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154)

가짜 프랑스인

[···이것도 함정인가?]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로 봐선 아니다, 에 걸고 싶다.

솔직히 시기가 너무 짠 듯이 맞아떨어져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의 100%라고 봤었는데, 이게 함정이기엔 우리가 생각할 시간을 너무 많이 주고 있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잠깐, 그 첩보 확실한 건가? 듣자 하니 아직 동맹이 확실히 체결된 것도 아니잖은가! 도대체 이 촌극은 누가 사주한 거야!"

"워워, 다들 진정하시오. 진작에 예견되었던 일이잖소! 아무렴 폐주가 믿는 구석 하나 없이 일을 키웠을까? 그 작자는 처음부터 저들과 한패였던 거요!"

일단 저 왁자지껄한 우익진영만 봐도 그렇다.

우리 쪽이야 원체 인맥이 부실해서 이런 대외첩보에 눈이 어두울 수밖에 없다고 쳐도 저쪽은 나름 귀족들이고 사교계에서 이래저래 엿들은 게 있을 텐데도 혼란 그 자체다.

혼란의 방향성도 설마하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라기보다는 왜 하필이면 지금이라는 느낌.

무엇보다 고작 나 하나 잡자고 청문회로 라파예트 파벌을 정리할 기회를 날려버리는 건 너무 근시안적인 실수다.

아직 청문회가 열리기도 전에 라파예트가 의회에 총구를 들이밀고 오를레앙공이 전시 수상으로 우뚝 서며 전면적인 파벌 개편에 착수할 절호의 기회와 명분을 걷어찬다?

그러다가 또 훗날에라도 라파예트가 의회의 뒤통수를 겨누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일부러 날 엿먹이기 위한 함정을 판다 고쳐도 최소한 라파예트 파벌을 확실히 숙청하건 흡수한 다음이지, 청문회 그 자체를 무산시키는 건 글쎄올시다.

[그렇다면 그냥 피차 지독하게 운이 나빴다는 거군.]

그것도 모르는 일이다.

좌우지간 이건 좌우를 막론하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고, 이렇게 되면 사전 준비보단 임기응변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다.

나 혼자 저쪽에서 작심하고 준비한 스트레이트를 막고 받아치는 것보다야 공평하게 양쪽 모두 어퍼컷을 얻어맞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거지.

중요한 건 이 어퍼컷을 누가 왜 날렸냐가 아니라 이제부터 어떻게 게임을 풀어나갈 것이냐, 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말이다.

"아마 사실일 겁니다."

상석에 선 오를레앙공이 선수를 쳤다.

"저 청년의 신분은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저희 집안사람이니 응당 제가 책임지는 게 맞겠지요. 여러분들을 놀라게 할 생각까진 없었습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일 없도록 주의 시켜두겠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꾸벅.

한마디 뱉고서 백 마디 꾸중을 듣고 있었던 전령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럼 이제 우익측에서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우익 측 영수가 고용한 사람이라는데 어쩌겠어.

···아니 그보다도 이게 오를레앙공이 꾸민 일이라고?

[그런 것치곤 왕당파들도 우왕좌왕하던데.]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그냥 청문회고 뭐고 제 직권으로 라파예트 파벌에 자비를 베풀어주기로 한 건가?

그랬다간 제아무리 저 인간이 공작이라도 그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텐데.

차라리 좌익인 내가 나서면 몰라도 사교회에서 오랫동안 알고 지냈을 오를레앙공이 독단적으로 라파예트를 용서해주면 처음부터 짜고 친 거 아니냐는 게 합리적인 의심이 되어버리잖아.

[···흠, 혹시 어젯밤이나 오늘 아침 사이에 급히 정해진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임기응변이라고?

[그래. 대외첩보라면 이 자리에 모인 의원 중 제일가는 오를레앙공이니 누구보다 빠르게 이 정보를 손에 넣었겠지. 그럼 제아무리 청문회를 서둘러도 청문회 도중에 동맹 체결이라는 급보가 파리까지 전해질 거라는 점도 익히 짐작했을걸세.]

청문회 도중에 라파예트를 급히 용서해주느냐.

아니면 청문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폭탄을 터트려서 혐의를 뭉개버리느냐.

[아마 오를레앙공으로서는 그나마 의회의 권위가 덜 손상되는 선택지를 고른 거겠지.]

···그럴싸하군.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모처럼 의회가 군부를 무릎 꿇린 상징적인 사건이 될 청문회가 거꾸로 군부의 신성불가침과 필요성을 부각하게 되는 것보단 그냥 청문회를 하지 않는 게 맞긴 하다.

이러면 자연스럽게 이번 첩보를 사전에 확보한 1등 공신인 오를레앙공이 전시 수상으로서 전쟁 위기임을 부각하며 준전시체제로 넘어갈 명분도 쌓이니까.

다만 이제부터 구사일생한 라파예트 파벌이 더욱 의기양양해질 거라는 점, 그리고 소외당한 우익의원들이 오를레앙공에게 앙심을 품을 거라는 단점이 있긴 할 텐데.

[그거야 한 파벌의 영수라면 당연히 감당해야 할 몫이지.]

그래, 그 말이 맞다.

평소엔 사리더라도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선 본인이 한번 독박도 써줘야 권위가 서지.

"참으로 공교롭군요."

때마침 콩도르세 후작이 상석에 선 오를레앙공을 노려봤다.

"라파예트가 청문회에 출두하겠다고 약속하기가 무섭게 전하께서 부리는 시종이 이 신성한 의회에 난입하다니."

"아직 교육이 부족한 아이입니다. 후작께서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길."

"어련하시겠습니까. 라파예트 후작은 참으로 이 시대의 풍운아로군요."

오우야, 살벌한 거 봐라.

비단 콩도르세 후작만이 아니라 좀 젊거나 허름한 차림새의 귀족들은 다들 죽일 듯이 오를레앙공을 노려보고 있다.

하기야 영수로서 필요한 일이긴 했지만 그만큼 호감이 쌓일만한 일이기도 했지.

반대로 연배가 좀 있고 부티나는 친구들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거 보면 귀족사회 내에서도 파벌이 꽤나 갈려있는 모양이지?

덕택에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벌떡.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당장 트루아의 루이 부부를 파리로 압송해야만 합니다."

이번엔 당통이 치고 나갔다.

"그들이 이번 일을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알고 있었다면 당연히 지난 도피 사건과 연결하여 깊이 있는 조사에 나서야 할 것이고, 모르고 있었다면 더더욱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파리에서 직접 감시·감독해야만 합니다."

"지금 사자의 심장에 기생충을 직접 심어 넣자는 말씀이십니까?"

"물론 그렇게도 들리겠지요. 하지만 존경하는 의원님, 이미 파리를 탈출했던 부부가 트루아에서 달아나질 못하겠습니까? 아예 코르시카 같은 외딴섬에 유배를 보낼 게 아니라면 트루아보다는 파리에서 직접 감시하는 게 안전할 겁니다."

으음, 모로 봐도 정론이다.

더하여 급진공화파나 할 수 있는 이야기고.

당통 같은 온건파가 할만한 어투는 아니긴 했는데, 저쪽도 선전포고를 던진 만큼 나름 칼을 갈았다는 거겠지.

하지만 그보다도.

[···왕당파 측에서 전혀 호응이 없는데.]

내가 봐도 그렇다.

하기야 지금 오를레앙공의 공식적인 직함은 말이 좋아서 전시 수상이지 사실상 프랑스 왕국의 섭정이니 이제 와 국왕을 불러와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긴 한데, 여기까지 질색할 줄은 몰랐다.

이미 자기들의 왕은 오를레앙공이지 루이 카페는 그냥 폐주다 이거지?

안 그래도 라파예트파다 오를레앙파다로 나뉠 판에 이제 와서 루이 16세파까지 끼워 넣어주긴 싫은 게 당연하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이 프랑스의 국왕이었을 텐데 참.]

벌떡.

"어서 국왕 폐하를 파리로 모셔 옵시다."

[이봐!!!]

어휴, 요건 못 참지.

오를레앙파, 라파예트파, 루이16세파 우익삼분지계라니 아주 군침이 싹도네.

뭐 이미 파리를 등진 마당에 루이16세파가 과연 얼마나 남았을지야 사실 별 기대도 안 되긴 하는데, 그래도 꼴에 국왕이니 혼자서라도 고춧가루 부대 노릇 정도는 해주지 않겠어?

"로, 로베스피에르 의원. 그게 도대체 무슨-."

"당통 의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만일 수상께서 말씀해주신 내용이 정녕 사실이라면, 지금 우리 프랑스는 유사 이래로 최악의 안보 위기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두 앙숙이 군사동맹을 체결했다면 그게 과연 누구를 겨냥한 동맹일까요? 러시아? 오스만 튀르크? 아뇨!"

[전날에 우리가 나설 일 아니라고 협의했잖은가!!!]

입 닥쳐, 막시밀리앙.

"결국 우리 프랑스 왕국이 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여기까지 말했으면 다들 가슴으로는 거부해도 머리로는 이해했을 거다.

이게 그냥 전쟁 위기건, 아니면 진짜로 곧장 전쟁을 치를 판이건 현직 국왕이 저 못난 루이 16세인 이상 어쩔 수 없이 언젠가는 파리로 불러올 수밖에 없다는 거.

당장 국왕도 없이 뭔 수로 동원령을 내리려고?

어지간한 일이야 의회랑 섭정이 다 알아서 처리할 수 있겠지만 전쟁은 이야기가 다르다.

징병이 되었건 징발이 되었건 무조건 국왕이 도장을 찍어줘야 할 것이고,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의회의 퇴위 권고를 씹어버린 이상 현재 프랑스 왕국의 공식적인 국왕은 트루아에 머물고 있는 루이 16세.

파리로 끌고 온 다음 공식적으로 국왕을 갈아치우건, 진짜로 단두대로 보내건, 아니면 도장만 찍는 꼭두각시로 살려두건 간에 무조건 한번은 국왕을 파리로 데려와야 한다.

"헌데 이 전대미문의 국난 앞에서 우리 프랑스인 간의 사소한 정치적 견해차가 대체 무슨 대수란 말입니까?"

그렇다면 어차피 한번은 일을 치를 거 우리가 총대를 메는 게 맞지.

안보팔이는 빨갱이가 왕당파 행세해도 넘어가게 해주는 전가의 보도니까.

이미 라파예트가 쳐들어왔을 때 앞장서서 좌우합작 외친 전적도 있으니 다들 짜증은 좀 내도 트집 잡을 순 없을 거다.

그때는 입 꾹 다물고 있었으면서 왜 똑같은 이야기하는데 괜히 트집잡냐고 반박당할 테니까.

[···하아.]

"그러니 친애하는 의원 여러분."

그러니까 집주인의 한탄쯤이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자.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지 뭘.

"이 의회군은 이만 돌려드리겠습니다."

이 돌려준다는 어감이 중요하다.

어차피 내가 모이라 하면 알아서 몰려들 사람들이지만 아무튼 이제 공식적인 총사령관 자리는 궐석이다, 이거거든.

"그날의 기적으로 이미 우리는 하나가 되었건만 이제 와서 뭣 하러 국민위병과 의회군을 구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다들 모처럼 표정이 밝아졌으니 이번엔 오를레앙공에게 폭탄을 던져줄 차례다.

"그러니 각하, 어서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우리 프랑스의 안보가, 국민의 생명이 우리 의회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겸사겸사 책임 회피할 단서 하나 넣어주고.

"저 시건방진 게르만 놈들이 두 번 다시 우리 갈리아를 우습게 보지 못하게 본때를 보여줘야지요."

마지막으로 우리 조상 골족까지.

크, 완벽했다.

이만하면 명예 프랑스인이었다.

짭프랑스인 나보도 이거 들었으면 기립박수 쳐줬다.

"""·········."""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래?

우리 공화파 인사들은 애써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참으려 하고 있고 왕당파. 특히 고위 귀족들은 다들 얼굴이 썩어들어가고 있다.

뭐야, 무슨 일인데?

[···우리 프랑스의 전신 프랑크 왕국은 게르만족이 세운 나라일세. 현 프랑스의 왕족, 귀족들은 그 프랑크 왕국의 후예거나 후예를 자칭하고 있고. 그러니까 자네는 지금 그 시건방진 게르만족에게 골족 농노들을 위해 동포들과 맞서 싸우라고 한 꼴이야.]

아항, 그랬구나.

난 또 프랑스=우리 조상 골족만 생각해서 당연히 쟤네도 골족일 줄 알았지.

그런데 이거 따지고 보면 국민은 한국인인데 귀족들은 일본인, 중국인이라는 꼴이잖아?

흠.

'이봐.'

[또 무슨 일인가.]

'역시 단두대가 답이었던 거 아냐?'

난 거들먹거리는 양반집 종가가 마오 씨거나 도조 씨면 별로 잘못한 거 없어도 단두대 마려울 것 같은데.

집주인 놈은 답하지 않았다.

내 멋대로 긍정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

파리시.

"···빌어먹을."

쿵.

조금 전 복귀수속을 끝낸 나폴레옹은 외진 골목에서 홀로 벽을 걷어차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국난을 틈타 고속 승진은커녕 의용군 중령 자리를 제 손으로 반납하고 정규군 중위로 역진급을 자처한 격이 되다니. 

멍청한 자식,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촌뜨기, 세상을 다 가진 양 착각하는 애송이 놈.

이러려고 빈털터리를 자처하며 정든 고향과 따뜻한 식사를 등지고 온 거냐는 자책만 온통 머릿속에 가득했다.

설마하니 모처럼 칼을 뽑아 든 의회군과 국민위병의 정면충돌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서 수습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파리 시민들은 매일같이 그날의 기적과 기적의 사나이 로베스피에르를 칭송했으나 조금 전 막 파리에 도착한 나폴레옹에겐 이는 저주요, 로베스피에르란 놈은 악마가 따로 없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일생을 건 도박을 박살 낸 개자식.

전쟁의 ㅈ자도 모르는 주제에 쓰잘데기없이 운만 좋아서 혼자 거들먹거리며 온갖 낯간지러운 소린 다 지껄인 온실 속 화초.

그게 지금 이 순간 나폴레옹의 머릿속에 아로새겨진 로베스피에르라는 사내였다.

'이제 어쩐다.'

이제 와서 고향으로 돌아가기는 글렀다.

애초에 휴가에서 복귀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휴가를 내주겠는가.

그리고 설령 정겨운 코르시카로 돌아가봤자 아무도 환영해주지 않겠지.

그때는 이게 저 높이까지 이끌어줄 금줄이라고 믿었으니 아무 망설임 없이 절연을 각오했던 거지만, 뒤늦게 후회가 앞섰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다못해 정식으로 부모님께 파리로 돌아가 보겠다고 전하고 올걸.

지금 같은 상황에선 고작 정규군 중위나 하려고 안부 인사도 없이 갔냐며 가문의 구박덩어리로 전락할 게 뻔했다.

차마 사나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돌아온 탕아 소리나 들을 수는 없었다.

'일단 무조건 의회군에, 그것도 로베스피에르라는 놈에게 가까운 줄을 대봐야 한다.'

고찰은 짧았고, 결론은 신속했다.

어차피 돌아간다는 선택지가 막힌 이상 그에게 남은 길은 이것뿐이었다.

하다못해 지금처럼 피는 안 흘렀더라도 라파예트가 이겼다면 나폴레옹은 단지 정규군 소속 군인이라는 점 하나만으로도 출세 가도가 열렸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히려 의회가 승리한 이상 마이너스가 되면 되었지.

머리가 굳은 놈들은 일단 전쟁 위기, 혹은 전쟁만 터지고 나면 모든 게 사건 이전으로 돌아오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겠지만 어림도 없다.

바스티유 습격 사건을 시작으로 샹 드 마르스 행진까지 이 일관적이고 선형적인 방향성을 보라.

지금 프랑스 왕국은 의심할 여지 없이 민중의 힘이 극대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번 일로 군부는 파리 시민들에게 잠재적인 위험 요소로 낙인찍혔고, 반대로 의회-개중에서도 로베스피에르는 민중의 영웅으로 자리 잡았다.

저 의회의 같잖은 책상물림들이 또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야 이제 막 상경한 나폴레옹이 알 턱이 없었지만, 지금처럼 민중의 힘이 계속 극대화 되다 보면 결국 끝에는 로베스피에르가 이 나라의 정점에 서게 될 거다.

곧, 혁명의 완승이다.

'앞으로는 무조건 급진적인 공화파 인사로 인지되어야 한다. 다소 위험한 영역에 걸치더라도 어쩔 수 없어. 나 같은 코르시카 촌놈이 집안과 연을 끊고 파리에서 출세하려면 죽자 살자 덤벼야 해. 그러다가 운이 좋으면 로베스피에르, 그 샌님의 눈에 띌 수도 있을 테고.'

자, 그래서 여기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고.

문제는 어떻게 로베스피에르의 사람이 되냐는 건데.

신문에 투고를 내볼까, 책을 써볼까, 거리로 나가서 서투른 프랑스어로나마 친 혁명파 연설을 해볼까.

머릿속으로 온갖 꿍꿍이들이 스쳐 지나가던 찰나.

"인민을 위하여! 혁명을 위하여! 프랑스를 위하여! 여러분, 우리의 영웅 로베스피에르를 위하여 우리 급진당과 함께 싸워주십시오!!!"

때마침 허름한 복장의 남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행진하는 모습이 눈에 잡혔다.

급진당?

'저거다.'

그냥 로베스피에르라는 이름을 빌린 갱단일 수도 있겠지만, 상관없다.

그런 잡찌끄레기 갱단이라면 고작 중위밖에 안 되는 나폴레옹이라도 얼마든지 먹어 치울 수 있을 거다.

반대로 좀 규모가 있는 결사라면 조금이나마 권력 핵심에 가까워질 테고.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로베스피에르의 직계라면-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주신 기회다.

덥석.

"어엉?"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 급진당이라는 곳에 가입할 수 있겠소!"

그럼 이 이상의 고민은 필요 없다.

고민이 길어질수록 망설임만 늘어나는 법.

설령 그게 잘못된 결정일지라도 신속함이 낫다.

하여 나폴레옹은 언제나처럼 신속하게 거렁뱅이들에게 다가가 사내의 손을 움켜쥐었고.

"아, 뭐야! 상퀼로트 동지시구만! 급진당에 온 걸 환영하오!"

"···예?"

튼실한 몸뚱어리만 믿고 맨몸으로 파리로 상경한 구질구질한 동류 취급받으며 금세 이 거렁뱅이들과 친해졌다.

이튿날 그가 정규군 장교정복을 입고 나타났음에도 아무도 정규군 신분을 믿어주지 않은 건 물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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