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우
이튿날.
"좋아요, 우리 모처럼 힘을 합쳐봅시다."
···뎃?
개회가 무섭게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허락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오를레앙공이 선수를 쳤다.
"이 프랑스는 명예롭고 용맹한 기사의 나라입니다. 국왕 폐하의 근심이야 익히 짐작하는 바이나, 상황이 여의찮다면 옥체를 피하실 게 아니라 더더욱 더 기사답게 명예롭고 용맹하게 국난에 맞서 싸우셔야만 했습니다."
하물며 오스트리아라니요.
오를레앙공은 안타깝다는 듯이 탄식했다.
"한 사람의 기사이자 프랑스인으로서 이번만큼은 우리 의회가 함께 기사의 깃대를 짊어지고 따끔한 충언으로서 이 나라 프랑스의 근본을 되새기고 우리 스스로의 허물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 손을 들어주겠다, 이건가?
흠, 뭐.
어제 내 나름대로 생각해둔 시나리오 중에선 그럭저럭 차선쯤은 되는 전개이긴 한데-.
'···이 분위기 어쩔 거야.'
개회와 동시에 내 뒷골에 마라의 서늘한 시선이 꽂히니 저절로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다.
밤새도록 찜질해서 겨우 붓기를 뺀 턱도 갑자기 욱신거리고.
에베르, 야 굳이 상판을 들여다보진 않았지만 보나 마나 뒷자리에서 그럴 줄 알았다며 히죽거리고 있겠지.
그나마 당통 정도가 쓴웃음을 지은 채 날 동정하듯 슬쩍 한번 쳐다봤을 뿐이었다.
짜식, 고맙다.
근데 사내새끼한테 반하긴 싫으니까 지금은 그냥 혼자 있게 해줄래?
벌떡.
결국 이대로 폐회했다간 고대로 자코뱅 수도원에서 마라 손에 목 매달릴 거라는 위기감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름 여기도 의회인데 이렇게 발언권도 안 따지고 아무 때나 불쑥불쑥 일어나도 되는 건가, 싶긴 한데 말이지.
오늘은 어제와는 달리 거의 맨 앞자리에 앉았으니 딱히 문제 될 건 없을 거다.
보아하니 지금 여긴 발언권 같은 원리원칙보단 눈에 보이는 서열이나 순발력 같은 게 더 중요한 모양이니까.
무슨 국회가 눈치 게임도 아니고 정말로 이게 맞냐, 불란서야.
"이의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저는 어제 분명 국왕 탄핵을 주장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지금 의원님께서는 충언을 말씀하시고 계시군요."
잠시 숨을 고를 겸 우익의원들의 면면을 흘겨보았다.
너희도 뻔히 기억하고 있지 않냐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험.
개중 누군가가 내뱉은 헛기침을 신호 삼아 다시 한번 오를레앙공에게 칼끝을 겨눈다.
"의원님께서는 조금 전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할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게 정녕 협력을 제안하는 사람의 태도인지 이 필부로선 잘 모르겠군요.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의원님께서는 제가 루이 공에게 충언을 바치길 원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저와 함께 루이 공을 탄핵하시려는 겁니까?"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오를레앙공이 사람 좋은 미소를 만면 가득히 떠올렸다.
"물론 이번 사안은 전적으로 의원님께서 주도하신 사안이 맞습니다. 저조차 이번 사안에서만큼은 그저 의원님의 고매한 의견에 한두 마디를 첨삭하는 보조역에 불과하지요."
"의원님께서 제 스승 되시는 분인지는 미처 몰랐습니다."
"해서 이것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지금 우리 프랑스의 국법에 의회가 국왕을 탄핵할 권리가 과연 나와 있는지요?"
···이 새끼가?
미간에 주름을 잡자니 날 바라보는 오를레앙공의 눈동자에 희열이 짧게 스쳐 지나갔다.
"설마하니 잊고 계실 분이야 없겠습니다만, 지금 우린 제헌의회를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은 장차 100년, 아니 어쩌면 천 년간 계속될 우리 프랑스의 아름다운 법제와 전통을 만들어가는 동지들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우리 손으로 만든 헌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지킨다는 말입니까? 반란군? 오스트리아인? 어림도 없는 소리지요. 우리 위대한 프랑스가 해적들의 전철을 밟을 순 없습니다."
오를레앙공이 과장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프랑스의 첫 번째 의회, 첫 번째 헌법입니다. 국왕 폐하께서 제아무리 규탄받아 마땅한 죄악을 범하셨다고 한들 법에 폐하를 탄핵할 수 있다는 조항이 없다면 우린 헌법에 정해진 선 안에서 그분께 충언을 올리고 신하 된 도리로서 그분이 이제부터라도 정도를 걷도록 바르게 섬겨야만 합니다."
악법도 법이니까요.
오를레앙공이 마침내 입가에서 가식적인 미소를 지운 채 좌중을 둘러보았다.
송곳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을 것 같은 참으로 두터운 얼굴 가죽이었다.
결국 난 헌법의 수호자 노릇할 테니까 정 국왕을 탄핵하고 싶으면 네가 총대 메고 역풍까지 독박써라, 이거지.
저 국왕을 탄핵하면 가장 득을 볼 사람이 자기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21세기 한국인이 듣기에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닌게 더 엿 같다.
악법도 법이다.
장외투쟁할 거면 모를까, 일단 원내에 들어온 국회의원인 이상 법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놀아야 한다.
하물며 제헌의회의 제헌의원이면 두말할 것도 없지.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탄핵조항을 만들면 되겠군."
벌떡.
내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이번엔 마라가 치고 나갔다.
···아니 여기 진짜로 의회가 아니라 꼴뚜기 게임이었어?
무슨 주말 예능이야 뭐야.
"그게 뭐가 그리 어렵지? 당신네가 먼저 이번만큼은 우리와 뜻을 모으자고 말했잖소. 오늘 뭐 결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테니스 코트에서 함께 맹세한 동지들만 찬성표 던져도 넉넉하게 법전 하나는 뚝딱 만들고도 남겠구려."
"마라, 좀 진정하게."
"입닥쳐, 막시밀리앙."
투우사 앞에 선 황소마냥 콧김을 씩씩거리는 마라가 옆에서 말리려 한 나를 노려다보았다.
만일 이 비유가 맞다면 지금 투우사는 저기서 웃고 있는 오를레앙공이겠군.
여기서 마라가 하고 싶은 대로 뒀다간 함정에 빠지는 건 저쪽이 아니라 이쪽이 될 거고.
"그럼 이렇게 합시다."
여차하면 날 물어뜯기라도 할 듯 으르렁거리는 마라를 애써 뒤로 밀치면서 발언권을 되찾아왔다.
"루이 공, 아니 국왕 폐하께 퇴위를 권고합시다."
"퇴위라."
"물론 오를레앙공께서 지적하신 대로 지금 우리에겐 국왕 폐하를 끌어내릴 권한 따윈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번 사건을 고작 규탄 선에서 끝낸다면 도대체 누가 헌법을 두려워하고 또 우리 프랑스에 법치가 바로 섰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일단 탄핵이 아니라 퇴위를 '권'하자.
물론 저쪽에서 싫다고 뻗대면 끝이긴 한데, 원래 정치란 건 밑밥을 깔아놓고 꽃봉오리가 만개할 때까지 세월아 네월아 기다리는 거니까.
이미 적국에 도망치려다가 붙들려서 의회에 한 번 퇴위를 권고 당한 국왕이니 더는 예전처럼 전제군주 노릇을 할 순 없을 거다.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날 마주 보고 선 오를레앙공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의 좌우로 넓게 퍼진 우익의원들의 반응도 크게 다를 바 없다.
누가 봐도 승리를 자신하고 있는 상판.
그야 탄핵도 아니라 권고가 되어버리면 안 그래도 봉건적이었던 해결책이 더욱 봉건적인 절차로 바뀌는 거니까 그럴 법도 하지.
반대로 날 노려보는 좌익의원들의 기세는 당장이라도 날 자코뱅 수도원으로 끌고 갈 듯이 흉흉하기 그지없다.
왜 네 멋대로 저쪽에서 하자는 대로 따라가냐, 이거겠지.
아니면 국왕 폐하라고 존칭한 것 때문에 열받은 걸 수도 있고.
'바보들.'
허나 내가 보기에 이건 내가 혼자 판돈을 싹쓸이 한 판이었다.
'국왕이 오스트리아랑 내통한 반란군에게 납치당했다던 놈들이 퇴위를 권하자는데 좋아라하면서 이기긴 개뿔이.'
결국 이건 왕당파조차 국왕은 납치당한 게 아니라 외세와 내통해서 파리를 버리고 도망쳤다고 인정해버린 거다.
퇴위 권고고 탄핵이고 다 눈속임이오, 이슈 끌기용 쇼고 왕위 다툼에 눈이 뒤집힌 오를레앙공에게 이거 하나만 받아냈으면 이제 프랑스 왕정은 끝났다.
의회의 퇴위권고가 봉건적인 절차라면 당연히 외부인은 귀족들이 주도했다고 보겠지.
루이 16세가 정치의 ㅈ자도 모르는 초짜라면 의회로부터 퇴위 권고를 받는 순간 이게 도대체 뭔 일이냐고 어안이 벙벙해지겠지만 로베스피에르의 지식을 빌리자면 국왕은 재위 20년 차를 바라보는 베테랑.
제아무리 무능한 암군이라도 짬밥을 똥구녕으로 잡순게 아닌 이상에야 왕당파에서 이번 사건을 계기로 꼬리 자르기를 시도하고 있다는걸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자, 이제 어쩔테냐?'
파리의 원내 왕당파는 국왕을 버렸다.
당장 저 마라 같은 급진 공화파가 득세한 와중 도읍 파리의 중앙귀족들까지 절 버렸다고 생각할 루이 16세는 물론이고 보고서를 조작한 라파예트 후작까지 상경한다는 선택지가 원천 봉쇄된 거나 다름없다.
원외야 아직 충성파가 제법 남아있겠지만 그들도 중앙귀족들이 참여한 의회에서 국왕에게 퇴위를 권고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일단 바짝 엎드려있겠지.
파리가 곧 프랑스요, 다시 프랑스는 파리니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지역유지 나부랭이가 암만 여의도를 우습게 알며 날고 기어봐야 서울 사대문 안쪽에 사는 진짜 노괴들 앞에선 초라해지는 거랑 똑같다.
단, 그 지역유지들 곁에 국왕이 없다는 전제하에서 말이지.
'이제 네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
하나, 지방의 골수 충성파와 함께 상경해서 감히 국왕을 우습게 본 의회를 쓸어버린다.
둘, 상경을 거부하고 그냥 지방에 눌러앉아 임시정부를 차린다.
전자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파리 시민 전부를 적으로 돌리는 친위쿠데타이자 내전이고, 후자는 분단국가화다.
프랑스 왕국이라는 나라가 지방 소도시의 국왕령과 파리의 의회령으로 나누어지는 거다.
전자라면 피가 다소 흐르는 대신 짧게 끝나겠지만, 후자라면 어느 한쪽이 숙일 때까지 질질 끌게 되겠지.
그리고 그 기나긴 냉전 끝에 국왕과 국민 중 누가 이 나라의 주인인지가 분명해질 거고.
'내가 이겼다, 이 바보병신들아.'
구태여 두고 볼 것도 없다.
지금 여기가 정말로 빛의 도시 파리고, 또 파리가 의회 손에 있다면 이 싸움의 결말은 이미 시작부터 정해진 거나 다름없으니까.
권력이 사방으로 분산되는 봉건제-연방제 국가들과는 달리 프랑스나 대한민국처럼 중앙집권형 국가의 모든 부와 권력은 수도로 모이게 되어있다.
결국 이 수도로 모인 부와 권력을 독점한 중앙정부가 지방을 압도하니까 중앙집권이 유지될 수 있는 거고.
고로, 시작부터 파리를 따고 시작하는 이상 이건 지려야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저쪽에서 단기전에 나서건, 장기전을 각오하건 말이다.
'···이걸로 단두대 볼 일은 앞으로 영영 안 생겼으면 좋겠는데.'
이것만큼은 내가 어떻게 설계해볼 수 있는 게 아니니 별수가 없었다.
좌우지간 이로써 난 판을 설계하고, 적장의 멱을 땄으며, 피아를 막론하고 이목을 사로잡으며 추후 일이 터졌을 때 가장 먼저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를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그럼 지금은 카지노 지배인에게 붙들리기 전에 오늘 딴 판돈을 챙겨 도망쳐야겠지.
싱긋.
나는 일부러 얄미운 미소를 만면 가득히 떠올리며 오를레앙공을 향해 목례를 올렸다.
그제야 무언가 불온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오를레앙공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털썩.
책임을 통감한다는 얼굴을 한 채 패잔병이 되어 자리에 주저앉았다.
"빌어먹을, 그까짓 헌법이야 지금 이 자리에서 새로 만들면 그만이지 그게 대체 무슨 대수라고!"
"악법도 법이라, 말 한번 잘하셨습니다! 자, 존경받는 의원님들! 이 자리를 빌려 반부패 특별위원회 신설을 제안하겠습니다! 어디 누가 죄인이고 누가 애국자인지 이 자리를 빌려 헌법과 국법에 나온 대로 낱낱이 밝혀봅시다!"
직후 언제나와 같은 마라와 에베르의 개소리가 의원들의 눈과 귀를 가렸다.
"어, 어허! 이 사람들이! 지금 갑자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존경하는 의원님들, 조금 전 그건 저 에베르 의원 개인의 소견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딘가 찔리는 구석이 있었던 당통의 새치기는 덤이었고.
적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거추장스럽기 그지없었건만, 오늘만큼은 든든하다 못해 유쾌하기까지 했다.
***
"이놈들이···."
꾸깃.
턱밑까지 차오른 욕지거리를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아낸 라파예트 후작이 전령을 죽일 듯이 노려다보았다.
"의회로부터의 전언은 이게 다인가?"
"예, 예! 그렇습니다!"
"그럼 내 마음 바뀌기 전에 이만 물러나 보시게."
그러자 전령은 무슨 죽을죄라도 지은 양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그야 졸지에 전쟁영웅의 살기를 정면에서 받아내게 되었으니 오죽하겠냐마는.
"대기, 라."
유감스럽게도 지금 라파예트 후작 질베르 뒤 모티에는 한낱 전령 따위를 걱정해줄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겁에 질린 기색이 역력한 부관의 모습.
후우-.
그제야 뒤늦게 제 모습이 조금도 기사답지 않았다는 자각이 든 라파예트 후작은 짧게나마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의회에서 파리로 상경하지 말고 국왕 폐하와 함께 교외에서 대기하라더군."
"네? 언제까지 말입니까?"
"그런 말은 없었네."
짧은 문답.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한껏 겁에 질려있던 부관의 낯빛이 짙은 분노를 내비치긴 충분했다.
"···오를레앙 공작이로군요."
"아마도, 틀림없다고 봐야겠지. 또 무슨 음모를 꾸미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정말로 모르겠는가?
라파예트 후작은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해답은 쉬이 나왔다.
당연히 모를 리가 있나.
이미 반백년도 전부터 오를레앙 공작가는 이 나라 프랑스에서 부르봉 왕가 다음가는 세를 자랑하는 대귀족이었다.
태양왕 루이 14세가 그들의 성장세를 경계하여 제가 죽을 적에 당대의 오를레앙 공작을 섭정으로 삼지 말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물론 오를레앙 공작은 태양왕의 유언을 그냥 깔끔하게 무시해버렸고, 태양왕의 증손자이자 당시 갓난아이였던 루이 15세는 고스란히 섭정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지금은 그때보다도 부르봉 왕가의 권위가 심각하게 실추된 상황이니 이번 대의 오를레앙공이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지야 불 보듯 뻔하지.
"기어이 그놈이 왕이 되려는 모양이군요."
빠득.
부관이 이를 악물며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냈다.
그놈, 이라고 지칭한 것만 봐도 더는 그를 이 프랑스 왕국의 공작으로 대우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임이 분명했다.
하기야 갓난아이 국왕을 위한 섭정이면 모를까 대놓고 국왕 자리를 노리는 놈이 반역자가 아니고서야 달리 무엇이겠냐마는.
"각하, 이런 되지도 않는 소꿉장난에 어울려줄 필요 없습니다. 당장 명을 내려주십시오. 병사들도 장군께서 나서면 누구나 동참해줄 겁니다."
털썩.
급기야 부관이 라파예트 후작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게 어떤 명령인지는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도 없었다.
라파예트 후작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돌려 파리를 바라보았다.
이미 저 지평선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 이 나라 프랑스의 천년 도읍을.
"···흠."
그 순간 그의 머릿속을 스친 건 함락 시킬 수 있는가, 가 아니었다.
함락시킬 수 있냐고?
그야 당연히 함락시키고말고.
전쟁의 ㅈ자도 모르는 얼뜨기들, 기사로서의 공부라고 해봐야 철없는 시절에 병정놀이가 전부인 문약한 귀족 자제들이 지키는 파리 따위 조금도 두렵지 않다.
그가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그 이후.
파리의 시민들이 그들을 해방자가 아닌 정복자로서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것.
"진을 치게."
결심을 굳힌 라파예트 후작이 부관을 빤히 응시했다.
"···각하."
"명령일세."
"각하, 그 명령서는 오를레앙 공작의 함정입니다."
"나도 아네."
허나.
"나는 주사위를 던지지 않을걸세."
국민위병 총사령관 라파예트 후작이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 한번 명하겠네. 진을 치게. 파리를 눈앞에 두고도 파리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으니 병사들에게 외박과 위문품이나마 넉넉히 챙겨주고."
"···예, 각하."
척.
결국 흙먼지를 털고 일어난 부관이 라파예트 후작을 향해 군례를 올렸다.
올곧고, 강직하며, 흠잡을 데 없는 군례였다.
만일 이 프랑스에 이처럼 충직한 군인들만 가득했다면 좋았으련만.
'도대체 누굴 믿고 있는거냐.'
최악의 경우 루이 카페 몫의 죄를 뒤집어쓸 각오로 올린 보고서를 반려할 정도라면 분명 그를 대신할 믿음직한 칼잡이를 등용했다는 소리일 텐데.
'왜 우릴 배신한 거지?'
다시 한번 저 멀리 보이는 파리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다만 저 풍요로운 센강이 그의 루비콘이 되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