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정말이지 자네는 내가 봐온 중 최고의 이리야.]
칭찬으로 듣겠다.
아무렴 똥개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여의도 꿈나무가 이 정도도 못할까 봐?
물론 나는 여의도 구경도 제대로 못 해보고 끈 떨어진 신세 된 날백수이긴 한데, 그래도 여기저기 견학 다니고 선배님들께 수학 받은 짬밥이 있는데 한평생 호의호식하면서 부모님께 물려받은 귀족작위로 잘난척하는 애송이들에게 밀려서야 똥개의 나라 대한민국이 운다.
라떼는 말이야. 선거철만 되면 학연, 지연, 혈연 다 조까고 일단 들이받고 물어뜯는 놈이 갑이었다, 이거야.
"그-."
"···험."
그에 비하면 현 프랑스 왕국은 거기까지 막 나간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주먹질이나 막말이라면 얘네가 더했으면 더했지 여의도보다 못하지는 않았을 텐데, 막상 온몸에 폭탄 짊어지고 냅다 꼴아박은 불나방은 처음 경험해보는 느낌.
그 증거로 좌우를 막론하고 미간에 주름을 잡고 끙끙 앓고 있을 뿐 벌써 몇십 초째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
그야 고민되시겠지.
차라리 내가 전시내각이나 의회군을 이끌겠다고 나섰으면 모르겠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작위도 높고 명망도 있는 오를레앙공을 추대했으니까 절차상 틀린 점은 없다.
오히려 국왕이 한 발짝 물러난 사이 의회가 사분오열할지도 모르는 위기 시에 먼저 야심을 꺾고 저쪽에 숙여준 격이니 칭찬받을만한 일이지.
그렇다고 반역자 루이 카페, 폐주 운운을 물고 늘어지자니 사실상 만장일치로 루이 16세에게 퇴위 권고를 날린지 불과 며칠도 지나지 않았고 또 루이 16세가 퇴위 권고를 아무런 응답도 없이 쌩 까버리면서 의회를 물먹인 것도 사실이다.
아직 루이 16세가 파리를 공격하겠다고 나선 것도 아닌데 이쪽에서 먼저 선빵을 날리는 건 영 부담스럽겠지만, 또 막상 진짜로 나중에라도 루이 16세가 파리를 공격하고 나서면 이때 내가 하자는 대로 성공했으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거라고 물고 늘어질 게 뻔하단 말이지.
물러날 수도, 그렇다고 나아갈 수도 없다.
전시내각 수립이 사실상 오늘 회기의 기준점이 된 거다.
[···그런데, 정말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라파예트 후작과 싸우겠다는 건가?]
그럴 리가.
저쪽에서 오늘 회의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어버버 거리고 있으면 그때는 별수 없이 전쟁해야겠지만 왕당파 중 한 사람이라도 총대 매고 나서면 난 못이기는 척 물러나 버릴 거다.
이러면 우리 급진파에서 먼저 왕당파에게 공동전선을 제안했지만, 목숨 아까운 왕당파 놈들 때문에 단합이 깨졌다는 프레임을 뒤집어씌울 수 있으니까.
"저기 막시밀리앙, 자네-."
"입 다물게, 당통."
허나 우리 편에서 총대 메고 말리려 든다면 양보는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 이건 기세 싸움이다.
내가 근신하면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야 궁금하지도 않고 알아봐야 아무 소용없다.
왜냐?
저쪽에서 먼저 오늘 회의 전에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해줬거든.
이건 결국 날더러 총알받이나 하라고 불러왔다는 소리고, 중간에 휴식 시간에 체면 깎아가며 물어보러 다니건 아니면 오늘 끝날 때까지 눈치나 보면서 알아서 내일 회의 준비하라는 소리다.
그러니까 날 급진공화파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돌격대장에 꽂아 넣으려 든거지.
물론 그 우두머리에는 언제나처럼 당통이 있을 것이고.
"아직 저 루이필리프가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잖은가."
조까.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하지도 않고 또 이제부터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될 거다.
루이 카페 토벌이라는 핵폭탄이 떨어졌는데 일단 몸을 피하고 봐야지 어제 회의에서 뭐 했는지까지 생각이 갈 놈이 어디 있어?
이렇게 된 이상 이 버스는 청와대로 간다.
불붙은 버스에 치이고 싶지 않거든 얼렁 내 앞에서 비키든가 내 뒤에 올라타든가 알아서들 하셔.
[이리 같은 놈.]
칭찬으로 듣겠다.
이제부턴 날 라이칸슬로프 박민혁이라고 불러주시라.
아우우.
"···농이 지나치시군요."
때마침 장고 끝에 오를레앙공이 입을 열었다.
멀리서 봐도 영업용 미소가 무너지고 이를 악물고 있는 게 어지간히 빡친 모양이지?
잘된 일이다.
사람이 머리에 열이 뻗치면 평소에는 안 할 실수가 쏟아져나오기 마련이거든.
시정잡배끼리의 길거리 싸움이라면 모를까, 토론장에서 빡친 놈은 그냥 어서 날 요리해줍쇼-하고 배를 벌렁 깐 호구다.
그럼 원하는 대로 얼렁 저 도련님의 배때지에 사시미를 꽂아 넣어줘야지.
"농담이라니요. 오를레앙공이시야말로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제가 아무리 기사의 명예도 모르는 미천한 필부이기로서니 이 나라의 명운을 걸고 농담을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설마하니 라파예트 후작이 국왕과 내통했다는 소리는 아니시겠지요."
오, 우리 도련님께 영업용 미소가 돌아왔다.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으셨구만?
"다름 아닌 그 라파예트 후작입니다. 국민위병 총사령관이자 우리 프랑스의 자랑이며 저 대서양 너머 아메리카 대륙에서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압제자와 맞서 싸운 자유의 투사 라파예트 후작 질베르 뒤 모티에의 이름조차 설마하니 모르시는 건 아니겠지요."
오를레앙공이 과장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지금 국왕은 바로 그 라파예트 후작의 감시 아래에 있습니다. 곧 우리 의회의 손아귀에 있다는 소리지요. 의원님께서 무엇을 근심하셨는지야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지금이 그런 비상조치가 필요한 비상시국이라고 생각하기엔 어렵군요."
"아, 물론 라파예트 후작이라면 잘 알고 말고요."
자, 지금이 승부처다.
있는 힘껏 목울대와 배에 힘을 주고 허리를 곧추세워 목소리를 한계까지 끌어올린다.
"국왕 부부를 도와 우리 의회에 올릴 보고서를 조작한 반역자 아닙니까?"
"···이놈이."
"제 말 틀렸습니까? 국왕 부부가 파리를 버리고 적국 오스트리아와 내통한 반역자라는 건 이미 우리가 알고 파리 시민들이 알며 또 온 프랑스가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중 누구도 국왕 폐하를 해치길 원하지 않았기에 지난날 우리 테니스 코트의 동지들이 모처럼 한마음 한뜻으로 퇴위를 권고했던 것 아닙니까."
헌데.
"국왕은 우리의 호의를 배신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두 눈과 귀를 가리려 했던 라파예트 후작은 국왕이 트루아로 피신할 수 있도록 도왔지요."
그렇다면.
"제가 모르는 사이 의회에서 루이 카페를 트루아의 별궁에 감금하기로 협의한 것이 아니라면 이 두 사람은 의회에 도전한 반역자라고 해석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오를레앙공은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홍당무처럼 온통 시뻘겋게 물들어서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이다.
그야 당연하겠지.
결국 이건 제가 왕위 다툼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서 라파예트 후작의 보고서를 놓친 부메랑이니까.
나의 추대를 받아서 국왕이 될까, 말까만 생각하다가 라파예트 후작이 제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걸고 조작한 보고서를 무시하면 어떤 사달이 터질지를 놓친 대가였다.
"만약 라파예트 후작이 의회에 충성하고 있다면 가장 먼저 혼자서라도 파리로 출두하여 왜 보고서를 조작했는지 낱낱이 해명해야만 했습니다."
우쭈쭈. 우리 도련님은 설마 이거 하나로 여기까지 물고 늘어질 수 있을 줄은 몰랐쥬?
몰랐으면 맞아야지.
여의도 굴다리에 끌려오신 걸 환영합니다 호갱님.
"만일 그가 진정 국왕이 아닌 프랑스 국민에게 충성하고 있다면 교외에 진을 칠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본인이 칼을 뽑아서라도 루이 카페가 퇴위 권고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해야만 했습니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아뇨, 조금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반역죄입니다. 잉글랜드의 찰스가 왜, 어쩌다가 목이 잘렸는지 다들 기억하시잖습니까?"
기억하지 못한다면 이제부터 기억하게 만들면 되는 거고.
딸꾹.
우익진영에서 들려온 겁에 질린 딸꾹질 소리에 더욱 득의양양해져 스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국민위병 총사령관 라파예트 후작은 왜 의회를 속이면서까지 거짓된 보고서로 국왕 부부를 옹호하려 했는지 스스로 해명할 기회를 저버렸습니다. 폐주 루이 카페는 우리 의회에서 평화로운 사태 해결을 위하여 협의한 퇴위 권고라는 마지막 기회를 외면하며 의회와 유권자들을 욕보였습니다."
가급적 천천히, 보란 듯이 좌중의 면면을 낱낱이 살폈다.
이 구역의 미친개는 나다.
오늘 회의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 라이칸슬로프 박민혁-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듀오다.
지혜의 박민혁, 혓바닥의 로베스피에르.
두 사람은 레볼루숑.
"고로 존경하는 의원님들, 이 자리를 빌려 이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가 주제넘게도 감히 다시 한번 제안하겠습니다."
"무, 무엇을-."
"국민위병 총사령관 라파예트 후작 질베르 뒤 모티에의 탄핵, 혹은 특별조사위원회 설치입니다. 왜 그가 보고서를 조작했는지, 왜 아직도 국왕 부부를 옹호하려 하는지, 그의 충성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무엇보다도.
"그가 이 프랑스의 카이사르가 되려는 건 아닌지."
얼이 빠진 오를레앙공작을 향해 감사의 목례를 올린다.
싱긋.
"모든 것이 명백히 밝혀지기 전까진 우리 의회로선 더는 군부를 신뢰할 수 없으며, 신뢰해서도 안 됩니다."
침묵.
정적.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았다.
아무도 맞서려 하지 않았다.
당통도, 마라도, 하다못해 에베르조차.
반쯤 넋이 나가서 키 160cm 남짓한 단신 로베스피에르를 우러러보고 있다.
[지금 그 소리가 대체 왜 나오는가!]
하지만 팩트죠?
이대로 계속 서 있으면 아무도 반박하지 않을 것 같길래 일단 자리에 앉았다.
털썩.
하지만 그럼에도 한참을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은근히 날 어깨로 툭툭 치면서 기 싸움을 하던 놈들이 어느 틈엔가 저 멀리 도망쳐서 살갗 하나 닿지 않으려고 발악하고 있다.
몇몇 머리가 이상한 놈들은 이쪽을 무슨 사랑에 빠진 눈초리로 보고 있고 말이지.
흠.
'···이대로 회의가 끝나면 나도 곤란해지는데.'
저기요? 진짜로 아무도 없어요?
일부러 중간중간에 공격할 틈 숭숭 뚫어놨는데 그것도 못 찾겠어?
이대로 폐회하면 진짜로 라파예트 후작 파리로 끌고 와서 특위 열어야 하는데?
루이 16세야 개껌도 아니지만, 괜히 전쟁영웅이랑 척져서 구국의 결단 당하는 건 사양이거든요?
[보기와는 달리 겁쟁이였군.]
겁 안 나게 생겼냐?
그러게 당군부터 만들었어야지 왜 반동들한테 군권을 맡기냐고!
암만 정치동아리라도 그렇지 너 군대가 그렇게 우스워?
에잉, 이래서 미필이란···!
딱딱딱.
"그 말대로요."
다행히도 최악의 사태는 끝내 벌어지지 않았다.
내가 앉기가 무섭게 마라가 나서줬거든.
한껏 상기된 얼굴을 보아하니 어지간히 조금 전 내 주장들이 제 마음에 쏙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놈이 정녕 딴 마음이 없었으면 가장 먼저 의회에 출두해서 해명부터 했겠지! 루이 카페 그놈과 함께 트루아로 도망쳤으니 이미 혐의를 자백한 격이잖소! 자, 뭣들 하시오? 어서 저 반역자들이 파리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제 죄를 뉘우칠 수 있도록 단두대를 대령합시다!"
"다, 단두대라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하십니다!"
"대체 너무할 게 뭐 있습니까? 그렇게 좋아하시던 법치를 바로 세울 차례인데! 자, 어서 명예로운 기사 나으리들께서 앞장서십시오! 아니면 미천하고 비루한 저희 필부들이 앞장설까요?"
뒤이어 에베르까지.
당통이 혼자 골머리를 싸맨 체 끙끙 앓고 있는 가운데 두 사고뭉치가 나서서 깽판을 치기 시작하니 우익의원들도 하나둘 나서서 아무 말 대잔치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나보단 저것들이 만만하다, 이거겠지.
막 나가면서도 은근히 물러날 구석을 파두는 나와는 달리 앞뒤 분간 없이 달려드는 자살특공대는 얼렁 때려눕히지 않으면 같이 죽으니까 조건반사적으로 반박하게 되는 것도 있을 테고.
후우-.
아무튼 당장에 라파예트 후작을 파리로 끌고 오지는 않게 되었다는 생각에 나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피를 보기가 두려운 건가?]
내가? 피를?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야 지금껏 살인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으니 막상 누군가를 죽여야 할 때 모질게 굴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은 없다.
하지만 그보다도.
'아무나 죽이면 그게 혁명이냐.'
학살이지.
혁명은 사랑받는 존재라기보단 공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혁명가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그게 그치들 혁명이 망한 이유다.
혁명이란 민중의 자발적인 참여와 사랑으로부터 피어나야만 한다.
혁명이 공포의 대상이 되는 순간부터 과도정부가 민중을 섬기는 게 아니라 민중이 과도정부를 섬기게 되고, 그 끝은 병적인 의심에 기초한 통제사회와 자기 보신만 우선하는 테크노크라트 독재로 인한 자멸뿐.
그래서야 지배계층의 이름만 바뀐 봉건사회다.
고로, 민중이 정부의 눈치를 살피게 만들 피는 적게 흐를수록 좋다.
'설령 학살이 민의라고 해도 말이지.'
안 그래?
로베스피에르에게 되물었다.
혁명하는 기계는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박 당하진 않은 거로 충분했다.
***
늦은 밤.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 2세의 자택.
"당했다···."
반쯤 넋이 나간 오를레앙공이 중얼거렸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지?"
"전하, 진정하십시오."
"라파예트, 이대로 가다간 라파예트와 싸워야 할 판이야."
곁에서 말리는 시종장은 안중에도 없는 양 오를레앙공이 울먹거렸다.
불과 며칠 전까지의 여유와 품위라곤 온데간데없는 모습.
철없는 코흘리개 같은 주인의 추태에 시종장이 거듭 고개를 조아렸다.
"아직은 아니잖습니까."
이대로 가면 라파예트 후작과 싸울 판이라는 건 결국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것.
그제야 총기를 되찾은 오를레앙공의 눈이 번뜩 뜨였다.
"체통을 지켜주십시오. 듣는 귀가 많습니다. 물론 보안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자칫 파리에 안 좋은 낭설이라도 돌면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미안하네. 내가 답지 않은 짓을 할 뻔했군."
"이제라도 정신이 드셨다면 그걸로 됐습니다. 자, 어서 목부터 축이십시오."
쪼르륵.
시종장이 잔 가득히 와인을 따라 건넸다.
파리 시민들이 한평생 뼈 빠지게 일해도 한번 입에 댈까 말까 한 고가의 사치품이었건만.
꿀-꺽.
오를레앙공은 그 향기나 맛을 느낄 새도 없이 단숨에 잔을 가득 채운 와인을 비웠다.
싸구려 사과주를 마시듯이 말이다.
"···시건방진 놈."
그제야 조금이나마 객관적인 시야로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 오를레앙공이 이를 악물었다.
의회군 결성에 전시 수상 추대라니.
라파예트에게 싸움을 걸면서 그게 무슨 추대인가?
사형수로 단두대에 내모는 격이지.
오를레앙공은 바보도, 기사도적 낭만에 취한 애송이도 아니었다.
지금 그가 의회군이랍시고 급조해봐야 라파예트가 이끄는 국민위병과 싸우면 백전백패다.
같은 귀족끼리 패장을 잡아 죽이진 않겠지만, 그 포로로 잡힌다는 게 어디 사람 마음대로 되던가?
설령 포로로 잡히더라도 라파예트에게 참패한 그가 국왕을 노려볼 기회는 앞으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터.
결국 이건 저 로베스피에르라는 공화파 애송이가 그를 위해주는 척하면서 물먹인 거였다.
"전하께서 그리 당황하실 정도면 대단한 놈인 모양입니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이 또한 사실.
지금껏 급진공화파 애송이들이 그를 물고 늘어진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말꼬리를 잡거나 앞뒤 분간 없이 냅다 들이받는 단순 무식한 공격이었다.
지금처럼 치밀하게 판을 설계해서 빼도 박도 못하게 한 다음 마지막 쐐기 하나만 남기고 슬쩍 치고 빠지는 노련한 책략에 당한 건 이번이 처음.
저건 애송이 따위가 아니다.
저와 대권을 두고 경쟁할 대등한 호적수지.
비로소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라는 이름을 똑똑히 머릿속에 아로새긴 오를레앙공이 말했다.
"일전에 말해준 소문은 계속 퍼트리고 있나?"
"전하께서 그만두라고 하시지 않았으니까요."
"잘됐군. 이제 그만 배후를 드러내 보게."
"···일부러 발각되라는 말씀이십니까?"
당혹한 시선.
그야 저 공화파 애송이를 일대 유명 인사로 만들어준 게 오를레앙공이라니 분명 엄청난 파장이 번질 테지.
하지만 오를레앙공은 단호했다.
"그래."
여기서 저 공화파 애송이들 사이에 의심이 번져 내분이 일어나면 최선이다.
설령 내분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소식을 듣게 된 루이 16세가 의회가 똘똘 뭉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겁에 질려 투항한다면 차선.
그리고 최악, 저 애송이들에게 대권을 내주게 되었을 경우 이때의 은혜를 빌미로 목숨 정도는 건질 수 있을 터.
보나 마나 그날 옥좌엔 저 로베스피에르가 앉아있을 테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네. 지금 당장 착수하게."
"···알겠습니다."
결국 충직한 시종장은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조아렸다.
진정으로 홀로 남은 오를레앙공은 밤하늘의 달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왜 하늘은 그를 낳고서 또 저 이리를 낳았느냐,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