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통수
허름한 셋방으로 돌아가는 길.
덜컹덜컹.
"아이고, 턱아."
이번에도 당통이 빌려준 마차에 신세를 지기로 한 나는 마라에게 얻어맞아 팅팅 부은 턱을 어루만졌다.
배는 그래도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기라도 했는데, 턱은 그게 안 된단 말이지.
어떻게든 혀는 깨물지 않은게 다행이라고 할까.
이 세 치 혀 하나로 먹고사는 몸으로선 마라가 의도했건 의도치 않았건 아킬레스건을 찔릴뻔한 셈이었다.
"무슨 국회의원이라는 놈들이 시정잡배도 아니고-."
무심코 투덜거린 말이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저것들은 시정잡배가 맞았다.
이 나라 프랑스는 불과 몇 년, 아니 1년 전까지만 해도 의회란 게 없는 전제군주제였다.
로베스피에르의 지식에 따르자면 의회라 불러주기엔 흠결이 많은 삼부회가 열린 것조차 175년 만이었다고 했으니 체계적인 정당조직이니 위에서 당겨줄 선배님들이니 같은 게 있었을 리가 있나.
비유가 아니라 저것들은 정말로 정치동아리 활동하던 반골 청년들이 대혁명이라는 시류를 만나 선배님들께 국회의원의 의무나 행실을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최고위원 자리까지 올라온 거고, 끝내는 비상대권을 휘두르다가 자멸한 사례였다.
기껏해야 동아리에서 박수갈채나 받던 애송이들이 1년 만에 여의도로 상경해서 사전지식과 인맥을 부모·형제들에게 전수받은 정치 금수저들을 동물적 감각과 제 몸으로 체득한 경험으로 압도해 잡아먹어 버린 맹수들인 거다.
"···난 놈들일세?"
이건 칭찬이다.
진심으로.
정치판에 관한 사전지식이나 인맥 하나 없이 동물적인 감각과 이념 무장, 민중의 지지 삼박자만으로 열강 하나를 먹어 치운 게 어떻게 대단한 놈들이 아닐까.
저놈들은 그냥 시정잡배가 아니라 세계구 시정잡배였다.
다들 저만 잘났다고 으스대는 콩가루 집안에 머리 수십 개 달린 히드라라서 그렇지.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세계구 시정잡배들의 거두란 말이지···.'
새삼스레 오한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문이 앞섰다.
그런 무시무시한 동물적인 감각을 가지고 태어난 인자강들이 내가 설명해줄 때까지 이번 한 수가 가져올 이익이나 여파를 몰랐다?
말도 안 된다.
워낙 초짜다 보니 골수 공화파였던 내가 고작 하루 만에 오를레앙공과 내통한다는 게 얼마나 무리수인지조차 몰랐다, 라는 가능성도 있겠지만 상대방의 실력이 가늠되지 않는다면 일단 내려치기보단 올려치는게 맞다.
그렇다면-.
'···이 새끼들 설마 나 혼자 너무 눈에 띈다고 각 잡고 다구리 한건가?'
응, 거의 100%라고 본다.
이 세상에 신념으로 똘똘 뭉친 반골보다 더한 야심가도 없거든.
무조건 내가 권력을 잡아서 내가 원하는 대로 이 엿 같은 세상을 뜯어고쳐야 성이 풀리는 족속들이니까.
어제 작당모의 할 때 혼자 쏙 빠져있었던 내가 갑자기 오를레앙공이랑 대립각을 세우면서 모든 관심과 이목을 쓸어가니까 꼴 받아서 견제도 할 겸 서열정리도 할 겸 딱 두 대만 패준게 맞을 거다.
얘넨 지금 원내정당이 아니라 대학가 정치동아리니까.
"이런 씹···."
저절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다가 말았다.
나 혼자 있다면 상관없지만 지금 여긴 당통이 빌려준 마차다.
조금 전 오를레앙공과 내통했다는 핑계로 린치까지 당한 와중이니 저 마부는 그냥 심부름꾼이 아니라 살아있는 도청장치라고 봐야겠지.
'우선 정리해보자.'
가장 먼저 내 몸, 혹은 정신상태.
일단 나, 박민혁이라는 자아에 로베스피에르가 뒤섞인 흔적은 없다.
결국 자아라는 건 기억과 경험을 토대로 형성되는 법인데 지금 내게 로베스피에르로서의 기억은 없거든.
간간히 튀어나오는 지식이나 나 답지 않은 웅변 실력을 보면 아주 영향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것도 내가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답답할 따름이다.
정황상 내가 혁명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할 때 힘을 빌려주는 것 같긴 한데 말이지.
그럼 로베스피에르라는 자아는 21세기의 박민혁이랑 바꿔치기 당하거나 소멸한게 아니라 지금도 날 지켜보고 있는 건가?
'뭐, 빙의라는 것 자체가 오컬트적인 특수상황이니 문외한이 깊게 고민해봤자 소용없나.'
지금은 그럴 수도 있다, 는 추론 정도로 넘기자.
당장 로베스피에르가 내 목숨을 위협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도저히 노려서 실각이나 망명해볼 수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야.'
그래, 지금 중요한 건 이쪽.
불과 어젯밤만 해도, 그러니까 국민의회나 급진 공화파가 어찌 돌아가는지 몰랐던 시절에는 그냥 중간만 가면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다.
정말로 저놈들이 정치의 ㅈ자도 모르는 개천룡이고 장차 이 나라가 저 시정잡배들에게 잡아먹힐 예정이라면 괜히 단두대 쇼가 튀어나온게 아니다.
어떻게든 이 답답한 세상을 내가 생각하는 대로 뜯어고치고 싶다는 생각만 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티던 반골들에게 하늘에서 뚝 하니 비상대권이 떨어졌으니 오죽할까?
하물며 나중이야 몰라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정적들은 온통 학맥을 따지건 출신성분을 따지건 혈연을 따지건 본인과는 1도 관계없는 금수저들 뿐.
이미 나라는 혁명이 터질 만큼 아작났고, 본인은 이 나라를 아작나는데 아무런 책임도 없으니 더더욱 거리낌 없이 모든 책임을 적들에게 돌리며 칼부림을 벌였을 거다.
뒤늦게 그 칼끝이 저와 제 동료들까지 겨누기 시작했을 때야 이미 멈추려 해도 늦었을 것이고.
'내가 미국으로 망명해봐야 트로츠키 얼음송곳 해버릴 거고, 내가 얌전히 입다물고 있으면 부하린 해버릴 놈들이야. 살고 싶으면 도망칠 게 아니라 싸워 이겨야 해.'
어떻게?
잘.
벌써 거기까지 심계가 나왔으면 내가 여의도에 갔지 날백수하고 있었겠나.
좌우지간 차라리 내가 칼자루를 쥐었으면 쥐었지 저놈들에게 넘겨줘선 안 된다는 확신만큼은 이미 굳어졌다.
'···그런데 이럼 결국 로베스피에르의 전철을 밟게 될 것 같은데.'
에이.
설마.
사람은커녕 곤충 한 마리 잡아본 적 없는 대한민국의 선량한 MZ 청년 박민혁이가 그럴 리가 있나.
코흘리개 시절에도 개미 다리 떼어본 정도밖에 없는 나다.
설령 내 손에 칼자루가 쥐어지더라도 그렇게 설겅설겅 사람 목을 잘라댈 리가 없지.
애초에 난 내가 단두대로 끌려가지 않을 거란 보장만 있으면 꼭 칼자루를 쥘 필요도 없다고.
그럼 내가 칼자루를 쥐지 않는다는 가정에서 차선은-.
'그나마 당통, 인가?'
의회에서 신성모독 하는 에베르는 논외.
다짜고짜 내 급소만 노리던 마라도 논외.
오를레앙공, 은 아직 판단이 안 서기는 하는데 프랑스 국왕 해 먹고 싶은 사람이 급진 공화파인 나를 살려두진 않을 것 같다.
그러니까 은근히 날 견제하면서도 조금씩 챙겨주고 있는 당통이 인간적으로 보건 현실적으로 보건 차선 같기는 한데.
'···그 양반 반드시 부패하는 자잖아.'
내가 비록 이 시대를 전문적으로 공부해본 적은 없지만, 당통만큼은 안다.
부패할 수 없는자 로베스피에르와 쌍벽을 이루는 반드시 부패하는자 당통.
남들이 반혁명이니 매국이니 하는 이유로 끌려갈 때 혼자 부패 혐의로 단두대 끌려간 사나이.
저절로 가슴이 웅장해진다.
"도착했습니다, 의원님."
"음."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기를 수십여 분.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내 셋집까지 데려다 준 마부를 위해 호주머니에서 동전 몇 푼을 꺼내어 건네주었다.
짤랑.
"언제나 수고가 많으십니다. 시간도 늦었는데 이만 술이라도 자시면서 푹쉬십시오."
···그런데 이것도 뇌물로 들어가나?
택시비 내는 셈 치고 건네주긴 했는데 아직 이 시대의 청렴결백이라는 기준이 가늠되지를 않는단 말이지.
일단 마부가 입꼬리가 완전히 찢어질 듯 좋아하는 것 보면 실수한 건 아닌 것 같긴 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이까짓 돈이 아니라 인망이고 평판이니까 말이지.
"아이고, 뭐 이런 걸다···!"
"당통에게 한 소리 듣거든 저 때문이라고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미적거려서 그렇다고 그러면 그놈도 별말 하지 않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의원님께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프랑스 만세!"
거의 땅에 이마를 처박을 듯이 과장스레 허리를 굽신거리던 마부는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떠나갔다.
혹시 내가 돌려달라고 할까 봐 그랬나?
"거참."
그까짓 돈이 무슨 대수라고.
뭐, 이 경우엔 내 금전 감각이 이상한 거겠지만.
섭섭함을 애써 달래며 나는 곧장 내 셋방으로 돌아가 숙면을 취했다.
"아, 의원님! 어서오세-꺄아아악!!!"
와장창.
···정정한다.
볼이고 턱이고 온통 퉁퉁 부어서 돌아온 나를 목격한 셋집 아가씨가 놀란 나머지 그릇을 깨는 바람에 그날 숙면은 물 건너갔다.
하기야 나 같아도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이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서 돌아오면 놀라기야 할 테지만.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아니아니, 사죄는 제가 해야죠. 저야말로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그보다 빗자루가 어디 있죠?"
"네? 저기 있긴 한데-아니 환자가 지금 뭐 하시려는 거에요!"
흠, 그렇게 유난 떨만한 부상은 아니었다고 보는데.
결국 그날 나는 셋집 아가씨-엘레오노르와 함께 그릇 조각을 치우고 상처를 치료하느라 숙면을 포기해야만 했다.
***
같은 시각.
"좋지 않아."
"무슨 문제라도?"
"아, 자네가 아니라 정치판 이야기야."
혹시 제 주인의 심기를 거슬렀을까 봐 데굴데굴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시종장을 향해 오를레앙공작 루이필리프 2세가 손을 휘저어 보였다.
"하필이면 외통수에 걸렸어."
"국왕이 또 뭔가 일을 벌인 겁니까?"
"라파예트한테 붙잡힌 포로가 이제 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나. 기껏해야 이것저것 투정이나 부리면서 시간을 버는게 고작이겠지."
국왕.
어떠한 존대도 경외도 보이지 않는 호칭.
하지만 오를레앙공의 저택에서 이를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며 트집 잡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야 당연했다.
이 나라 프랑스에서 폐하라는 존칭에 어울리는 유일무이한 존재는 저 무능하고 비겁한 루이 카페가 아니라 그들의 주인, 영리하고 선량한 오를레앙공이었으니까.
"공화파 애송이들이야."
오를레앙공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놈들이 국왕을 탄핵하자더군."
"···참으로 무도한 애송이들이로군요."
"그래, 그렇지. 하지만 안 받을 수도 없게 되었어."
저격에 당했거든.
심각한 어조였으나, 시종장은 제 주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국왕의 망명을 핑계 삼아 공화파에서 국왕 탄핵을 시도한다.
그 정도야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바 아니었는가?
당장 오늘 아침 국왕이 붙잡혔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 저택의 호사가들이 가장 먼저 입에 담은 게 국왕 탄핵이었다.
이참에 부르봉 왕가의 명성에 똥칠한 루이 카페를 끌어내리고 우리 주인님을 새 국왕으로 옹립하자고 말이다.
물론 인간 세상 공부를 할 만큼 한 시종장이야 고작 이 정도 사건으로 프랑스 국왕이 탄핵당할 리는 없다고 철부지들을 비웃었지만.
"···그놈들이 설마 전하를 공격한 겁니까?"
지금 저보다 영리한 주인님이 저격에 당해서 곤란하다고 말하고 있잖은가.
꿀꺽.
저절로 침이 넘어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교활한 주인님께서 당했다고 할 정도면 도대체 오늘 낮 의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로서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뭐,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군."
오를레앙공이 턱을 만지작거렸다.
"정확하게는 루이를 공격한 거지만 말이야."
"···예? 그럼 전하께는 득이 되는게-."
"내 말 잘 들어보게. 저놈들이 루이를 공격했네. 알겠나? 왕실도 아니고, 왕국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고 루이. 그놈만 저격했다는 말이야.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알겠나?"
절레절레.
"저놈들은 지금 이 나라의 귀족들에게 어서 루이를 잘라내라고 회유하고 있는 거야. 이 프랑스 왕국이 아니라 루이 그놈이 못난 거로 혁명이라는 소동을 정리하자, 이거지."
그럼 루이는 쫓겨나도 왕국은 살아남을 테니까.
설명을 끝낸 오를레앙공이 목이 말랐는지 오른손 검지를 까닥였다.
와인을 가져다 달라는 수신호였다.
곧장 시종장이 시종들을 시켜 와인 한잔을 대령하니 목을 축인 오를레앙공이 덧붙였다.
"참으로 외통수가 아닌가."
쓸쓸한 미소.
그제야 시종장은 대강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난 바스티유 습격 사건 이래로 지금 이 나라의 왕당파 중 루이 16세 개인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는 이는 더는 아무도 없다.
그들은 하나같이 제가 타고난 기득권과 프랑스 왕국이라는 체제를 지키기 위하여 왕당파를 자처하고 있는 거지, 만일 국왕을 배신하고서 작금의 체제가 살아남을 길이 보인다면 주저 없이 잘라낼 기회주의자들이다.
소위 라파예트 후작으로 대표되는 입헌주의자 또한 마찬가지.
이들이 루이 16세를 지키는 건 저 철뜨기 공화파 애송이들이 함부로 날뛰지 못하도록 하는 마지막 족쇄이기 때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그 국왕을 대체할 대안이 등장한다면?
그 대안이 혁명 따위가 아닌 방계 왕족의 즉위, 그러니까 왕조 내 권력다툼이라는 너무나 봉건적인 해결책이라면?
"우리 사람 중 경거망동하는 자가 없도록 제가 직접 주의시키겠습니다."
대강의 사태 파악이 끝난 시종장이 고개를 조아렸다.
자칫 일이 꼬이면 그의 주인이 딱 잘라 사양해도 멋모르는 귀족들에게 추대 당할 판이다.
제아무리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오를레앙공의 국왕 즉위라고 하지만 이래서야 공화파 애송이들에게 놀아나는 격.
하물며 국왕이 얌전히 옥좌를 양보하는 대신 꿋꿋이 버틴다면?
그 즉시 왕당파 간의 내전이다.
분열시켜 지배하라.
옛 그리스로마적부터 내려오는 오랜 격언을 새삼스레 상기한 시종장은 식은땀이 비 오듯 제 등을 타고 흐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네."
허나 그의 주인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녕 독이 든 성배를 들이키려 하시는가.
내심 침음을 삼키려는데 오를레앙공이 덧붙였다.
"여기서 내가 루이를 용서하자고 하면 용서하는 대로 그래도 같은 왕족이랍시고 편드는 거냐고 공격하겠지. 물론 입단속이야 해야겠지만 자네까지 나서서 일을 키울 필요는 없네."
"하오나···!"
"그래, 차라리 이게 낫겠군."
오를레앙공이 품에서 그의 인장이 새겨진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시종장에게 건넸다.
"오늘 일을 보다 세세히 말해줄 테니 내가 말하는 대로 파리. 아니 프랑스 전역에 소문을 퍼트리게."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하, 소신으로서는 도통-."
"공화파 애송이에게 초점을 맞추란 말이야."
오를레앙공이 씨익 웃었다.
"주인공이 되지 못한 건 아쉽긴 하지만 내가 루이와 싸움이 붙었다고 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나."
"아···!"
과연.
오를레앙공 루이필리프 2세가 소문의 주인공이 되면 멋모르는 우민들은 왕위 다툼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공화파 애송이가 소문의 주인공이 된다면?
멋모르는 애송이가 주제넘게도 프랑스의 국왕을 갈아치우자고 주장한 게 더 큰 화제가 되겠지.
저 애송이를 제 손으로 직접 유명인사로 키워주게 된 건 다소 뼈아프지만, 그의 주인은 그게 이 혼란한 와중 왕당파끼리 다투는 것보단 낫다고 판단한 거다.
"그럼 지금 당장 착수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이건 빨리 해치울수록 좋은 일이니까."
꾸벅.
반드시 널리 알려야만 할 알짜배기만 전해들은 시종장은 새삼스레 제 주인의 심계에 감탄하며 조용히 물러났다.
오늘 이 사건만으로도 누가 이 나라의 적법한 주인인지.
누가 국왕이 되기에 어울리는 왕재인지가 입증된 듯했다.
"아쉽구나, 아쉬워."
허나 막상 오를레앙공 본인은 조금도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야 당연했다.
당장 눈앞에 왕위가 어른거리는데 그라고 어찌 아쉬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눈엣가시 같은 애송이들이 운을 띄워준 김에 제 사병들을 이끌고서라도 의회를 습격하고 싶은 기분이야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질베르, 이 미련한 사람아. 왜 이렇게 날 애태우는가."
라파예트 후작만 끌어안을 수 있었다면 지금쯤 프랑스는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을 텐데.
아쉬웠다.
그런 명장이 하필이면 무능한 루이와의 의리에 눈이 가려 진정한 왕을 보지 못하고 있었으니.
"내가 자네를 실망시킬리 없거늘."
문득, 오늘 낮 의회에서 득의양양하게 절 노려보던 공화파 애송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머지않아 라파예트 후작이 파리로 돌아올 거다.
국민위병 총사령관이라는 자리를 버리면서까지 멍청한 루이를 지키려 한 그가 국왕을 갈아치우자고 한 버르장머리 없는 공화파 애송이와 만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거야말로 훗날의 즐거움이라며 루이필리프 2세는 숨죽여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