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154)

오늘의 기적

연단에 오르자 요사이 매일같이 얼굴을 보고 지내던 구면들이 나를 반겼다.

뭐 일요일에는 주일이라고 출근 안 하고 각자 따로 놀았지만 그래봐야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다들 편 가르며 놀았단 말이지.

그러니까 속된 말로 하자면 마누라나 부모님보다 자주 본 사이다, 이건데.

"···그."

"험."

오늘따라 다들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어색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불편해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그냥 어떻게 말을 걸면 좋을지 몰라서 막막해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어서 오시오, 프랑스의 영웅이여!"

"오, 마침내 파리의 은인이 나타나셨군!"

짝짝짝.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내게 말 거는 이들도 별다를 건 없다.

세상에 이렇게 삭막한 박수갈채가 있던가.

공화파라 더 좋아한다? 

왕당파라 어색해한다?

그런 구분도 없었다.

그냥 다들 평등하게 날 부담스러워하고 어색해하고 내심 질투하고 있다.

아주 호감만빵이다, 이거지.

분명 다들 얼굴은 웃고 있고 목소리도 들떠있는데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징그러운 밀랍 인형 같은지 몰라.

어휴.

[···테니스 코트의 맹세가 울겠군.]

누가 아니래.

예상은 했지만, 기분은 영 별로다.

차라리 오를레앙공처럼 대놓고 이용해 먹으려고 드는 게 낫지.

좌우를 막론하고 입으로만 웃고 있지 눈으로는 파괴광선을 쏘고 있으니 새삼스럽게 왜 정치판을 복마전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간다.

아니 그래도 한 사람도 안 죽고 돌아왔으면 칭찬이라던가 못 믿어줘서 미안하다는 사죄의 한마디라도 해줄 순 없나?

내가 책임지고 죽겠다고 했을 때는 분위기 타서 같이 으쌰라 으쌰했으면서 이제 와 눈총질이야.

왜. 이제 와서 보니까 그냥 라파예트 손에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싶으신가 보지?

툭.

"인상 풀게."

날 상석으로 이끌던 오를레앙공이 내 옆구리를 찔렀다.

"시민들이 보고 있어. 초연부터 망치고 싶은가?"

···흠. 

불편한 기색이 얼굴에 다 드러나고 있었나.

이건 전적으로 내 경험 부족이고 실수다.

하기야 입정치, 뇌내정치만 죽어라고 했지. 나나 로베스피에르나 실전 경험치로는 1년도 못 채운 햇병아리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잠깐, 왜 나까지 햇병아리로 몰고 가는가? 난 그래도 자네와는 달리 올해로 3년 차야.]

아이고 잘나셨습니다.

군대도 아니고 초선의원인데 0년 차나 만 2년 차나 그게 그거지.

그리고 삼부회는 의회로 불릴 가치도 없다고 했던 사람이 삼부회 제3신분 대표자 경력까지 넣는 건 너무 비겁한 거 아냐?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아무튼 이번만큼은 솔직하게 오를레앙공에게 고맙다고 말해주자.

괜히 개선식 망쳤다가 국민의회까지 덩달아 얼굴에 똥칠할까 봐 참견한 거겠지만 도와준 건 도와준 거니까.

그래서 먼저 꾸벅, 고개를 숙이자니 오를레앙공이 완전히 넋이 나가서 한동안 날 멍하니 쳐다봤다.

갑자기 왜 저래?

"···아, 그렇지. 바스티유 습격 이래로 이제서야 고작 만 2년이었군, 참."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는 뒤늦게나마 정신이 들어온 거 갈긴 한데, 변함없이 그다지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내가 뭐 잘못했나?

[새삼스레 자네가 햇병아리라는 걸 깨달은 것 같은데.]

아, 그건가.

설마하니 꼽준걸로 감사까지 받을 줄은 몰랐다?

거참 별것도 아닌 거로 호들갑이시구만.

지들도 햇병아리 시절 정도는 있었을 거면서 왜들 유난이야?

[아니, 그런 이유에서가 아닌 것 같네만···.]

"막시밀리앙!"

언제나처럼 혈기 왕성한 마라가 상념을 깨웠다.

짝.

오, 나이스 하이 파이브.

역시나 마라야.

또 혼자 설친다고 옆에서 밀랍 인형들 낯짝이 일제히 썩어들어가는데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오늘의 주인공에게 아는 척하고 있다.

"이 친구가 있는 허세 없는 허세 혼자 다 떨더니 기어이 살아 돌아오셨군그래! 그것도 티끌 하나 다치지 않고서 말이야! 으하핫! 그래, 파리의 은인이 되신 기분은 좀 어떤가?"

"에이, 파리의 은인은 무슨-."

"어허, 이 친구 보시게! 사나이 대장부가 그러면 쓰나! 자네 악룡을 무찌르고 공주님을 구출한 기사가 사람들 앞에서 겸양 떠는 거 봤나? 물론 겸손도 좋지만 우선 기사가 제 공훈에 떳떳해져야 저 멀리까지 무용담이 퍼져나가는 거지!"

···흠, 그런가?

그러고 보니까 왕조차 본인을 낮추는 게 미덕인 유교 문화권과는 달리 기사 문화가 발달한 유럽에선 오히려 좀 건방 떠는 게 미덕이라고 배운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오히려 본인을 너무 낮추면 겸손한 게 아니라 비굴하다고 본다던가, 뭐라던가.

"그래, 여기 무슈(Monsieur) 파리가 왔네. ···이거면 됐나?"

"훨씬 낫구만! 생환을 축하하네, 형제여!"

사람 좋게 웃으며 와락, 한번 끌어안고서는 제자리로.

이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다면 그럴 가짓수야 무궁무진했을 텐데도 사석에서처럼 하이 파이브 한번 치고, 생환을 축하한다고 끌어안고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돌아갔다.

참 좋게도 나쁘게도 일관적인 친구다.

분명 정치 감각이 없는 건 아닌데 매번 본인이 거기에 구태여 연연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나중에 나를 상전으로 모시게 된다고 해도 그냥 축하한다고 좋아해 줄 인간상이다.

[마라는 정치보단 혁명 그 자체가 목적인 사나이니까.]

그래, 내 생각에도 그렇다.

물론 본인이 혁명을 이끌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다른 사람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면 기꺼이 제 머리를 빌려줄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일전에 날 때렸던 게 혁명을 배신했다고 믿어서였듯이 지금 내게 아낌없는 호의를 보여주는 건 나의 행보가 혁명에 도움이 된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저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 한 마라는 절대로 날 배신하지 않겠지.

반대로 본인이 생각하기에 내가 혁명을 배신했다고 여겨지면 또 저번처럼 씩씩대며 달려들겠지만.

그렇지만 뭐-.

[마라 정도면 좋게도 나쁘게도 동지라 할 수 있지.]

···그래.

차라리 우익의원들이야 원래도 험한 소리 주고받는 사이였으니까 얼굴이 좀 썩어들어가도 이해해주겠는데 당통이나 에베르 같은 놈들까지 저 멀리서 마지못해 영업용 미소를 보여주고 있으니 자꾸만 입꼬리가 내려가려고 한다.

아니 쿠데타 시도나 의회랑 기 싸움은 라파예트가 했는데 왜 다들 의회 대표로 목숨 걸고 나갔던 나만 못 죽여서 안달이냐고.

뭐 좌익진영이라고 다들 그런 건 아니고 정말로 무슨 구세주를 보듯이 황홀하게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놈들도 있긴 한데, 이놈들은 내게 빌붙으려는 기회주의자나 아니면 진짜로 장기말 정도밖에 못될 부류지 저걸 축하해주고 있다고 보기엔 무리수가 많다.

그나마 날 진지하게 걱정해줬던 것 같은 건 멀리서 봐도 땀이 몽글몽글한 카미유 정도?

옆에 밀랍 인형들 때문에 티를 잘 못 내서 그렇지 웃는 모습만 놓고 보면 가장 자연스럽고 구김 없이 밝다.

그런데 이 친구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사적인 자리에선 잘 떠들어도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먼저 나서서 설칠 수 있는 체질이 아니니 별 도움이 안 된단 말이지.

결국 진짜로 내게 먼저 다가와 걱정해주고 축하해준 건 마라 정도.

햐, 그냥 연단 다시 내려가고 싶다.

라파예트랑 눈싸움하면서 순수하게 나와 함께 기뻐해 주고 영웅이라고 추앙해주는 민중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

[호, 오늘따라 마음이 잘 맞는데.]

그리고 겸사겸사 여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밀랍 인형들도 그냥 싹 다 단두대로-.

[그만하지.]

넹.

···쳇, 선량하고 미물 하나 함부로 죽여본 적 없는 나 같은 21세기의 상식인이랑 같이 다녀서 그런가.

이 양반이 갈수록 쫄보가 되어가고 있네.

"시민 동지 여러분!!!"

깜짝이야.

나와 함께 연단에 오른 오를레앙공이 상념을 깨웠다.

목소리 한번 우렁차셔라.

항상 보면서 느끼는 건데 이 사람이 처음부터 방계 왕족이 아니라 국왕이었으면 혁명 같은 건 어림도 없었겠다, 는 생각이 든다.

얼굴도 반반하지, 목소리도 시원시원하고, 겁이 좀 있어서 그렇지, 라파예트가 몰락하지 말자 담그려 드는 거 보면 파벌의 장으로서 결단력이나 행동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암만 봐도 이 영악한 양반이 국왕이고 사람은 좋다던 루이 16세가 방계 왕족으로서 가족들이랑 하하호호 행복하게 지내는 게 맞는 인선 같은데.

"오늘 우리 파리 시민 중 누구 한 사람 다치지 않고, 누구 한 사람 죽지 않고 형제로서, 친우로서, 동지로서 한자리에 모이게 되다니 정말이지 꿈을 꾸는 것만 같습니다!"

뭐 어쩌겠나.

하늘에서 인선을 이 모양으로 정해줬는걸.

나는 본디 유물론자였지만 이 오컬트적인 사건에 휘말린 이래로는 사실 처음부터 역천이야말로 하늘의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조금씩 들고 있다.

당장 오늘만 봐도 때마침 바람이 병사들 쪽으로 불어주지 않았다면, 그래서 와인냄새가 솔솔 번지지 않았으면 쉽지 않았을 거다.

오히려 하늘은 처음부터 혁명을 바랬던 거 아닐까?

그래서 교과서 속의 실패한 혁명에 실망한 나머지 나 박민혁에게 혁명을 반드시 성공시키라는 사명을 부여한 거 아닐까?

"전 아직도 공포에 사로잡혀 잠을 이루지 못하던 지난밤을 기억합니다! 그건 비단 제 죽음을 향한 공포만이 아니었습니다! 한때 우리가 형제라고 불렀던 사람들과 다시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누구보다 사랑하고 절친했던 동지를 죽여야 할 거라는 공포!"

물론 지나친 생각일지도 모른다.

자칫 이와 같은 오만한 생각이 내 흠을 돌아보길 게을리하게 만들고 끝내는 자아도취에 빠지게 할 수도 있겠지.

하물며 운명론이라니, 잠시나마 현혹되었다는 것 자체가 유물론자로서 죄를 짓는 격이다.

그렇지만-.

"하지만 악몽의 밤은 가시고, 마침내 새벽이 왔습니다! 전지전능한 우리 주의 사랑이 따스하게, 그리고 평등하게 내리쬐는 아침이 왔습니다! 바로 여기, 우리의 영웅 로베스피에르 의원 덕분에 말이지요!!!"

로베스피에르 만세!!!

생각을 미처 정리할 겨를도 없이 부름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난다.

집주인 놈은 조금 전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이쪽은 몸 주인이라서 그런지 예전부터 내가 하는 생각 전부는 아니라도 대부분은 읽을 수 있었으니 아마 나랑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거겠지.

아니면 뭐, 혼자서 딴생각 중일 수도 있고.

어서 책임지고 죽으러 나가라 등 떠밀 때는 언제고 영웅이 되어서 돌아오니 질색하는 밀랍 인형들이라던가 뭐 생각할 거리는 많으니까.

"감사합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께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다시 한번 이 보잘것없는 필부에게 믿음을 주셔서, 함께 나서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여하튼 연단에 우뚝 서서 뻔한 인사말을 늘어놓고 있자니 자연스레 집주인 놈이 혓바닥을 가로챘다.

그럼 된 거겠지.

뒤에서 사소한 말실수라도 하는 즉시 담가버리려고 죽일 듯 노려보는 밀랍 인형들의 시선을 애써 모른체하며 날 티 없이 맑은 사랑과 경외를 담아 우러러보는 민중들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여러분, 오늘 진정으로 칭송 받아야 할 건 제가 아닌 여러분입니다."

새삼스럽게 왜 국회나 기자들 앞에선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지지자들 앞에선 세상에 둘도 없는 호인이 되어서 깔깔껄껄 웃고 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왜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만리타향에서 개고생을 자처해야 하는지.

왜 저 더러운 인간들이랑 치고받고, 광대 노릇을 해야 하는지 이제야 좀 알겠다.

"아닌 말로 제가 오늘 한 일이라고 해봐야 음주가무 밖에 더 있습니까? 전 그저 맛 좋은 술과 유쾌한 음악으로 시민 여러분을 즐겁게 한 공밖에 없는 물주에 불과합니다. 얼마든지 서로를 다치게 할 수 있는 상황에서 포옹을 택한 건, 우리의 형제자매를 따스하게 안아준 건 여러분 모두의 뜨거운 가슴이었습니다."

다 저 사람들을 위한 일이다.

이게 지나치면 독선이자 자기최면이 되는 거겠지만, 이런 사소한 자기만족이라도 없으면 아무리 관심받는 게 좋아도 이 장사는 오래 못 해 먹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저는 사람의 선함을 믿습니다. 제아무리 우리가 이기적으로, 못되게 굴어도 우리 마음 한쪽에는 서로를 위하는 이타심이, 사랑이 깃들어있다고 믿습니다. 만일 그 누구도 손해 보려 하지 않는다면, 서로 이용하고 무릎 꿇리려는 악독한 이기심만 가득하다면 이 세상은 홉스가 말했듯이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만이 가득해졌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진정 우리 인간 세상의 전부입니까?"

천천히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파리 시민들의 면면을 살폈다.

"악인이 없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홉스가 말했듯이, 우리 내면엔 분명 어느 정도의 야만적인 폭력성이 깃들어있겠지요. 그렇지만 그건 인간의 일부분일 뿐 전부라 할 수 없습니다. 이기심이라는 게 꼭 상대를 해치기만 합니까? 편히 쉬고 싶다는 것도 이기심입니다.

오늘 우리는 편히 쉬고 싶다는 병사들의 이기심에 구원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연인과 아낌없이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청춘남녀의 이기심에 구원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여느 때보다 이기적으로 굴었으나, 그 결과 파리는 구원받았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며 라파예트 후작을 돌아봤다.

역시나 곤혹해 하고 있군.

도와주는 줄 알았더니 시민들 앞에서 못을 박아버리니까 아주 당황스럽지?

그러게 누가 의회 상대로 무력 시위하라고 칼 들고 협박함?

"오늘 우리는 역시나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걸, 우리가 그토록 죄악시하던 이기심조차 때로는 선할 수 있음을 더불어 노래하고, 사랑함으로써 증명했습니다."

뭐, 그렇다고 아주 빼도 박도 못하게 해버리면 곤란하니까 라파예트 놀리기는 이쯤에서 끝내자.

청문회에서 한동안 신나게 치고받아야 내게 화살이 안 날아오지, 일방적인 규탄으로 끝나버리면 그다음 타자는 나다.

앞으로 두고두고 얻어터지면서 욕받이 무녀로 부려 먹어야 하는데 벌써 훅 가면 쓰나.

아껴 써야지.

"물론 언제나 오늘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역사책만큼 사랑만으로 가득한 동화책과 정반대에 위치한 서적도 없지요. 만일 우리의 역사서가 사실만을 담고 있지 않다면, 누군가의 상상력에 의해서 창작된 서적이었다면 진작에 앞뒤 꽉꽉 막힌 추기경들에게 금서로 지정되고도 남았을 겁니다."

킥킥킥.

···왜들 웃지?

진심인데.

설마 지금 농담하는 줄 안건가?

"그러니까 여러분."

아무래도 좋다.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경건하게, 진솔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모쪼록, 하늘이 허락해주신 오늘의 기적을 소중히 합시다."

앞으로도 오늘처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끝낼 자신은 없거든.

최선을 다해서 노력은 해보겠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저 밀랍 인형들에게 시달리면서 언제까지 사람 좋은 행세를 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도중에 지쳐서 나가떨어질지도, 그냥 미쳐버릴지도 모르지.

"오늘 우리는 누구나 즐거운 노래와 맛 좋은 술을 주고받는 형제자매였습니다."

하지만 다음번엔 녹이 서린 연장과 총검을 주고받을지도 모른다.

"오늘 우리는 누구나 자유를 위하여, 개개인의 행복을 위하여 입을 맞춘 동지였습니다."

하지만 다음번엔 서로를 의심하고, 자유를 제한하려 발악하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 우리는 진정한 혁명이란 인류애로부터 비롯됨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다음엔 선민의식에 점철되어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사랑하는 시민 동지들이여, 모쪼록 오늘의 기적을 소중히 간직합시다."

언젠가 그날이 왔을 때 단호히 맞설 수 있도록.

오늘의 아름다운 추억이 그 끔찍한 날의 자정 장치가 될 수 있도록.

"이 맛 좋은 술과 아름다운 노래가 영원히 잊히지 않도록 함께 기념해나갑시다!"

건배!!!

시민들이 선창했다.

순간 당황한 내가 뭔가를 시도해보기도 전에 옆에 서 있던 오를레앙공이 선홍빛 술로 가득한 와인잔을 건넸다.

슬쩍 주위를 살피니 밀랍 인형들도 진작에 한 잔씩 들고 있는 게, 내가 한창 연설하는 와중에 이미 마지막을 건배사로 끝내려고 작심했던 모양이었다.

나 참.

벌컥.

그렇다면 진작에 그럴 거라고 말이라도 해주던가.

진짜 뭐라도 한방 먹이려고 별짓을 다하네.

연단에 선 나의 원샷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꿀꺽거리는 소음과 즐거운 노랫가락이 어지럽게 뒤섞이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다들 취해서 패싸움 나는 거 아닌가 싶긴 한데, 뭐 그거야 의회에서 어련히 책임지겠지.

축제의 신 디오니소스의 은총으로 오늘 이들은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며, 서로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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