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154)

세작

파리 전역에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동맹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지기까진 불과 보름도 필요하지 않았다.

"아니 그 감자나 먹는 놈들이 오스트리아랑 동맹을 해? 왜?"

"그래. 그치들 소문난 앙숙 아니었나? 내 기억에 전쟁도 여러번 했을 텐데."

"왜긴 왜야. 보면 모르겠어? 당연히 우리 프랑스를 침공하기 위해서지!"

"이 썩은 양배추 놈들이! 우릴 도대체 얼마나 우습게 알았으면 튀르크랑 전쟁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전쟁 준비야?!"

그만큼 자크 루 동지의 길거리 연설이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 걸까, 아니면 파리 시민들의 앙숙 오스트리아를 향한 적의가 그만큼 거대했던 걸까.

아마 둘 다였겠지만 내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덕분에 저쪽에서 뭔가 안 좋은 소문을 퍼트리려고 들어도 이 전쟁 위기라는 쓰나미가 찻잔 위 태풍으로 만들어버렸으니까.

앞서 한차례 우익 측에서 퍼트린 낭설 탓에 한동안 의회에서 입 꾹 다물고 묵언수행을 해야 했던 나로서는 기꺼울 따름이었다.

"그럼 뭣들하고 있는 건가? 어서 무기를 들고 혁명과 조국을 지키러 나가야지!"

"아니 이 사람아, 뭘 벌써 호들갑이야? 벌써 전쟁이 터진 것도 아닌데!"

"그래, 그래. 무엇보다 지금 파리엔 마법의 주둥아리가 있잖은가?"

"아아, 그 로베스피에르라는 친구? 으하핫! 맨날 맥주나 퍼마시던 친구들이 난생처음 달디단 와인을 배불리 먹고 돌아가겠구만!"

"큭큭큭! 전쟁이 아니라 와인관광이었네!"

겸사겸사 내 이름값도 하늘을 뚫을 듯이 치솟고 있고.

보통은 전쟁영웅 라파예트가 언급되는게 맞겠지만 그 양반은 직전에 보여준 추태가 있고, 무엇보다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고 이겼다는 점 때문에 더더욱 우리에게 초점이 맞춰지는 모양이었다.

어느 시대건 죽거나 다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다들 농담처럼 말하고 있지만, 진짜로 전쟁보단 와인관광이나 하고 돌아갔으면 하는 게 저 사람들의 솔직한 심정일 거다.

함부로 입 밖에 내면 겁쟁이 취급 받을까 봐 농담처럼 덧붙이고 있을 뿐.

"토마알렉상드르 뒤마 대령입니다."

척.

여하튼, 상념은 여기까지로 하자.

지금은 카미유가 불러준 귀한 손님을 맞이해야 하니까.

테라스에서 혼자 앉아있는 날 보자마자 군례를 올리는 가무잡잡한 장교의 등장에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라고 합니다."

척.

군례 대신 오른손을 내밀며 악수를 권했다.

저쪽은 군인인지 몰라도 난 아니거든.

다들 물라토와 살갗이 닿는 걸 싫어해서 악수 경험이 많지 않을 거라는 계산도 물론 있었고.

이걸로 호의를 살지 놀라움을 살지는 몰라도 마이너스가 될 리는 없다.

"···어."

빙고.

얼떨떨한 눈치로 내 오른손을 빤히 바라보는 뒤마 대령에게 말했다.

"안 잡아주실 겁니까? 제가 보기와는 달리 풀로 붙인 몸뚱이라 좀 힘드네요."

"아, 아닙니다. 파리의 영웅과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결국 뒤마 대령은 다급히 내게 다가와 손을 마주 잡았다.

그렇다면 초전은 내가 가져갔다고 봐야겠지.

"피차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 우선 앉으시죠."

여전히 곤혹스러운 눈치의 뒤마 대령을 테라스에 데려와 앉혔다.

비록 귀족들이 좋아할 만한 화려함은 없지만, 카미유가 오직 오늘의 만남을 위해 마담 데물랭께 싹싹 빌어서 대절해준 자리인 만큼 부족함 없이 세련되고 정갈한 자리였다.

나도 잘 몰랐는데 아무래도 데물랭 일가는 마담이 경제권을 꽉 쥐고 계신 모양이더라고.

아무튼 뒤마 대령 같은 군인에겐 너무 화려한 자리보단 이편이 백배는 더 나을 거다.

"우리 급진당에 관심이 많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자, 초전을 가져갔으니 내가 시작해야겠지.

각자 커피를 한 모금, 두 모금씩 머금고 슬슬 목을 축였으니 곧장 본제로 들어가 보자.

"그렇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속공.

"보다시피 저는 물라토입니다. 사생아지요. 제가 만민평등을 주장하시는 의원님께 호감을 느끼게 되는 게 그리 이상한 일입니까?"

"물론 정당하고 말고요."

"전 저들의 위선을 평생에 걸쳐서 지켜봐 왔습니다. 그 야만성, 탐욕, 신앙심이니 명예니 하는 거추장스러운 가면에 감추어진 색욕까지."

뒤마 대령이 치를 떨었다.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죄송합니다. 좀 좋지 않은 일들이 생각나서."

"괜찮습니다. 충분히 이해하고 말고요."

"여하튼, 전 의원님께 동정이나 구하려는 게 아닙니다. 전 이 나라와, 사회와 맞서 싸우기 위하여 급진당을 찾아온 겁니다. 저야 운 좋게 이 자리까지 승승장구할 수 있었지만, 장차 태어날 제 아들에게까지 이런 저주받은 인생을 물려줄 순 없습니다."

이것도 사실인 것 같군.

21세기인 내가 봐도 충분히 혼혈인이 겪었을 법한 이야기고, 또 사고방식이다.

이따금 야심이 좀 보이긴 하지만 일단 첫인상을 평가하자면 타고난 태생 탓에 이래저래 좀 거칠어지긴 했어도 올곧게 살아가고 싶어 하는 군인상이다.

올곧은 게 아니라, 올곧게 살고 '싶'은 거다.

"모쪼록, 제게 급진당과 함께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의원님께서 만들어가실 미래를,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서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미래를 위하여 싸우고 싶습니다."

"아유, 그야 물론이지요."

이 점을 놓치면 자칫 뒤마 대령이라는 사내와 혼혈 태생에 속아 넘어가기 십상이겠지.

나는, 우린 아니다.

우선 저쪽에서 편히 있을 수 있도록 넉살 좋은 미소를 지어주자.

"그런데, 라파예트 후작께서는 잘 지내고 계십니까?"

"···예?"

멈칫.

순간 뒤마 대령의 얼굴이 굳어졌다.

곧장 펴지긴 했지만 그래봤자지.

"저번 샹 드 마르스 행진 때 후작께 승마술을 배우기로 했는데 요즈음 일이 꼬이면서 제가 먼저 찾아가기가 곤란해졌거든요. 그래서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 대신에 후작께 일정을 물어봐 주십사, 하고 운을 떼봤습니다."

"저기,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라파예트 후작께서 보내신 거잖습니까?"

직구.

이번에야말로 뒤마 대령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묵비권을 행사하시겠다?

"전 절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어림도 없지.

"전 민중의 영웅이지 군부의 영웅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멋대로 절 파리의 영웅이라고 띄워주고 있지만, 정말로 모든 파리 시민들이 절 영웅이라고 생각할까요? 글쎄, 아니죠."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뒤마 대령이 입술을 핥으며 덧붙였다.

"전 군인이기 이전에 물라토입니다."

"우리 급진당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연대장까지 올라간 사람이 군인이 아니라고요?"

농담도 잘하시지.

물론 뒤마 대령이 혼혈인으로서 차별받았던 것도, 급진당의 이상에 개인적인 호감을 느낀 것도 사실일 거다.

하지만 토마알렉상드르 뒤마는 겉으로 보기에 서른 남짓한 젊은 나이에 연대장까지 올라온 출세한 군인.

급진당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과는 별개로 이제 와서 줄을 갈아타기엔 본인이 잡은 줄이 이미 저 하늘 높이 승천하고 있는 금줄이다.

날 만나기 전에 이미 사생아나 피부색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는 은사를 만나 제 타고난 재주를 여실히 살리고 있었다는 소리지.

그렇다면 그 은사가 과연 누굴까?

라파예트 후작 본인인지, 아니면 그 측근인지는 몰라도 일단 군부 내 이너서클의 일원일 거라는 점만큼은 확실하다.

내가 무슨 국방위원장도 아니고 한창 출세 가도를 걷고 있는 군인에겐 그냥 최근에 몇 번 이목을 사로잡았던 일개 국회의원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거물일 거란 말이다.

"당신은 우리 급진당에 가입하기엔 너무나 가진 게 많은 사람입니다."

차라리 나보라면, 지금은 일개 장교 나부랭이일 코르시카 촌뜨기라면 당원명부에 이름을 올릴 수도 있다.

나보가 제아무리 재능있는 군인이라도 일단 그 재능을 살리려면 윗선에 댈 연줄이 있어야 하는데, 걘 지금 그런 게 전혀 없을 거거든.

그렇지만 연대장이라면 장성을 목전에 두고 있는 몸.

고작 물라토라는 편견으로 이 박민혁이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어림도 없지.

"후작께서 당신에게 뭐라고 지시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염탐하라고 하셨을지, 사보타주를 지시하셨을지, 힘을 실어주라고 하셨을지."

"···허."

"하지만 어떤 보상을 약속하셨을지는 알 것 같습니다."

별.

군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꿀 영광의 자리.

"우리 솔직해집시다. 대령님은 우리 급진당을 발판 삼아 비백인계 최초의 장성이 되고 싶으셨던 거 아닙니까?"

꿀꺽.

뒤마 대령은 답하는 대신 침을 삼켰다.

정곡을 찔린 거겠지.

아직 젊어서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지, 아니면 그동안 물라토라는 점 덕분에 이런 식으로 추궁당한 적이 없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참 알기 쉬운 반응이다.

"아, 안심해주십시오. 뒤마 대령님, 당신을 급진당에서 내쫓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 우리 당원 중에선 당신이 가장 선임이거든.

애초에 지금 군인들이 파리 시민들 앞에서 군부를 망신 준 날 좋아해 줄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이 친구를 괜히 내쫓아봤자 저쪽에서 새로운 세작을 침투시키려 들 게 뻔하고.

이미 발견된 세작은 세작으로서 경계할 가치도 없단 말이지.

"그냥 라파예트 후작께 언제쯤 저택에 찾아가도 될지 저 대신 여쭈어주시기만 하면 족합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입장이 입장인지라, 이런 가벼운 만남만으로도 피차 곤란해질 수 있거든요."

"···의원님께서는 절 물라토라 생각하지 않으시는군요."

"아뇨, 물라토라고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저로서는 감히 짐작도 하기 어렵지만, 아직 어린 소년이 세상을 향해 복수를 각오할 정도로 끔찍한 나날들이었겠지요."

하지만.

"제게 동정이나 구하려고 찾아오신 게 아니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렇다면.

"저도 대령님을 어디까지나 대령님으로 보고 또 대우해드려야겠지요. 그래서 후작께서 보내신 사람인 줄 알아봤고, 알아본 김에 사적인 심부름을 부탁드리기로 한 겁니다. 이제 설명이 되셨습니까?"

대답은 없었다.

뒤마 대령은 다만 제 앞 잔에 한가득 담긴 커피를 내려다보며 혼자 나지막이 웃음을 터트렸을 뿐이었다.

그의 피부색만큼이나 검고 쓴, 제 동포들의 피땀이 서려있을 커피를.

드르륵.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무언가 결심을 내린 듯한 얼굴로 뒤마 대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즐거운 대화였습니다. 사령관 각하께는 제가 직접, 가능한 한 빠르게 일정을 여쭙고 오겠습니다."

"대령님을 이런 사적인 심부름에 휘말리게 만든 점 정중히 사죄드립니다."

꾸벅.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원래 정치꾼이라는 놈들의 고질적인 직업병이 남 부려 먹는 것인걸요. 모쪼록, 너무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어련하시겠습니까. 커피, 잘 마셨습니다."

그렇게 뒤마 대령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자리를 떠났다.

설마 이 길로 급진당을 탈퇴해버리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커피를 잘 마셨다고 하기엔 입만 살짝 대던데 뭘.

아이고, 저 아까운 커피 어떻게 하나.

버릴 수도 없고 그냥 내가 마셔?

[분명히 말해두는데, 난 그런 취향 없네.]

나도 그런 취향 없어.

그냥 해본 소리다.

[그보다도, 어떻게 안 건가? 분명 서류상으로는 아무런 낌새도 없었을 텐데···?]

뭘 어떻게 알긴 어떻게 알아.

흑백혼혈인데 연대장까지 승승장구했다는 게 무슨 소리겠어?

본인의 역량도 역량이지만 제 파벌엔 아주 외골수 충신이었다는 거지.

어지간한 백인 놈보다도 믿음이 가니까 물라토이자 사생아라는 마이너스 요소가 대충 묻히고 찬란한 공훈만 눈에 들어온 거다.

뭐 저런 사람이 아직 졸병일 때 우리 사람이 되어줬으면 엄청나게 든든해졌겠지만-뭘 어쩌겠어.

"저만한 보석에 손때가 안 묻었기를 기대하는 게 도둑놈 심보지."

아무튼 이번 일로 우리 손때도 좀 묻었으니 적당히 용병으로만 쓰거나, 차차 우리 색채로 물들여서 끌어들이거나 중 1택이다.

가능하다면 후자가 더 낫긴 한데, 정 일이 꼬이면 전자로 만족하는 수밖에.

하, 그런 의미에서 진짜 나보야 어디 있니?

제발 저점매수 좀 하자!

이 형이 널 애타게 찾고 있다 진짜!!!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자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건 자네 조국의 흥복일거야.]

그리고 얜 또 왜 이래.

내가 뭘 어쨌다고?

세작을 잡았으면 칭찬을 해줘야지 나 원 참 듣는 정신기생체 서러워서!

아아, 혁명 마렵다아!

***

오스트리아, 빈.

"···저기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루이 16세의 남동생 아르투아 백작 샤를 필리프가 애써 망가져 가는 미소를 고치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니까 지금 프랑스를 저 폭도들에게 양보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소."

신성로마제국의 카이저 레오폴트 2세가 눈살을 찌푸렸다.

"다만 사사로운 정을 우선할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는 거요. 그대들도 익히 알고 있겠지만, 지금 당장 군을 일으키기엔 아국의 사정이 여의치가 않소. 아직 휴전조약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또 새로운 전쟁이라니."

절레절레.

"도대체 우리 제국의 선제후 중 누가 이 전쟁에 동조하겠으며 설령 동참하더라도 내 여동생을 구하기 위하여 그토록 많은 병사들을 보내주겠소. 유감스럽지만, 지금 당장은 때가 아닌 것 같소."

"사정이 여의찮은 건 저 폭도들도 매한가지잖습니까."

샤를 필리프가 침을 튀겨가며 열변을 토했다.

"폐하께서 기억하시는 유럽 제일의 강군은 더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 귀족 장교들이 유럽 전역에 뿔뿔이 흩어졌는데 병사들만으로 무슨 전쟁을 치른다는 말입니까? 설령 제아무리 근육질의 몸이라도 이를 다룰 머리가 없다면 허수아비만도 못한 법입니다."

"으음."

"폐하께서 오라비 된 몸으로 군을 일으켜 프랑스의 국모를 돕겠다고 선언하신다면 그 누가 그 고결한 뜻을 의심하겠습니까? 신성로마제국의 용맹스러운 병사들이 단 한 걸음만 프랑스령에 내딛어도 사방에서 국왕 폐하를 지키려는 충성스러운 신민들이 달려와 힘을 합칠터."

꾸벅.

"모쪼록, 이 유럽의 주인께서 왕국에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굴욕스러운 언사였다.

지난 수 세기에 걸쳐 프랑크 제국의 적자를 겨루며 다투었던 두 나라의 오랜 경쟁 관계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더욱 치욕스럽게 느껴지는 무조건 항복선언이었다.

'하지만 별수 없다.'

그들은 지금 정든 조국에서 내쫓겨 유럽을 떠도는 망명객 신세.

반면 상대는 신성로마제국의 카이저다.

단 1만 명이라도, 고작 1개 군단이라도 원군을 빌릴 수 있다면 그가 못 할 말이 달리 뭐가 있겠는가?

오늘의 치욕은 먼저 고국에 돌아가 폭도들을 효수하고 왕국을 재건한 뒤에 차차 갚아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잠시만 더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하지만 레오폴트 2세는 요지부동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철함을 되찾은 것인가?

그도 아니면 선제후와 중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마음이 꺾이고 만 것인가.

'무능한 놈.'

제 여동생이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데 사나이가 칼을 뽑기를 망설이다니.

저런 우유부단한 놈을 카이저랍시고 섬기는 제국인들이 가엽다며 샤를 필리프는 궁정을 떠나는 내내 속으로 오만가지 저주를 퍼부었다.

'씨도 없는 새끼, 술탄에게 엉덩이나 벌릴 그리스 자식. 로마의 이름이 울겠다, 이 게르마니아 대족장 놈아···!'

덜컥.

"어떻게 되었습니까?"

문이 열리는 즉시 쪼르르 몰려와 그에게 진전을 묻는 망명귀족들의 모습에 샤를 필리프는 또 한 번 한숨을 삼켰다.

이토록 많은 사람이 그에게 기대고 있건만, 카이저라는 놈은 여기까지 와놓고서 전쟁을 망설이다니.

"···카이저께서는 기다리라고 하셨네."

그게 소극적인 부정임을 눈치채지 못한다면 귀족이라 자칭할 자격도 없으리라.

옛 프랑스 귀족들의 낯빛이 일제히 어두워짐을 목격한 샤를 필리프는 남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무력했다.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그 또한 부르봉의 피를 이은 고결한 푸른 피가 한낱 붉은피들의 폭동에 밀려 남의 궁정에 얹혀사는 식객으로 전락하다니.

관절을 뽑거나 끓는 쇳물을 붓는 등 단두대 이전의 사형법 정도로는 제 분이 절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벌떡.

"차라리 저희가 직접 여론을 조성해봅시다."

순간 한 젊은 귀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잊힐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건 정든 고국으로 돌아가야지요! 카이저께서 망설이신다면 우리가 직접 제국의 귀족들을 설득해봅시다! 다들 저희를 동정하고 있으니 모른척하진 않을 겁니다!"

이상론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이대로 잊히는 것보다야 나았다.

만에 하나 잊힌다면 그들은 두 번 다시 공적인 자리에서 프랑스의 귀족임을 자칭할 수 없게 될 터이니.

"그래, 어디 한번 해보세나."

마침내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아르투아 백작 샤를 필리프가 용단을 내렸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양국이 프랑스를 겨냥한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로 협의한 건 그로부터 얼마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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