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통첩
라파예트 저(邸).
"자네도 참 뻔뻔한 친구군."
푸르륵.
승마복 차림의 라파예트 후작이 말에서 내리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날 흘겨봤다.
"자네에게 세작을 붙였다는 걸 뻔히 눈치챘으면서도 이렇게 날 찾아오다니."
"에이, 이 장사하다 보면 이럴 수도 있는 거고 저럴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러십니까?"
진심이다.
암살자도 아니고 고작 세작이었는걸 뭘.
나야 아직 믿고 일을 맡길만한 사람이 카미유나 자크 루 신부님밖에 없으니까 그렇지, 내게 뒤마 대령이 있었다면 똑같이 가서 라파예트 후작을 감시하라고 시켰을 거다.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두라는 말이 있지요. 결국 누가 되었건 두루 가까이 두고 친하게 지내라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각하 같은 국민 영웅이 상대라면 두말할 것도 없겠지요."
"···글쎄, 내가 듣기에 그 격언은 본디 그런 의미가 아닌 것 같은데."
[동감일세.]
입 닥쳐, 막시밀리앙.
"그래도 뭐, 귀하신 손님이 찾아왔으니 어쩔 수 없군."
툭.
후작이 내게 다가와 가볍게 어깨를 쳤다.
"커피와 승마. 둘 중 어느 쪽부터 즐기고 싶은가? 아, 덧붙여서 아직 햇살이 눈 부시니 술은 금지일세."
안사람이 싫어하거든.
뻔한 너스레였다.
아무튼 저쪽에서 먼저 편히 대하고 있으니 나도 편하게 대해줘야겠지.
"그럼 커피부터 하지요."
솔직히 승마는 처음부터 핑계였으니까.
"편하실 대로 하시게."
그걸로 끝.
무더운 태양과 서늘한 여름 바람이 스며드는 야외석으로 안내받고 커피를 한잔, 두 잔째 비우는 동안 우리는 아무런 대화도 없이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나야 뭐, 오늘 로베스피에르가 라파예트 후작의 저택에 드나들었다는 소문만 돌아도 이득이니까 그랬다지만 저쪽은-잘 모르겠다.
청문회야 때마침 전쟁 위기가 터지면서 넘어갔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가택연금당하고 있으니까 이래저래 궁금한 게 많을 텐데 말이야.
그보다 가택연금당한 사람이 뒤마 대령한테는 무슨 수로 지령을 내린 거지?
[뭐, 꼴에 전쟁영웅이니까 이럴 때를 대비한 비상연락망 정도는 준비해둔 거 아니겠나?]
그럴 수도 있겠군.
그렇다면 이쪽에서 떠보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후우-.
우선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양국이 공동으로 우리 프랑스를 겨냥한 최후통첩을 발표했습니다."
직구.
그제야 자꾸만 먼 곳만 내다보던 라파예트 후작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기쁨보다는 의아함으로 가득한 시선이었다.
"···지금 그 친구들에게 그럴 여유가 없을 텐데?"
"피차 마찬가지니까요. 저쪽도 기진맥진하지만, 이쪽이 더 엉망진창이라고 본 거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전개가 빠르네."
끼익.
라파예트가 의자를 내 쪽에 가까이 붙였다.
이걸로 겨우 흐름을 끌어왔군.
"그들이 직접 그 최후통첩에 전쟁, 혹은 선전포고라는 단어를 언급했는가?"
"아뇨."
"우리 프랑스의 외교관을 모욕하거나, 동원령을 발표했는가?"
"아뇨."
다만.
"프랑스의 국왕이 완전히 자유로워질 때까지 필요한 만큼 무력을 포함하여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겠다, 고 했습니다."
"그건 그냥 단순한 수사적 위협이야!!!"
쾅!
라파예트가 있는 힘껏 식탁을 주먹으로 내리찍었다.
"그게 진짜로 최후통첩이라면 필요한 만큼의 무력이 아니라 보다 직접적인 내용과 행동이 동반되었겠지! 그렇지 않다면 그건 그냥 외교적인 압력일 뿐이네! 국왕 부부, 보다 정확히는 왕후마마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하여 조금 강하게 윽박지른 것뿐이야!"
"그럴지도 모르지요."
솔직히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생각하긴 하는데-.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모양입니다."
어차피 전쟁을 시작할 거면 저쪽에서 먼저 명분을 제공했다고 둘러대는 게 나으니까.
뻔히 사정을 알만한 오를레앙공은 물론이고 왕당파 대다수, 그리고 공화파 상당수까지 이걸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모양새다.
오히려 이걸 외교적 수사라고 주장하는 반전파는 나를 포함해서 극소수에 불과했다.
"···왜지?"
라파예트 후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내게 이런 거짓 정보를 전달하는 이유가 뭔가?"
아, 그쪽이었나?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어차피 내가 열심히 해명해봤자 믿지도 않을 테니까.
"여하튼 덕분에 파리는 지금 온통 아수라장입니다."
"자네와 자네 패거리 때문이겠지."
"귀족들을 당장 몰살시켜야 한다고요. 이번 선언의 배후에 망명귀족들이 엄청난 공을 세웠다는 소문이 도는 바람에 애초에 망명도 가지 못하게 잡아 가뒀어야 했다는 초강경론이 힘을 얻었습니다."
침묵.
라파예트는 나의 진의를 어떻게든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듯이 내 얼굴 가죽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그렇게 노려볼 바에야 뒤마 대령 때처럼 군용 비상연락망을 쓰는 게 훨씬 빠르겠지만, 괜히 내게 실마리를 주고 싶지 않다는 눈치다.
어차피 잘 생각해보면 내가 이런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할리가 없다는걸 알 텐데 말이야.
참 군인으로선 어떤지 몰라도 정치인으로선 빵점인 아저씨일세 그려.
"마치 자네는 무고하다고 주장하는 것 같군."
그야 실제로 무고하니까.
우리가 요 며칠 사이 한 일이라고 해봐야 별 재미도 없는 반전 연설이랑 시민들에게 생필품 미리 챙겨두라고 열심히 독려한 것뿐인걸.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순 없으니 다른 이름을 대기로 했다.
"자크 르네 에베르."
"···젠장."
"각하께서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은 아닐 텐데요."
라파예트 후작은 다만 아랫입술을 깨물 뿐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평소에 어지간히 악명이 자자했나 보지?
이번 기회에 알게 된 거였는데, 에베르 그 친구의 주특기는 원내정치도, 원외투쟁도 아니었다.
혐오팔이지.
이게 다 저 못된 반동들 때문이다, 아무튼 귀족들만 다 때려죽이면 경제고 안보고 민주주의고 다 해결된다, 좌우를 막론하고 다 나라 팔아먹을 궁리 밖에 안 하는 쓰레기들 뿐이니까 우리 같은 애국혁명지사들이 나서서 다 쓸어버려야 한다 등등.
21세기인인 박민혁이 봐도 참 익숙하고 정겨운 혐오선전들을 오만가지 방법으로 쏟아내는데-어휴.
왜 원내에선 비꼬기밖에 안 하는 친구가 급진 공화파 거두 중 한 사람인지 알겠더라.
똑같은 싸움꾼인데도 우리 집주인 놈이 마라는 좋아하는데 에베르는 극혐하는 이유도 말이다.
그야 21세기인이 봐도 와 진짜 선진적이다(?), 방구석 키보드워리어들의 선지자다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는 저질스럽고 노골적인 섹드립과 패드립을 다채롭게 쏟아내는데 이 시대엔 좀 혐오스러울까.
SNS도 인터넷 커뮤도 없는 시대에 21세기식으로 앞서나가니 팬층도 안티팬층도 철근 콘크리트보다 두꺼운 슈퍼스타가 될 수밖에.
"그 천박한 버러지가 기어이 대형 사고를 쳤군."
으득.
지금만 봐도 그렇다.
난 다른 설명 없이 에베르만 언급했을 뿐인데 그동안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라파예트 후작이 알아서 이해하더니 혼자 또 분노하고 있다.
나 참, 도대체 내가 없는 사이에 얼마나 21세기식으로 날뛰셨길래 다들 이런 반응이야?
[국왕을 '술 취하고 게으른 오만한 돼지'로, 여왕을 '색정증에 미친 갈보'로 묘사했다면 좀 짐작이 가는가?]
오우, 커뮤니티 스타일.
아니지. 인터넷 커뮤니티 기준으로도 영구차단감인가?
괜히 신문사 이름이 「늙은이 뒤센(Le Père Duchesne)」이 아니었네.
"···그래서 아직 우리 프랑스 왕국에 남아있는 귀족들은 망명한 놈들과는 다르다. 애국자고, 오스트리아 놈들에게 굴복하지 않을 거다."
골치가 아파져 오는지 라파예트 후작이 앞머리를 쥐어뜯으며 중얼거렸다.
"그런 알기 쉬운 충성맹세가 필요했고, 급기야 이 외교적 수사에 불과한 경고를 의회에서 확대 재생산하기로 했다는 소리군."
"예, 뭐. 비슷합니다."
"빌어먹을 놈. 내가 손님이 아니라 근심거리를 집안에 들였어."
···흠, 이건 나 보고 들으라는 소리인가?
그렇다면 실례구만.
가택연금 당한 사람한테 일부러 찾아와 이 천금보다 귀한 정보를 미리 알려줬건만.
아, 물론 일부러 저쪽에서 내게 진 빚을 갚기도 전에 천금 같은 정보를 알려줘서 청구서에 빨간 줄 하나 더 그은 것도 맞다.
기왕 빚쟁이로 만들었으니 이자까지 후려쳐서 두고두고 벗겨 먹어야지 않겠어?
켈켈켈.
"···내게 대체 무엇을 원하는 건가."
후우.
마침내 라파예트 후작이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2번째 무조건 항복선언이 나오는데 좀 오래 걸렸네.
얄미우니까 조금만 더 너스레를 떨어주자.
"그야 당연히 승마 아니겠습니까? 당초 선약이 승마였잖습니까."
"이 로키 같은 자식. 자네랑 엮이게 된 건 내 일생일대의 실수야."
"아무렴요. 루비콘강을 건널 뻔하셨으니 일생일대의 실수고 말고요."
으드득.
라파예트 후작이 더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이를 갈았다.
게르만족 아니랄까 봐 북구신화 들먹이는 것 좀 봐.
아유, 고소해라.
[자네 로키의 장남이 어떤 동물인지 아나?]
입 닥쳐, 막시밀리앙.
"뭐 농담이고, 어차피 전쟁을 피하긴 어려울 것 같으니 미리미리 군부에 얼굴을 비춰두려고 합니다."
아무튼 전쟁영웅 골려 먹긴 이쯤으로 하고 본론으로 넘어가자.
"우리 같은 제3신분이야 몰라도 제1, 제2신분들에겐 슬슬 목숨이 걸린 사안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어차피 조만간 의회에서 후작님을 부르면 어련히 알게 되셨을 일들이니 제게 감사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나와 우애를 다지기 위해서 찾아온 거다?"
"뭐. 그렇죠. 이제 의회군이 국민위병에 흡수되어버렸으니 한 지붕 아래 한 식구가 된 거잖습니까? 기왕 같은 배에 탄 거 한번 으쌰으쌰 잘 지내보자는 의미에서 앞으로도 자주 얼굴을 비춰볼까 합니다."
"뻔뻔한 놈."
아니 글쎄 루비콘강 건너려고 했던 당신에게 듣고 싶지는 않다니까?
아무튼 저 인간도 나름 정치군인이니 이걸로 대충 알아들었을 거다.
내가 이참에 군부에 개입할만한 핑계나 인맥을 여기저기 만들어놔서 의회군 출신들을 팍팍 밀어줄 속셈인 거.
승마고 라파예트고 계기이자 핑곗거리일 뿐 주는 그게 아니지.
난 장차 국민위병을 시뻘겋게 우리 급진당의 색채로 덧칠해버릴 거다.
지금이야 다들 온건파나 왕당파라지만 앞으로 1, 2년만 지나고 나면 왜 혁명 안 하냐고 원내를 보채는 초강경 혁명파로 변신해있을걸?
[겸사겸사 우리 급진당원도 요소요소에 침투해 있을 테고 말이야.]
바로 그거지.
켈켈켈.
"어디 자네 마음대로 해보게."
라파예트 후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우리 병사들을 믿고, 또 장교들을 믿네. 대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야 아직 잘 모르겠지만, 고작 자네 한 사람이 어떻게 해볼 수 있을 만큼 이 나라의 군인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아이고, 어련하시겠습니까."
땡볕에 완전군장하고 행군시키니까 풀어지는 게 어느 나라건 군인은 다 똑같더만 뭘.
여하튼 우리 카이사르께서 그러시다니 일단 그렇다고 쳐주자.
"그럼 앞으로도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뒤마 대령을 통해 먼저 기별을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지금 고삐를 쥔 건 나지 저쪽이 아니거든.
"길다면 긴 인연이 될 듯한데, 옛 은원일랑 이제 그만 묻어두고 한번 잘 지내봅시다. 아, 덧붙여서 제 개인적인 취향을 말씀드리자면 전 술보단 커피가 좋습니다."
"우리 안사람에게 싹싹 빌어서라도 꼭 오전 음주를 허락받아둬야겠군."
···아니 이 사람이.
"농담일세, 농담."
라파예트 후작이 모처럼 낄낄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실없는 웃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도저히 이 사람이 후작씩이나 되는 고위 귀족이라는 게 믿어지질 않았다.
***
신성로마제국.
"모두 여기 제 손에 쥐어진 이 문서를 봐주십시오!"
루이 16세의 남동생, 프로방스 백작 루이 스타니슬라스 그자비에가 연단에 올라 언성을 드높였다.
"이는 저와 함께 탈출을 결의하였으나, 불행히도 바렌에서 역도들에게 붙잡혀 탈출하지 못하셨던 국왕 폐하의 친서입니다! 이 못난 동생에게, 사방이 폭도들과 작당한 모리배로만 가득한 와중 유일무이하게 신뢰할 수 있었던!"
후우-.
"마지막까지 프랑스에 남아서 질서가 회복되기를! 이 프랑스의 정의가 다시 서기를 함께 기대하고 인내하였던 유일한 혈육을 혹시 저 혼자 탈출에 성공하고, 폐하께서 탈출에 실패하시면 이 프랑스 왕국의 섭정으로 봉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신성한 칙서입니다!"
도중에 일부러 숨을 고르며 '신뢰'를 강조했음을 눈치채지 못한다면 귀족이라 자칭할 자격 따윈 없으리라.
물론 천만다행히도 그런 천박한 이들은 오늘 이 자리에 단 한 사람도 초대받지 못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건 누구 한 사람 빠짐없이 옛 프랑스로부터 망명한 귀족들이오, 또 그들을 받아들여 준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 뿐이었으니.
청중은 이미 비슷한 자리에서 몇 번씩이고 등장한 국왕의 친서를 지루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순진하게도 사람들의 선의를 믿으셨습니다. 아직 우리 프랑스인들이 성모와 그리스도를 사랑할 것이라고, 국왕을 공경하며, 신께서 내리신 이 신성한 권력에 순종하리라고!"
쿵!
프로방스 백작이 안타깝다는 듯이 발을 굴렀다.
"하지만 저 폭도들은 폐하의 순진한 선의를 배신했습니다! 그분을 궁지에 몰고, 트루아에 잡아 가두었으며, 마침내는 우악스럽게 파리로 압송하여 인질로 삼았습니다! 오, 주여! 도대체 이 신성한 땅에서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찌 버러지만도 못한 농노들이 국왕을 포로로 붙잡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처절한 외침이었다.
벌써 몇 번씩이고 들었던 뻔하고 지루한 연설에 눈이 반쯤 감겨있던 청중들도 이때만큼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 말이 맞다.
제아무리 국왕이 못났기로 서니 어찌 농노 따위가 주제넘게 신성한 왕권에 도전한다는 말인가?
차라리 귀족들이나 교황청에서 알아서 못난 국왕을 끌어내고 새 왕을 세울지언정 농노가 이 신성한 절차에 개입하다니.
감히 왕의 목을 쳤던 잉글랜드처럼 야만스러운 무뢰배들이나 할 짓이다.
하물며 프랑크 왕국의 적자 프랑스에서 이런 야만스러운 사건이 벌어지다니,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았다.
이와 같은 야만이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똑똑히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
그와 같은 공감대가 곧 저 섭정의 지루한 연설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이 지금 이 자리에 몇 번이고 참여하도록 만드는 주요한 원동력이었다.
"하여 여러분, 카이저께서 용단을 내리신 김에 이 자리를 빌려 프랑스 왕국의 섭정으로서 제가 감히 한마디 올릴까 합니다."
다만, 여기서부터는 달랐다.
언제나처럼 뻔한 마무리와 박수갈채를 보낼 채비를 갖추고 있던 청중이 일제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단에 선 프로방스 백작을 올려다봤다.
"파리의 시민들은 듣거라!"
그러자 한껏 격앙된 프로방스 백작이 양팔을 휘두르며 고래고래 외치기 시작했다.
"만일 너희가 이제라도 분수를 알고 제자리로 돌아가 폐하께 순종한다면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허나, 만일 너희의 광신적인 악업으로 폐하께 위해를 가한다면!"
후우-.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아니 온 유럽의 열강군이 너희의 광신적인 악업을 용서치 않을 것임을! 설령 파리가 잿더미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신성한 질서와 정의가 바로 서게 될 것임을 너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웅변술로서는 조금 전과 비교하여 무엇 하나 발전한 게 없는 뻔한 반복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담긴 내용은 달랐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란 청중들은 잠시 놀라서 프로방스 백작을 바라보았다가, 이내 다들 열띤 환호와 함께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다시 봤다는 둥, 이제야 좀 사나이답다는 둥.
온통 낯 뜨거운 칭찬 세례들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연단에 선 프로방스 백작이 수줍게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물론 득의양양한 그의 양어깨는 속내를 아낌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날 섭정의 엄중한 경고는 며칠 후 파리까지 똑똑히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