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154)

가스라이팅

국왕 감찰이라.

[계륵이군.]

뭐, 그렇겠지.

국민의회의 무능과 부패로 사방천지에 아직 왕당파가 기세등등하게 버티고 있는 와중에 국왕 부부 감찰이라는 게 기꺼운 임무일 리가 있나.

안 그래도 우린 급진공화파의 대명사격인 인사니 진짜 몇 안 되는 충성파가 국왕 폐하를 구하겠다며 목숨을 걸고 자살 돌격해올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왕당파를 안심시키려 했다가는 거꾸로 마라 같은 녀석들이 혁명을 배신했다면서 날 족치려 달려들 거고.

결국 왕당파의 기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혁명파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혹독한 감찰이 되어야 한다는 소리인데, 그게 어디 말이 쉽지.

감찰권 같은 위험한 권한을 공짜로 줄 거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않았으니까 오히려 이만하면 제값 주고 샀다고 봐야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썩 달가운 임무는 아니다.

[그래서, 어쩔 텐가?]

뭘?

[국왕 부부 말이야. 오를레앙공이 우리에게 이런 임무를 맡긴 것만 봐도 뭘 기대하고 있는지 뻔하잖은가.]

···최소 왕권 정지, 무난하게 퇴위, 최악 암살이나 처형이겠지.

[그래. 어떻게 해야겠는가?]

글쎄, 잘 모르겠다.

라파예트 후작의 부탁 때문도 물론 있긴 한데, 이번 감찰로 국왕 부부에게 너무했다는 동정론이 일게 되면 그 비난의 화살은 온통 우리 공화파가 뒤집어쓸 거고 오를레앙공은 이를 틈 타 아직 갓난아이나 다름없는 왕세자를 보위에 올린 다음 본인은 섭정에 오르면 그만이다.

그리고 공화파를 숙청하고 적당히 민심이 진정되고 나면 정식으로 양위를 받건 아니면 본인은 만고의 충신이라는 내숭이나 떨면서 아들에게 계승권을 넘기도록 조작한 다음 친위세력 하나 없는 어린 국왕을 치워버리면 끝.

결국 수위 조절에 실패하면 오를레앙공 좋은 꼴만 시켜줄 거라는 소리다.

솔직히 이렇게 생각하면 왕권 정지가 가장 무난하긴 한데-.

[그럼 마라가 우릴 용서하지 않겠지.]

···미쳐버리겠군.

도대체 이래서야 어느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라는 건지 원.

똑똑.

"신(臣)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국왕 폐하의 부름을 받아 입궐하였나이다."

일단 직접 만나보고 난 다음 정하기로 하자.

이 화법이 궁정 예법에 맞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차피 저쪽에서도 급진공화파가 예법까지 맞춰서 받들어줄 거라고는 기대조차 안 할 테니 적당히 존중한다는 느낌만 내면 될 거다.

우리 집주인도 그다지 저 파리를 버리고 도망친 국왕을 존중해주고 싶은 의향은 없는 모양이니까.

「···들라 하여라.」

덜컥.

흠, 의외군.

병치레라던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그냥 빈손으로 돌려보낼 줄 알았는데.

[그랬다간 진짜로 끌려 나올 판이라는 걸 저 한심한 사내도 슬슬 느낀 거 아니겠나.]

뭐, 그럴지도.

아무리 무능하다지만 사람이면 그 정도 눈치는 있을 테니.

시종들의 안내를 받아 궁으로 들어서자 초췌한 얼굴의 사내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 그래. 오늘은 어쩐 일인가?"

"날씨가 아주 좋네요. 마침 홍차를 마실 예정이었는데, 위원장께서도 함께하시겠어요?"

···우아한 귀부인에게 부축받으면서 말이다.

아마 저 사람이 그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인 거겠지만, 이건 진짜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그래도 명색이 국왕이라는 사람이 초면부터 얕잡아 보이게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지?

혹시 동정을 유별하기 위한 책략인가?

[극좌 혁명파 인사에게 말인가?]

그럼 그냥 진짜로 아무 생각 없이 약한 모습부터 보여주고 있는 거라고???

"날씨가 좋긴 하지요. 하지만 제 개인적인 취향을 덧붙여보자면 홍차보다는 커피가 더 좋습니다."

애써 표정이 무너지려는 걸 참아내며 우선 우회적으로 왕후의 권유를 사양하기로 했다.

그래도 한 나라의 국모인데 여기까지 말했으면 어련히 알아듣겠지.

"어머나, 마침 질 좋은 커피가 들어왔는데 다행이네요. 자, 우선 안쪽으로 오실까요?"

이걸 못 알아듣는다고?!

아니면 알아듣고서도 모른 척 화두를 끌어오려는 책략인가?

모르겠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정말로 모르겠다.

내가 지금 저놈들을 위해 찾아온 저승사자라는걸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아마 모르는 것 같은데.]

오, 주여. 

"초대해주신다면야 저로서는 영광이지요."

그렇지만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척 귀부인의 안내에 따라 고풍스러운 식탁에 나란히 앉았다.

화려한 겉모습에 비해 군데군데 먼지나 금이 가 있는 건 소박함의 상징일까?

아니면 지금 이 사람들의 지위를 은유하고 있는 걸까.

"아, 원두는 어떤 게 더 좋으신가요? 덧붙여서 전 아랍에서 온 게 취향이랍니다."

"우선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괜히 이 이상 저쪽의 의도대로 휘말려 가기 전에 일단 여기서 끊는 게 맞겠다.

사실 아무 의도도 없을 수도 있지만, 저쪽에서 아무 의도도 없었더라도 커피만 마시고 돌아가면 의회에서 날 가만히 놔둘 리가 없으니.

"의회는 제게 전면적인 감찰을 요구했습니다."

목적어는 따로 필요 없겠지.

딸꾹.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국왕을 대신해 왕후가 대꾸했다.

"···그러니까 의회에서 저흴 해하려 한다는 말씀이신 건가요?"

"아니요."

"그렇다면 내쫓으려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아니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 의회는 국왕 폐하께서 지난 도주 사건과 이후의 대응에 관련하여 명쾌한 해명과 의회를 향한 사죄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물론 반만 진실이었고, 반쯤은 거짓말이었다.

분명 오를레앙공이 원내 연설 중 루이 16세의 무책임한 태도를 지적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게 국왕 감찰을 명하면서 따로 방향성을 정해준 적은 없었다.

알아서 감찰하고 또 알아서 비난의 화살까지 독박쓰라, 이거지.

딸꾹딸꾹.

루이 16세가 더욱 큰 소리로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파리 시민들이 아니라 의회란 말씀이시군요."

반면에 왕후는 그럭저럭 날카롭다.

국왕이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사로잡혀 대응 의지조차 반쯤 놓아버렸다면 여긴 부족한 눈치로나마 열심히 뭔가 노력은 해보고 있다고 해야 하나.

"예. 의회입니다."

"그리고 현 수상은 평등한 필리프고요."

"오를레앙공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맞습니다."

여기까지 말했으면 그럭저럭 알겠지.

혁명적인 해결책이라기보다는 봉건적인 해결책인 거.

즉, 현 수상이 오를레앙공인 이상 파리 시민이 아닌 의회를 향한 사죄와 해명은 오를레앙공 개인과 오를레앙파 귀족들에 대한 왕권의 패배로 인식될 거다.

물론 나는 이 둘이 다투는 동안 불구경을-.

"왜 당신은 저희가 필리프와 다투기를 원하시죠?"

···어라.

"분명 우리 부부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시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의외로군.]

그러게.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만 봐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냅다 들이박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래도 명색이 한 나라의 국모다, 이건가.

"라파예트 후작과 약조했습니다."

"···네? 누구와 뭘 약조했다고요?"

하지만 결국 거기까지였다.

라파예트의 이름을 꺼내자마자 순식간에 표정이 무너져버렸거든.

보아하니 잘 꾸며진 거짓말보단 팩트가 더 충격적일 것 같길래 그냥 모든 걸 털어놓기로 했다.

"들으신 대로입니다. 라파예트 후작이 제게 국왕 폐하의 안전을 보장해달라 요청하였습니다. 대신에 당분간 원내에서 제 계파에 힘을 실어주는 거래였지요."

"오, 주여···."

"라파예트 후작은 제게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최후의 피난처로 대서양 너머를 언급했습니다. 전 그와의 거래를 받아들였고, 그러니 감찰 기간 중 신변상의 안전을 최우선 사항으로 둘 예정입니다."

물론 정말로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건 아니다.

가령 라파예트 후작과의 거래.

이건 사전에 승마 수업이라는 핑계로 라파예트 저택을 드나들던 와중 자연스럽게 나온 이야기였지만 난 의도적으로 라파예트가 감찰위원장에 취임한 로베스피에르를 찾아와 청탁한 것처럼 설명했다.

그래야 더 절실해 보이고 충신 같아 보이니까.

신대륙행 또한 마찬가지다.

라파예트는 이미 퇴위는 기정사실로 놓고 독립전쟁기의 인연을 빌려 시민 루이 일가를 미국으로 이주시키는 걸 생각한 모양이지만, 난 의도적으로 유배지로 들리게 했다.

그나마 가까운 코르시카도 아니고 한창 반란 와중인 생도맹그 같은 곳 말이지.

이 새장 없는 창살에 갇혀 극히 제한적인 정보만 듣고 있을 국왕 부부로선 지금쯤 국왕께서 파리의 사치재 대란 해결을 위해 몸소 서인도로 출병하셨다-라는 전개를 상상하고 있을 거다.

그럼 합스부르크와의 연락선이 끊기는 건 물론이오, 언제 어떻게 국왕이 죽었다고 처리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혁명적인 단죄가 아니라 봉건적인 왕위 다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사뭇 세련되었을 뿐 아니라 그만큼 의회의 분위기가 완전히 오를레앙공 즉위로 넘어갔다는 식으로 들릴 테지.

[하여간 나쁜 꾀에만 밝다니까.]

칭찬 감사요.

"내게 무엇을 원하는 건가."

그제야 루이 16세가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

아무리 봐도 이쪽을 신임하는 눈치는 아니다.

뭐, 그야 극좌 인사가 감찰위원장이라는 완장을 차고 나타났으니 무슨 말을 해도 의심스러운 게 당연하겠지만.

"아시다시피 전 공화파입니다."

보아하니 이 부부는 괜히 돌려 말하는 것보단 팩트폭력에 더 약한 거 같더라고.

"지금 오를레앙공이 보위에 오르게 되면 저흰 영영 기회를 잃게 되겠지요. 설명이 되었을는지요?"

"···짐이 필리프보다 무능하기 때문이라는 거군."

"그렇게까지 말씀드리지는 않았습니다만. 여하튼 저와 제 동지들은 오를레앙조 프랑스의 개국공신이 되고 싶은 마음 따윈 추호도 없습니다."

여기까지 말하면 알아서 헤아려주겠지.

물론 판단에 필요한 정보를 온통 비비 꼬아서 주었으니까 굉장히 뒤틀린 결론이 되겠지만 그거야 내가 동정해줄 바는 아니다.

오히려 더욱 부추기고 기뻐해야 할 처지지.

"괜히 폐하의 기분만 언짢게 만든 듯하니, 소신은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드르륵.

뻔한 인사치레를 늘어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쪼록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라파예트 후작께 부탁 받은 바가 있으니 감찰 기간이라 할지라도 특별히 불편하실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 약조드리겠습니다. 혹여 불편한 바가 있다면 앞으로도 자주 찾아뵐 테니 재깍재깍 말씀해주시길."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발소리가 멀어지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다만 침통한 얼굴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만 있을 뿐 잘 가라던가, 벌써 가냐던가 하는 인사치레조차 없었다.

그야 그렇게 무엄하게 굴었으니 붙잡을 생각도 안 들긴 하겠지만.

[그래서 어떻게 해야 좋을 것 같은가?]

뭘?

[저 한심한 사내 말이야. 직접 만나보고 난 다음에 정하자고 하지 않았던가.]

···글쎄.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두면 될 것 같은데.

[이대로 내버려 두겠다고?]

괜히 이쪽에서 뭔가 더 손댈 필요도 없이 알아서 또 자책골을 쏠 것 같다는 말이야.

차라리 얌전히 있으면 무사할 텐데 심약한 국왕은 피해망상에 빠졌고 미숙한 왕후는 쓸데없이 성실하니 내버려 두면 또 뭔가 사고를 칠 게 뻔하다.

안 그래도 주전파가 권력다툼에서 패하면서 합스부르크조의 원군이 달려올 명분이 사라진 마당에 지금 의회에서 너흴 와인 마차 테라스 해버릴 작정이라고 겁을 줬으니 더더욱  뭔가 비책이 필요하다고 여기겠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가스라이팅을 해야 사고를 쳐줄지야 두고 볼 일이긴 한데, 아무튼 당분간은 괜히 감찰하겠다고 여기저기 들쑤시기보다는 계속 겁이 나 주면서 누구랑 대화하고 또 누구랑 편지를 주고받는지만 감시하는 게 더 효율적으로 보인다.

갈수록 철장이 옥죄어 오는데 내 몸은 아직 자유롭고 믿고 의지할 희망은 오직 하나뿐이라면 궁지에 몰린 사람이 어떻게 튀어 나갈지야 뻔할 뻔 자거든.

[···악랄한 책략이군.]

내가 뭘.

딱히 저 부부를 고문한 것도 아니고 신변의 안전까지 도모해주겠다고 약속해줬으니 오히려 착한 일한 거 아닌가?

봐봐, 저 꼬마 아가씨도 기둥 뒤에 숨어서 열심히 우릴 배웅해주고 있잖아.

계속 못 본 척하는 것도 좀 그래서 가볍게 허리를 굽히며 예를 갖췄다.

"···!"

후다닥.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진 아가씨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도망쳐버렸다.

저 아가씨는 우리가 뭐 하러 온 사람인지 알고 있을까?

모쪼록 알고 있기를 빈다.

미움받는 게 훨씬 속 편할 테니까.

***

오스트리아, 빈.

"마리아, 너는 두고두고 우리의 아픈 손가락이로구나."

후우-.

카이저, 레오폴트 2세는 미처 밀서를 파기할 생각도 못 하고 먼 곳을 바라보며 한참을 혼자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정말로 혁명인지 뭔지 하는 소란에 관여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여동생이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는 소식에 눈이 까뒤집혀서 당장에 전쟁 채비를 갖추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반란이 진압된 지 불과 1년 남짓한 합스부르크령 저지대와 기나긴 오스만 튀르크와의 전쟁으로 소진된 제국, 무엇보다도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주판만 튕기고 있는 잉글랜드가 눈에 밟힐 때마다 카이저는 공인으로서 사적인 감정을 애써 억눌러야만 했다.

당장 그래서 엘자스 지방의 독일인 영주들이 혁명정부의 폭정에 신음하는 와중에도 애써 모른척하지 않았던가.

만일 이렇게 해서라도 저 혁명이라는 아수라장이 수습될 수만 있다면.

프랑스 국왕이 의회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무엄하게도 헌법이 신성한 왕권 위에 군림하게 될지라도 그것이 새로운 질서로 안착한다면 카이저는 여동생의 안위를 위해 그냥 못 본 척할 작정이었다.

한데 왕위교체라니.

"무슨 일 있으십니까?"

조심스럽게 고개를 조아리는 그의 재상을 향해 카이저가 대꾸했다.

"필리프가 기어이 루이를 끌어내리려 한다는군."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마도. 마리아의 밀서에 따르자면 의회가 루이를 생도맹그로 추방하려 한다고 나와 있었네."

이것까진 과장이겠지만 말이야.

카이저가 덧붙였으나 재상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그야 만약 이 밀서에 나와 있는 내용이 사실이라면 혁명은 더는 프랑스 국내의 문제가 아니었다.

왕조의 문제였지.

이 경우 일차적으로 프랑스-오스트리아 간의 혼인동맹이 단절될 거고, 합스부르크의 피를 이은 왕세자가 보위에 오르지 못하게 될 것이며, 어쩌면 소식을 듣고 고무된 벨기에인들이 새 국왕의 도움을 받아 2차 반란을 일으키려 할지도 모른다.

어떤 시대에나 왕조교체를 인정받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승전이니까.

현 국왕 루이 16세와는 달리 오를레앙공 필리프 2세는 합스부르크와 어떠한 혈연관계도 없으니 더더욱 거리낌 없이 벨기에인들을 부추기려 들 것이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더욱 서둘러야만 할 것이옵니다."

재상이 언성을 드높였다.

"어서 부르봉 조에 힘을 실어주소서."

"고작 여동생의 편지 하나로 대군을 움직이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프로방스 백작을 보내소서. 일찍이 프랑스 국왕이 2개월 이내에 귀국하지 않으면 왕위계승권을 트집 삼겠다고 하였으니 아무도 문제 삼지 않을 것이옵니다."

프로방스 백작이라.

카이저는 제국 영내에서 프랑스 왕국의 섭정을 자칭하고 있는 음흉한 놈의 낯짝을 떠올렸다.

운 좋게 왕족으로 태어나 무능해도 사람은 좋았던 형 루이 16세와는 달리 인성까지 고약한 놈.

이것이 동생 루이를 향한 카이저의 인간 평이었다.

오죽하면 형님 루이를 차도살인지계하고 왕위를 차지하려고 일부러 혁명정부를 도발하고 있는거란 소문까지 돌까.

"만일 프로방스 백작이 해를 입는다면 이는 곧 마리아 님의 밀서가 사실이라는 증좌가 될 것이옵니다. 저들이 국경에서 프로방스 백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또한 흉계를 꾸미고 있다는 증좌가 될 것이며, 무사히 받아들여진다면-."

"왕세자 바로 다음가는 왕위계승권자이니 필리프의 야심을 견제하는 데 큰 힘이 되어줄 거라는 거군. 잘 알겠네."

그 정도면 충분히 저 폭도들과 필리프를 향한 경고가 될 테지.

무엇보다 저 음흉한 동생 루이를 치워버릴 수 있을테고, 잘만 흘러간다면 양국 관계를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프로방스 백작을 시작으로 망명귀족이 하나둘 프랑스로 돌아간다면 양국이 다퉈야 할 이유도 그만큼 줄어들 테니까.

"경만 믿고 있겠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어쩌면 평화로운 사태 해결을 위한 첫걸음이 될지 모르겠다는 기대를 담아 군신은 훈훈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얼마 뒤, 프랑스-오스트리아 접경지대에서 완전무장한 1천 명의 용병과 함께 국경을 넘으려 했던 프로방스 백작과 망명귀족 일당이 입국을 거부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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