소. 마 시장에게서도 순결한 암말은 가격을 훨씬 후하게 치르지. 하물며…….”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혼사는 자신을 두고 흥정하는 거래였다. 그것도 마치 동물을 사고파는 듯한…….
아이델이 입 안의 여린 살을 힘껏 깨물었다. 치밀어 오르는 모멸감처럼 비릿한 내음이 입안에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