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야붕
으윽.
[? 왜 그러나?]
아니, 그냥 괜히 소름이 쫙 돋아서.
집주인 놈은 못 느낀 거 보면 딱히 추운 건 아닌 것 같은데, 지금은 있지도 않은 내 척수를 타고 소름이 쫙 돋았다.
이것이 진짜 영감(靈感)?
[그렇다면 조만간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모양이군.]
아마도.
사실 내가 유물론을 믿었으면 믿었지, 오컬트 같은 걸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미 오컬트 그 자체에 휘말려 든 이상 영감을 무시할 순 없다.
나라는 이레귤러가 존재함으로써 이미 이 세상에 영혼이 있다는 게 증명되어버렸는데 영감이 없을까.
뭔가 일어났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가 의도하지 않은 이유로 말이지.
그렇지만 당장은 짚이는 구석이 전혀 없는데.
흠, 혹시 나보 놈인가?
"그럼 개회를 선언하겠습니다."
뭐,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니까 일단 신경꺼두자.
너무 긴장이 풀려서 좋은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 혼자서 매번 전전긍긍해봐야 내 명줄만 짧아진다는 말이지.
어차피 당장은 나보보단 저 눈앞의 승냥이들이 더 실질적인 호적수이기도 하고.
벌떡.
"지금 당장 라파예트를 탄핵하고 루이 카페를 토벌하기 위한 의용군을 소집합시다."
···아, 물론 우리 집 승냥이들도 말이다.
저저 마라 이 미친 놈 개회하자 말자 상의도 없이 냅다 혼자 반자이 돌격 박는 거 보소.
어휴, 저걸 누가 말려.
"마라 의원, 진정해주십시오."
"진정? 아뇨, 제정신이라면 당신들이 차려야지요. 이 이상의 논의는 불필요합니다. 이미 지난번 회기 때 다들 들었잖습니까? 루이 카페는 의회의 권위를 욕보였고, 라파예트는 의회를 속이려고 들었습니다."
마라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내 쪽을 한번 흘끗 쳐다보았다.
입에 피 칠갑을 한 채 주인님께 칭찬해달라고 헉헉대는 맹견이 연상되면 기분 탓일까.
어, 음. 마음은 참 고맙기는 한데 괜히 엮이고 싶지 않으니까 저리 가주실래요?
"그럼 도대체 다들 뭘 망설이고 계신 겁니까? 한시가 급한 일입니다. 이미 주일을 통째로 허비했으니 지금쯤 근왕군이 트루아에 도착해 소집령을 내리고도 남았겠군요."
"억측이 너무 심하군요. 평생 군대 근처에도 가본적 없는 샌님 주제에 왜 그렇게 내전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리고 댁은 루이 그 덜떨어진 놈과 오스트리아 갈보년에게 매수된 왕당파겠지."
···이제 보니 독설 강도로는 마라도 만만치 않았구만.
오늘은 시작부터 완전히 마라의 독무대다.
한 세트처럼 붙어 다녔던 에베르도 오늘만큼은 조용히 팔짱을 끼고 있는 게 옆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거들었다간 진짜로 내전이라는걸 다들 눈치챈 거겠지.
그 누구도 전쟁영웅 라파예트 후작이 이끄는 국민위병에 맞서 총대를 메고 싶진 않을 것이고 말이야.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내가 짜놓은 판이 맞긴 한데 여기선 저쪽에서 수습할 때까지 기다려줘야지 내가 마라에 가세하면 진짜로 의회군 소집해야할 판이고 거꾸로 내가 마라를 말리려 들었다간 처음부터 싸울 마음도 없었으면서 괜히 쇼했다는 소리나 들을 거다.
그러니까 여기선 미친개 마라가 폭주하는 동안 우익진영의 활약을 기대해야 할 국면인데.
"···흠."
우리의 오를레앙공이 개회 이래로 꿈쩍도 안하고 있다.
딱히 자포자기했다거나 벌써 말문이 막힌 건 아닌 것 같은데, 저 양반 좌우로 나란히 앉은 측근들이 한두 마디씩 보태고 있지 본인은 요지부동이다.
이 로베스피에르가 직접 나서면 모를까 마라 정도로는 급수가 안 맞는다, 이건가?
[요 며칠 호되게 당하다니 아무래도 뭔가 깨달음이 있었나 보군.]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아니면 지금 이게 방심이나 미혹이 없는 본래 모습이고 지금까지의 추태는 애송이라고 얕봐서, 혹은 왕위가 당장 눈앞에 어른거리는 바람에 생긴 기복이었는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건 마라가 시작부터 돌격해서 지난주의 나처럼 마구 물어뜯고 폭주 중인데 저쪽에서 꿈쩍도 안하고 있다면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니다.
슬슬 저쪽에서도 어느 정도 대응매뉴얼이 만들어졌다는 소리거든.
앞으로 청와대 다이브할 때는 좀 더 각을 잘 보고 덤벼들어야겠다.
"그럼 마라 의원, 당신이 직접 의회군을 지휘하는 것 어떻습니까."
지금만 해도 그렇다.
분명 오를레앙공이 직접 나선 것도 아닌데 저 양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온통 시선이 쏠리는 거 봐선 우익인사 중에선 제법 거물급 인사인가 본데.
저 양반이 카미유가 말했던 브리소인가?
[아쉽지만, 틀렸네. 저건 콩도르세 후작일세. 위대한 수학자이자 우리 프랑스의 헌법 초안을 작성한 위인이지.]
그리고 졸렬한 반혁명 부르주아지고?
[반교권주의자야. 교황청과 원수진 인사야 한둘이 아니라지만 저 인간처럼 교회를 세속에서 아예 지워버리려 드는 급진파가 몇이나 될는지. 온건파라면 온건파지만 어떤 의미에선 나나 당통보다 더한 인물일세.]
···젠장, 뭐가 이렇게 복잡해.
아니 그보다 좌익 자코뱅 로베스피에르가 주일미사 나가는데 우익측 거두가 반종교라는 게 지금 말이냐?
암만 봐도 좌우가 뒤집힌거 아니야?
"정 그렇게 남을 죽이고 싶다면 마라, 당신이 가장 먼저 죽으십시오. 그렇게 전쟁하고 싶다면 당연히 그에 앞서 당신이 가장 위험한 자리에 나서야지요."
"콩도르세, 당신 지금 라파예트를 감싸려는 겁니까?"
"못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적어도 그가 마라, 당신보단 이 프랑스를 위해 보다 애국적인 위업들을 쌓아 올려 왔을 텐데요."
오우야.
우익 급진파 이름값 톡톡히 하네.
콩도르세 후작이 나서기가 무섭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던 마라가 도통 맥을 못 춘다.
탐난다.
자네, 기왕 반교권투쟁 하는 김에 변증법적 유물론 파볼 생각 없나?
"애당초 라파예트 후작이 진정 의회를 속이려 했는지도 의문입니다."
콩도르세 후작이 내 쪽을 흘긋 노려보았다.
"국왕이 파리를 버린 것이 밝혀진 건 6월 21일 오전이었습니다. 라파예트 후작이 국왕 부부를 체포한 건 그 이튿날 새벽이었지요. 의회에 보고서가 도착한 건 정오에 가까운 시각이었고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번엔 콩도르세가 마라를 노려보았다.
"착각이 생기고도 남을 촉박한 시간이지요. 물론 의회에 바칠 보고서에 아직 불확실한 사견을 넣은 게 잘한 일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라파예트 후작 같은 국민적인 영웅을 반역자로 몰아도 될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자, 여기가 내가 나서야 할 국면이다.
"지금-."
"그렇다면 먼저 라파예트 후작이 고의로 보고서를 조작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제시해주십시오."
벌떡.
흠씬 두들겨 맞은 마라가 괜히 말실수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나섰다.
울상인 거 보면 잘못한 건 알고 있나 보지?
우쭈쭈, 잘했다 우리 치와와.
이제 그만 몬●터볼에서 푹 쉬렴.
"다름 아닌 오스트리아입니다. 기껏해야 해적질 밖에 할 줄 모르는 잉글랜드 따위가 아니란 말입니다. 일군의 총사령관쯤 되는 사람이 고작 착각만으로 대국 오스트리아와 전쟁 위기를 자초한다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두 아시다시피 폐주 루이 카페의 비는 합스부르크 사람이지요. 밤새도록 국왕 부부를 추격했을 라파예트 후작이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결국 그건 가정이잖습니까. 지금 여기가 무슨 토론 학습장도 아니고. 계속 만약의 가정만 더하실 겁니까?"
흠.
제법 아픈 구석을 찔렀다고 생각하는데도 저쪽에서 별로 놀라지 않는 거 보면 처음부터 날 끌어내려고 친 덫이겠군.
이정도야 별로 간지럽지도 않으니 일단 걸려주기로 하자.
"그럼 저도 이참에 절 라파예트 후작이라고 가정해보기로 하지요. 자, 어떻습니까. 왜 신성한 의회에 그런 조작된 보고서를 올렸는지 이 라파예트가 존경하는 의원님들 앞에서 속 시원하게 답해드릴까요?"
내 조롱에 발맞춰 곳곳에서 킥킥대며 비웃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물론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좌익진영으로부터의 원호 사격이다.
내가 지난번 회기 때 지적한 건 팩트지만 당신이 지금 지껄인 건 억측이고 소설이다 이거지.
"···이놈."
공공연히 조롱받은 걸 눈치챈 콩도르세 후작이 얼굴을 붉혔지만, 이번에도 본격적인 공격은 없었다.
털썩.
오히려 지금 여기서 물러나면 이 로베스피에르한테 패배했다는 인상을 줄 거라는 걸 모를 리가 없는데도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그냥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다들 어지간히도 사리고 있구만.
지난 회기 때 보여준 여의도 굴다리가 그렇게 무서웠나?
아무튼 저쪽에서 순순히 패배를 인정한 이상 내가 더 나가봤자 괜한 원한만 살 뿐이겠지.
자칫하면 마라처럼 네가 총대 메고 의회군 소집하라고 덤벼들 수도 있고.
벌떡.
"그렇다면 이렇게 합시다."
이어서 내가 주저앉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당통이 나섰다.
"루이 카페에 대한 처분은 우선 뒤로 미루고, 먼저 라파예트 후작에게 의회에 출두할 것을 권고합시다."
"그 긍지 높은 군인이 권고를 따르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때야말로 반역자로 선언하면 됩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서 궐석재판을 열어봤자 결국 공허하기만 할 따름이지요. 하물며 피고인에게 항변할 기회도 주지 않고서 반역자로 몰다니요."
절레절레.
"만일 이번 일이 선례로 남게 된다면 장차 그 누가 우리 프랑스에 법치가 바로 섰다고 하겠습니까. 청문회를 열어서 먼저 그의 변론을 들어봅시다. 우리 모두가 듣기에 합당하게 들린다면 그걸로 끝인 거고, 바로잡아야 할 잘못이 있다면 법에 나와 있는 대로 징계를 내리면 되는 거죠."
어떻습니까?
당통이 좌중의 면면을 하나하나 살피며 넉살 좋은 미소를 떠올렸다.
흠, 얼핏 보기에도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타협안이다.
우리 집주인님이 주일미사에서 썸녀랑 썸타는 동안 저쪽도 나름 바쁘게 준비하고 있었구만.
[지, 지금 그 소리가 갑자기 왜 나오는가!]
하지만 사실이죠?
분명 나쁘지 않긴 한데, 우익진영의 반응이 묘하다.
"훌륭한 방안입니다."
"만약 라파예트 후작이 흑심을 품고 있다면 차라리 이참에 궐기할 테지요."
"다른 대안이 없다면 당통 의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가는게 차선일 듯합니다."
···이 새끼들 암만 봐도 너무 노골적으로 짜고 치고 있잖아.
물론 결과만 놓고 보자면 내 의회군 소집이나 내전보단 훨씬 건전하고 이성적인 전개긴 한데, 저놈들 지금 이면합의 있었던 거 숨길 생각은 있나?
여기 이야기 꺼낸 당사자도 모르는 사이에 이쪽 파벌 영수랑 저쪽 파벌 영수랑 쿨거래하고 끝내는 게 진짜 맞아?
[이게 당통의 방식일세.]
머릿속의 로베스피에르가 쓰게 웃었다.
[우리가 마음 가는 대로 사고치고 폭언을 마구 쏟아내고 나면 회기가 끝나고 난 다음 당통이 저들과 담판을 지어서 개중에서 그나마 건질만한 걸 양보받아오는, 뭐 그런 전략이었지. ···이번에는 좀 비겁하게 보이겠지만 말이야.]
비겁하게 보이는 게 아니라 완전히 비겁 그 자체인데요.
이거 완전히 뒤통수 맞은 거잖아.
갑자기 적의가 팍팍 샘솟는다.
이 이상 호감 갈 일 만들지 않으려고 당군까지 믿고 맡겨놨더니 진짜 이러기야?
괜히 초장부터 영감이 반응한 게 아니었구만?
싱긋.
나와 눈이 마주친 당통이 언제나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나도 눈을 피하는 대신 빙그레 미소 지었다.
오냐, 이 호색한 짱구 놈아.
어디 누가 이 동아리 오야붕인지 자웅을 가려보자.
***
트루아.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의회 놈들이 일선을 막 넘나드는군요."
홍당무처럼 붉게 물든 부관이 이를 악물었다.
"지금 당장 파리로 출두하라니. 반역이라면 루이 카페가 했지, 각하 같은 애국자에게 죄를 묻겠다니요. 이런 가당치도 않은 촌극에 어울려주실 거 없습니다. 그냥 무시해버리시지요."
"그럼 그때야말로 난 진짜 반역자가 되는걸세."
라파예트 후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세히 읽어보게. 저들은 지금 내게 해명을 요구하고 있는 거지 당장 죄를 추궁하겠다는 게 아니야."
"결국 말장난이잖습니까!"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말장난에 속아주지 않으면 그때야말로 합법적으로 저들에게 라파예트의 죄를 추궁할 명분이 주어진다.
그의 참모진들도 귀족이니만큼 고작 이정도도 유추하지 못할 리 없었다.
"큭···!"
결국 부관이 분하다는 듯이 아랫입술을 깨무는 동안 라파예트는 요 며칠 사이 오간 밀담을 떠올렸다.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절차라고 했었지.'
오를레앙공 한 사람이면 모를까, 평소에 그와 알고 지내던 의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그를 위로하며 안심시키려 드는 것 보면 아마 거짓말은 아닐 거다.
당장에 저들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겠지만 그들 사이에 무언가 오해가 있었고, 그 오해를 풀기 위한 최후의 기회가 주어진 게 맞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문득 그들 모두가 이번 사건의 진정한 흑막으로 지목한 젊은 급진파 의원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잘 연상되지는 않았다.
애당초 그리 기억에 남는 거물급 인사가 아니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루이 카페가 파리를 등지고 도망치지만 않았더라면, 그리고 라파예트가 그를 쫓느라 잠시 파리를 떠나지 않았다면 아마 앞으로도 한평생 그렇게 지낼 만큼 그들 사이엔 까마득한 격차가 있었다.
이미 혁명 이전부터 프랑스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름을 알고 지냈던 위대한 전쟁영웅이자 아리따운 아내와 자식들을 둔 성공한 인생의 라파예트.
반면 혁명 뒤에나 출셋길에 올라 프랑스 국민의 기억 속에 남을만한 공을 세운 적도, 이름을 알린 적도 없는 가난하고 땅딸막한 노총각 로베스피에르.
"···쯧."
그런 추레한 사나이가 절 함정에 빠트린 맞수라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고 믿어지지도 않았다.
차라리 그간 믿어왔던 것처럼 오를레앙공의 음모라는 게 훨씬 신빙성 있게 느껴질 지경.
아마 의회에서 그의 분노를 피하려고 보잘것없는 노총각 의원을 제물로 바친 거 아닐까.
그래, 그게 맞을 거다.
멋모르고 일을 키우긴 했는데 수습할 엄두가 안 나니 총대 메고 나선 애송이를 꼬리 자르기 한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새삼 그 로베스피에르라는 청년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딴에는 출세를 꿈꾸고 옆에서 부추기는 대로 나섰을 텐데 산 제물이 되고 말다니.
'하지만 어쩌겠나. 자네의 객기를 탓해야지.'
자그마치 반역죄다.
제아무리 라파예트가 긍지 높고 명예로운 군인이라도 일단 여기까지 몰린 이상 본보기를 보여주지 않으면 앞으로 두고두고 그를 깔보려 들 터.
군인이기 이전에 정치인인 라파예트로선 어떻게든 이번 사건으로 깎인 명예와 권위를 다시 세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저희와 함께 상경하시지요."
고로 부관의 제의에 라파예트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저 어서 계속하라는 듯이 따뜻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봐줬을 뿐.
"어차피 파리로 상경하고 나면 전우들과 합류하게 될 겁니다. 지금 의회를 지키고 있는 경비대들이 온통 각하의 사람들인데 저놈들이 대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무력 시위를 하자는 건가?"
"뭐. 저놈들에게 흑심이 있다면 그렇게도 보이겠지요. 하지만 각하께서는 우리 국민위병의 총사령관이십니다. 반역자 루이 카페를 붙잡아 개선하는 개선장군이 시민들에게 환영받진 못할망정 맨몸으로 상경한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그래, 그 말대로다.
그는 개선장군이다.
천하의 라파예트다.
결국 누가 진짜 흑막인지, 무슨 꿍꿍이로 그를 함정에 빠트렸는지야 아직 몰라도 이 전쟁영웅을 우습게 본 저 하룻강아지들에게 한 번쯤 본때를 보여줘야지 않겠는가.
"내 직권으로 장병들에게 포상 휴가를 내리겠네."
결심을 굳힌 라파예트가 참모들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자네들도 잠시 고향이나 다녀오는 게 어떻겠는가. 노모께서 근심하고 계실걸세."
"아유, 휴가라면야 언제나 환영이지요."
그의 참모들이 너스레를 떨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 국민위병은 본디 라파예트 후작이 이끌던 민병대.
파리에서 줄곧 활동해온 라파예트의 친위대가 가야 할 고향은 당연히 파리다.
마침내 주사위가 주군의 수중에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