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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만만치 않은 상대 (67/76)


67화. 만만치 않은 상대
2023.05.21.



“저는…….”

고심하는 기색이 가득한 아이델이 천천히 입을 열자 레이니언이 숨을 죽였다.

리산드로 제국으로 함께 가자는 제안을 그녀가 승낙해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찰나였다.


“누구 마음대로.”

두 사람의 말 틈을 가르고 서릿발처럼 매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아이델이 만찬실의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내내 기다리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전하……!”

그를 보자 반가운 마음에 아이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열린 만찬실의 문 사이로 대공이 걸어 들어왔다. 벗지 않은 코트와 손에 쥔 스틱이 그가 도착하자마자 곧장 만찬실로 왔음을 짐작게 했다.


“누구 마음대로 대공비를 리산드로 제국으로 데려간다는 겁니까.”

테이블 쪽으로 가까이 다가온 카에론이 싸늘하게 내려앉은 눈빛으로 레이니언을 응시하며 물었다. 우아하게 구겨진 미간 사이로 숨길 수 없는 불쾌함이 드러났다.

레이니언 역시도 굳은 표정으로 카에론의 시선을 똑바로 맞받았다.


 


“전하, 작은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

카에론과 레이니언 사이의 불편한 기류를 느낀 아이델이 재회의 기쁨을 뒤로하고 중재에 나섰다.

아마 지금 막 도착한 카에론은 앞의 대화를 듣지 못하고 레이니언의 마지막 말만 들은 듯했다.

지난 황실 연회 때처럼 카에론과 레이니언의 사이가 어색해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레이니언 님께서는 제가 드린 부탁 때문에 리산드로 제국으로 초청 제안을 주신 것입니다.”

“부탁……?”

“……네. 설명해 드릴 테니 우선 이쪽에 앉으세요.”

그녀가 자신의 옆에 비어 있는 좌석을 권하며 날이 선 듯한 카에론의 심기를 가라앉히고자 했다. 그녀의 권유에 카에론이 마지못해 의자에 앉았다.

카에론은 이번 납치 사건의 재판까지 모두 마무리한 후에 이제 막 대공성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아이델의 상태를 매일 보고 받고 있긴 했지만, 기력을 회복한 그녀의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자 발길을 서둘렀다.

특히 기차역에 마중 나온 수행원으로부터 레이니언이 대공성에 갑작스럽게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전속력으로 마차를 달려서 왔다.

당장이라도 심기를 거스르는 불청객을 쫓아내고 싶었지만, 레이니언을 그대로 대공성으로 들인 건 그가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그것은 레이니언이 이웃 제국의 황자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실은 제가 관심 있는 분야의 전문가가 리산드로 제국에 있어서요. 레이니언 님은 친우에 대한 호의로 초청을 해 주신 것뿐이에요.”

친우. 그녀가 정의한 그 관계 때문이었다.


- 레이니언 님과의 관계는 명확하게 정의했어요. 그와 저는 지금도 앞으로도 친우일 뿐이에요.


- 저를…… 믿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자신을 믿어 달라며 간곡하게 얘기하던 아이델 때문이었다.

뱃속에 실타래처럼 뭉친 불쾌한 감각은 여전했지만, 카에론은 그녀와의 지난 대화를 떠올리며 날 선 심기를 다스리려 했다.


“……아이델 님의 말이 맞습니다. 그 분야는 유피테르보다는 저희 리산드로가 더 발전했으니까요. 리산드로에 오신다면 아이델 님께도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무슨 분야를 얘기하는 겁니까?”

“아이델 님이 관심 있으신 분야는 여성 인권입니다.”

“여성 인권……?”

“맞아요. 실은 이번 사건을 통해 피해를 본 소녀들을 보면서 여성 인권 분야에 관심이 생겼어요. 그 분야를 좀 더 탐구해 보고 싶어요.”

“……그랬군.”

기력을 회복하자마자 여성 인권에 대해 고민하다니…… 그녀답다고 해야 할까. 카에론이 작은 한숨과 함께 느린 호흡을 내뱉었다.

납치 사건으로 인한 외상은 크지 않았지만, 혹여라도 마음의 상처가 남아 있지는 않을지 내심 걱정했던 차였다. 저렇게 의욕에 타오르는 모습을 보니 그 걱정은 사라졌지만…….


“저는 아이델 님이 리산드로 제국에서 관련 자문을 얻으실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고 싶습니다. 아이델 님이 원, 하, 시, 는 일이니까요.”

아이델이 원한다는 말을 강조하는 레이니언의 의도는 명백했다. 그 명백한 압박을 받은 카에론의 눈빛도 다시 날이 섰다.


“보수적인 문화 때문인지, 지금껏 저희 리산드로에 유피테르 귀족 여성이 정식 방문을 한 적은 없지만…… 아이델 님께서 견문을 넓히시기를 대공께서도 분명 바라실 거라 믿습니다.”

역시 저 샌님 같은 황자는 겉보기와는 달랐다. 일부러 보수적인 유피테르의 문화를 언급한 것이 틀림없었다.

여기서 만약 대공비의 리산드로 방문을 반대한다면, 유피테르의 보수적인 문화를 수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는 아이델이 바라는 여성 인권 추구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이었다. 그로 인해 그녀 역시 그에게 실망할 터였다.


‘역시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야.’

카에론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휘었다. 미소 짓는 입가와는 달리 레이니언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일말의 웃음기도 없었다.


“물론입니다. 대공비가 원하는 일은 적극적으로 지원할 겁니다.”

“……다행이군요.”

예상치 못한 카에론의 시원스러운 대답에 레이니언은 내심 놀란 눈치였다. 그러한 반응은 아이델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말 제가 리산드로 제국에 다녀와도 될까요?”

아이델이 기대가 섞인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다시 한번 카에론의 의사를 물었다.

레이니언은 모르지만 그녀는 현재 계약 상태였다. 대공가의 행정을 비롯한 대공비의 업무를 우선으로 이행할 의무가 그녀에게는 있었다.

리산드로 제국으로 가고자 하는 건 공적인 일이 아니라 사적인 일이기에, 아이델은 레이니언의 제안에 선뜻 응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녀로서도 레이니언이 소개해 주겠다는 여성 인권 전문가를 만나 조언을 구하고 싶었고, 관련 학회에도 참석해 보고 싶었다.

그런 숨은 열망이 느껴지는 아이델의 모습에 카에론이 설핏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대가 원하는 걸 내가 불허했던 적은 없으니까.”

“전하…….”

“지난번 과제 수행을 위한 외출도 결국 허락했었지.”

“그건…….”

지난 일을 언급하는 카에론의 말에 아이델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레이니언과 함께하는 과제 수행을 어렵게 허락받았던 것이 떠올랐다.

레이니언의 동행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카에론을 설득하기 위해 고생했었는데…… 이번 리산드로 제국 동행은 흔쾌히 수락해 주는 듯한 카에론이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런 그녀의 의아함을 풀어 주듯 카에론의 말이 이어졌다.


“단, 그때 하나 배운 교훈이 있어.”

“교훈……이요?”

“그래. 대공비의 외출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 함께 보내지 말 것.”

“……!”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카에론의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레이니언이 몸을 움찔거렸다. 레이니언의 호수 빛 눈동자가 강한 파문이 일어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 말에 담긴 카에론의 의사는 명백했다.


‘당신은 믿을 만한 자가 아니야.’

대공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며, 레이니언이 자책하던 부분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할 말이 없군.’

과제를 위해 동행했던 대공비가 납치되었다. 그녀를 안전하게 지키지 못했던 책임은 절대 회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조하는 빛이 가득한 얼굴로 레이니언이 눈가를 찡그렸다. 후회와 패배감이 입 안에 쓰게 퍼지는 듯했다.

그때였다. 카에론이 동행을 선언한 것은.


“그러니, 내가 함께 가지.”

“전하께서…… 함께요?”

놀란 아이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그의 말을 되물었다.


“그래. 도무지 마음이 안 놓여서 말이야.”

카에론이 옆에 있던 아이델의 손을 끌어와 잡으며 깍지를 끼었다. 보란 듯이 그녀의 손을 단단히 붙잡는 카에론의 모습에 레이니언의 동공이 크게 요동쳤다.


“한시도 내 곁에, 내 공간이 아닌 곳에 그대를 두고 싶지 않아.”

카에론의 목소리에는 아이델을 자신의 곁에서 보호하겠다는 견고한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동시에 자신의 여자에 대한 남자의 진득한 소유욕 역시 드러났다.

같은 남자이기에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카에론의 감정 표현에 레이니언이 슬며시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면 자신을 위해 리산드로 제국에 동행하겠다는 카에론의 말을 듣고 아이델의 눈동자에는 기쁨이 넘실거렸다. 그녀의 흰 뺨 위로 옅은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이내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화색이 돌던 아이델의 얼굴이 곧장 굳어졌다. 그녀가 우려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오나, 전하께서는 공무로 바쁘실 텐데…….”

늘 쉴 틈 없이 바쁜 대공이었다. 대공으로서의 대외 활동은 물론 대공가의 모든 사업 관리, 대법관으로서의 행정까지 도맡고 있었다.

게다가 피에르가 언급했던 ‘외로운 싸움’까지…….


‘그에게 부담은 되지 말아야 해.’

안 그래도 그는 주어진 과업으로 고단할 터였다. 그런 그에게 자신의 욕심으로 또 다른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아이델이 애써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 개인적인 목적을 위한 일 때문에 전하의 공무에 지장을 드리고 싶지는 않아요. 전하께서 이렇게 마음 써 주신 것만 해도 기쁩니다.”

그 말을 들은 카에론이 아이델을 지그시 바라봤다. 속마음을 간파한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잡고 있던 그녀의 손 등 위를 부드럽게 쓸며 대답했다.


“그 이유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내가 리산드로에 가기로 한 건 공무 때문이기도 하니까.”

“공무 때문이라고요……?”

“그래. 마침 리산드로 제국에 사절단을 파견할 시점이거든.”

“아……!”

그녀의 무거운 마음을 달래 주려는 듯한 의도였을까. 카에론이 사절단 파견이라는 이유를 얘기하자, 아이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사절단 순방에 대공비도 함께하도록 하지. 그렇게 되면 그대의 리산드로 제국 방문에도 내가 함께하는 게 될 테니까.”

“네, 좋아요. 잘됐네요.”

“……다행이네요. 리산드로 제국으로 방문해 주신다니 기쁩니다.”

홀가분한 얼굴로 미소 짓는 아이델을 보며 레이니언 역시 기뻤지만…… 어느새 대공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기분에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리산드로 제국 행이 결정되고, 세 사람 사이의 묘한 기류가 흐르던 저녁 식사는 마무리되었다.

만찬실을 나오는 길에 카에론이 레이니언을 불러세웠다.


“레이니언 황자. 지금 잠시 시간 괜찮겠습니까?”

“괜찮습니다만…… 무슨 일 때문이신지?”

“둘이서만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

단독 만남을 요청하는 대공의 말에 레이니언이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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