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남녀 사이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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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남녀 사이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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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남녀 사이의 관계
2023.03.26.
수도 곳곳을 직접 탐방하기 위해 아이델과 레이니언, 비엔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같은 수도 안이더라도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군요.”
“지금 이 구역은 공장들이 모여 있는 곳이에요.”
레이니언의 말에 아이델이 수도의 지리가 표시된 지도를 펼쳐 보며 답했다. 상점이 즐비했던 중심가에서 벗어나 동쪽으로 이동하자, 공장이 빼곡히 들어선 풍경이 펼쳐졌다.
“이 소음은 공장에서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일까요? 게다가 공기도 탁한 것 같아요.”
비엔이 양손으로 귀를 막으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근처에 있는 면직 공장에서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방직기 소리가 흘러나왔다. 도열하듯 세워진 공장들의 건물 위로 솟아오른 굴뚝마다 뿌연 석탄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동안 여느 귀족가의 영애들처럼 의상실이나 카페, 레스토랑이 즐비한 수도 중심가만 들렀던 비엔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이곳의 풍경이 낯설고 두렵기도 했다.
“비 전하, 아니 아이델 님. 손수건을 입가에 대시는 게 어떠세요?”
안쪽으로 갈수록 머리를 찌르는 듯한 매캐한 냄새가 점점 심해지자 비엔이 권했지만, 아이델은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아. 이곳을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온 거니까. 힘들다면 잠시 쉬고 있을래?”
“쉬다니요! 게다가 두 분을 두고서…… 절대, 절대 안 돼요!”
아이델이 역으로 권유하는 말에 비엔이 손사래를 치며 펄쩍 뛰었다. 대공이 내린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럼 조금만 힘내 줘.”
“물론이죠. 저는 괘념치 마시고 두 분이 하셔야 할 일에 집중하셔요.”
비엔이 조용히 입을 다물고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아이델과 레이니언 사이에 자리 잡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그들이 공장들이 즐비한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던 때였다. 돌아서는 코너에서 누군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앗!”
“아이델 님!”
자신의 몸에 부딪힌 누군가로 인해 아이델이 놀라서 짧게 소리를 지르자, 비엔과 레이니언이 동시에 아이델의 이름을 외쳤다.
“아야…….”
아이델과 부딪힌 사람의 정체는 그녀의 허리께까지 오는 작은 아이였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아이를 보고 당황한 아이델이 빠르게 그 곁으로 다가갔다.
“괜찮니?”
“아, 네…… 괘, 괜찮아요.”
무릎을 굽힌 아이델이 아이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걱정스레 물었다. 아이는 모자 아래로 드러난 아이델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도 있구나…….’
염려스러운 듯 얼굴을 살짝 찡그린 모습마저도 우아했다. 보석처럼 빛나는 연녹색 눈동자를 빠져들 듯 바라보던 아이의 귀에 다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미처 널 발견하지 못했구나.”
사과가 담긴 아이델의 말에 ‘아니, 먼저 달려와서 부딪친 건 그 아이인데…….’ 하는 비엔의 속상한 투덜거림이 들려왔지만, 아이델은 개의치 않고 아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잡고 일어나렴.”
“아…….”
아이가 자신에게 내밀어진 티 없이 곱고 하얀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난생처음 보는 귀한 예술품 같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내뻗다가 아이가 얼룩이 묻은 자신의 손을 발견하고는 순간 동작을 멈췄다.
‘저 아름다운 손이 더러워지면 어떡하지…….’
아이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속상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이델이 먼저 아이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아이를 마주 보며 미소 지은 아이델이 손에 힘을 주어 아이의 작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얼굴이 붉어진 아이가 그녀의 앞에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한 채 서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몇 살이니?”
“아, 아홉 살이에요.”
짧은 더벅머리 위에 모자를 눌러쓴 아이는 작은 몸집 때문에 실제 나이보다 더 어려 보였다. 낡고 해진 셔츠와 멜빵바지를 입은 아이의 몸 곳곳에는 알록달록한 얼룩들이 가득했다.
“이름은 뭐니?”
“에, 에나예요…….”
“여자아이구나.”
“네…….”
짧은 머리 때문에 성별이 모호해 보였지만 여자아이였다. 에나는 아이델 앞에 서 있는 게 쑥스러운지 눈을 제대로 못 마주치며 몸을 비비 꼬았다.
“에나는 어디 다녀오는 길이니?”
“고, 공장에요.”
“……공장?”
“저는 저쪽에 있는 염료 공장에서 일해요.”
아이델은 에나의 손은 물론 몸 곳곳에 묻어 있는 얼룩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아이델은 가슴 속에 찌릿한 통증을 느꼈다. 안타까움에 물든 아이델의 눈동자가 에나의 작은 몸 곳곳을 살폈다.
“염료 공장에서 일하는구나. 공장에는 에나와 같은 친구들도 많이 있니?”
“네…… 저처럼 학교에 가지 못하는 집 아이들은 대부분 공장에 취직해서 일해요.”
“학교는 왜 못 가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
“그야, 학비가 비싸니까요. 저희 집은 빵 하나 사기도 어려운걸요…….”
아이델이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예상했던 대답이었지만 아이의 입에서 직접 듣는 말은 그녀의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매일 하루 한 끼, 그마저도 빵 하나로 버티며 살아가는 형편의 빈민들에게는 학업은 사치였다.
“혹시 하루에 얼마나 일하고, 급료는 얼마나 받는지 알려 줄 수 있을까?”
아이델의 질문에 에나가 서툴게 손가락을 세며 답했다. 중간에 밥을 먹는 시간을 제외하더라도 아이는 매일 15시간 가까이 일하고 있었다.
게다가 급료는 일하는 시간 대비 형편없이 적었다. 아이라는 이유로 어른의 10분의 1 수준의 급료를 받고 있었으며, 여기에 그 급료마저 다시 여자라는 성별을 이유로 절반으로 깎였다.
“……힘들지는 않니?”
“그래도…… 제가 일하지 않으면 동생들이 굶는걸요.”
에나는 얼룩덜룩한 작은 손안에 책임감을 말아쥐며 답했다. 가난과 굶주림 앞에 내몰린 아이의 작은 어깨는 너무 무거웠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말간 눈망울을 보며, 아이델이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애써 얼굴에 드러난 어두운 기색을 털어 냈다. 그녀가 눈을 구부리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에나, 답해 줘서 고맙구나. 내가 시간을 많이 빼앗은 것 같은데…… 혹시 시계탑 광장 앞에 있는 베이커리 카페를 아니?”
“붉은색 간판으로 되어 있는 곳 말씀하시는 거죠? 알고 있어요.”
지나칠 때마다 고소한 빵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비록 그곳에서 원하는 만큼 빵을 가득 살 수는 없어도 냄새만으로도 배가 부르는 기분에 에나는 일부러 자주 지나치곤 했다.
“그래. 사실 내가 과제를 하느라 도움이 필요했는데 에나가 많은 도움을 줬어. 고마운 마음을 담아 보답하고 싶은데 그곳에서 빵을 선물하는 건 어떨까?”
“정말요? 너무 좋아요!”
“그럼 이따 시계탑의 종이 다섯 번 울리면 그곳에서 만나도록 하자.”
당장 아이에게 필요한 돈을 줄 수도 있었지만…… 그 방식은 부담을 줄 것 같았다. 그래서 대신 아이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빵을 주기로 했다. 베이커리에 얘기해서 언제든 아이가 원하는 빵을 골라갈 수 있도록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야.’
다시 만날 약속을 한 후 멀어지는 에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이델이 생각에 잠겼다.
무역 항로 개척을 통해 근대화된 산업이 발달하면서 수도 내 공장 규모가 커지고 있다는 것은 그녀 역시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이번에 추진한 치수 사업 역시 항구가 있는 수도 서쪽 외곽 지역과 공장이 즐비한 수도 동쪽 지역을 빠르게 연결하는 운하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사업이었다.
그러나 산업 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이렇게 어린아이들까지 고용되고, 그들이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채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고심에 차서 잔뜩 흐려진 아이델의 얼굴을 걱정스레 살피던 레이니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이델 님, 괜찮으신 겁니까?”
“아…… 레이니언 님. 생각해 봤는데 이번 과제 주제는 아동 노동에 관한 걸로 하는 게 어떨까요?”
“그렇게 생각하실 것 같았습니다. 저 역시 아까 아이의 말을 듣고 놀라기도 했고요.”
“수도 내 공장들이 세워지고, 많은 인력이 이곳에 모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어린아이들까지 고용되어 착취당한다는 건 몰랐어요. 부끄러운 일이에요.”
아이델의 자책 어린 말에 비엔이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아이델 님,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저 역시도 몰랐던 일인 걸요. 어느 귀족이 이런 부분까지 신경을 쓰겠어요.”
그러나 비엔의 말은 아이델에게 큰 위로가 되지는 못했다. 신분이 높다고 해서 신분이 낮은 이들의 삶을 외면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특히 힘과 권력이 있다면 더 적극적으로 다른 이들의 어려움을 헤아리고 바꿀 수 있어야 했다. 아이델과 레이니언은 수도 내 아동 노동과 관련된 부분에 대하여 심도 있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아동 노동이 과연 옮은 일일까요?”
“산업 발전에 있어서 노동력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또한 저 아이처럼 생계를 위한다면 일자리가 절실하기도 하고요.”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노동 이전에 기초적인 교육의 기회도 보장되어야 해요. 노동의 가치 또한 제대로 평가받아야 하고요.”
레이니언은 아이델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상반된 시각에서의 공정성을 갖기 위해 의견을 냈다. 그의 의견에 아이델 역시 반박하며 둘은 아동 노동 개선안에 대한 합의점을 만들어 갔다.
“오늘 의견 나눈 것을 토대로 각자 관점에서 정리해 오면 될 것 같습니다.”
“좋아요. 다음 행정학 총론 수업이 끝나고 논의하는 걸로 해요.”
레이니언의 말에 아이델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해야 할 과제는 마무리가 되었지만, 아직 그녀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아이델이 레이니언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레이니언 님, 혹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네, 오늘은 특별한 일정은 없습니다.”
“그럼, 저를 개인적으로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개인적으로요……?”
“네…… 레이니언 님이 도와주신다면 좋을 것 같아요.”
과제는 끝났지만 그녀와 헤어지기 아쉬웠던 차였다. 아이델이 개인적인 도움을 청하자, 레이니언의 연푸른색 눈동자가 기쁨에 차서 넘실거렸다.
“물론입니다. 아이델 님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도울 겁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레이니언 님.”
서로를 보며 미소 짓는 아이델과 레이니언의 모습을 보던 비엔이 분위기를 환기하듯 끼어들었다.
“그럼 다시 수도 중심가로 가시죠.”
아이델이 레이니언에게 도움을 청한 이유를 이미 알고 있는 비엔이 앞장을 섰다.
‘저 선한 황자님이 상처받을 수도 있지만…….’
비엔 역시 오늘 하루 레이니언과 함께하며 그가 소문보다 더 온화하고 지적인 남자라는 걸 알았다. 아이델을 향한 따스하고 조심스러운 눈빛만 봐도 그가 얼마나 배려심 넘치는 사람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남녀 사이의 관계는 확실한 게 좋으니까.’
비엔은 레이니언을 보며 약해지려는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