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54)

붉은 사제

어휴.

"영-지루하구만."

[평화롭다고 할 수는 없겠나?]

내가 한창 주도권을 잡고 승승장구하는 와중에 찾아온 평화라면 그랬겠지.

그만큼 내 주도권이 굳어지고 사람들의 인식도 굳어지는 와중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물론 당통과 좌익 영수를 두고 경쟁하는 사이가 되었으니까 가난뱅이 노총각 로베스피에르 시절보다는 훨씬 진일보하기는 했는데, 우익 영수 오를레앙공을 거의 잡을 뻔했던 시절과 비교하면 명백한 쇠퇴고 퇴보란 말이지.

그렇다면 지금 같은 평화는 전-혀 긍정적인 상황이 아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 잡아먹는 늪에 빠진 꼴이니까.

결국 내 주특기인 여의도 굴다리를 보여주려면 어떻게든 좌우가 극명히 대립하면서 치고받고 싸워야 하는데, 요 며칠 사이 의회는 도통 그럴 기색이 안 보인다.

일부러 내가 활약할 여지 자체를 안 주려고 다들 끔찍하게 몸을 사리고 있는 느낌.

정말 누가 봐도 당통이 왕당파와 내통해서 자꾸 같은 편을 견제하는 구도인데-.

[아무도 당통을 의심하지 못하고 있지.]

그래, 이게 문제다.

아니 왜 난 고작 전시 수상 추대했다고 오를레앙공이 심어놓은 첩자 소리까지 들었는데 대놓고 붙어먹는 당통은 면역인가, 불만이긴 한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결국 간단한 순서 맞추기였다.

만약 내가 오를레앙공이 심어놓은 첩자라는 낭설이 먼저 돌지 않았다면 지금쯤 파리에선 당통이 사실 왕당파의 첩자였다는 소문이 돌고 있을 거다.

하지만 내가 첩자라는 헛소문이 돌고 난 다음이라면?

당통까지 첩자라고 덧붙여봤자 아무도 믿지 않겠지.

그냥 급진공화파 자체가 오를레앙공이 만든 허깨비고 꼭두각시라는 소리니까.

결국 원래 당내 온건파이긴 해도 요즈음 들어서 너무 온건하게 군다는 불평까진 나올 수 있어도 의심의 화살이 당통에게까진 날아가진 않는다.

[아마 저쪽에선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설계했다고 봐야겠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꼼짝없이 당한거다.

처음부터 당통을 보호해줄 작정으로 날 이용했다는 소리니까.

물론 언젠가는 약발이 떨어지면서 당통에게까지 의심의 화살이 날아가기 시작하겠지만, 그때쯤이면 이미 청문회고 뭐고 끝나고 난 다음이겠지.

화려함은 없지만 제 사회적 영향력을 이용한 정직하고 무거운 한 수다.

결국 당통도 저놈들도 날 직접 공격하는 게 아니라 그냥 국회의원으로서 자기 할 일에 충실한 것뿐이니 지금 내가 못 참고 섣불리 선수를 쳤다간 미리 덫을 깔아놓고 기다리고 있는 저놈들에게 여의도 굴다리로 끌려들어 갈 거다.

어떻게든 이 일방적인 교착 구도를 타개할 수 없다면 조만간 당통의 경쟁자도 모자라 좌익진영 이인자로 추락할 터.

[흠, 그 정도인가?]

그 정도고 말고.

지금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에게는 본인만의 세력이나 사람이라고 할만한 게 없다.

카미유가 있기는 한데 그 양반은 사람이 너무 좋아서 당통이냐 나냐고 하면 그냥 사이좋게 지내라고 덕담 건넬 사람이지 날 위해 싸워줄 인간상은 아니야.

현 좌익진영을 나와 당통이 각각 급진파와 온건파로 나누어 가진다면 그나마 마라와 에베르가 내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이것도 그냥 파벌 다툼할 때나 의미 있지 내 개인을 위한 충신은 아니다.

반면 당통은 다르지.

사람을 모으는데 필요한 매력, 부, 권세 모든 걸 갖춘 완전체니까.

매력과 권세라면 여기 집주인님도 슬슬 만만치 않게 따라가긴 했는데, 결국 그놈의 가난뱅이가 발목을 잡는다.

서민보다 못한 가난뱅이 부르주아지라니, 이게 말이야 방귀야.

[지금 날더러 축재를 권하고 있는 건가?]

그야 당연하지.

돈 안 버는 부르주아지라니 그거 완전 직무유기 아닌가?

[아니, 이제와서 축재에 열을 올리는 것이야말로 날 믿어준 유권자를 향한 배신이지.]

갑자기 흥분한 또 하나의 내가 언성을 드높였다.

[그래, 물론 정치자금이 많으면 많을수록 승승장구하기도 쉬워지겠지. 그걸 부정하지는 않겠네. 하지만 내가 개인적인 사업을 한다면 지금처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은가? 천만에.] 

결국 잃을게 많아질수록 몸을 사리게 되는 법이니까.

또 사업적인 거래를 빙자한 개인적인 청탁도 그만큼 늘어날 테고.

[당장 당통이 그렇잖은가. 난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을 위하여 이 자리에 서 있고, 민중은 그런 나를 믿었기에 날 지금 이 자리에 그들의 대전사로 내세웠네. 그렇다면 나의 청렴결백함이야말로 제일가는 무기고 유권자를 위한 공약이지. 

당통에겐 당통의 길이 있고, 내겐 나의 길이 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 시대에 그 나이 되도록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사셨나?

괜히 약점 만들지 않으려고?

[커흠.]

뭐, 농담이다.

사실상 정치자금 없이 정치하는 지독한 패널티 플레이긴 한데 괜히 떡을 주무르다 보면 손에 콩고물이 묻기 마련이라고 변명하는 추잡한 놈보단 훨씬 낫지.

오히려 이쪽이 가진 게 없으니 나중에 가서 가진 놈들에게 양보하라고 할 때 더 떳떳해진다는 장점도 있을 거다.

가령 토지개혁이라던가.

[지금 신성한 사유재산에 손을 대겠다고?]

···아니 이 양반이 반동 부르주아지 아니랄까 봐 토지개혁도 싫다네.

아니 이보쇼, 고무신 선거라고 못 들어봤어?

일단 뭐라도 사람들한테 떡을 돌려야 지지세가 늘지 청렴결백하기만 하면 끝이야?

[내가 언제 부의 재분배를 금하라고 했나? 사유재산에 손대서는 안 된다고 했지! 차라리 부자에게 세금을 더 내게 하면 했지 신성한 사유재산을 압류한다니 그 무슨···!]

네, 네. 

그럼 정부에서 돈 주고 사서 농업 협동조합 만드시던가요.

거참 막무가내일세.

설마 당신이 생각하는 민중이 파리 시민 뿐인 건 아니겠지?

그놈의 사유재산 때문에 토지개혁도 싫다면 지역유지랑 교단 조지면서 무슨 농민들에게 지지를 받겠다는 거야.

하기야 이러니까 방데로도 민심 수습 못해서 반동 당하고 단두대 컷 당했지.

[듣자 듣자 하니까 자네 정말···!]

"자크 루이올시다."

덥석.

카미유가 낸 모집공고를 보고 셋방까지 찾아왔다는 사나이가 내 상념을 깨웠다.

"보이는 대로 신부 나부랭이요. 뭐, 주님이 이 어린양의 행실을 과연 예뻐하실지는 나도 잘 모르겠소만. 아무튼 그렇소."

"잘 오셨소, 동지."

할렐루야.

땡잡았다.

내가 비록 이 양반의 사상이나 인생에 대해서 작정하고 공부해본 적은 없지만 뭐하던 양반인지만큼은 잘 알고 있다.

별칭, 붉은 사제.

원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의 선구자.

가격상한제를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또 몸소 분노한 민중을 선동해서 부자들을 습격해 부의 재분배(물리)를 실천하셨던 위인이다.

아, 덧붙여서 역사상 최초의 페미니스트이기도 하고.

바뵈프 앞에서는 한 수 물러줘야겠지만 이 양반도 앞으로 장장 2세기에 걸쳐 계속될 유구한 투쟁의 최선봉에서 반동과 맞서 싸우다가 독재자 로베스피에르에게 목이 잘린 사람이다.

[흠, 미래의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는 참 잘했군.]

아이고, 어련하시겠어요.

반동 부르주아지 놈이 다 그렇지 뭐.

"그런데 기사에 적어둔 소집일은 분명 며칠 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머릿속의 좌우 분쟁을 한쪽으로 미뤄두고 뻔뻔스레 되묻자니 자크루 동지 왈.

"당신이 뭘 하려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덜컥 내 이름을 올리겠소? 그래도 꼴에 주님을 섬기는 몸이니 오늘은 내가 당신을 위해 성사라도 한번 봐 드릴까, 하여 왔소."

"···오호라."

이건 거꾸로 내 면접을 보겠다 이거지?

크, 이거지.

이 쥐뿔도 없는 주제에 세도가 앞에서 조금도 꿇리지 않는 뻔뻔함.

난 하늘을 우러러 아무것도 부끄러운 게 없다는 떳떳함.

그래, 이런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이제야 좀 내가 혁명하고 있다는 실감이 드네.

[빨갱이들끼리 모이더니 아주 신났군.]

입 닥쳐, 막시밀리앙.

"먼저 이것부터 여쭙겠소."

끼익.

집주인 허락도 없이 낡은 의자에 걸터앉은 자크 루 동지가 입을 열었다.

"그 당신이 만들겠다는 정당, 이름이 어떻게 되오?"

···어, 잠깐. 

생각해보니 이름도 안정해놨나?

흠, 그런데 뭐 이름이야 당연히-.

"인미-."

[자네 진짜로 나랑 한번 해볼 텐가?]

"···급진당 정도로 생각해두고 있었습니다만."

우우, 더럽다.

집주인의 횡포다.

인민의 적, 반동 부르주아지는 각성하라.

우우.

"급진당이라."

자크 루 동지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최소한 쉽게 쉽게 가지는 않겠다는 말씀이시군."

···그, 고작 급진당으로 만족하시다니 너무 기준이 널널한거 아닙니까?

하기야 이 사람도 기껏해야 해방신학일 테니까 유물론자의 관점에서 너무 많은 걸 기대하면 안 되겠지만.

모처럼 동류를 만났다는 생각에 한껏 끓어올랐던 기분이 짜게 식었다.

"뭐, 그렇지요. 이제 와 쉽게 갈 생각은 없습니다. 이미 소문을 들으셨겠지만, 루이 카페와 라파예트로 끝장을 달린 몸입니다. 제가 뒤늦게 당통처럼 온건하게 굴어봤자 누가 절 용서하겠습니까?"

"오히려 이 기회에 눈엣가시 같은 놈을 끌어내리려 들겠지."

"예, 그렇습니다. 사나이 대장부가 기왕에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썰어야지요. 그래서 어디쯤이 제 무덤이 될지야 지금은 그야말로 주님만 알고 계시겠지만, 가급적 도착지에 가깝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애꿎은 무는 왜?]

뭐, 꼬레에 그런 속담이 있어요.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이것 한 가지만 여쭙겠소."

아무튼 내 설명을 들은 자크 루 동지가 한참을 말없이 턱을 쓰다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의원님께서는 장차 누구로 기억되고자 하시오? 키케로? 페리클레스? 그도 아니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하나하나 쟁쟁한 인물만 고르셨군.

[우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함정지문일세.]

그래, 그렇겠지.

나조차 이름을 알고 있는 로마 제국의 오현제고 여느 혁명가들처럼 기독교를 박해한 성군이지만 결국 황제다.

공화정의 정치가인 다른 둘과는 아예 결이 다르단 말이지.

그럼 공화국을 위해 카이사르와 싸운 키케로와 대 페르시아 제국에 맞서서 아테네 민주정을 훌륭히 이끈 페리클레스 중 고르란 말인데.

"가이우스 그라쿠스."

둘 다 싫다.

키케로는 후대에 공화주의의 성자로 물고 빨리지만 결국 부자와 지주만을 위한 원로원 과두독재를 옹호하기 위해 온갖 치졸한 수를 법치라 포장한 개자식이고 페리클레스는 군사 지도자로서 민주정을 통치한 인물이다.

그나마 개인적인 호불호를 따지자면 후자가 낫긴 한데, 그래도 싫은 건 싫다.

"바라건대 전 장차 이 프랑스의 가이우스 그라쿠스로서 기억되고 싶습니다."

그라쿠스 형제의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분명 민중을 위해 싸운 의로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영리함은 부족했지.

그 때문에 현직 호민관이 백주대낮에 지지자들과 함께 학살당했는데도 아무도 복수해주지 않았다.

반면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젊은 나이에 그런 형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격하고도 곧장 원로원과 적대하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충분히 세를 모으고, 기득권과 대립하면서도 때로는 타협의 여지가 남아있는 듯 가장함으로써 더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결과 형님 그라쿠스는 현직 호민관으로 재적하는 와중에 살해당했지만, 동생 그라쿠스는 원로원에서 치졸한 수로 그를 낙선 시킨 다음에야 그와 그의 지지자들을 학살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라쿠스 형제 두 사람 중 꼭 한 사람만 꼽아야 한다면 난 단언컨대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야말로 진정 후세의 반골들이 본받아 마땅한 민중 정치가였다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존경하는 인물은 구태여 물어볼 것도 없겠군."

씨익.

그제야 자크 루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을 마주 잡았다.

덥석.

"내가 당신의 티베리우스가 되어드리리다. 급진당에 온 걸 환영하오."

"어허, 이 신부님이. 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형님 행세이십니까?"

물론 농담이었다.

자크 루가 내게 먼저 고개를 숙이고, 다시 내가 그를 일으켜 세움으로써 의기투합한 우리 두 사람은 그날 밤새도록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았다.

장차 혁명은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 급진당이 어디까지 급진적으로 가야 할지에 대하여 말이다.

[이 빨갱이 놈들이 또.]

입 닥쳐, 막시밀리앙.

***

이튿날.

"아흐, 싫다."

기껏 자크 루 동지와 의기투합해서 밤새도록 앞으로의 청사진을 짜고서 일어나 한다는 일이 또 의회에 나가서 구색 갖추기라니.

확 그냥 자크 루 동지랑 함께 무장봉기 선동해서 의회로 닥돌해버려?

[이봐.]

농담이다 농담.

아니면 말고.

정말로 수틀리면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어차피 요격당할 게 뻔하고 또 설령 의회를 점거해봐야 실제로 통치할 역량이 아직 없단 말이지.

괜히 싸움에선 이겨놓고 실정으로 내쫓기고 싶지 않다면 지금은 그런 모험주의일랑 고이 접어두는 게 맞다.

[도대체 어떻게 그 살기 좋은 나라에서 이런 빨갱이 놈이 튀어나온 건지 참···.]

글쎄, 당신도 직접 살아보면 또 생각이 달라질걸.

꼴에 부르주아지라서 무히려 좋아하려나?

아무튼 남들 눈에 안 보이게 몰래 하품 쩍쩍해가며 출근했더니-웬걸.

"라파예트가 병사들과 함께 파리로 상경하고 있다고?!"

모처럼 의회는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요!"

"그, 뭔가 오해가 있는 것 아닙니까? 고작해야 청문회잖습니까!"

"아니 그보다 잠깐, 폐주 루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요? 설마하니 국왕과 함께 상경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이건 반역이오! 우리 의회와 파리를 향한 도전이라고! 라파예트 이 사람이, 좋게 좋게 넘어가려고 했더니만!"

···흠, 잘은 모르겠지만 군침이 싹 도는걸?

일단 좌우를 막론하고 기겁하고 있는 걸 보아하니 내게 썩 나쁜 전개는 아니다.

오히려 하늘이 도왔다고 봐야겠지.

지금처럼 저것들이 당황할수록 내가 파고들 틈도 그만큼 늘어나니까.

아아, 이 서늘하고 묵직한 감각.

일주일만인가?

"모두 진정하십시오. 국왕 부부는 아직 트루아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때가 아니다.

일단 지난번 일로 경계도가 MAX를 찍은 내가 나서면 저것들이 라파예트고 뭐고 나부터 담그려 들 거거든.

당장은 팔짱 끼고 열심히 듣고나 있자.

이렇게 대강 머릿속을 정리하고 나니 언제나처럼 상석의 볼품없는 아저씨가 이쪽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라파예트 후작이 보낸 보고서에 따르자면 그가 대동한 병사들은 모두 휴가차 파리로 복귀하는 장병들이라고 했습니다. 장차 청문회에 참여할 건 예정된 대로 오직 그 한 사람뿐이고, 저들은 우연히 행선지가 겹쳤을 뿐이라고-."

"개소리 집어치워. 무슨 휴가를 나간다는 거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의 치와와 마라가 불같이 튀어 나갔다.

우쭈쭈. 잘한다.

"파리 시민들이 그렇게 우습소? 아니면 우리 의원들이 우습나? 저걸 통과시켜주면 또 구경꾼이랍시고 청문회까지 병사들을 끌고 올 작정인 게 뻔하잖아!"

"마라 의원, 발언권을 먼저 획득하고서-."

"씨발. 다 집어치워! 이 병신들아, 아직도 모르겠어? 저 개자식이 지금 우리 의회를 치러 군대를 끌고 왔잖아!"

씩씩.

"지금 당장 의회군을 소집해야 하오. 저놈들이 센강을 넘는 순간 우리 모두 끝장이오, 끝장. 아시겠소? 이제 진짜로 전쟁이라고!"

전쟁.

다들 그 무게감에 짓눌려 무심코 숨을 삼켰다.

그토록 두려워하고, 피하려 했던 동포끼리의 내전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문득, 좌중의 시선이 지난날 의회군 총사령관이자 전시 수상으로 추대받았던 오를레앙공에게 향했다.

"어, 어허! 말이 너무 지나치구려! 이 신성한 의회에 그런 시정잡배나 쓸 욕지거리라니! 험험."

물론 오를레앙공은 그 의미를 뻔히 알면서도 말을 돌렸다.

그야 무섭겠지.

하다못해 내 말대로 의회군이라도 미리 소집해뒀다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결국 이놈들은 날 담그기 위해 아무것도 안 했다.

뭐 정말로 아무것도 안 했다기보단 국민을 위한 현안을 우선한 거지만 당장 쿠데타군이 코앞까지 다가오는 와중에 의회군 소집이 우선순위에서 밀렸으면 그게 딴짓한 거지.

그럼 오를레앙공이 제 복을 걷어찬 이상 다음 순번이야 뻔하다.

벌떡.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하여, 저 겁쟁이들이 뒤이어 나를 바라보기 전에 선수를 치기로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