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신사의 탈을 쓴 맹수
(24/76)
24화. 신사의 탈을 쓴 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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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신사의 탈을 쓴 맹수
2022.12.22.
카에론은 서두르지 않았다. 여유로운 눈빛으로 제 아래에서 고뇌에 빠진 여인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 여유로움은 가장된 것이라는 걸 팽팽해진 근육과 솟아오른 힘줄이 말해 주었다.
새하얀 피부는 살성마저 연약했다. 여인의 흰 목덜미에 남은 제 흔적으로 바라보며 당장이라도 온몸 구석구석에 새기고 싶다는 짙은 욕망이 올라왔다.
그러나 신사의 탈을 쓴 맹수는 놀란 그녀가 도망가지 않도록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충분히 덫에 빠져 완전히 사로잡힐 때까지.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한가? 그대에겐 그럴 여유는 없어 보이는데.”
익숙한 기시감이 올라왔다. 막다른 길 위에서 자신을 느긋하게 몰아붙이는 포식자의 눈빛이었다.
곤혹스러움이 역력한 표정으로 아이델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여인의 모습에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움찔’
손바닥에 단단하고 매끄러운 사내의 피부가 닿자 아이델이 몸을 잘게 떨었다.
카에론은 제 흉근에서부터 복근까지 그녀의 손을 잡아 밑으로 슬슬 미끄러뜨렸다.
그녀의 손길이 닿은 모든 피부가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가면을 쓴 그의 표정은 여상했다.

“이렇게 만지고 싶어 하지 않았나?”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진 얼굴로 아이델이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술에 취해 꿈인 줄 알고 자신이 했던 행동이 생각나 할 말을 잃었다.

“그대가 마땅히 대공비의 의무를 다한다면…….”
깊고 그윽해진 그의 시선은 더할 나위 없이 감미로웠다.

“나 역시 마땅히 내 대공비가 원하는 대로 내어주지.”
평소의 냉정한 모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침대 위에서 나른하게 미소 짓는 남자는 정신이 아찔할 만큼 매혹적이었다.
아이델은 가슴과 아랫배에서 뭔가가 들썩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 생경한 떨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지만, 목이 타는 것만 같은 낯선 갈증이 정신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아이델…… 계속하길 원해?”
원하지 않아도 원하게 해 주겠다는 뒷말을 삼키며, 카에론이 잡고 있던 그녀의 손마디 안쪽으로 파고들며 깍지를 꼈다.

“아……!”
그 낯익은 동작에 아이델이 탄식을 내뱉으며 침음에 잠겼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순간, 마치 구원처럼 붙잡아 주던 그 손길이었다.

‘놓고 싶지 않아…….’
이 관계의 결말이 정해져 있다는 걸 알지만…….
그때도, 지금 이 순간도, 자신은 이 단단한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 사람을…….’
떨림이 서서히 멎은 아이델의 곧은 시선이 카에론의 짙푸른 눈동자로 향했다.
피하고 싶었지만, 피할 수 없었던 그 푸른 용암 속으로 결국 속절없이 이끌려 들어갔다.
비록 이 선택의 끝이 재가 되어 타고 남은 후회와 절망뿐이더라도…….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작지만 또렷한 그 목소리에는 더 이상의 흔들림은 없었다.

“……원해요…….”
입 밖으로 감춰 왔던 그 욕망을 꺼낸 순간에 아이델은 자신의 감정을 더 선연하게 깨달았다.

‘나는 이 사람을 원해.’
숨겨 온 갈망을 여과 없이 드러낸 여인의 눈빛을 보며 카에론은 처음으로 타인에게 압도당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온몸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렬한 전율이 그의 몸 곳곳을 타고 올라왔다. 여인을 완전히 품에 안지 않았는데도 희열에 찬 충일감에 휩싸였다.

“나의 비가 원하는 대로.”
신사의 탈을 쓴 맹수는 그녀의 선택에 경의를 표하며 그녀의 손목 안쪽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입술이 느릿하게 떼었다 떨어지는 순간에도 그의 강렬한 시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맹수의 품위는 거기까지였다.
신사의 탈을 완전히 벗어 버린 그가 억눌러 참아 왔던 욕망을 쏟아 내며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으르렁거리는 듯한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아이델의 정신은 아득해졌다.
그의 입술과 손길이 닿는 모든 곳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새어 나오는 숨결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며 카에론이 그녀의 몸 곳곳을 샅샅이 훑어 내려갔다.
모든 신경이 극도로 민감해졌다. 휘몰아치는 감각의 홍수 속에 잠긴 기분이었다.
거세게 밀려오는 감각 때문에 아이델이 참지 못하고 눈을 감으려고 할 때마다, 카에론의 입술이 여린 살갗에 닿으며 그녀의 아득해지는 의식을 깨웠다.

“앗……!”

“눈 감지 말고 전부 느껴.”
집요한 맹수는 찰나의 순간조차도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첫날밤은 길었고, 그녀의 위에 있는 맹수는 지독히도 절륜했다.
* * *
푸르스름한 이른 아침 공기가 잔뜩 예민해진 피부 위에 닿았다.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뜬 아이델이 이불속에서 등을 둥그렇게 말았다.
지난밤부터 이어진 형언하기 어려운 감각의 향연 속에서…… 지금 남은 것은 온몸을 저릿하게 관통하는 통증이었다.
그 통증 덕분에 또렷해진 정신으로 아이델이 주변을 찬찬히 살폈다.
커다란 침대에 그녀 홀로 남아 있었다.
잔뜩 헝클어졌던 시트는 새것처럼 깨끗했다.
입을 때부터 옷으로의 기능이 부족했던 네글리제는 분명 그의 손에 찢겨 명을 다했는데…… 어느새 단정한 슈미즈 드레스가 입혀져 있었다.
아이델은 까무룩 하고 정신을 잃어버리기 전 기억을 찬찬히 되돌렸다.
점점 떠오르는 장면들 때문에 아이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지난밤의 모든 게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일어났군.”
그때 방문이 열리고 어느새 품위 넘치는 대공으로 돌아온 카에론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평소와 다름없이 완벽한 모습이었다.

“아…… 전하…….”
아이델이 그를 발견하고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자 카에론이 그대로 있으라며 손짓했다.
그의 뒤로 트레이를 끌고 온 시녀가 침대 옆에 있는 베드 테이블에 홍차와 조식이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다.
공손히 인사한 시녀가 이내 방을 나섰고 카에론이 그녀의 침대맡에 걸터앉았다.
그가 테이블 위에 있는 홍차를 직접 따라 그녀에게 건넸다. 향긋한 차향이 코끝에 스쳤다.

“마셔.”
첫날밤을 보낸 신부에게 신랑이 대접하는 얼리 모닝 티였다.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에 찻잔의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일어났을 때 그녀 홀로 남겨졌다는 사실에 아픈 몸보다도 허전한 가슴의 통증이 더 크게 느껴졌었다.
그 통증이 느껴졌던 심장에 그가 건네준 티 온도처럼 따스한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몸은 괜찮은가?”
마음껏 제 욕심을 채운 맹수는 지난밤보다 관대해진 표정이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여인을 바라보는 눈빛은 제 것에 대한 만족스러운 소유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실 그녀가 중간에 정신을 잃지만 않았어도 아침까지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차분한 표정으로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숙녀가 울며 흐트러지던 모습이 떠올랐다.
카에론이 순간적으로 손을 움켜쥐었다가 이내 풀며 제 안의 남은 욕망을 제어했다.
삼 년이라는 시간은 이제 시작이었다. 질릴 만큼 그녀를 탐하기에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오늘은 집무실에 가지 말고 푹 쉬도록 해.”
괜찮다고는 했지만 그에게 밤새 시달린 탓인지 해쓱해진 하얀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내일 떠나기 전에 마무리해야 할 거 같아서요…….”
신혼여행은 내일 떠날 예정이었다.
일주일 정도 자리를 비울 예정이기 때문에 하던 업무는 마무리를 지을 생각이었다.

“그레고리가 알아서 할 거야.”
그녀의 걱정 담긴 말에 카에론이 일축했다.
어쩐지 대공 부부가 신혼여행을 어서 떠나기만을 학수고대하는 것 같은 그레고리에게 남은 일은 맡겨 버렸다.

“푹 쉬어. 잘 쉬고 회복해야 차질 없이 대공비의 의무도 다할 수 있을 테니까.”
콜록콜록!
은밀한 의도가 담긴 것만 같은 그의 말에 아이델이 사레가 들렸다.
입가를 가린 그녀의 눈이 놀라서 휘둥그레졌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대공이 입가에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

* * *
지난밤부터 마를린은 대공과 대공비의 첫날밤을 앞두고 긴장하며 내내 대기를 했다.
마지막으로 단장을 도우면서 봤던 아이델의 모습은 담담해 보였지만, 여려 보이는 그녀가 첫날밤을 잘 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평소 압도적인 피지컬로 승마와 사격 등 모든 스포츠에 발군인 대공이 아닌가.
대공은 머리도 좋았지만 몸도 좋았다. 신체로 하는 건 웬만해서 다 잘한다는 뜻이었다.
마를린이 직접 확인한 바는 없어도…….

‘그렇게 벼르고 벼르신 첫날밤이니…….’
아마도 대단했을 터였다.
그런 대공을 상대로 가녀린 대공비가 괜찮을지 걱정하며 길고 긴 밤을 지새웠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드디어 대공비의 방에서 사용인을 호출하는 벨이 울렸다.
시녀들 대신에 마를린이 직접 대공비의 방으로 향했다.
정중하게 노크하고 들어가자 가운을 걸쳐 입은 대공이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부유하는 방 안의 뜨거운 공기가 얼마나 이 밤이 격정적이었는지를 짐작게 했다.
마를린이 곁눈질하며 침대 안쪽을 바라봤지만 휘장에 가려져 대공비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유능한 시녀장은 표정을 숨기며 차분하게 대공의 부름에 응했다.

- 부르셨습니까.

- 대공비가 편하게 잠들 수 있게 해.

- 네, 알겠습니다.

- 그리고 내가 씻고 올 동안 차를 준비해서 가져와.
명령을 마친 카에론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연결된 문을 통해 대공의 방으로 향했다.
대공이 나가자, 마를린이 대공비의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 주변에 찢긴 넝마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퐁푀뉴 부인이 야심 차게 선물한 네글리제였다.
제 형태를 완전히 잃은 네글리제를 보고 의도했던 기능을 다 한 것을 좋아해야 할지……. 마를린의 얼굴에 모호한 표정이 떠올랐다.
휘장을 걷자 맨몸 위에 이불을 덮고 잠이 든 대공비가 보였다. 이불 위로 드러난 목과 어깨 위로 대공이 남겼을 것이 틀림없는 긴 시간의 흔적이 가득했다.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어 내자 마를린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예상은 했지만 예상을 훨씬 웃돌 만큼 격렬하게 남은 흔적을 보며 심란해졌다.
그녀에 대한 대공의 지독한 열망을 짐작게 했다.
침대 시트를 정리하고 지쳐 잠든 대공비의 옷도 갈아입혔다.
마를린이 작게 한숨 쉬며 시달렸을 대공비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래도 다행이야…….’
타인에게 냉혹한 대공은 첫날밤부터 열정적으로 제 아내에 대한 애정을 쏟아부었고, 얼리 모닝 티를 챙기는 다정함도 잊지 않았다.
얼리 모닝 티와 함께 몸에 좋은 보양식을 준비하라고 전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대공비의 방을 나서는 마를린의 머릿속이 바빠졌다.
그러다 보니 대공가의 수많은 방 중에서 대공자와 대공녀 방 위치에 대한 고민까지 이어졌다.
밤을 지새운 마를린의 눈가는 퀭했지만 눈동자 속에는 반짝반짝한 생기가 넘쳐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