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정말로 말에 올라타진 않을 텐가?"
라파예트 후작이 홍당무처럼 붉게 물든 얼굴로 내게 속닥거렸다.
그래도 자기가 잘못했다는 자각은 있나 보지?
아니면 괜히 오늘 일로 나한테 나중에 책잡힐까 봐 신경이 쓰였나?
[그보다도 패장이잖은가. 전투에서 진 주제에 상승장군인양 백마를 타고 위풍당당이 개선하려니 영 기분이 불편한 거겠지.]
아아, 소위 말하는 군인의 명예라는 놈?
그래서 그렇게 명예 따지시는 양반이 왜 의회랑 기 싸움을 해보려 하셨데?
아니, 오히려 아직도 명예나 따지는 낡아빠진 귀족 나리시니까 입만 산 샌님들과 기 싸움을 하려고 든 건가?
뭐 아무튼 간에.
"그야 전 말을 탈 줄 모르거든요."
[이봐!!!]
이번에는 또 하나의 내가 머릿속에서 고래고래 소리쳤다.
깜짝이야.
[누굴 교양이라고는 없는 야만인이나 숫기라곤 없는 샌님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당연히 말 정도는 탈 수 있고말고! 물론 기사 놈들처럼 능숙하게 타지는 못하지만···!]
아무튼 잘은 못 탄다는 소리잖아.
거참 시끄럽네.
21세기로 치면 다 큰 성인 남자가 운전면허도 없다, 뭐 그런 인식인가 보지?
그렇다 치더라도 반응이 좀 과하다.
말 등에 올라타 있었던 라파예트 후작도 무슨 외계인을 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고.
푸르륵.
···아니 이놈의 말까지 또 왜 비웃고 자빠진 거야.
확 고삐를 당겨버릴까부다.
"참, 그랬었지. 이거 실례했네. 자네는 제3신분이었지."
라파예트 후작이 혼자 킥킥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눈까지 질끈 감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깨를 들썩거리는 게 참 열심히 웃는다 싶긴 한데, 딱히 이쪽을 비웃는 것 같진 않았다.
그냥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저절로 터져 나온 느낌.
흠, 새삼스레 말도 탈 줄 모르는 애송이에게 당한 제 처지가 기구하게 느껴진 건가?
"자네만 좋다면 내 저택으로 초대하겠네. 앞으로 청문회까지 며칠 정도 여유가 있을 테니
간단한 마술 정도는 가르쳐줄 수 있을 거야. 그럼 남들 앞에서 재주를 뽐내지는 못해도 비웃음을 살 일은 없을걸세."
"저야 감사할 따름이죠."
땡잡았다.
뭐, 순진한 호의라기보다는 내가 이번 일을 어영부영 덮어준 빚을 승마술 핑계로 조금이나마 갚겠다는 생각이겠지만.
그래도 내게 나쁠 이유는 없다.
이번 일로 내 이름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는 만큼이나 이 떠오르는 태양을 어떻게든 담그려 들 놈들도 수두룩할 거거든.
물론 나도 당분간 사리기야 하겠지만 사리는 보람도 없이 온갖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억까를 당할 텐데, 그때 내가 프랑스의 국민 영웅 라파예트 후작 집에 드나든다?
그럼 나보단 라파예트 쪽으로 비난의 화살이 몰릴 수밖에 없다.
이미 한번 의회랑 기 싸움 한 양반이 두 번이라고 못할까.
겸사겸사 나도 라파예트랑 짜고서 쿠데타 꾸미는 거 아니냐는 의심을 사게 될 테니 이름값이 조금이나마 깎일 테고.
오히려 너무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으면서 혼자 고고한 척하는 것보다야 이렇게 간간히 공격당할 여지를 만들어두는 게 나중에 낫다.
저쪽에서 공격하는 만큼 나와 라파예트 후작 간의 연대도 그만큼 단단해질 거고.
[흠, 난 자네가 당연히 라파예트 후작을 싫어할 줄 알았는데···?]
그야 왕당파니까 당연히 싫지.
지금도 저 수구꼴통이랑 구태여 정치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라파예트 후작은 본인이 단순한 왕당파가 아닌 야심가이고 정치군인이라는 걸 보여줬다.
그럼 이야기가 다르지.
신념범이 아니라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야심가고 철새라면 내가 저쪽에 도움이 되는 한 먼저 통수를 치려 들지는 않을 거거든.
하물며 이번 일로 목숨값을 빚졌으니 언젠가 결별해야만 하는 날이 오기 전까지는 목줄 채워놓고 유용하게 부려 먹는 게 맞다.
자고로 권력이란 총부리에서 나오는 법이고, 또 혁명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법이니까.
[···정말이지 이런 말까진 하고 싶진 않았는데, 자네 같은 빨갱이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건 자네 조국의 흥복일거야.]
입 닥쳐, 막시밀리앙.
"나중에 언놈이 제 승마술을 비웃거든 후작님 존함 좀 빌리겠습니다."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적백내전에도 애써 태연한체하며 라파예트를 돌아보았다.
"어디 그쪽에서 누구 이름이 나올지는 몰라도 이 프랑스의 국민 영웅이신 각하와 비할 바는 아닐 테지요."
"이봐, 지금 누굴 공연히 망신 주려고 벌써 불안하게 하는겐가?"
껄껄껄.
하하하.
뻔하고, 의례적인 웃음소리.
입만 열심히 씰룩거리지 눈빛은 이미 싸늘하게 식은 채로 우리는 한참 동안 시선을 주고받았다.
어느덧 라파예트 후작에게 낭패감은 온데간데없었다.
허리는 곧게 세우고,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하며, 이쪽을 향해 환호하는 파리 시민들을 향해 이따금 손을 흔들어주면서 영락없는 개선장군 행세를 하고 있다.
어차피 난 말도 안 탔겠다 키도 작겠다 잘 보이지도 않을 테니 청중의 이목을 사로잡아 이번 일로 깎인 제 명성이나 민심부터 회복하겠다, 이거다.
거참 뻔뻔하기도 하셔라.
뭐, 어차피 이러라고 데려온 거지만 말이야.
그런데 의회랑 기 싸움을 하려던 양반이 벌써 이렇게 설쳐대면 나중에 청문회에서 덜 아프게 맞을 거 더 아프게 두들겨 맞을 텐데 청문회 나갈 생각은 안하슈?
[안 하겠지.]
하기야 그런가.
꼴에 귀족이라고 동료 귀족들에게 욕먹을 걱정이나 하지 천한 것들이 점거한 의회는 여전히 내심 깔보고 있는 게 당연한가.
뭐, 그렇다면야 아프게 처맞으면서 배우셔야지.
자고로 존중이란 공포에서 나오는 법.
요 몇 주간 여의도 굴다리에 시달리면서 혓바닥을 갈고 닦았을 직장동료들의 청문회를 내심 고대하며 이번에야말로 파리 시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로베스피에르 만세!!!
"···흐."
기분 째진다.
다들 나보단 말에 탄 라파예트 후작을 보고 있는 게 좀 마음에 안 들긴 하는데, 그래봐야 지금 시민들 입에서 나오는 건 내 이름이다.
보기는 백마 타고 멋들어지게 개선하는 라파예트를 보고 있는데 막상 아무도 라파예트는 환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야 저 사람들도 뻔히 요 며칠 사이 라파예트에게 맞서 의회를 지키자는 호소나 격문들을 봤을 텐데 이게 대강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모를 리가 있나.
국왕이 파리를 버리고 도망친 이래로 좋게도 나쁘게도 파리 호사가들의 주인공은 언제나 로베스피에르였고, 오늘 새벽만 해도 장장 1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나와 함께 싸우자며 샹 드 마르스 연병장에 몰려들기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 그 1만 명의 시민들, 더해서 라파예트가 끌고 온 병사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어깨동무한 채 개선하고 있는데 파리 시민들이 이게 누구 공인지 모를 리가 없지.
열심히 영업용 미소 날리며 손 흔들고 있는 라파예트 후작에게는 미안하지만, 내 이름은 들었어도 내 얼굴까진 모르는 사람들은 아, 저 선두에서 멋들어지게 백마를 타고 개선하는 사람이 바로 그 소문의 로베스피에르구나! 하고 생각할 게 뻔하다.
[이래서 한사코 승마를 사양한 거였군.]
뭐 그렇지.
로베스피에르도 그렇게 못생긴 건 아닌데, 혼자 살다 보니 관리를 거의 안해서 피부도 좀 거칠고 어깨도 좁은 데다가 키도 평균보단 작아서 개선장군 노릇을 하기엔 이래저래 하자가 많다.
사람들이 다들 기대에 부풀어서 소문의 주인공을 보러 왔다가 뭐 저런 어깨도 좁고 키도 땅딸막한데다가 말도 제대로 못 타는 노총각이 개선장군이냐고 실망할 게 뻔하다.
[커흠.]
그럴 바에야 지금처럼 라파예트 방패를 써버리는 게 낫다.
나는 나대로 선두에서 함께 걸어가고 있으니 핑곗거리도 있고, 라파예트의 인상착의를 아는 사람들은 지금 이 사달을 내놓고서 뭘 뻔뻔스레 주인공 행세냐고 라파예트에게 반감을 품게 될 거고 라파예트의 인상착의를 모르는 사람들은 저 잘생긴 친구가 로베스피에르라고 믿게 될 거다.
어느 쪽이건 내가 손해 볼 일은 없다는 거지.
저 양반은 아직 모르고 있겠지만 내 채권추심은 이미 시작되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자네가 여기로 온 건 참 자네 조국의 흥복이야.]
입 닥쳐, 막시밀리앙.
이 좋은 날에 자꾸 초 칠래?
아무튼 파리 시민 모두가 로베스피에르의 이름을 외치는 와중 나 로베스피에르 본인은 라파예트 후작의 산초가 되어 선두에서 고삐를 끌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지금껏 아무도 이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있지만 난 개의치 않는다.
암튼 다 내 계략이고 책략이니까.
고작 이런 거로 상처받을까 봐?
푸르륵.
···그래, 사실 쬐끔은 신경 쓰인다.
머리로는 지금 이 멍청한 광대 놈은 풍차로 돌격하는 돈키호테고 난 옆에서 그걸 부추긴 흑막이라는 건 아는데 기분이 영 그렇단 말이지.
그러니까 로시난테여, 미물 주제에 자꾸 비웃지 말아줄래?
울어버린다.
***
루이 15세 광장-훗날의 콩코르드 광장까지는 순식간이었다.
공포정치의 상징과도 같은 단두대가 설치되었던 곳이라 얼마나 을씨년스러울까, 했는데 오히려 널찍널찍하고 화려한 곳이었다.
의회에서 급히 설치한 연단 뒤로 보이는 멋들어진 기마상에 온통 대리석으로 도배된 거리, 그 밖에 소소하지만 화려한 거리 장식들까지.
이 프랑스 왕국이 절대왕정을 지탱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무고한 농민-노동자들의 고혈을 수탈해왔을지 짐작하게 하는 사치의 온상이었다.
햐, 진짜 반달리즘이고 뭐고 그냥 싹 다 불사르고 때려 부숴버리고 싶다.
[동감일세.]
모처럼 의견이 일치했군.
역시 혁명 부르주아지 로베스피에르 동지.
내 정권을 잡거든 기필코 가장 먼저 저 루이 15세 기마상부터 싹 녹여다가 낫과 망치 동상으로 바꿔놓을 테다.
[···이봐.]
이번엔 농담 아님.
왜. 뭐. 왜.
"역시 로베스피에르 동지! 믿고 있었소!"
한창 딴생각하고 있자니 연단에 서 있던 오를레앙공이 버선발로 내게 달려와 날 끌어안았다.
와락.
"당신은 우리 프랑스의 영웅이고 파리 시민들의 은인이오!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를 잃을 수는 없다고 용맹하게 나서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건만! 기어이 누구 한 사람 다치거나 죽지 않고서! 그것도 반나절도 안 되어서 오해를 풀고 돌아오다니!
우리 동지와 같은 영웅호걸과 같은 시대를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바야흐로 주님의 은총이 온 누리에 가득해졌음을 알겠소!!!"
우웩, 땀 냄새.
지독한 향수 냄새까지 뒤섞여서 아주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아저씨가 갑자기 징그럽게 왜 이래-.
-라고 나쁘게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온통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던 거 보면 이 양반도 딴에는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니까.
그게 과연 라파예트에게 험한 꼴을 당할까 봐 그랬던 건지, 아니면 반나절도 안 되어서 개선하고 돌아오는 날 맞이할 걱정 때문에 그랬던 건지야 아직 미지수이긴 한데-.
"아니 전하, 파리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쑥스럽게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이 촌극에 어울려줘봤자 당장 내가 득 볼 건 없으니까 슬쩍 내숭 떨면서 밀어내자.
제 지분을 주장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사람들 앞에서 나와의 친분을 과시하고 싶은 건지야 모르겠는데 이번 일로 라파예트를 호구로 잡았으면 됐지 당장은 과식이고 소화불량이야.
일단 저쪽에서 대기표 뽑고 너튜브라도 보면서 기다리고 계슈.
"어허, 쑥스럽다니! 겸손이 지나치시오!"
한데 이 아저씨, 아무리 내가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은근히 팔에 힘을 주고 있는 게 진짜 뺨이라도 치지 않으면 안 물러날 기세란 말이지.
갑자기 진짜로 왜 이래.
슬쩍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려니 그제야 오를레앙공이 후다닥 제 솔직한 속내를 밝혔다.
"만일 동지가 이 자리에 안계셨다면 지금처럼 우리 시민들이 병사들과 이렇게 웃고 떠들며 노래할 수 있었겠소? 당장 지난날 우리 의원들이 보는 앞에서 동지가 비장하게 죽음을 각오하던 모습이 아직도 내 눈에 선하건만! 전시 수상씩이나 되어서 그런 동지를 위해 무엇 하나 해준 게 없으니 그거야말로 이 루이필리프 일생일대의 수치요!"
하물며.
"지난날 동지께선 이 부족한 몸을 프랑스의 집정관이라고 불러주셨소. 하지만 이 형편없는 놈은 그런 동지에게 그 흔한 덕담 한마디 해준 게 없구려. 오늘 일은 그날의 실수에 대한 사죄이자, 오늘 동지께 목숨을 빚진 모든 이들을 대신한 감사의 표시라고 생각해주시오."
오우야.
길어야 한두 시간 사이에 급조했을 핑곗거리치고는 아주 청산유수다.
제아무리 공작씩이나 되는 고위 귀족이라지만 꼴에 우익영수 자리를 포커 쳐서 따낸 건 아니다, 이거지?
흠, 그런데 말하는 낌새가 어째 좀-.
[우리보단 저 라파예트 후작을 겨냥하고 있는 것 같군.]
내 생각에도 그렇다.
라파예트가 보는 앞에서 구태여 전시수상 이야기를 들먹이는 것도 그렇고, 목숨을 빚졌다는 걸 자꾸 강조하는 것도 그렇고 날 올려치는 척하면서 은근히 라파예트를 엿먹이고 있다.
뭐 결과적으로는 사소한 오해였다고 얼렁뚱땅 넘겨버리긴 했는데, 계속 내가 목숨을 걸고 용기있게 나섰다는 걸 사람들 보는 앞에서 강조하는 이유가 뭐겠어.
저 라파예트 놈이 완전무장 한 병사들 끌고 와서 파리 시민들을 학살하려 했지만 지혜로운 로베스피에르가 재치 있는 꼼수로 파리를 구했다, 이거지.
반쯤 등 떠밀려서 올라간 자리기는 한데 기왕에 전시수상까지 올라간 김에 제 자리도 굳힐 겸 라파예트가 거느리던 우익의원들까지 흡수할 겸 이참에 사람들 보는 앞에서 무장해제 된 라파예트를 담가버리겠다는 속셈인 거다.
불과 어젯밤만 해도 라파예트가 온다고 겁에 질려서 벌벌 떨던 거 생각하면 참 같잖긴 한데, 어쩌겠어.
"로베스피에르 의원, 동지는 우리 모두의 은인이오."
"별말씀을요."
이 뻔뻔함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인데.
점점 얼굴이 썩어들어가는 라파예트를 위해 슬쩍 오를레앙공을 뒤로 밀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품속으로 파고들려던 놈이 잠자코 밀려주는 거 보면 이제 제가 할 말은 다 했다, 이거겠지.
무엇보다 파리 시민들이 말 위에 올라탄 게 라파예트고, 오늘의 영웅 로베스피에르는 걸어서 콩코르드 광장까지 왔다는 걸 눈치채버렸다.
그럼 이제 소문이 어떻게 돌겠어.
뭐, 그냥 이대로 오를레앙공이 생각한 그림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긴 한데.
"저는 아무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기왕에 라파예트를 부려 먹기로 한 김에 이번 한 번은 구해주자.
너, 나중에 각오해둬야 할 거다.
"우리 파리 시민들의 우애가, 사랑이, 그 무엇보다도 주님의 아가페가 오늘의 기적을 일으킨 거지요. 이 아름다운 행렬을 봐주십시오. 지금 이 자리에서만큼은 시민이나 병사라는 구분은 없습니다. 다들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형제자매들이 있을 뿐이지요."
헌데.
"여기서 승패나 공훈을 따져서 무엇하겠습니까? 설령 사람이 일을 꾸미더라도 이를 이루는 건 하늘의 뜻에 달린 법입니다. 만일 정 오늘의 영웅을 골라야만 한다면, 저는 이 아름다운 기적을 허락해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자비로운 성모께 공을 돌리겠습니다."
"오, 주님의 은총은 참으로 무한하도다! 용기 있고 지혜로울 뿐 아니라 신심까지 깊다니, 로베스피에르 의원께서는 우리 프랑스의 축복이구려!"
[···낯짝도 두꺼우시지.]
내 말이.
하지만 당장은 내게 도움이 되고 있으니 그냥 봐주자.
라파예트도 머리가 장식이 아니라면 이번 일로 지금 의회의 분위기가 대충 어떤지, 그에 맞서 제 명예를 지키려면 누구와 손을 잡아야 하는지 정도는 눈치챘을 테니까.
"어이쿠, 내 정신 좀 봐! 우리의 영웅을 너무 기다리게 했군! 자, 곧장 상석으로 모시리다!"
뻘쭘하게 말에서 내리는 라파예트 앞에서 보란 듯이 호들갑을 떠는 오를레앙공의 손에 이끌려 연단에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