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짝
으어어.
"죽겄다···."
거추장스러운 가발이나 코트를 벗을 생각도 못 한 채 털썩, 셋방 침대 위에 쓰러졌다.
머리는 핑핑 돌고 속은 메슥거리고 다리는 천근만근이고.
딸꾹.
무엇보다 이놈의 짜증 나는 딸꾹질까지.
셋방 아가씨 뒤플레 아가씨는 물론이고 셋방 주인 뒤플레 씨까지 새벽 귀가한 날 보자마자 의사나 신부님을 불러오겠다고 할 정도니 말 다했지.
아직 젊어서 좀 쉬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둘러대긴 했는데-이 미친 술고래들.
종일 땡볕 아래에서 걷고, 또 걸었던 사람한테 밤새도록 술을 먹이는 게 제정신이냐.
그보다 그렇게 섞어댈 거면 도대체 왜 와인을 마시는 거야.
그것도 국회회식으로 1차, 공화파 인사들끼리 모여서 2차, 마지막으로 코르들리에 클럽 인사들만 따로 모여서 3차까지.
으으윽.
[···내가 보기에도 이번에는 좀 지나치더군.]
누가 아니래.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놈들이 원내의원인지 대학가 정치동아리 회원들인지 구별이 안 된다.
물론 눈꼴시려서라도 엿먹이고 싶었던 건 이해하지만 그것도 적당히 해야지.
뭐 안주발 세울 겨를도 없이 병째로 막 때려 넣어서야 이게 무슨 음주냐.
사약 드링킹이지.
안 그래도 알코올 혐오자였건만 18세기 말 프랑스에 떨어진 이래로 갈수록 더 술이 싫어져 가고 있다.
[그게 아니라 사치 말일세. 지난 85년의 끔찍한 가뭄 이래로 지금껏 단 한 번도 우리 프랑스 서민들에게는 좋은 시절이랄게 없었어. 홍수에, 우박에, 기록적인 추위까지 그야말로 하늘이 힘없는 민중에게 어서 궐기하라며 부추기고 있었지.
어느덧 만 5년이 지난 지금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네. 민중은 다만 혁명이라는 희망 하나에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지. 헌데 국민의 의회라는 놈들이 그 비싼 안주에, 고급술에 족히 수천 명은 살릴 수 있을 재화로 사치를 부리다니!]
···아, 그쪽?
이 양반도 참 엥간하다.
나도 나름 최 교수님 밑에서 공부하던 시절부터 의욕만 앞선다고 여러 번 한 소리 들었었는데 집주인 놈은 밤새도록 술 마시고 한다는 소리가 민생걱정이라니.
나랑 한 몸을 공유하고 있으니 이 숙취나 취기도 똑같이 느끼고 있을 텐데도 말이다.
참 좋게도 나쁘게도 정열적인 사람이야.
[커흠. 그보다 어서 나갈 채비 안할텐가?]
뭐가?
[뭐긴 뭔가. 출근이지. 다들 그런 거 생각 안 하고 광란의 밤을 보내긴 했는데 오늘은 엄연히 평일일세. 국민을 위해 어서 봉사하러 나가야지.]
···이 미친놈들이 무슨 쌍팔년도도 아니고 평일에 새벽까지 술을 달린 거냐.
아니 따지고 보면 쌍팔년도 보다도 훨씬 옛날이긴 한데 하여튼.
"안가."
[그래, 그래야-뭐라고?]
"민혁이 출근 안 해. 집에서 쉴 거야."
난 로베스피에르 같은 철의 사나이가 아니다.
물론 같은 몸을 공유하고 있긴 한데, 똑같은 숙취에 시달려도 저 인간은 새벽부터 정열에 불타오르는 게 암만 봐도 이건 정신력의 영역이다.
결국 이 나약한 현대인 박민혁은 로베스피에르와의 정신력 대결에서 패했다는 거지.
그리고 솔직히 다들 어떻게든 골로 보내려고 나만 콕 찍어서 일점사하던데 그렇게 두들겨 맞고 뭔 수로 새벽같이 출근해서 그 밀랍 인형들과 겨루라는 거야.
모르긴 몰라도 평소보다 뇌 기능이 한 70% 정도는 저하되었을 것 같구만.
[자네 진짜로 이럴 건가!]
엉, 진짜로.
[이 사람이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워, 워.
진정하고 냉정하게 생각해보라고.
어제 그치들이 밤새도록 날 골로 보내려고 든 이유가 뭐겠어?
어떻게든 내일 아침에 병가 쓰는 꼴을 보고야 말겠다, 이거겠지.
로베스피에르가 갑자기 기적을 일으킨 사나이가 되어버렸으니 이런 사소한 흠결이라도 만들어서 어떻게든 뒷말이 나오게 하려는 거다.
안 그러면 너무 혼자 독보적인 입지라서 다른 의원들로선 상대가 안 되니까.
헌데 그렇게 합심해서 술을 퍼먹였는데도 우리가 술병이 안 나고 당당하게 다음 날 아침에 정시출근한다?
그러면 또 어떻게 해서건 새로운 흠결을 만들려고 들 거고 그걸 버티고 또 버틸 때마다 더욱 강도 높은 공세가 날아오겠지.
유치하다면 유치한 수이긴한데, 이런 건 그냥 모른 척 얌전히 당해주는 게 맞다.
무슨 전제군주도 아니고 민선의원이 그런 사소하지만 인간적인 흠결 하나도 안 보여주면 그게 오히려 더 위험한 놈이야.
[하여간 잔머리만 빨라서는.]
칭찬 감사요.
정치질로 먹고사는 정치꾼이 잔머리가 빠르다면 최고의 칭찬이지 뭘.
아무튼 오늘은 기왕에 땡땡이치는 김에 어디 가지 말고 셋방에서 푹 쉬도록 하자.
또 혹시 알아?
뒤플레 아가씨가 술병 난 우리를 간호하러 와주실지.
운이 좋으면 제법 풋풋한 관계 진전을 기대해볼 수 있을걸?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오는가!]
하지만 기대했쥬?
[아뿔싸···!]
아뿔싸 좋아하시네.
그래도 같은 몸을 공유하는 사이인데 이정도야 척하면 척이지.
물론 난 남의 연인 뺏는 취미는 없으니 안심하시라.
이래 봬도 순정남이다 이거야.
[···도대체 어디서 이런 로키 같은 놈이 튀어나온 건지 원.]
아니 이보쇼.
프랑스인이면 켈트 신화에서 골라야지 북구 신화가 맞냐?
아무튼 기왕에 술병 핑계로 땡땡이친 김에 모처럼 나 혼자 브레인스토밍, 아니 둘이서 작전회의를 해보기로 했다.
당장 어제 눈에서 파괴광선을 쏴대던 것도 그렇고, 평일 새벽까지 달려서 기어이 골로 보내버린 것도 그렇고 저것들이 우릴 순순히 놓아줄 거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든단 말이지.
뭐 결국 언젠가는 예전처럼 편하게 대해줄 날이 오겠지만, 그때 어디 즈음에 있겠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의 노력 여하에 달렸다.
끝내 오를레앙공마저 제치고서 수상이 되어있을지, 국민의회의 쌍두룡으로서 현상 유지일지, 야당지도자일지, 또다시 당통에게 영수를 양보하고 밀려났을지.
혹은 의원 자리마저 빼앗기고 완전히 몰락해있을지.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이상 지금의 자리는 본래 내 위치가 아니라 잠시 맡아둔 자리라고 생각해두는 게 정신건강에 옳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알고 있잖은가.]
뭐, 그렇긴 하지.
중간중간에 구멍이 숭숭 나 있는 반쪽짜리 미래지식이긴 한데 그마저도 없는 것보다야 낫다.
자, 그래서 앞으로의 개략적인 작계인데-.
[아 참, 루이 부부는 어떻게 할 텐가?]
누구?
[루이 16세 말이네. 아직 트루아에 임시로 머물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 그 이야기구나.
뭐 생각해둔 거야 이것저것 있긴 하지만-.
"우리가 함부로 꺼낼 주제는 아닌 것 같은데."
[하기야 그렇군.]
안 그래도 호감만빵인데 급진 공화파라는 놈이 아직 퇴위 권고도 안 받아들인 현직 국왕 부부의 거취를 거론한다?
우리가 유화론을 꺼내건 강경론을 꺼내건 무조건 각이다, 각.
유화론을 꺼내면 그러고도 공화파냐고 깔 거고, 강경론을 꺼내면 무엄하다고 까겠지.
이도 저도 아닌 중도라면 우유부단하다며 실망스럽다고 깔 거고.
차라리 지금이 빙의 초기였다면 아직 무명의 초선의원이니까 한 번쯤 각 잡고 다이브 치겠는데, 이제 슬슬 좌우를 막론하고 우리만 노려보고 있을 시기다.
어떻게 해서건 흠을 만들어서라도 끌어내릴 놈들에 구태여 그럴 명분과 기회를 만들어줄 필요는 없겠지.
인간적인 흠결로 소소하게 까이는 거랑 정치적인 아젠다에서 붙들려 굴다리로 끌려들어 가는 거랑 같을 수는 없다, 이마리야.
[그렇다면 그나마 만만하게 역시 전쟁반대겠군.]
···전쟁?
[뭘 놀라고 있는 건가? 이미 루이 카페는 파리를 등진 채 적국 오스트리아에 망명하려 시도했고, 실제로도 동생 루이는 탈출에 성공했네. 더하여 총사령관 라파예트는 국왕을 보호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에 화살을 돌리려 했고, 우리가 추대한 오를레앙공의 현 직함은 엄연히 전시 수상일세.
이제 라파예트는 전쟁을 통해 제 쓸모가 아직 남아있음을 입증하려 들 거고, 오를레앙공은 전시 수상으로서의 직권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원하겠지. 언제, 어떤 핑계로 전쟁이 시작될지는 몰라도 양국 간의 전쟁 위기는 이미 현재진행형이야.]
아니아니, 이 양반이 왜 갑자기 정색이야.
그보다도 전쟁이라는 게 이렇게 쉽게 이야기가 나와도 되는 건가?
전쟁이잖아?
무고한 사람들이 별 웃기지도 않는 이유로 어마어마하게 죽어 나갈 거라고.
물론 나도 혁명전쟁을 생각하고 있긴 했는데 이렇게 아무 준비도 안 되어있는 상태에서 무작정 꼬라박자는 건 아니었다.
아니 도대체 당장 내전 터질 뻔한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전쟁 타령인데?
[···이 친구야, 도대체 얼마나 평화로운 시대에서 온겐가.]
하지만 집주인은 오히려 그런 내가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왜 우리 프랑스가 기사의 나라겠는가? 왜 이 유럽의 봉건 군주들을 상징하는 것이 책이나 서류뭉치가 아니라 검과 갑옷이겠는가? 자네 나라, 자네 시대는 어떤지 몰라도 내가 살아가는 유럽의 전쟁은 군주나 기사가 제 권력과 명예를 뽐내기 위한 정치적인 행사에 불과하네. 그래, 자네의 표현을 빌리자면 스포츠라고 해도 되겠군.
지금쯤 트루아의 루이 카페는 어서 전쟁이 시작되기만을 고대하고 있을 걸세. 전쟁에서 이긴다면 조금이나마 권위가 회복될 테고, 패하거든 의회에 모든 책임을 넘기고 정치 일선에 복귀할 수 있을 테니까. 지금 이 나라에 전쟁을 그렇게 두렵고 꺼림칙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건 자네 뿐일 거야.]
오, 18세기란.
이런 18섹.
정말이지 제정신들이 아니다.
누군가 전쟁이란 정치의 연장선이라고 말하긴 했는데 무슨 내가 여의도 굴다리 끌고 가는 감각으로 전쟁을 터트리려 하는 게 진짜 맞냐?
아니 오스트리아는 영국 같은 해적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유럽 대륙의 패자라며?
아무리 프랑스가 유럽중화 소리 듣는다지만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란 소리잖아?
왕국군이 건재하던 시절에도 끝내 완전히 압도하진 못했던 호적수를 상대로 국민위병이나 민병대만 믿고 싸움을 거시겠다?
[말했잖은가. 저들에겐 전쟁의 승패 따윈 아무래도 좋을 거라고. 전쟁이라는 스포츠 자체가 귀족과 봉건 질서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한 축제고, 나아가 혁명을 잠재우기 위한 비장의 한 수인걸세.]
미친놈들.
완전히 쳐 돌았다.
아니 진짜로 헛되이 죽어 나갈 사람들 생각은 안중에도 없나?
최소한 몇 년에서 10년 정도는 내실을 다질 생각부터 해야지 직전까지 국왕이 탈출하네 마네 내전을 하네마네 하던 놈들이 당장 지금부터 전쟁 준비를 시작할 거라고?
보아하니 막시밀리앙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또 인명피해라는 요소를 빼버리면 그럭저럭 해볼 만한 일 같아서 더더욱 기가 막혔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농노는 사람이 아니었구나.
그나마 한번 들고일어났던 파리 시민들이나 좀 귀하지, 진짜 전쟁이 시작되면 죽어 나갈 절대다수의 농민들 걱정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저들에게 있어서 농노란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며 세금을 바치고 전쟁이 일어나면 더욱 많은 세금과 목숨을 가져다 바칠 가축일 뿐.
인권이란 날 때부터 하늘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우리가 만들어가야 하는 존엄한 무언가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전쟁을 막아야지.]
그래, 동감이다.
내가 뭐 전쟁 그 자체를 이 지구상에서 추방하자는 것도 아니잖은가.
물론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최선이겠지만, 그런 신념적인 반전주의는 평생 원외투쟁 할 투사들의 몫이지 원내 의원인 우리가 매번 반전론만 들먹였다간 매국노라고 몰리기 십상이다.
그리고 혁명 수출이나 산업화의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봐도 언젠가 한 번쯤 전쟁하긴 해야 하겠지.
하지만 그건 사전에 철저히 준비해서, 가급적 적은 인명피해로 무고한 이들의 고통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지금처럼 면피를 위하여, 봉건귀족들의 영원불멸할 권세를 위하여 아무렇게나 시작되는 전쟁은 결단코 사양이었다.
[그래, 이제 좀 말이 통하는군.]
이 양반이 또 언제는 말이 안 통했다는 듯이 구네?
듣는 정신기생체 섭섭하게시리.
거 생사람 몸에 들러붙은 잡귀기로서니 이렇게 푸대접하셔도 되는 거요?
[그거야 집주인 마음 아니겠나. 정 마음에 안 들면 내친김에 구마의식이나 받으러 가세나. 누가 구마 당할지야 불 보듯 뻔하지만.]
···젠장, 입 닥쳐 막시밀리앙 주제에 팩트로 덤비다니.
예전엔 휘둘리기만 하더니 갈수록 한마디씩 툭툭 반격해오는 게 꽤나 매섭다.
하기야 같이 지내온 시간이 있는데 서로 영향을 받는 게 당연한 건가?
지혜의 박민혁, 혓바닥의 로베스피에르.
우린 둘이서 하나니까.
***
트루아.
"정녕 파리에서는 아무런 기별도 없는가?"
우울한 얼굴의 루이 16세가 시종을 보챘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독촉이었다.
이미 난처한 얼굴을 한 시종의 모습만 봐도 긍정적인 소식이 있었을 리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국왕은 애꿎은 시종들만 달달 볶았다.
차마 그들을 호위-아니 억류한 트루아의 군인들에게 호되게 굴 수는 없었으니 별수 없는 일이라면서.
"어허, 이게 대체 어쩐 일이란 말인가."
결국 오늘도 국왕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다.
왕권이란 신이 내린 신성한 것이거늘, 어찌 국왕을 섬겨야 할 병사들이 그와 그의 일가를 이렇게 포로처럼 다룰 수 있다는 말인가.
정녕 이 트루아의 별장이 그들의 감옥이란 말인가?
무엄한 폭도들, 간사한 모리배들의 마수로부터 도망쳐 처가의 도움을 받아 왕국을 바로 세우려 했던 것이 그들의 국왕을 여기까지 욕보이고 감금할 적법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못된 역적 놈들."
루이 16세는 무력감에 치를 떨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 역적들이 무슨 논리로 이와 같은 폭거를 정당화할 생각인지 이해할 수 없었을뿐더러 이해할 생각도 없었다.
결국 어떤 변명을 대건 간에 저들은 신성한 왕권을 침범하려는 역적이고, 그는 다만 하늘이 끝내 돕지 않은 탓에 고초를 당하고 있을 뿐인 선량한 피해자였다.
그러니 이 프랑스에 정의가 아직 살아있다면, 전지전능하신 창조주께서 이 끔찍한 작태를 보고 계신다면 기필코 의기 있고 용맹한 기사들이 그들 일가를 구하러 달려와 줄 터.
오직 이 헛된 희망만이 심약한 루이 카페가 인질로서의 나날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심지요, 원동력이었다.
벌컥!
"폐하!"
순간 문이 활짝 열리며 누군가 그의 감옥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기어이 그날이 왔구나!
겁에 질린 루이 카페가 세 걸음 뒤로 물러날 즈음.
"오라비께서 마침내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루이 카페는 어느덧 네 아이의 어머니가 되고서도 그 발랄함을 조금도 잃지 않은 목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그녀가 제 사랑하는 아내이자 프랑스의 국모임을 눈치챘다.
저 무엄한 역도들이 그들을 트루아에 가두고서도 차마 죄인이라 하지는 못하고 국왕 일가는 현재 요양 중이라 둘러댄 덕택이었다.
"···그대였구려."
그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루이 16세는 아내가 건넨 밀지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사전 설명은 필요 없었다.
언제 어디에 역도들의 세작이 눈과 귀가 숨어있을지 모르는 이상 제아무리 사적인 자리라도 대화보단 필담이 안전했다.
짐이 곧 프랑스라고 자신하던 태양왕의 권세는 어디 가고 프랑스의 국왕이 이리도 초라해졌다는 말인가.
또다시 참담한 기분에 눈앞이 어지러워지던 찰나.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동맹 체결.】
단 네 단어.
그거면 족했다.
"경축드리옵니다."
그의 발랄한 아내가 애써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한마디 건넸다.
루이 또한 애써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밀서를 불태웠다.
과연 정의는 살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