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선
"으하핫-!"
팡팡.
술에 취하여 벌겋게 물든 마라가 내 등을 있는 힘껏 두들기며 웃음을 터트렸다.
"통쾌해! 아주 속이 다 시원하구만! 오를레앙 놈 얼빠진 거 봤나? 내 살아생전에 그 새끼가 넋이 나간 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자네 취했나?"
"취했냐고? 그래, 취하고말고! 승리에 취하고 낭만에 취하고 혁명에 취했지! 그리고 물론 막시밀리앙, 자네에게 취했고 말이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마라고 하늘 높이 싸구려 와인을 치켜들며 외쳤다.
"우리의 스파르타쿠스! 위대한 혁명가이자 프랑스의 키케로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를 위하여!"
"""위하여!!!"""
텅-.
꾸릉내가 물씬 풍기는 거친 건배였다.
나무잔에 담긴 탓에 기분 좋게 쨍-하는 소리가 나진 않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유리잔으로 지금처럼 부딪혔으면 쨍그랑 소리가 났겠지.
홀짝.
일단 안 마실 수도 없어서 한 모금만 입에 머금었더니 마라가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막시밀리앙, 자네 정말로 이런 건가?"
"내가 뭘?"
"오늘의 주인공이 그리 사려서야 우리가 어떻게 먹고 마시고 즐기겠냐는 말이야. 적장의 멱을 따고 온 개선장군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지. 갑자기 웬 되지도 않는 샌님 흉내신가?"
···저기요, 당신 환자잖아.
내가 의사는 아니긴 한데 만성적인 피부병을 달고 사는 양반이 술에 취하면 몸이 더 빨리 망가지면 망가졌지 몸에 좋지 않을걸?
프랑스 와인이 아무리 건강에 좋다고 선전해봐야 술이고 알코올인데 코가 벌겋게 달아오를 만큼 폭음을 하는데 간이 버틸 수 있겠냐고.
벌컥.
내심 투덜대는데 그 틈을 타 몸을 가로챈 집주인이 단숨에 와인 한잔을 비워버렸다.
꺼흐윽-.
우웩.
아니 이 양반들이 암만 좋은 날이라지만 무슨 맥주도 아니고 와인 500cc를 그 자리에서 한방에 비우고 앉았냐.
와인은 향과 산미를 음미하면서 마시는 고급술 아니었어?
"그래, 그래! 이래야지! 이제야 좀 스파르타쿠스답구만! 역시 자넨 사나이 중의 사나이야!"
그제야 기분이 좋아진 마라가 껄껄대며 내 등을 두드려줬다.
아니 뭐, 딱히 악의가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더 뭐 같다.
회식 강제 참여에 원샷 강요라니 지금이 뭔 쌍팔년도야?
아, 그보다 더 옛날이었지 참.
[거참, 미래엔 다들 대체 무슨 재미로 사는 건지 원.]
SNS라던가 너튜브 쇼츠라던가 망플렉스라던가 음주가무보다 좋은 것들 이것저것 많거든여?
최소한 와인을 무슨 막걸리처럼 마구 위장에 털어 넣고 있는 이 양반들보단 내가 훨씬 재미있게 놀면서 살았다.
[흠,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한데. 우리 프랑스에서 와인이란 건 그렇게 귀족들만 즐기는 고급술이 아닐세. 물론 그런 사치품들도 있긴 한데 그치들이 소비해봐야 뭐 얼마나 마시겠나. 자네 나라에선 포도가 그리 흔하지 않다 보니 그런 듯한데, 이제부터 프랑스에서 살려면 먼저 그 인식부터 고치는게 좋아.]
네네, 물어본 적도 없는 지방방송은 그쯤 하시고요.
마라가 날 놓아준 김에 재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벌써 상의를 벗어던지고 식탁 위로 기어 올라간 양반.
어깨 동무하고 난 알지도 못하는 노래를 음정 박자 따윈 무시하고 고래고래 합창하는 자리가 있는가 하면 한쪽에선 술집 여자들이랑 술래잡기나 하고 있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 틈바구니에서 통통한 아줌마 속치마에 손 집어넣고 있는 당통은 일단 모른척해 주자.
식탁 위로 올라가 제 가발을 벗어 휘두르면서 노래 부르고 있는 에베르도.
퍽!
아. 물론 뭐 때문에 시비가 붙었는지도 모를 이유로 쌈박질 중인 자리도 있다.
살 때리는 소리가 꽤 살벌하긴 한데 조금 전까지 기분 좋게 술 퍼마시던 마라가 씩씩거리면서 저쪽으로 달려갔으니 어련히 알아서 정리할 거다.
온통 괜히 선술집 하나를 통째로 대절한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는 아수라장이었다.
"···진짜 대학 동아리가 따로 없네."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로베스피에르를 포함해서 다들 서른 줄은 넘겼다 보니 그래도 술을 마시더라도 나름 격식 차리면서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상상했던 그 이상이다.
좋게 보면 그만큼 자유롭고 구성원들 간의 서열 같은게 없이 평등하다고 하겠는데 그것도 정도가 있는 거지.
지금 누가 이 광란의 밤을 보내고 있는 양반들을 내일 아침부터 국회에 출근해야 하는 국회의원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저기 자네, 내일은 일요일이네만.]
그래서 다들 출근 안 하고 쉰다고?
진짜?
루이 카페 토벌에 라파예트 후작 특위로 핵폭탄 터트려놨는데 내일 휴일이라고 다들 정신줄 놓고 술 퍼마시고 있는 거야?
햐, 단두대 마렵다.
이러고서 국민의 혈세로 녹봉 받아먹고 싶지 진짜?
[아니, 일요일이래도···.]
입닥쳐, 막시밀리앙.
21세기 대한민국은 일개 회사원도 주말 출근하는데 18세기 프랑스는 주말이라고 조국의 안녕을 근심해야 할 국회의원들이 술집 여자 불러서 술 퍼마시고 놀고 있다니.
아, 프랑스의 앞날이 어둡구나.
혁명가란 놈들이 이렇게 타락했으니까 반동 당했지.
[···내가 보기엔 그 대한민국의 앞날이 더 어두워 보이네만.]
젠장, 팩트로 승부하다니.
막시밀리앙, 이 비겁한 놈.
정정당당하게 날조로 승부하지 못할까!
"우리 스파르타쿠스께선 도대체 혼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시는가?"
어느 틈엔가 내게 다가온 에베르가 상념을 깨웠다.
능글맞게 웃고 있는 게 아무래도 또 내 신경을 긁으려 왔나 본데, 조금 전에 가발 벗고 노래 부르던 모습 때문인지 오늘따라 조금도 불쾌하지 않다.
차라리 웃음 지뢰면 모를까.
미안하지만 그 가발 벗은 모습이 머릿속에서 사라질 때까지만 그 얼굴 좀 치워주라.
아니면 그 대충 뒤집어쓴 가발이라도 똑바로 정리하던가.
퍽!
옆에서 마라가 사람 패는 소리를 배경 삼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처럼 웃음꽃이 피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흐, 자네 덕분에 말인가?"
"그건 모르겠고, 최소한 자네 덕분은 아니라는 건 잘 알겠네."
그러니까 좀 저리 꺼져.
분명히 전했다고 생각했는데 에베르는 언제나처럼 싱글벙글 웃기만 할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로는 까딱도 없다, 이거겠지.
하기야 의회에서 대놓고 신성모독 하는 놈이니 살아오면서 듣지 못한 쌍욕이 어디 있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놈은 단두대로 끌려가는 와중에도 자기 할 말 다 하다가 죽을 거다.
[촉새 같은 놈일세.]
로베스피에르가 덧붙였다.
[마라가 투계라면 저놈은 입만 살았지, 음침하고 실속이라고는 없는 촉새지. 괜히 자네의 기억에 없는게 아닐세. 후세에 두고두고 기억될 가치도 없는 비겁한 놈이니까.]
아니, 암만 사적 원한이 앞선다지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건 좀.
하지만 틀린 비유 같지는 않다.
마라는 싸움닭이다.
옆에서 말리지 않는 이상 무조건 눈앞의 적을 향해 돌격하고, 설령 제가 다치더라도 마지막까지 적을 물어뜯고 할퀴다가 숨통이 끊어질 수탉.
그리고 이 맹목적이기까지 한 공격성엔 어떠한 정치적인 계산도 없다.
당장 날 두들겨 팬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살갑게 구는 것만 봐도 적에겐 한없이 냉혹한 반면 아군에겐 한없이 무른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명암이 극명한 부류라고 할까.
반면 에베르에겐 그런 맹목적인 공격성이 없다.
물론 어떻게 감히 저런 소리를 입에 담을 수 있냐고 충격받을만한 독설을 쏟아내긴 하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똑같은 독설을 날리더라도 날이 서 있는 마라와는 달리 에베르는 그냥 조롱하고 비꼴 뿐이다.
그러니까 다들 골치 아픈 독설꾼이라며 멀리할지언정 반드시 제거해야 할 맞수나 악인으로 보진 않는 거겠지.
마라의 독설은 제대로 받아치지 못하면 다음 순간 단두대로 끌려가겠지만, 에베르의 독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봐야 당장 손해 보는 건 없거든.
오히려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괜히 흥분해서 평소엔 안 할 실수를 남발하게 될 테니 다들 그냥 원래부터 좀 이상한 놈, 이라고 괜히 엮일 일을 만들지 않는 거다.
"···흠"
하지만 그게 과연 전부일까.
에베르라는 놈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내가 보기에 마라보단 에베르가 훨씬 위험한 놈이었다.
만약 남 비꼬는 재미로 사는 게 끝인 놈이라면 그냥 언론인을 하지 정치를 할리가 없거든.
하물며 이 시대에 공적인 자리에서 태연히 신성모독을 하면서 아직 숨이 붙어있다면 보통 놈은 아니다.
정직하고 알기 쉬운 마라의 대검과는 달리 이놈의 검은 잘 숨겨져 있다고 봐야겠지.
"그래서, 계산은 끝나셨는가?"
이번에도 마찬가지.
에베르가 능글거리며 또다시 내 성질을 살살 긁었다.
"고매하신 부르주아 아니시랄까 봐 이 천박한 필부와 담소라도 나누려면 잔머리가 필요하신 모양이지?"
"이봐. 선의로 하는 말인데, 동지들에게 좋은 소리 듣고 싶으면 먼저 그놈의 말투부터 고치게. 그 시비조만 고쳐도 다들 자네를 달리 볼 거야."
"어련들하실까. 다들 좋은 집안에서 고생이라곤 안 하고 호의호식하며 살아온 도련님들이시니 다들 이 시정잡배 놈의 말이 귀에 거슬리시겠지."
절레절레.
"하지만 사양하겠네. 차라리 자네들이 내 화법을 배우는 게 어떻겠나? 민중을 위한다는 분들이 기사 나으리 마냥 점잔빼는 꼴이 퍽 같잖아서 하는 말이야."
"···자네."
"말로는 다들 민중을 위한다고들 잘난체하지. 헌데 자네들이 도대체 민중에 대하여 뭘 아는가? 가난뱅이의 삶, 말투, 욕구. 무엇 하나 모르는 주제에 말로만 민중을 위한다느니, 혁명이라느니."
벌컥.
에베르가 와인으로 병나발을 불더니 덧붙였다.
"나 같은 가난뱅이 상퀼로트(Sans-culotte)로선 영 같잖아서 못 어울려주겠단 말이야."
···어, 나 갑자기 이 양반이 마음에 들려고 하는데.
[이봐.]
농담이다, 농담.
반쯤은 진담이긴 한데 혁명관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걸 담은 그릇이 저 모양이니 이미 글렀다.
지금만 해도 술 몇 병 들어갔다고 곧장 속내를 드러내고 있잖아.
부르주아 싫어하는 건 알겠는데 혼자서 전위당 따로 만들 거 아니면 가끔은 혁명적 부르주아지한테 내숭도 떨어줘야지.
[이봐!!!]
농담이다, 농담.
아님 말고.
"자네, 취했네."
내가 미처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어느새 나타난 당통이 나섰다.
같이 놀던 아줌마가 안 보이는데, 그사이에 벌써 한번 뛰고 오셨나?
뭐 그냥 돌려보낸 걸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하려면 취기가 가시고 난 다음으로 하게. 에베르, 자네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야."
"하, 부르주아지가 상퀼로트의 뭘 안다고."
"모르네. 하지만 자크 르네 에베르라는 사나이는 알고 있지."
당통이 에베르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그만두게."
"···우리 친구가 그리스 문학을 너무 많이 읽었군."
퉷.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에베르가 내 발치에 가래침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부르주아지답게 마음껏 잘난 채 해보시게. 이 가난뱅이는 이만 가볼 테니까."
그걸로 끝.
처음부터 끝까지 제 말만 늘어놓은 에베르는 시적시적 제자리로 돌아갔다.
새삼스레 왜 저 사람이 내 기억 속에 없었는지 짐작게 하는 시간이었다.
···뭐, 사람이 삐뚤어져서 그렇지, 오늘처럼 속내를 툭 터놓고 이야기하다 보면 오히려 나랑 가장 생각이 잘 맞을 것 갈긴 한데 말이지.
[앞으로도 내 몸을 계속 같이 쓸 생각이면 저놈을 도울 생각은 꿈에도 말게.]
우우, 집주인의 폭거다.
셋방에서 설탕도 안 먹고 사는 주제에 본인도 부르주아지랍시고 계급 배반은 못 하겠다 이거지?
에잉, 이래서 혁명적 부르주아지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는 건가?"
이번엔 당통이 상념을 깨웠다.
"모처럼 평온하다, 고 생각하고 있었지."
집주인과 혁명노선을 두고 다투고 있다고는 차마 답할 수 없어 둘러댔다.
"또 에베르에게 그랬던 것처럼 둘러대려 하는군."
"들켰나?"
"에베르라는 폭풍이 지나갔는데 도대체 어떻게 평온할 수 있단 말인가. 혼란 그 자체지."
껄껄껄.
당통이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보면 확실히 사람은 좋긴 한데, 내가 없는 동안 어떤 이야기가 나왔었는지 1도 안 말해준 것도 그렇고 그전부터 간간히 날아오는 견제구를 생각하면 도저히 좋게 생각해주기 어렵다.
사적으로 만나긴 좋은데 정치판에선 적은커녕 아군으로도 안 만났으면 좋겠는 인간상이라고 할까.
지금 에베르로부터 날 구해준 것도 뭔가 다른 속셈이 있어서 다가온 거다, 에 걸 수 있다.
한 백만 짐바브웨 달러 정도.
[엄청난 액수 아닌가!]
···어, 그게 말이죠.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한번 맞춰보겠네. 자네, 라파예트 후작을 생각하고 있었던 게로군?"
아니 어떻게 알았지-라고 놀라는 척할 필요는 없겠지.
상식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면 그야 당연히 있으나 없으나 한 루이 16세보단 칼날을 쥔 라파예트 후작이 신경 쓰이는 게 당연한 거니까.
"술맛 떨어지게 이 좋은 날에 꼭 일 이야기를 꺼내야겠나?"
홀짝.
긍정하는 대신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글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네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니군."
"내가 남들 웃고 떠들고 즐길 때 일 이야기나 할 만큼 꽉막힌 사람은 아닐 텐데."
[커흠.]
맞군.
"됐고. 어디 말해보시게. 뭐, 좋은 방안이라도 있나?"
직구.
내가 일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고 이미 딱 잘라냈는데도 앵겨붙는게 넉살 좋은 당통답지 않다.
다시 보니 얼굴에 취기도 전혀 안 보이고.
나야 술을 애초에 별로 안 좋아하니까 홀짝거리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지만 이놈은 분명 조금 전까지 술집 아줌마랑 좋은 시간 보내고 있었을 텐데 말이지.
설마 딴짓 하는 척하면서 내가 혼자 남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아니 잠깐, 그럼 맨정신으로 아줌마 속치마에 손 집어넣고 있었던겨?
"좋은 방안이라."
말해줘도 되나, 를 고민하기 이전에 당통이 답지 않게 저돌적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일단 오늘 낮에 있었던 일로 당통도 지금 주도권이 나한테 넘어갔다는걸 눈치챘을 거다.
심심할 때마다 툭툭 날라오던 견제구만 봐도 지금 이 정치동아리에서 그나마 가장 감각이 있는 게 얘거든.
그렇다면 하다못해 이인자 자리라도 챙기거나 나중에 트집을 잡으려고 일부러 앵기는건데.
[당통은 믿어도 되네.]
또 하나의 내가 단언했다.
[물론 평소 행실이야 흠잡을 구석 뿐이네만, 혁명정신만큼은 흠잡을 데 없는 사나이가 바로 당통일세. 그도 이번 일이 우리 모두에게 득이 될 거라는 걸 알 테니 당장 우리를 함정에 빠트리려 들지는 않을 거야.]
그, 당통을 단두대로 보내신 장본인께서 말씀하셔도 말이죠.
[내가?!]
"사병을 모으려고 하네."
아무튼 집주인님이 그렇다는데 뭐 어쩌겠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니 믿어드려야지.
당통이 놀랍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병을 모으겠다고?"
"혹은 자경단이나 의용군이라고 해도 괜찮겠군. 명칭은 상관없네. 우리만을 위한 무력이 필요해."
"자네, 꼭 기사 나리들 같은 발상을 하는군."
"그럼 지금 맨몸으로 천하의 라파예트 후작과 싸움을 걸 텐가?"
속이 뻔히 보이는 내숭을 떠는 당통을 노려보았다.
"군대가 필요하네. 시정잡배나 대충 선동해서 불러 모은 폭도가 아니라 잘 조련되고 충분히 보급받는 군대 말이야. 언제 어느 때건 우리를 위해 싸워줄 당군이 없다면 혁명에 내일은 없네."
"의회에서 이를 묵인하겠나?"
"묵인하게 만들어야지. 때마침 라파예트 후작이라는 핑곗거리가 생겼으니 인정받진 못해도 방해하진 않을걸세. 저들이 트집 잡지 않는 선에서 소수정예로 꽉꽉 채워야지."
여기까지 말하면 당통이라면 어련히 알아들었을 거다.
마키아벨리의 시민군 예찬도 그렇고 이미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공화주의자들에게 시민군과 공화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거든.
시민군 전통이 무너져서 로마 공화정이 무너졌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그렇다면 이번 일도 자네가 진행해보겠다는 건가?"
그러니까 이건 뻔히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면서도 괜히 떠보는 거라고 봐야겠지.
"지금 내게 군권까지 넘겨주겠다고?"
아예 종신독재관으로 추대하지 그러냐.
비꼬듯 대꾸하니 당통은 더는 아무 말도 안하고 혼자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좋게도 나쁘게도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동아리 활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