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154)

구밀복검

"나, 나는 정말로 모르는 일이네."

어이구, 퍽이나 그러시겠어요.

솔직히 내가 의도한 게 맞기는 한데 몇 번이나 만났다고 또 이렇게 사고를 친 거 보면 진짜 헛웃음 밖엔 나오질 않는다.

허.

"자네도 알잖은가! 내가 지금껏 프로방스 백작과 편지를 주고받는걸 본 적 있는가? 이건 정말로 아닐세. 이건 내가 원했던 일이 아니야. 이제 와서 고작 용병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저 국왕은 그걸 비웃은 거라고 제멋대로 오해했는지 혓바닥이 길어졌지만 말이야.

그런데 또 반쯤은 비웃은 게 맞긴 했다.

참 알기 쉬운 사람들이야, 정말로.

"그걸 의도했는지, 의도하지 않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폐하께서도 잘 아시잖습니까."

여하튼 괜히 과장하거나 속일 필요 없이 날것 그대로의 진실을 들이밀어 주자.

아무튼 내가 듣기 싫은 소리를 하긴 해도 거짓말쟁이는 아니라는 신뢰를 얻는 게 중요한 거니까.

실제로도 국왕 부부에게 거짓말한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단지 군데군데 말하지 않았던 빈구석이 있었을 뿐.

그런데 이정도야 우리가 왕당파도 아닌데 본인들이 알아서 눈치껏 가려들어야 하는 것 아니겠어?

[암암.]

봐. 집주인님도 이렇게 말씀하시잖아.

"의회는 전일 회기에서 이번 도발을 주도한 프로방스 백작과 그를 도운 망명귀족들의 재산을 모조리 압류하리라 결의했습니다. 중장기적으로는 모든 망명귀족의 재산을 압류할 예정이고요."

"아니, 어찌 그런···!"

"한데 어찌 폐하만은 무사하기를 기대하십니까?"

지금 당신이 남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루이 16세는 잠시 분노를 담아 이쪽을 노려보았다가 이내 시선을 슬쩍 피하며 꼬리를 내렸다.

오지랖 넓으신 거야 알겠는데 슬슬 본인 앞가림이나 해야지.

매번 신성한 사유재산 어쩌고저쩌고하던 국민의회에서 이번만큼은 국유화라는 초강수를 둔 것만 봐도 이번 사태의 경중을 짐작할 수 있다.

막상 오스트리아 놈들은 얌전히 있는데 자꾸 망명귀족 놈들이 선을 넘으려 든다, 이거지.

물론 겉으로만 얌전한 거고 오스트리아에서 은근히 부추기고 있는 걸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슬슬 오스트리아도 저 떠돌이들과 손절하는게 평화를 도모하는 길일 거다.

여기서 망명귀족들이 얌전히 귀국을 택하거나 오스트리아에서 강제추방해버리면 재산압류 같은 초강경책도 반역을 도모한 프로방스 백작과 그 일당에게만 한정된 사법적 조치로 끝.

반대로 오스트리아에서 끝끝내 강제추방을 거부하거나 망명귀족들이 곧 죽어도 전쟁 도발을 멈추지 않는다면?

전쟁이지 뭐.

나야 전시 감찰이라는 특권을 휘두르게 되겠지만 솔직히 그다지 내키지는 않는다.

차라리 양국 정부가 작정하고 전쟁으로 달리고 있으면 모르겠는데 이래서야 욕심만 가득한 똥파리들에게 놀아난 꼴이잖아.

이번만큼은 오스트리아에서 합리적인 선택지를 골라주길 빌고 있다.

"모쪼록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십시오."

당신들은 빼고.

감찰이라고 말만 거창하게 했지, 뭐 거칠게 몰아세우는 것도 아니고, 고문을 하는 것도 아니고, 수색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만나서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 만만하게 본거지는 몰라도 갈수록 국왕 부부의 행실이 과감해져 가고 있다.

본인들 딴에는 믿을 수 있는 심복에게 시켰다지만 대놓고 빈까지 편지를 보내는 판이니 말 다했지.

내용까지 확인했다간 개봉 흔적 때문에 의심을 살까 봐 일단 송수신인과 날짜만 기록해두고 있긴 한데, 내가 보기엔 아무리 봐도 안전불감증이다.

우리가 설마 국왕 부부인데 법정에 세우기야 하겠어? 라는 느낌.

물론 세울 예정이고, 또 그럴 작정으로 몇 개 빼돌려둔 밀서도 있다.

이 태평한 부부는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말이야.

"제가 라파예트 후작과 거래한 건 어디까지나 폐하의 신변상 안전입니다. 만일 의회에서 그 밖의 요소들을 공격하려 한다면 전 기꺼이 의회에 동참할 것입니다."

"···진정한 감찰을 시작하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뭐,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겠군요."

그 감찰 이미 시작했는데요.

뭘 진정한씩이나.

"여하튼, 지금 폐하께서는 제가 보기에도 굉장히 위태로운 분기점에 서 계십니다."

왕위라도 건지냐 마냐가 아니라 머리 걸이라도 건지냐 마냐 하는 분기점 말이지.

어떻게든 왕위를 지켜보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하고 있는 게 기특하다면 기특하긴 한데, 처자식들 목숨이라도 건지려면 슬슬 다음 생을 기약하는 게 맞을 거다.

그게 싫다면 다 같이 단두대로 끌려가셔야 할 테고.

"물론 저는 앞으로도 라파예트 후작과의 신의를 지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영단을 내려주시지 않는다면 저로서도 해드릴 수 있는 일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주어서 고마워요."

마리 앙투아네트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저희가 알아서 해볼게요."

"···그렇습니까."

퍽이나.

보나 마나 또 급발진이나 하겠지.

뭐, 내가 의도한 결과이기도 하니까 일단 내버려 두자.

"그럼 좋은 하루 되십시오. 내일도 같은 시간에 찾아뵙겠습니다."

"어머나,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맛 좋은 커피를 맛보여드려야겠네요."

간드러진 눈웃음.

빛바랜 선의에 답을 주는 듯 마는 듯하면서 접객실을 나섰다.

쿵.

항상 느끼는 거지만 사람은 참 좋다.

저런 좋은 사람들이 외세를 끌어들여 자국민을 학살하려고 들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라더니, 왕과 왕후라는 자리는 사람을 저 모양 저 꼴로 만드는 건가.

역시나 군주제는 군주 본인의 인권을 위해서라도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만 한다는 확신이 새삼 차오른다.

[모처럼 의견이 일치했군.]

모처럼이라기엔 우린 꽤나 자주 의견이 일치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보다도 어떤 것 같아?

[뭐가 말인가?]

그 프로방스 백작이 끌고 온 용병들 말이야.

진짜로 오스트리아에서 사주한 무력도발일까?

이런 건 나보단 이 시대 사람인 그쪽이 잘 알겠지.

[흠, 나도 잘 모르겠네. 아무튼 지금 증언이 엇갈리고 있기도 하고, 내 손에 자료들이 쥐어진 것도 아니니까 말이야. 다만 내 개인적인 직감에 따르자면, 프로방스 백작의 독단 같네.]

호오, 어떤 근거로?

[간단한 이야기일세. 프로방스 백작이 유럽 대륙에 명성을 떨친 대단한 명장이던가? 지금 카이저는 여동생과 조카 남매를 인질로 잡혀있네. 한데 여동생을 구출해오기 위하여 그런 짐 덩어리를 끼워 넣을 리가 있는가? 아니지. 차라리 용병단만을 보냈을걸세.

숫자도 1천명이 아니라 100명보다 적게 해서 은밀하게 침투시켰겠지. 우리 국경수비대에 들키건 말건 작전을 속행하려 들었을테고.]

흠, 그럴듯하긴 한데.

그냥 경고 차원에서 무력 시위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 경고를 우리가 경고로 받아들일지가 문제지. 당장 지금도 그냥 죽여버리자는 소리가 나오고 있잖은가? 인질극 와중에 인질의 목숨만 위태롭게 할 무력 시위를 벌일 개연성이 있을지 난 잘 모르겠군.

내가 보기엔 아직 프랑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프로방스 백작이 세를 과시할겸  일부러 국경에서 거부당할 명분을 만들어낸 것 같네. 반혁명파에겐 꿈에도 그리던 해방군을 몰고 온 것처럼 보였을테니 다들 한동안 구세주 동생 루이만 찾겠지.]

그로 인해 형님 부부가 목숨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더라도 말인가.

거참 악랄한 인간이구만.

이쯤되면 차도살인지계 아닌가?

원래 권력 앞에선 피도 눈물도 없는 거라지만 여기까지 막 나올 줄은 몰랐다.

그래도 혈육의 정이라는 게 있을 텐데 말이야.

쯧.

"불쌍한 놈."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깜짝이야.

어느샌가 쥐도 새도 모르게 나타난 푸셰가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보다 여기 아직 궁정 안인데 이렇게 막 불쑥불쑥 들어와도 되나?

"아무것도 아닐세. 그보다 무슨 일 있는가?"

"오스트리아에서 송환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들어올 만했군.

허락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무례를 범할만한 일이었다.

"대신 프로방스 백작과 그 일당을 국외추방하겠다 역제안해왔습니다만, 의회에서 이 타협안을 받아들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누구 하나는 책임을 져야할 사안이니까요."

"답신 한번 빠르구만."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거 아니겠습니까."

그건 이전부터 눈엣가시였던 놈들을 추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애초에 이번 사건이 오스트리아의 설계라는 소리인가.

"그럼 우리도 준비해야겠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캐물어봤자 푸셰는 또 어느 쪽으로건 해석될 수 있는 대답으로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갈 게 뻔하니까.

지금은 평화로운 사태 해결이 갈수록 멀어져가고 있다는 쪽에 주목하는 게 맞을 거다.

"자네, 1달 안에 결정적인 단서를 잡아낼 자신 있는가?"

"···왜 하필이면 1달입니까?"

"프로방스 백작에게 주어진 시간이 2달이었으니까. 그 전에 논쟁의 여지를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나."

푸셰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 짧은 문답만으로도 내가 지금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눈치챈 거다.

"자신 있나, 없나만 대답해주게. 어떤가?"

그렇다면 목적어는 필요 없었다.

한참을 혼자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푸셰가 대꾸하기를.

"헌병대만 붙여주신다면 보름 안에도 가능합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게."

꾸벅.

그걸로 끝이었다.

푸셰는 가볍게 목례하고 서둘러 궁전을 나섰고, 나는 잠시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푸셰와 함께 궁을 나섰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알 놈은 다 알겠지만 이런 음모를 꾸밀 때는 좀 더 다양한 추측이 오갈 여지를 남겨두는 게 맞겠지.

[흠, 그러니까 무슨 일인가?]

프로방스 백작이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하기까지 남은 시간이 1달이다.

국왕이 2달 안에 입국하지 않으면 왕위계승권을 박탈하겠다고 했고, 그때로부터 이제 딱 1달이 지났으니까.

뭐 이미 이번 사건으로 의회에서 프로방스 백작과 그 일당의 재산을 압류하겠다고 하긴 했는데, 왕위계승권은 재산이 아니잖아.

의회권을 부정하는 반혁명파는 앞으로도 인질로 잡힌 루이 16세보단 해방군을 끌고 온 프로방스 백작을 지지할 거고, 그러다 2달이 지나기도 전에 국왕이 불미스레 퇴위를 당한다면?

당연히 이미 야심을 내비친 저 프로방스 백작이 왕위를 주장하고 나서겠지.

적기를 기다리겠다며 시간을 끌었다간 압류 당한 본인 재산이 경매에 내다팔릴 판이니까.

그럼 그때 오를레앙공이 본색을 드러내건, 어린 왕세자를 내세우며 눈 가리고 아웅을 하건 왕당파는 두 쪽이 날 수밖에 없다.

합스부르크의 피를 이은 왕세자와 합스부르크에 신세를 진 프로방스 백작 사이에서 고민이 깊어질 오스트리아도 섣불리 나설 수 없을 테고 말이야.

그러니 어차피 국왕을 퇴위시킬거라면 차라리 지금 당장 처리하는 게 맞다.

푸셰는 조금 전 몇 마디로 내가 뭘 주문했는지 눈치챈 거고.

[···잠깐, 그러다가 오를레앙공이 정말로 보위에 오르는 거 아닌가? 그 뒷감당은 대체 어쩌려고?]

그럼 오를레앙파, 왕세자파, 프로방스 백작파 삼등분이 날 텐데 오히려 잘된 일 아니고?

[허, 참.]

어차피 감찰권은 지금 우리 손에 있다.

저쪽도 슬슬 강제 퇴위 각 잡고 모든 비난은 우리가 뒤집어쓸 프레임을 위해 열심히 설계 중일 테니 무조건 직공으로 가야지.

그리고 라파예트와 약속 지키려면 서둘러야 할걸?

지금이야 우리 상퀼로트들이 사설 감찰 돌리는 재미에 맛 들여서 아직 조용하지만 결국 금방 질리게 될 거다.

저 얼빵한 부부를 위해서라도 괜히 또 국왕을 죽여라 합창단 나오기 전에 지금 얼른 끌어내리는 게 맞아.

[피바람이 불겠군.]

뭐, 그거야 정치판이니까.

전쟁보다는 정쟁이 그나마 피가 덜 흐를테니 그 점을 위안 삼자고.

단두대가 희생자를 부르고 있다.

텅 빈 옥좌로의 전력 질주가 될 지, 단두대로의 전력 질주가 될지야 두고보면 알겠지.

***

으슥한 밤.

"형제가 날 찾아왔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군."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 주교가 자크 루를 흘겨보았다.

"말했잖은가. 난 형제 같은 폭도와 함께할 생각은 없네."

"우리 제3신분들을 위해 인권선언 초안을 작성하셨던 분이 진정 이러실 겁니까?"

"그래, 내가 적었지. 하지만 그건 그거, 이건 이거 아닌가. 자네들은 너무 갔어."

자크 루는 다만 빙그레 웃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더 꾸짖어봐야 소용없겠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쉰 시에예스 주교가 되물었다.

"내게 뭘 원하는 건가."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친구가 날 왜 찾아왔지?"

"그야 물론 전령 노릇을 하기 위해서지요."

전령이라.

이젠 로베스피에르, 그 친구의 똘마니라는 사실을 숨길 생각도 없는 모양이군.

시에예스 주교가 나지막이 혀를 찼다.

"어디 말해보시게."

"토지채권 아시냐를 폐지하고자 합니다."

그제야 주교의 두 눈이 자크 루를 향했다.

"궁극적으로는 반가톨릭적인 정책들을 하나둘 철회하거나 더 온건하지만 합리적인 방향으로 개선하고요."

"···이해하기 어렵군."

시에예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짓을 대체 누가 좋아하겠는가?"

"흉년에 굶주린 민중이 좋아하겠지요."

"이봐, 자네들은 아무리 잘 쳐줘도 소수파야. 왜 다수결을 거스르려고 하는가?"

"민중이 왜 소수파입니까?"

자크 루가 숨 쉴 틈도 없이 답했다.

"우리 모두 점점 일이 단단히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걸 알잖습니까. 물론 지난 앙시앵 레짐에 가톨릭교회가 차지하는 업보가 다대한 건 사실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책임과 부담을 교회가 홀로 짊어지는 게 맞습니까? 진정 국민의회가 교회의 빈자리를 대체하는 데 성공했습니까?"

아니,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영적인 부분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고, 구휼과 같은 전근대적인 사회안전망에서도 국민의회는 교회권을 대체하기 위한 모든 종류의 시도에서 몰수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거뒀다.

이럴 바에야 정말로 그냥 교회가 알아서 관리할 때가 나았다는 소리가 공공연히 나올 지경이니 더 말해 뭐할까.

당장 혁명 이래로 사제의 충성은 국가가 아닌 오직 교황청을 향해야 한다는 반선서파가 공공연히 활동하고 있는데도 이들을 뿌리 뽑지 못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그만큼 저들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적잖은 거지.

극단적으로 말해서 국민의회는 파리만의 정부요, 그들의 정책은 오직 파리의 의사만을 반영할 뿐 지방은 실정만을 거듭하는 국민의회를 적대하며 구체제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잘못된 걸 알았다면 바로잡아야만 합니다."

자크 루 신부가 단언했다.

"의회는 이미 민중을 끌어안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그들이 의지할 그늘까지 뺏어서야 되겠습니까? 장차 우리 급진당은 제1신분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독려할 작정입니다."

"난 자네들이 제3신분인 줄 알았는데."

"제3신분 부르주아지도 제2신분 귀족들과 영합하고 있잖습니까. 그럼 제3신분 상퀼로트는 제1신분과 영합하여 전국으로 뻗어나가야지요."

뻔뻔한 소리였다.

하지만 대충 무슨 꿍꿍이인지는 알 것 같았다.

어차피 상퀼로트이니 뭐니 해봐야 파리라는 도시의 부랑아 집단에 불과하다.

그들을 조직화하고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여 덩치를 불리는 데 한계를 느낀 급진당으로서는 파리 저 너머까지 세를 확장할 창구를 찾고 있었을 터.

그렇다면 가장 만만한 조직이 어디겠는가?

당연히 농민들에게 사랑받고, 또 현 국민의회에서 가장 핍박당하고 있는 미운 오리 새끼 사제들이 될 수밖에 없다.

막상 진짜로 온갖 특혜와 부귀영화를 누렸던 고위 성직자들은 다들 도망쳐서 로마 교황청의 그늘에 숨어버렸는데 홀로 남아 묵묵히 교구를 지키고 있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들.

"영악하군."

시에예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냥 좌충우돌하는 천둥벌거숭이들인 줄 알았더니 짱구 굴리는 솜씨가 제법이야."

"로베스피에르 동지께서 말하길,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하였습니다."

자크 루가 뻔뻔스레 덧붙였다.

"현 체제는 인민이라는 환자를 치료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환자에게 아편을 처방할 차례가 아닐까요?"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좋아, 알겠네. 어디까지 함께 갈진 몰라도 어디 두고 보자고."

덥석.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시에예스 주교가 자크 루 신부의 손을 마주 잡았다.

하필이면 아편에 빗대다니, 참으로 지독한 비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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