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동거
파리는 혼란스러웠다.
뭐 언제는 이 도시가 평온했냐마는, 근래에는 특히 유별났다.
"그러니까 국왕이 파리를 포위했다는 말이야?"
"아니 이 사람아, 국왕 폐하께서 교외에 머물고 계시다는게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뭐, 폐하? 너 이 새끼 설마···?"
"자, 잠깐!"
파리를 버리고 떠났음에도 국왕 루이 16세는 변함없이 빠와 까를 미치게 하는 당대의 슈퍼스타였다.
아니, 어쩌면 파리를 버리고 떠났기에 더 유명해졌는지도 모르지.
오늘날 파리는 온통 상경하다 말고 교외에 진을 친 루이 16세에 관한 낭설과 정치 담론으로 요란법석이었다.
그럼에도 이 카오스 속에서 규칙을 발견해보자면 크게 세 가지.
"설마 라파예트 각하께서 우리를 배신할 줄이야···."
"배신이라니. 국왕이 헛짓거리 못하게 잘 감시하고 있는 거지! 그분이 우릴 배신했으면 지금처럼 멀뚱멀뚱 있겠나? 천만에!"
"늙은이 뒤셴(Le Père Duchesne)지에서는 의회가 국왕 폐하를 탄핵했다던데?"
"교회도 아니고 그치들이 대체 무슨 자격으로?"
"무슨 자격이라니. 당연히 우리 파리 시민을 대표해서지!"
하나는 제한적인 정보 속에서 현 상황을 어떻게든 명확히 파악해보려고 애쓰는 부류.
대중매체는 커녕 종이신문조차 만족스럽게 성장하지 못한 시대이니 결국 뜬 소문이나 당파에서 찍어내는 선전지에 기댈 수밖에 없지만, 이들은 이 혼란 와중에도 그럭저럭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부류에 속했다.
한눈에 봐도 보잘것없는 소수파라서 그렇지.
이 극소수의 상식인들이 발품을 팔아가며 어떻게든 정보를 모으는 동안 대다수는 누굴 죽이고 살려야 하는지를 떠들어대고 있었다.
"반역자 국왕을 죽여라!"
"저 작자가 선수를 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저자들의 목을 베야 하고!"
"그래서야 오를레앙공만 좋은 일 시켜주는 거잖소! 괜히 일을 키운 그 자부터 쳐 죽입시다!"
"일을 키운 거로 죄질을 따지려면 가장 먼저 탄핵을 입에 담았던 로베스피에르 놈부터 죽여야지!"
"그게 지금 우리 힘없는 민중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선 분께 할 말이야!"
이들은 진상규명 따위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세간에 떠도는 낭설과 선전지에 나온 내용만 곧이곧대로 믿고 누구부터 죽여야 하는지를 토의하지, 아무도 죽이지 않고 끝난다는 선택지는 생각지도 않는 모습들이다.
이렇게 제삼자의 관점에서 관찰하고 있자면 사실 사형이란게 내가 아는 형벌이 아니라 월드컵이나 롤드컵처럼 전 세계가 열광하는 프로스포츠 중계가 아닐까 의문이 들 정도.
너나 할 것 없이 이놈 죽여라, 저놈 죽여라 선창하는 폭도들의 낯짝엔 온통 기대와 흥분이 가득하다.
"저놈들이 또···."
"쉿! 조용히."
"쯧쯧쯧. 다들 하라는 일도 안하고 뭣들하고 있는 건지."
"할 일이 있으면 지금 한가하게 저러고 있겠나? 돈벌기 바쁘지."
"하기야 그렇군. 견실한 사람이 평일 대낮부터 탱자탱자 놀고 있을 리가 있나."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방관자 집단.
의외였던 건 어떻게든 진상규명을 추구하는 첫 번째 집단과는 달리 이들은 시종일관 타인의 죽음을 노래하는 두 번째 집단과 비교해도 크게 꿇리지 않는 다수파였다는 점이었다.
아니, 오히려 본인들이 거리로 나서서 직접 목소리를 내지 않아서 그렇지 이들이 실질적인 다수파임이 분명했다.
침묵하는 다수, 시끄러운 소수라는 구분이 괜히 있을까.
대혁명 와중일지라도, 아니 오히려 대혁명 와중이기에 시끄러운 소수에게 모든 이목이 주목되어서 그렇지 내가 보기에 파리의 다수여론은 처음부터 혁명 그 자체에 냉소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컸다.
만약 혁명파가 다수파였으면 공화국이 무너지고 나폴레옹 제정이 성립되진 않았을 테니.
잘은 몰라도 대혁명기의 혼란상에 진저리를 내던 침묵하는 다수가 결국 로베스피에르를 단두대로 보내고 나폴레옹을 추대한 거겠지.
히틀러가 그렇듯이 나폴레옹도 엄연히 국민의 지지 위에서 선출된 독재자니까.
"국왕 폐하가-."
"오를레앙공께서-."
"로베스피에르는-."
여하간, 오늘날 파리에서는 당파를 막론하고 쉴 새 없이 우리 세 사람의 이름이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걱정과 선망을 담아서, 또 누군가는 경멸과 두려움을 담아서.
개개인의 정치색에 따라 누굴 걱정하고 누굴 경멸하는지도 그때그때 달라졌으나 주어는 언제나 우리 세 사람, 한사람 더 끼워 넣자면 라파예트 후작까지 네 사람에 관해 떠드느라 바빴다.
정치동아리에서나 좀 알아주던 철뜨기가 비로소 전국구-까지는 아직 모르겠고 파리의 유명 인사가 된 거다.
"이제 만족하는가?"
파리 중심가치고는 기이할 정도로 인적이 드문 한적한 카페.
테이블 너머로 마주 앉은 마라가 날 향해 으르릉거렸다.
"다들 목숨을 걸고 민중을 위해, 혁명을 위해 싸우고 있건만 인민들은 적과 내통한 인민의 적에 관한 이야기만 하고 있군."
"그러게 난 내통한 적 없대도."
"배신자들은 다들 그렇게 말하곤 하지."
아니 진짜라니까 믿어주는 시늉도 안 하네.
의회에서 나 혼자 원맨쇼한 대신 책임지고 근신하겠다고 했고 그 좋아하던 대중연설도 안하고 얌전히 짱박혀 있으면 됐지 뭘 자기 시간까지 쪼개가며 날 감시하겠다는 거야.
자코뱅 수도원에서 대중연설도, 저술도 안하고 진짜 근신하겠다고 할 때는 다들 좋다고 희희낙락했으면서.
이제 와서 파리 시민들이 온통 내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까 샘이 나나 봐?
그게 아니면.
"이제 그만 속 시원하게 털어놓아 보게."
창가에서 시선을 떼며 속 시원한 직구를 날렸다.
괜히 빙빙 돌려봐야 마라 같은 인간상을 상대론 의심만 키울 뿐이다.
차라리 지금은 정직하게 나가보는게 맞겠지.
"자네도 나만큼이나 연설하고 관심받기 좋아하는 사람 아닌가. 날 이렇게 감시하고 싶었으면 사람을 붙였으면 붙였지, 민중에게 다가갈 아까운 시간까지 버려가며 직접 나서다니 답지 않군."
"지금 날 회유하려는겐가?"
"난 이미 내 모든 심계를 밝혔네. 실패했고, 그래서 지금 근신 처분까지 받아들였지."
물론 거짓말이다.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진실.
만약 마라가 정말로 날 죽이려 했다면 진작에 그랬을 테고, 감시하려면 제 아까운 시간을 버릴 게 아니라 사람을 붙였겠지.
나와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어서 찾아온 마라가 고작 이 정도 가식을 트집 잡지는 않을 거다.
"솔직하게 말해주게. 왜 날 찾아왔는가?"
"···요 며칠 사이 능청이 늘었군."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일세. 저 압제자들이라고 날 때부터 저랬겠나? 천만에."
단호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명심해두게. 언젠가 같은 자리에 서게 되면 우리라고 저들과 다르라는 법은 없어."
뻔한 설교였다.
그렇지만 빙의라는 오컬트를 솔직히 밝히는 것보다야 낫겠지.
후우-.
잠시 나를 께름칙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마라가 한숨을 내뱉으며 마침내 속내를 털어놓았다.
"···다들 자네가 복귀해주기를 바라더군."
"아직 근신 당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네만."
"빌어먹을, 나도 알아. 짧지. 마음 같아서는 막시밀리앙, 너처럼 저만 아는 놈에게 두 번 다시 손을 벌리고 싶진 않았다고."
헌데.
"오를레앙, 그 개자식이 독을 품었어."
마라가 이를 악물었다.
"거의 같이 죽자는 기세야. 다들 최선을 다해서 버텨보고 있지만 얼마 못 가겠지. 그러니-."
"그만."
침통한 마라의 고백을 도중에 끊었다.
"그만하면 됐네."
그 이상 말하지 않아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뻔히 보인다.
아마 오를레앙공은 그동안 온통 국왕 탄핵에만 정신이 팔려있었을 거다.
그토록 고대하던 왕위가 눈앞에서 어른거리니 저절로 침이 꼴딱꼴딱 넘어가고 있었겠지.
그러니까 내가 먼저 국왕을 갈아치우자는 말을 꺼내고 다시 제가 반격해서 퇴위 권고로 주고받았을 때는 정말로 온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을 거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거든.
위풍당당하게 루이 16세에게 퇴위를 권고하고 그놈이 파리로 들어와서 국왕행세 못하게 틀어막고 보니까 뒤늦게 라파예트 후작이 눈에 들어온 거다.
너 혼자만이라도 파리로 돌아와라, 인솔자를 교체하겠다 등 온갖 당근과 채찍으로 라파예트 후작을 달래고 있겠지만 후작은 꿈쩍도 안하고 있을 것이고.
그럼 하다못해 의회라도 제 사람으로 가득 채워놔야지.
그래야 나중에 일이 불리하게 돌아가도 뒤를 찔리진 않을 테니까.
오를레앙공이 너 죽고 나죽자는 식으로 덤비고 있다는 건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저쪽에서도 정치생명을 걸고 덤벼들고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우리 정치동아리에선 결국 독을 품고 덤비는 공작에게 맞서려면 이번 일로 유명 인사가 된 내가 나서야 급이 맞는다, 는 판단이 섰을 테고.
이독제독.
저 세계구 시정잡배들이 단순 무식해서 그렇지 정치 감각이 없는 건 아니니 그날 날 때렸던 마라를 보낸 것도 화해의 제스쳐라고 보는게 맞겠지.
"동지들이 위기에 처했다는데 내가 어찌 두고 보고만 있을 수 있겠나? 어서 앞장서게. 그 불장난 좋아하는 불한당이 뼈다귀도 추리지 못하게 진짜 싸움 맛을 보여줘야지."
"···막시밀리앙, 자네 정말로 뻔뻔스러워졌군."
"장 자크 루소는 마키아벨리를 공화주의자의 친구라고 했네."
사실이다.
그 양반 군주론 덕분에 유명해져서 그렇지 원래 전공은 로마 공화정 연구였거든.
"그 마키아벨리는 도덕과 실리 사이에서는 언제나 현실을 택하라고 조언했고."
"하, 벌써 군주라도 된 기분이신가?"
"마음대로 생각하시게. 우린 더는 이런 허름한 카페에서 조국의 미래를 토의하는 소피스트 따위가 아니야. 전장에 나서서 민중을 위하여 적과 맞서 싸우는 스파르타쿠스지. 수세에 몰린 반역자가 수단과 방법을 가릴 텐가?"
절레절레.
"기사도 따위 똥이나 먹으라지. 전장의 명예는 귀족 나리들이나 따지는걸세. 우리가 승리가 아니라 명예를 우선하는 순간 또 한 사람의 힘없는 민중이 죽게 되네."
"···자네."
"프랑스의 긍지 높은 기사님들은 그까짓 농노의 죽음 따위 제 명예에 비하면 사소하다고 말하겠지. 그렇다면 나도 답하겠네. 기사의 죽음 따윈 민중의 존엄에 비하면 지극히 사소하다고."
부릅.
두 눈에 힘을 가득 실으며 턱이 열린 마라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비겁하다느니, 뻔뻔하다느니 어디 마음대로 욕하라지. 혁명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법일세. 우리는 인류문명의 선형적 진보를 앞당기기 위한 역사적 과업을 짊어지고 지금 이 자리에 서 있고, 나는 프랑스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자유인으로서 이 땅에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국이 바로 서는 걸 꼭 봐야만 하겠네."
···잠깐.
이거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맞나?
분명 내 지식이 맞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21세기 반골청년 박민혁이 할 만한 말은 아니다.
총학시절 절친이랍시고 대선 때 VIP 들이받았다가 나를 포함해서 그때 졸업반들 깡그리 여의도 선배님들과 줄줄이 연락 끊기고 날백수 만들었던 우리 최루탄 교수님이라면 모를까.
그렇다면-.
"그래, 이제야 좀 막시밀리앙 자네답군."
마라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동시에 척수를 타고 꼬리뼈까지 소름이 쫙 돋았다.
오, 주여.
구마의식 한번에 얼마죠?
***
"안된다는 말만 하지 말고 그럼 내가 어찌하면 좋을지를 말해주게."
루이 16세가 땅이 꺼지라고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나? 내 친애하는 친척이 권하는 대로 이만 퇴위하여 수도원이라도 들어가면 되겠나? 아니면 맨몸으로라도 파리로 돌아가면 좋겠나."
"폐하, 아니 되옵니다."
"그러니까 자꾸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 해결책을 말해달라고 하지 않았나."
하아-.
또다시 한숨.
국왕 체면에 봉신이 보는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게 얼마나 바보같은 짓인지 모를 리도 없을 텐데도 루이 16세는 거듭하여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정신을 집중시켜야 간신히 들리는 자그마한 목소리.
명확하지 않은 억양, 힘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구부정한 몸.
포로로 잡힌 와중에도 허세를 부려보긴커녕 스스로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눈앞의 라파예트 후작에게 결정권을 양보하는 유약한 모습까지.
왜 이 나라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는지, 파리의 왕당파들이 국왕을 갈아치우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암군의 모습이었다.
뿌득.
잠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라파예트 후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하십시오."
루이 16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지금 나보고 저 폭도들과 타협하라는 말인가?"
"폐하, 폐하께서 파리를 떠나신 지 아직 불과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만일 이 퇴위 권고가 정말로 오를레앙공의 음모라면, 아직 의회도 충분히 규합되진 않았을 겁니다."
가령, 급진 공화파.
세작들의 보고에 따르자면 처음 국왕 탄핵을 주장한 건 급진 공화파의 로베스피에르 의원이라고 하지만, 그가 지금 이 상황을 주도한 건 아닐 거다.
보나 마나 급진 공화파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애송이답게 근시안적인 판단을 내렸고, 일단 지르고 봤더니 기회를 엿보던 오를레앙공에게 낚아채인 거겠지.
퇴위 권고와 국왕 탄핵 사이의 미묘한 어감만 봐도 이들이 각각 무엇을 노리고 있었는지야 눈감고도 훤히 보인다.
지금쯤 그 공화파 애송이들은 섣부른 탄핵의결을 후회하며 저 여우 같은 오를레앙공이 보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전전긍긍하고 있을 터.
"헌법의 수호자가 되십시오, 폐하."
그들과 결탁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파리로 돌아갈 길이 열린다.
한때는 적이었다지만 당장은 오를레앙공의 국왕 즉위를 막는다는 관점에서 뜻을 함께하는 동지.
그럼 정치판이 으레 그렇듯이 서로 이용하는 셈 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어떻게든 파리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지금의 헌법보다도 다소 과격한 조항들이 대거 들어가야겠지만 아무튼 국왕이 헌법을 승인하기만 한다면 오를레앙공을 지지하던 시민들도 당장에 돌아서서 국왕만세를 부르짖게 될 거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국왕과 급진 공화파라는 결코 서로 공존할 수 없다고 여겼던 앙숙들을 기적적으로 화해시킨 라파예트 후작을 칭송하게 될 테지.
"···으음."
허나 루이 16세는 선뜻 답하는 대신 라파예트 후작의 시선을 피했다.
아마 지금 여기서 헌법을 받아들였다간 지키는 '척'이 아니라 정말로 헌법에 옭아 매이게 될 거라는걸 눈치챈 거겠지.
원내 왕당파를 오를레앙공이 쓸어간 이상 그는 급진파와 라파예트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몸이 되어버렸으니까.
아직도 절대권력을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국왕의 눈에는 헌법을 받아들이라 요구하는 라파예트 후작조차 반역자로 보일 거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지."
'멍청한 놈.'
결국 우회적인 거부 의사를 밝힌 국왕을 향해 라파예트 후작은 내심 온갖 저주와 욕지거리를 쏟아부었다.
저가 무능해서 이 사달을 내놓고서 아직도 그놈의 권력에 미련이 남았나?
외세에 원병을 청하려다가 그와 그의 병사들까지 파리를 눈앞에 두고도 돌아가지도 못하는 몸으로 만들고서?
정녕 이런 덜떨어진 놈과 최후를 함께하는 것이 프랑스와 왕실을 위하여 한평생 바친 충성의 대가인가?
"···그렇다면 우선 트루아로 모시겠습니다."
까드득.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천불을 또 한 번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가라앉힌 라파예트 후작이 고개를 조아렸다.
"지금처럼 파리 근교에서 대치하여 시민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겁니다."
"음, 음. 좋아. 그렇게 하세나."
그제야 루이 16세는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국경과 적당히 떨어져 또다시 도망칠 거라는 의심을 피할 수 있으면서 파리와도 적당히 떨어져 있고, 무엇보다 국왕령이라는게 마음에 놓인 거겠지.
마음 같아서는 번영한 랭스로 가자고 하고 싶었겠지만 거긴 오스트리아령 저지대가 코앞이니까.
감히 저 미련한 머릿속을 짐작해보자면 충성파가 트루아로 몰려오는 동안 파리의 공화파 애송이들과 오를레앙파가 서로 다투다 자멸하는 장밋빛 미래라도 꿈꾸고 있는 거겠지.
'정녕 이게 최선인가?'
허나 그건 너무나 얕은꾀다.
저들이 자멸할 거라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천에 하나 의회가 힘을 합쳐 국왕과 맞서는 순간 그들은 파리와 맞서 싸워야만 한다.
파리.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그 도시와 말이다.
'트루아가 나의 무덤인가?'
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그가 떠나온 풍요로운 센강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