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154)

암군

"국왕 폐하께서 주전파와 함께하기로 하셨네."

푸웃.

너무나 상식 밖의 소리에 모처럼 라파예트 후작이 대접한 귀하디귀한 커피마저 뱉어버렸다.

그러니까 누가 뭘 지지해?

"···제정신입니까?"

"또, 의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2개월 안에 섭정을 자칭하고 있는 프로방스 백작이 귀국하지 않으면 왕위계승권을 박탈하시겠다고 하시더군."

"거 누굴 바보로 아는 것도 아니고 뻔히 속 보이는 소리 좀 그만하라고 하십시오."

그 양반한테 섭정직을 맡긴 게 누구인데 이제 와서 헛소리야?

그보다도 이미 집주인한테 국왕이 최후의 수단으로 전쟁을 추진할 거라고 듣긴 했지만 하필이면 지금 같은 시국에 냅다 꼬라박으려 들 줄은 몰랐다.

간신히 사회정의 실현으로 관심을 돌릴 즈음 되니까 본인이 직접 나서서 전쟁을 부추기시겠다고?

그러니까 본인 의도대로 여론이 안 흘러갈 것 같으니까 어떻게든 쐐기를 박아버리시겠다?

이 양반이 새장 속에 갇힌 인질 신세로는 많이 모자라셨나?

"결국 어떻게 해서건 본인이 절대왕권을 되찾아야겠다, 이거 아닙니까. 아무튼 전쟁이 터져야 왕후 오라비가 구출 병력을 보내주건 말건 할 테니까. 제 말이 틀렸습니까?"

식탁 너머의 라파예트는 다만 쓴웃음을 지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실상의 긍정이라고 봐야겠지.

[맙소사.]

돌아버리겠군.

그냥 얌전히 있으면 목숨이나마 건졌을 사람이 그놈의 알량한 권력욕을 못 버려서 또 사고를 쳐버릴 줄이야.

얼마 전 웬일로 이제부터라도 헌법을 준수하겠다길래 정신 좀 차린 줄 알았더니 뻔한 눈속임이었던 모양이다.

아니 지금 사태 파악이 그렇게 안 되나?

하다못해 의회에서 퇴위 권고를 안 했으면 모르겠는데, 퇴위 권고 날아가고 갈 데까지 간 이상 당신은 그냥 귀족들한테마저 버림받은 허수아비라니까?

고춧가루 부대 노릇 좀 하라고 불러왔더니만 진짜로 이럴 거야?

[국왕이 그런 걸 눈치챌 정치적 식견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지금 나라가 이 지경이 났겠나?]

···으음, 언제나 날카로운 팩트폭력이군.

아무튼 단언하던데 지금 이건 국왕 일가의 단두대행을 자초할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물론 절대왕권을 향한 변함없는 미련을 보여주고 있는 국왕이 순순히 전쟁에 협조할 리도 없겠지만, 설령 협조하더라도 주전파에서 과연 국왕을 반길까?

그럴 리가 없지.

좌우합작 해서 한마음 한뜻으로 국왕에게 퇴위권고 날린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의회발 퇴위권고마저 씹은 국왕이 친한척하는데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헌법을 준수하겠다는 입헌선언도 하다못해 본인이 주도적으로 했으면 모르겠는데, 해외망명 시도하다 트루아에 감금당했다가 파리로 끌려온 다음에나 받아들인 거잖아.

그럼 도대체 누가 이 입헌선언을 진심이라 받아들이겠으며, 이미 퇴위권고까지 당했던 루이 16세가 아직 현직 국왕은 본인이라면서 사사건건 개입하려 하는 걸 반기겠는가.

본인 딴에는 주전파에게 힘을 실어줄 생각이었겠지만, 솔직히 이제 와선 루이 16세가 싫어서라도 우리 반전파로 갈아탈 의원들이 더 많을 거다.

"그럼 이번 정보로 지난번 빚은 갚았다 치고, 한마디만 더 덧붙이겠네."

봐봐.

당장에 라파예트부터가 부탁조다.

본인이야 가택연금 당한 상태라지만 아직도 원내에는 라파예트파 의원들이 활동 중인 걸 생각하면 이건 라파예트파로부터의 구명 요청이라고 봐야 하겠지.

수장인 라파예트가 내게 호구를 잡혔다지만 라파예트파가 몽땅 반전파에 동참한 것도 아니고 이리저리 뿔뿔이 흩어져있으니 원내에 들어갈 수 없는 본인을 대신해서 부하들을 도와달라는 요청일 거다.

그럼 계파를 야무지게 불릴 기회인데 사양할 이유가 없지.

"말씀하십시오."

"사람이 나쁘신 건 절대로 아니야."

···아니었네.

"좀 미련하고, 정치 감각이 없으실 뿐이지. 강하게 나서야 할 때는 세상 소심한 분이 몸을 사려야 할 때는 왜 자꾸만 멧돼지처럼 달려드시는지 원."

라파예트가 쓰게 웃었다.

나름 왕당파라는 사람의 평가가 저럴 정도면 진짜 왕정 혐오자들에겐 어떤 평가일지 훤히 보인다.

괜히 모두 까기 인형 에베르가 21세기식 혐오 정치를 해도 다들 마지못해 눈감아주는 게 아니라고 해야 하나.

아니 그보다도.

"일단 전 왕당파들 사이에서 악명을 떨치는 대표적인 극좌 인사입니다만."

"하지만 지금은 내 협력을 기대하고 있지."

라파예트가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이 라파예트의 아킬레스건을 자네에게 맡기겠다는 말이야. 아직 이해가 안 되나?"

···허, 이렇게 나오시겠다?

뭐 이러쿵저러쿵해도 왕당파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제안이긴 한데.

[좀 의외군.]

그래.

솔직히 지금껏 내가 봐온 정치군인이라면 당연히 제 지위나 안위를 걸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방향성이 좀 뜻밖이다.

아니면 이쪽을 속이기 위한 거짓말인가?

"난 왕국의 군인일세."

라파예트가 덧붙였다.

"사실 우리들 모두가 그렇네. 우린 누구나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앞에서 왕국을 향한 불변의 충정을 약속한 기사들이고, 솔직히 말하자면···프랑스는 충성의 대상이 아니야. 지켜야 할 영지지."

"그러니까 의회에 칼을 겨눈 것도 왕국을 향한 충정이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건 내 야심이었지. 그걸 부정하진 않겠네. 그저 날 배신한 자네들이 미웠고, 자꾸 일선을 넘으려 드는 폭도들에게 이참에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게 전부였네."

"그럼 잡다한 신세 한탄은 그쯤으로 합시다."

솔직히 난 아직 당신을 못 믿겠거든.

"그래서 구체적으로 제가 어떻게 해주셨으면 하는 겁니까? 미리 말씀드리지만, 국왕이 직접 주전파에 올라탄 이상 저쪽은 정적이지 제가 지켜줘야 할 공주님은 아니잖습니까."

결국 어떻게 끝장내야 하나가 문제지 한번 끝장은 내봐야 할 판이다.

그 순간 칼을 쥔 게 나라면 라파예트가 말하는 내용에 따라서 한 번쯤 어떻게 끝낼지 정도는 고민해볼 수 있겠지만, 여론에 떠밀리게 되면 그냥 눈 딱 감고 라파예트와 절연해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물론 저쪽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테지만-.

"신대륙에 가본 적 있나?"

···이보쇼.

"넓고 풍요로운 대륙일세. 무엇보다 전통이니 신분이니 하는 시시콜콜한 족쇄들로부터 자유롭고 말이야. 조지, 그 친구가 정착을 권했을 때 진지하게 한 번쯤 고민해본 적도 있었지."

라파예트가 그립다는 듯이 먼 곳을 바라봤다.

"지금도 나는 가끔 후회하네. 아니, 오히려 내가 이렇게 되었기에 더더욱 후회하는지도 모르지. 만약 그때 조지의 권유를 따랐다면 조금 더 순수한 마음으로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조국의 시민들을 응원할 수 있었으련만."

"그래서 국왕 부부를 신대륙으로 보내자, 이 말입니까?"

이번에도 라파예트의 독백을 칼같이 끊었다.

다소 무례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 이 자리에서 칼자루를 쥔 건 나.

그리고 몇 번이고 말하지만 난 아직 라파예트를 신뢰하지 못한다.

괜히 사연팔이에 마음 약해지느니 다소 무례하더라도 끊어버리는 게 맞겠지.

"아무튼 그런 조건이라면 그럭저럭 가능할 수도 있겠군요. 뭐 대신에 신대륙에 가는 동안 불의의 사건·사고에 휘말리거나 본인들이 거기서도 또 만족 못하고 일을 키우면 저도 어쩔 방도가 없습니다만."

"상관없네. 나도 지금 거기까지 불평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 자네에게 이 정도나마 양보를 받아냈다면 왕국을 향한 그날의 맹세는 충분히 지켰다고 봐야겠지."

끼익.

라파예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내게 악수를 권했다.

"국왕 폐하를 잘 부탁하네."

"아메리카인 루이 씨를 잘못 말씀하신 거겠지요."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라파예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무례하다면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으련만, 후작은 다만 쓰게 웃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기사의 충정이었다.

***

오를레앙저.

"···아주 본인이 제 무덤을 파고 있군."

꾸깃.

국왕이 주전파에게 힘을 실어주려 한다는 내용의 밀서를 집어삼키며 오를레앙공이 투덜거렸다.

"가만히 있었으면 귀여운 조카는 무사히 보위에 오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아직도 나라를 망친 암군답게 알량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거지요."

"누가 아니라는가. 나와도 먼 친척이라지만 정말이지 루이 그 친구는 우리 카페 왕가의 수치일세, 수치."

시종장이 공공연하게 국왕을 모욕했건만 오를레앙공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원래도 그의 저택에선 무능한 루이 16세보단 오를레앙공을 적법한 군주로 대접하고 있기도 했거니와 샹 드 마르스의 행진 이래로 전시 수상이라는 지위에 오른 오를레앙공에겐 고작 이 정도 낭설쯤이야 가뿐히 누르고도 남을 권세가 있었다.

애당초 이제 와 파리에서 국왕을 암군이라고 부른다고 트집 잡을 충신이 남아있기는 한지도 의문이었고.

"아무튼, 덕택에 일이 아주 귀찮아졌어."

꿀꺽.

시종이 건넨 귀한 와인을 마시며 오를레앙공이 입술을 핥았다. 

안 그래도 면피를 위한 정치적인 쇼가 되어야 했을 전쟁 위기가 소비재 대란과 사치재 대란, 금년도 흉작이 겹치면서 점점 진짜로 국운을 건 전쟁을 각오할 판이 되어가던 차였다.

그런데도 시작부터 반전파를 자칭하던 로베스피에르, 저 무시무시한 이리에게 차마 승리를 양해줄 순 없어서 꿋꿋이 주전파를 지지하던 와중 이제는 허수아비 국왕까지 끼어들다니.

이러다간 진짜로 당통이나 브리소 같은 놈들이 바라는 것처럼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대적 오스트리아와 총력전을 치를 판이 아닌가.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 친척이라며 오를레앙공은 언제나처럼 국왕 부부를 내심 흉보았다.

'자아, 이제 어쩐다.'

현시점에서 오를레앙공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

이대로 반전파와 마지막까지 대립각을 세우면서 끝장을 달리는 것.

혹은, 반전파에 승리를 양보하는 대신 주전파의 힘을 꺾어두는 것.

지금까지의 양상이었다면 오를레앙공은 차라리 전자를 고집했으면 고집했지 절대로 후자를 선택하진 않았을 거다.

브리소와 당통이 주제넘게 귀족들에게 대드는 부르주아지치고는 공손하고 온건한 편이라는 이유도 있었거니와, 안 그래도 요즈음 승승장구하고 있는 로베스피에르에게 또 한 번 승리를 양보했다간 힘의 균형이 걷잡을 수 없이 뒤집힐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전시 수상의 지위를 유지하려면 지금 같은 전쟁 위기가 될 수 있으면 오래 지속되는게 유리하기도 했고.

하지만 점차 저 주전파 애송이들이 전쟁 위기를 위기로써 소모하는 게 아니라 혁명 수출을 위한 진짜배기 전쟁을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또 국왕이 이들을 지지해버리면서 계산이 복잡하게 꼬여버렸다.

바렌에서 추격대에 붙들린 이래로 퇴위권고로 의회와 갈 데까지 가버린 허수아비 국왕이었다.

전시 수상이라는 사실상의 섭정직에 취임한 그가 이제 와 루이 16세와 뜻을 함께한다는 건 곧 왕권과 의회권의 화해를 상징하게 될 터.

모처럼의 퇴위권고가 전시상황 와중 단결이라는 핑계로 구렁이 담 넘듯이 넘어가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지, 그건 아니 될 말이야."

오를레앙공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일 그의 궁극적인 목표가 입헌군주정이라면 분명 혹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를레앙공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디까지나 보위에 오르는 것.

비단 혁명 타령이 아니라 봉건적인 관점에서 봐도 제 정통성에 치명적인 손상을 당한 루이 16세에게 그가 이제 와서 자비를 베푸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무렴 지금 루이를 용서해준다면 다음 기회는 언제쯤 돌아올 것이며 또 돌아온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기는 한가?

또 일단 기회가 돌아온다고 쳐도, 그 무렵이면 루이 16세뿐만이 아니라 카페 왕조의 권위와 권세가 지하실을 뚫고 들어가서 왕정 폐지를 눈앞에 두고 있지는 않을까?

지금만 해도 이게 정치적인 자살행위인지조차 모르고 스스로 재앙을 자초하고 있는 루이 16세잖은가.

결국 민심이 참다못해 2차 혁명에 나선다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파멸적인 결말이 될 테고, 거꾸로 민심이 진정된다면 또 그건 그것대로 오를레앙공 개인에겐 끔찍한 결말이었다.

"마음을 정했네."

오를레앙공이 시종장에게 빈 와인잔을 건네며 말했다.

"내 사람들에게 미리미리 밀서를 보내두게. 국왕이 주전파의 손을 들어주는 즉시 이를 규탄하는 성명을 낼 수 있도록 말이야."

"마침내 국왕을 끌어내리려 하십니까?"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최상의 결과지. 설령 탄핵까진 가지 못하더라도 절대로 의회와 국왕이 화해했다는 인상을 줘서는 안 돼."

다름 아닌 오를레앙공 본인이 전시수상인 이상 의회와 국왕의 화해는 곧 그들 두 사람의 화해로 인지될 테니까.

기껏 자유주의자와 민중의 보호자로서 쌓아 올린 명성이 매국노 국왕을 위해 아깝게 소모되도록 둘 수는 없다.

"일단 국왕이 입법 절차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뻔한 핑계 정도면 될걸세. 벌써 저 친척 놈이 퇴위권고를 받았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진 않았을 테니 그 정도만 해두면 다들 알아서 화살촉을 루이 놈에게 돌려주겠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반전파에도 그리 전해둘까요?"

"···로베스피에르 놈 말이군."

글쎄,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번만큼은 오를레앙공도 선뜻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어차피 주전파를 등지기로 한 이상 국왕의 절차개입에 반대하는 게 의회의 총의로 보이려면 반전파를 끌어들이는 게 맞긴 하다.

하지만 저놈에게 정말로 이 이상의 승리를 양보해도 괜찮은 걸까?

또 지난번처럼 루이만 신경 쓰다가 로베스피에르에게 심장을 찔리는 것 아닐까?

"그래, 전해두게."

그런데도 오를레앙공은 협력을 택했다.

물론 여전히 겁이 나고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적으로 두는 것과 임시로나마 동맹으로 두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두려운가 하면 단연 전자.

당장 그래서 그동안 한참을 저 주전파 애송이들과 입을 맞추어서 저놈이 함부로 치고 들어올 수 없도록 짜고 치지 않았던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주전파를 등지며 일시적으로 무방비해진 이상 지금은 로베스피에르에게 힘을 실어줄 때였다.

"그리고 이참에 우리도 탐정사무소를 차려야겠어."

"···감찰 활동에 힘을 실어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시종장이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지금 오를레앙 파에서 그놈의 사설 감찰에 얼마나 학을 떼고 있는지, 또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떠올려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래."

그런데도 오를레앙공의 결심은 굳건했다.

"전쟁 타령을 묻어버리려면 무조건 사회정의 실현으로 가야지. 그래야 시민들이 전쟁 생각을 하지 않을 거 아닌가? 우리 의회에서 자정 노력을 안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신호도 될 테고 말이야."

"하지만 친구분들이 싫어하실 텐데요."

"그럼 저놈이 이대로 모든 공을 독식하는 걸 보고만 있어야겠는가? 이렇게 된 이상 일등 공신이야 어쩔 수 없이 저놈 차지가 되겠지만, 부패와의 전쟁은 우리 모두가 나선 일로 포장해야만 하네."

아무튼 군무감찰위원회는 의회 산하의 조직이니까 의회에서 주도한 일이라고 뒤늦게 포장해도 거짓말은 아니기도 하고.

무엇보다 의회와 식물국왕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와중 위원회 활동이 두드러지면 자연히 민심은 의회에 기울게 될 거다.

"앞으로 우리 쪽 신문에선 외부 세계 소식은 아예 빼버리게. 도망간 놈들이 뭐라고 떠들건 온통 국내 사안으로 도배해서 나라가 이렇게 엉망이고 또 의회에서는 현안 해결을 위해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걸 부각하라는 말이야."

"알겠습니다, 전하."

시종장이 잠자코 고개를 조아렸다.

그럼 지난 3년 간 의회가 이 지경이 될때까지 태업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의혹이 잠깐 들기도 했지만, 구태여 입에 담지는 않았다.

아무렴 뭐든지 전쟁보단 낫지 않겠는가.

괜히 그의 귀한 아들이 준비조차 되지 않은 전쟁에 휘말리는 것보다야 나을 터.

그의 선하신 주군이 무의미한 전쟁 대신 사회정의 실현을 부르짖으신다면야 거들었으면 거들었지, 반대할 사람은 적어도 이 파리에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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