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프랑스 왕국의 징세청부업자 피에르는 지금껏 절 소박하고 평범한 도시사람이라고 여겨왔다.
크게 풍족하진 않지만 부족함은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평범한 유년기를 보냈고, 징세청부업자였던 부모의 뜻에 따라 크게 모난 것 없는 아내와 정략혼을 맺어 그 자신도 세리로서 사업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남들처럼 적당히 눈치를 봐가면서 일하고, 적당히 더럽게 놀기도 하고, 챙길 건 챙겨가며 지난 20년간 성실히 근무하여 손에 넣은 재산이라고는 고작해야 파리 시내의 집과 별장 두채, 그리고 마차 정도.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동기들이 남의 눈치 따윈 보지 않고 사람 좋은 국왕 폐하의 그늘에 숨어서 너도나도 두둑이 챙긴 것에 비하면 '고작' 소리가 절로 나오는 조촐한 집안 살림이었다.
그런 피에르에게 바스티유 습격 이후로 한창 혼란스러운 와중 알고 지내던 귀족들을 몇몇 망명시켜주는 대가로 받아낸 노르망디 지방의 텃밭과 소작인을 넘겨받게 된 건 그의 인생사를 통틀어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천운이었다.
뭐 형식상으로는 어디까지나 위임받았을 뿐이고, 그들이 혹여나 프랑스로 돌아오게 되는 순간 원주인에게 돌려줘야겠지만 피에르는 이 텃밭들이 이미 제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기게 되었다.
아무렴 저놈들이 무슨 수로 프랑스로 돌아오겠는가?
파리의 민심은 이미 진작에 돌아섰고, 국왕 부부 최후의 도박마저 실패로 돌아간 이상 그들이 프랑스 땅으로 돌아올 방법이라고 해봐야 망국뿐이다.
한데 나라가 망한 판에 그까짓 토지대장이 무슨 대수겠는가.
이대로 조국이 승승장구한다면 저 망명귀족들도 두 번 다시 프랑스 땅을 밟지 못할 테니 그걸로 끝이다.
반대로 조국이 패망한다면 혼란기를 틈타 토지대장에 살짝 몇 글자만 덧붙인다면 만사형통.
선하신 국왕 폐하의 그늘에 숨어 승승장구하던 동기들은 혁명이라는 혼란기 와중 폭도들의 노여움을 사 운명하게 된 반면 혁명 투사로 변신한 피에르는 징세를 줄이는 대신에 이 위임받은 재산을 이용해 이런저런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는 필히 평소 소박하고 선량하게 살아온 날 마침내 주님께서 알아주신 것이렷다!'
피에르는 진심으로 그리 믿었다.
저도 부패한 세리에 불과하다는 자각은 더는 온데간데없었다.
아무렴 서민의 고혈을 빨던 탐관오리들이라면 이미 혁명기의 혼란 와중 명을 달리하지 않았던가?
반면 그는 살아남았으니 곧 죄인이 아니었다는 증좌였고, 토지대장과 소작증서는 선량한 피에르를 위한 그리스도의 보상이었다.
고로 피에르는 떳떳했다.
세리로서의 징세권을 사적인 사업에 동원할 때도, 불리할 때는 귀족들의 명의를 대고 제게 유리한 계약에서만 본명을 쓸 때도.
이 모든 것은 선하게 살아온 피에르를 위한 하늘의 보상이었고, 곧 신의 뜻이었다.
아무렴 저들도 평소 성실하고 선량하게 살아왔다면 응당 하늘에서 피에르와 같은 행운을 내려주시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전지전능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저들을 외면한 반면 피에르만큼은 총애하였으니, 이것이 곧 피에르의 영혼이 누구보다 순수하며 때 묻지 않은 선량한 어린양이라는 증거였다.
가난이란 하늘이 내린 징벌이오, 부유함은 포상인 까닭이다.
쿵!
"문 열라고 했지!!!"
"이게 지금 도대체 무슨 짓들이오!"
고로 어느 날 무슨 감찰위원회에서 나왔다는 이들이 현관문을 박차고 집안까지 흙발로 쳐들어온 순간, 피에르의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공포나 의문이 아닌 분노였다.
어딜 감히 한낱 인간이 하느님께서 간택하신 선량한 어린양을 감찰한다는 말인가?
하물며 다음에 오라고 몇 번이고 돌려서 말했건만 끝내 문을 부수고 재산손괴를 일으키다니!
"내 오늘은 모처럼 가족들과 귀중한 시간을 보내야 하니까 이만 돌아가 보라고 했잖소! 사람이 이렇게 경우가 없어서야 원! 당신들은 뭐 가족도 없으시오?"
"없소만."
허.
한데 돌아오는 대답은 더욱 기가 막혔다.
그걸 지금 자랑이라고 하는 소리인가?
"쯧쯧! 내 그럴 줄 알았지. 가정교육도 못 받은 고아 놈이 감찰은 무슨. 말세로구만, 말세야."
기가 찼던 피에르는 들으라는 듯이 일부러 혀를 차며 비아냥거렸다.
어디 한번 쳐볼 테면 쳐보라는 심경이었다.
피에르라고 해서 뭐 인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아직 혐의가 입증된 것도 아닌데 저쪽에서 먼저 폭력을 가한다면야 그의 친구들이 어련히 호되게 보복해주지 않겠는가?
내친김에 피에르는 저 어미·아비도 없는 놈들에게 현실의 벽을 알려주기로 했다.
"이봐, 자네들이 아직 세상을 잘 모르나 본데. 내가 라부아지에 박사님이랑-."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군무감찰위원장께서 인민의 적을 찾으시오."
"···뭐, 뭣? 누구?"
하지만 다음 순간 현실의 벽에 부딪힌 건 오히려 피에르였다.
아무렴 피에르라고 어찌 그 이름을 모르겠는가?
지난 1달여간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끝없이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던 소문의 주인공이었는데.
한데 그 소문의 주인공이 피에르처럼 선량한 부르주아를 찾고 있다고?
도대체 왜?
"그래서 따라올 거요, 따라오지 않을 거요. 그것만 확실히 답하시오. 자, 어떻게 하시겠소?"
이를 고찰할 시간 따윈 없었다.
저 무뢰배들이 내세운 집행 영장은 그들이 프랑스 정부를 위하여 일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고서 요란 법석하게 현관문을 박차고 들어왔으니 저택의 고용인들도 지금쯤 상황을 분명히 인지했을 터.
그렇다면 여기선 잠자코 따라가는 게 옳았다.
만일 저들이 정말로 로베스피에르를 위하여 일하는 자들이라면 피에르의 친구들이 신경 쓰여서라도 단순 조사라면 모를까 함부로 고문하지는 못할 테고, 거꾸로 단순한 무장 강도라면 정부의 인장을 위조했으니 중죄인이다.
하물며 지금 이 자리에는 목격자들까지 수두룩하니 금방 꼬리를 잡혀서 구출 받을 수 있을 터.
꿀꺽.
"···따라가리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마침내 결심을 굳힌 피에르는 그의 가족과 고용인들에게 그들이 떠나는 즉시 피에르의 친구들을 찾아갈 것을 거듭 강조하며 집을 나섰다.
이걸로 최후의 보험은 들어놨다.
혹시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제 친구들이 피에르를 구하러 달려오거나 최소한 복수해주리라.
무엇보다 그를 총애하시는 선하신 하느님께서 가만히 보고만 있으시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겨우 혼란을 가라앉히고 그 유명한 로베스피에르 씨가 무슨 연유로 절 찾았을까, 덜컹거리는 마차 속에서 생각을 정리하던 찰나.
덜컹.
"친애하는 프랑스의 학생 시민 동지들이여!"
"···으, 응?"
무뢰배들이 돌연 탁 트인 광장에서 마차를 멈춰 세우고 지붕 위에 올라가 연단 삼아 고래고래 외치기 시작했다.
마차를 끌던 짐말들조차 놓아줘 버리고서 말이다.
"여기 있는 이 잡놈이 지은 죄를 모두 똑똑히 들으시오! 이 더러운 세리 놈은 우리들의 혈세를 빨아먹은걸로도 만족하지 못하여 나라를 지켜야 할 병사들이 먹을 빵에 톱밥을 갈아 넣어서 양을 부풀렸소! 그리고 톱밥을 채운만큼의 밀가루는 제 사돈이 운영하는 사업장에 공급하고 열 배에 달하는 부당한 이익을 챙겼지!"
"이, 이보시오! 아직 재판도 전인데 무슨-."
"그뿐인 줄 아시오? 이 혁명의 적은 귀족들이 망명할 수 있도록 도와놓고서 뻔뻔스레 공신행세를 하며 우리 모두를 능멸했소! 짐승도 먹이고 키워준 은혜는 아는 법이건만, 이놈은 우리의 혈세를 빼돌려 제 사업장을 운영하면서 힘없는 서민들을 등쳐먹고 귀족들 배나 불려줬다는 말이오!"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거리지.
순간 머리가 띵해진 피에르는 더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채 그냥 멍하니 눈만 껌뻑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빈곤한 지식과 경험으로는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아직 정식재판은커녕 심문도 받기 전에 혐의가 제기된 것만으로 이 소란이라니.
아니 물론 그가 한 일들이 맞기는 하는데-.
"당신들 대체 이게 뭐 하는-읍읍!"
또다시 항의할 새도 없이 피에르는 무뢰배들에게 붙들려 마차 바깥으로 끌려 나왔다.
입에 재갈까지 물린채 마차 위로 끌려가 피에르가 마주하게 된 건 적의와 혐오로 가득 찬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는 수백 개의 광기 어린 동공이었다.
"자, 이러고도 무슨 나라에 돈이 없다는 말이오? 세수가 그렇게 모자라서 혁명 이래로 우리가 줄곧 요구하던 개선안은 벌써 3년째 단 하나도 통과되지 못하거나, 통과되고도 차일피일 미뤄져 가고만 있는데! 나라를 좀먹는 도둑들은 하나같이 살이 토실토실 올라 의회의 비호를 받으며 큰소리 떵떵 쳐대고 있구려!"
"""옳소!!!"""
"한데 어디 이런 개잡놈이 한 놈뿐이겠소? 온 나라에 이런 도둑놈밖에 없으니까 혁명 이래로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고도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인 거 아니오! 이런 놈들이 있으니까 우리처럼 선하고 힘없는 서민들만 고통받고 있잖소!"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그건 참으로 두려운 경험이었다.
연단이라도 되는 양 마차 위에 올라선 사내의 선창에 따라 수백 명의 청중이 광기에 사로잡혀 피에르의 죽음을 연호하고 있었다.
무언가 한마디라도 반박해야 하건만 입에는 재갈이 물려있고, 하다못해 도망이라도 가려고 해도 몸이 장정들에게 붙들려 옴짝달싹도 할 수 없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마차 지붕 위에서 무뢰배들의 호위 아닌 호위를 받으며 마차를 에워싼 광기 어린 집회를 보고, 또 듣는 것뿐.
눈을 질끈 감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제 죽음을 연호하는 괴성을 듣고만 있는 게 더 두려운가, 아니면 저들의 광기 어린 시선과 마주하는 게 더욱 두려운가.
스스로도 결론 내리지 못하고 반쯤 눈을 감고 뜬 채로 피에르는 넋이 나가 있었다.
"사죄하시오!!!"
그러자 지붕에 올라선 사내가 외쳤다.
"이 자리를 빌려 학생 시민 동지들에게 사죄하시오! 당신을 믿고 혈세를 성실히 납부한 국민들의 신뢰를 배신했음에 사죄하시오! 정직하고 성실하게 근로하여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는 무산대중에게 사죄하시오! 당신이 희롱하였던 이 나라의 충직한 군인들에게 사죄하시오!"
"""사죄하라! 사죄하라! 사죄하라!!!"""
"이 인간쓰레기야! 조물주의 수치야! 더러운 도둑놈아! 이제야 네가 네 죄를 알겠느냐!"
그제야 간신히 재갈이 풀렸다.
이미 반쯤 넋이 나간 피에르가 할 수 있는 건 더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저들 앞에서 죄송하다고 연호하는 것뿐.
무엇이 죄송하다는 건지, 왜 미안한지도 모른 채 피에르는 무뢰배들 손에 붙들려 돌과 오물을 두들겨 맞으며 저 같은 쓰레기가 태어나고 말았음에 정중히 사죄했다.
"자, 어서 서명하시오."
"·········."
그다음부터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감찰위원회에 붙들려갔고, 독방에서 무언가 서명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서명한 다음 날 아침에 풀려났다.
"에구머니나, 여보!"
"""나으리!!!"""
이튿날 아침, 저택에 돌아온 피에르는 전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전날 독방에 끌려가 서명한 것이 모든 혐의를 인정하며 이를 징벌적 성격의 보석금으로 배상하겠다는 서류임을 알게 된 뒤에도 피에르는 다만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
생 니꼴라 교회.
"좀 지나쳤던 거 아닌가?"
"지나치긴 무슨. 목숨은 붙여놨으니 자비로운 거지."
각각 카미유와 자크 루 동지의 반응이다.
딱 생각한 그대로라고 해야 하나.
혁명적 이상은 긍정해도 좀 더 온건함을 지향하는 카미유는 질색을 하는 반면 자크 루 동지는 애써 들뜬 마음을 숨기고 있는 모양새다.
애초에 이런 자아비판 자체가 반쯤 정신적인 사형이나 다름없으니 당연한 반응이긴 한데.
"뭐 어쩌겠나, 일단 본보기는 보여야지."
그래서 일찌감치 라부아지에가 분 악질 중에서 가진 인맥에 비하여 죄질이 더러운 놈 6명만 골랐다.
설마하니 그 6명으로 인민재판을 열어버릴 줄은 라부아지에도 몰랐겠지만 말이야.
아무튼 감찰위원회씩이나 설치했으면 적당히 청렴하다 내지는 청렴하려고 나름 자정은 하고 있다는 인상 정도는 줘야 하니까 의회에서도 이정도야 눈감아주겠지.
그럴 거면 한 수십명 고르지 왜 6명이냐고 할 수도 있겠는데, 일단 피해자가 너무 많아지면 의회의 반동 부르주아지들이 이러다가 다 죽는다고 똘똘 뭉칠 게 뻔하다.
그리고 신성한 주일에 인민재판하고 있으면 또 신성모독이라고 질색할 사람들이 있고.
너무 인민재판이 길어지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짜증이나 적의가 앞설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하루에 한 명씩,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딱 1주일만 연달아서 조리돌리는 거다.
하루에 한 명씩 매번 구획을 바꿔가며 인민재판을 열어서 실제 피해사례보단 사이다라는 입소문이 팍팍 퍼지게.
"우리가 저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고 생각해보게. 그럼 좀도둑들이 겁을 집어먹고 반성하겠나? 천만에. 오히려 그동안 열심히 훔친 재물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저 멀리 도망치려 들겠지. 반대로 너무 약하게 나간다면? 우릴 얕잡아보고 거꾸로 똘똘 뭉쳐서 맞서 싸우려 들겠지."
괜히 마키아벨리가 체제 그 자체가 부패했을 때는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진짜로 다 죽이고 다 갈아엎을 각오로 덤벼야 간신히 뭔가 가시적인 변화가 생기거든.
물론 우리에겐 그런 절대권력 따윈 없고, 다만 언제 거품처럼 사그라질지 모르는 민중의 지지만이 있을 뿐이다.
그럼 이 민중의 지지를 저 도둑놈들에게 절대권력처럼 휘두르려면?
인민재판이 딱이지.
단순히 말로만 여론의 단죄를 떠들게 아니라 실제로 단죄당한 사례가 등장해버렸으니 이제 찔리는 구석이 있는 도둑놈들은 뭉쳐 다니는 행인들을 볼 때마다 움찔움찔하게 될 거고, 반대로 행인들은 기회만 오면 알아서 자체적으로 조리돌림을 통한 단죄를 시도할 거다.
남은 건 우리가 이 여론에 올라타서 마녀사냥으로 번지지 않게 기강을 바로 세우는 것뿐.
곧 반전 보고서나 올리기 위한 이름뿐인 군무감찰위원회에게 실제 감찰을 위한 권한과 권위가 주어지는 순간이다.
"나는 저들에게 보석금이라는 타협안을 제안했네. 뭐 몇이나 이 거룩한 뜻을 알아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둘 나서다 보면 알아서 따라들 하겠지. 저놈들도 살고 싶으면 재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테니까."
"지금 저 민중의 적들을 보석금이나 받고 용서해주겠다는 건가?"
자크 루 동지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야 싫어하실 거야 예상은 했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나라에 진짜로 돈이 없는데.
"동지께서도 생도맹그 혁명으로 요즘 재정이 어렵다는 것 들으셨잖습니까. 안 그래도 전쟁 위기랍시고 호들갑들인데, 간신히 겨울을 날 가난한 서민들에게 증세 폭탄을 던질 수야 없지요. 증세 대신에 저 도둑놈들에게 그동안 번 만큼 게워내도록 징벌세를 매긴 거로 생각해주십시오."
"···으음."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모양새.
뭐 그렇다고 당장에 물어뜯지는 않는 것 보면 필요성은 인정하신 거니까 이걸로 넘어가자.
애초에 부의 재분배(민간주도)를 실천하신 분에게 뭔들 성에 차겠어.
"그래서 얼마나 모였는가?"
"아직 목표액의 4분지 1정도 밖에 안모였습니다. 저쪽에서 얼마나 협조적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역시 푸셰 의원의 안대로 한번은 가봐야겠습니다."
"그래, 주일이 지나는 즉시 시작하지."
타다닥.
최근 완전히 내 부관 자리에 정착한 나보가 열심히 주판을 두드리며 답했다.
아무튼 포병장교다 보니 숫자 계산 하나는 철저하더라고.
아직 전쟁이 터진 것도 아니겠다, 군부에서 아예 나보를 나한테 붙여준 김에 지금은 내 전속 산수 노예로 부려 먹고 있다.
왠지 군인으로부터 멀어진 것 같지만, 본인은 출세에 가까워져서 행복해 보이니 된 거겠지.
"자네도 참 많이 바뀌었군."
카미유가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야 이상한 정신기생체가 기어들어 왔으니까.]
입 닥쳐, 막시밀리앙.
"뭐,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닐세. 좋게도 나쁘게도 정치인다워졌다는 이야기니까."
카미유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튼 당분간 급진당은 우리가 관리하고 있겠네. 어디 한번 모처럼 감투 쓴 김에 잘 해보시게."
"그야 물론이지."
가이드라인이라면 이미 내 앞에 깔려있다.
선배들의 피와 땀으로 쓴 황금 같은 유산이지.
결코 헛되이 쓰지는 않을 거다.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