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위
조아생 뮈라는 지금껏 책 한 권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무식하고 미련한 사나이였다.
하지만 그게 그가 기초적인 상식조차 없는 사회 부적응자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의 동물적인 육감은 언제나 주인에게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분간시켜줬고, 인간이라기보다는 짐승에 가까웠던 뮈라는 별 도움도 안 되는 두뇌보단 이 맛깔나는 본능을 전적으로 신뢰해왔다.
"···이거 정말로 부숴도 되는 겁니까?"
그리고 뮈라의 동물적인 육감에 따르자면 이번 일은 명백히 감당할 수 없는 일에 속했다.
그야 궁인들이 꽁꽁 걸어 잠근 문을 부수라는 게 지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저 뒤로는 이제 스위스 용병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뮈라가 문을 부수는 즉시 납탄이 소나기처럼 쏟아질 텐데.
제아무리 저 안에 농성 중인 국왕 부부가 요즈음 누구나 아는 허수아비가 되었다지만 그게 뮈라 같은 부평초 인생이 함부로 덤벼도 되는 사람이라는 소리는 절대로 아니라는 것쯤은 뮈라조차 알고 있었다.
"그래."
한데 저 푸셰인가 뭔가 하는 샌님은 요지부동이었다.
물론 본인은 호위역이랍시고 멀대 같은 국가헌병대를 수백 명씩 끌고 왔으니 그야 의기양양할 수밖에 없는 거겠지만.
'아니 이럴 거면 차라리 헌병대를 시키던가 왜 나한테 지랄이야?'
설마 지가 시켜놓고서 문 부순 책임을 뒤집어씌울 작정은 아니겠지.
문득 불길한 예감이 뮈라의 옹졸한 두뇌를 스쳤지만 이제 와 눈치챈다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놈의 1만 리브르라는 말에 혹해서 함부로 덤볐던 게 제 잘못이지.
잠시 머릿속으로 당통이라는 놈을 저주한 뮈라는 손에 쥔 파쇄망치를 내려놓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으랏챠!"
쿵!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라 몸무게를 싣고 양발로 문짝을 있는 힘껏 걷어차 버렸다.
그러자 그걸로 끝.
물론 워낙에 갑작스러운 기습이라 궁정에서도 제대로 문을 봉하지 못하기도 했겠지만, 나무판이 뮈라의 발차기 한 번에 쩌적 소리를 내면서 갈라져 버렸다.
문 뒤에서 역도들을 기다리고 있던 스위스 용병들은 물론이오, 뮈라에게 공성을 지시한 푸셰와 국가헌병대조차 한동안 할 말을 잃고서 멍하니 눈만 깜빡거리게 하는 경이로운 차력쇼가 아닐 수 없었다.
"···대단하군."
푸셰가 슬쩍 오른손에 쥐고 있던 권총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탄성을 뱉었다.
"여기 내 명함일세. 이걸 들고 곧장 군무감찰위원회나 급진당에 찾아가 보게. 처음부터 그렇게 대단한 자리를 맡기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아쉽지 않게 대접해줄 거야."
"감사합니다, 나으리."
'개자식, 너 얼굴 기억해뒀다.'
이만한 묘기를 보여주지 않았다면 궁정에 함부로 침입하려 한 도적이랍시고 저 권총으로 쏴 죽이려고 했겠지?
뮈라는 내심 이를 갈면서도 비굴하게 허리를 굽혀 푸셰의 명함을 챙기고 후다닥 꽁무니를 뺐다.
이걸로 저 괴팍한 놈에게 도망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따윈 추호도 하지 않았다.
제 명함을 순순히 내줬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든 제 눈에 띄는 곳에 있으라는 이야기일 테니까.
그렇다면 군무감찰위원회와 급진당 중 어느 쪽이 그나마 나을까?
'당연히 급진당이지.'
푸셰인가 하는 저놈은 그가 알기로 군무감찰위원일지언정 급진당원은 아니었으니까.
왜 저 샌님이 급진당원도 아니면서 그를 급진당으로 보내려 했는지야 뮈라의 옹졸한 두뇌로는 감히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으나, 파리 뒷골목의 짐승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제 동물적인 육감의 권고를 따르기로 했다.
"폐하, 이만 포기하고 나오십시오."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맹수를 순식간에 의식에서 지운 푸셰가 한걸음 궁정으로 내디뎠다.
"안에 계시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귀여운 왕자 전하께 보위는 물려주셔야지요. 이렇게 괜히 시간을 끌어봐야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거 다 알고 계시잖습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만 호위병들이 도망친 와중에도 고용주를 지키는 스위스 용병들만이 우둑하니 그 자리에 앉아쏴 자세로 버티고 있을 뿐.
그런 그들도 함부로 궁정 안에 발을 디딘 푸셰를 노려보고 있을 뿐 감히 발포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작금의 정세를 똑똑히 보여주고 있었다.
비밀탈출 통로라면 사전에 파악하여 무엇 하나 남김없이 봉쇄해뒀다.
설령 탈출에 성공하더라도 이미 파리 시내에 저들을 도울 협력자 따윈 어디에도 없으며, 왕당파들조차 다음 국왕이 누가 될 것인가를 점칠 뿐 루이 16세를 바라보는 이는 없다.
그러니 왕세자 루이를 위해 보위라도 넘겨주려면 순순히 협력하는 게 맞다.
해방군을 끌고 온 프로방스 백작, 의회를 이끄는 오를레앙 공작 중 가장 형편없는 후보는 누가 뭐래도 고작 6, 7살 먹은 루이 왕세자니까.
"아니면 정말로 피를 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저희 국가헌병대야 얼마든지 격퇴하실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의회의 명령을 받드는 치안 병력과 유혈 충돌을 빚었다는 사실이 과연 루이 왕자님께서 보위를 세습 받는 데에 긍정적인 기록이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독하시군요."
마침내 궁정 안쪽에서 곱게 차려입은 귀부인이 걸어 나왔다.
푸셰로서는 국왕은 어디에 두고 감히 오스트리아 간첩이-라는 짜증이 살짝 치밀긴 했지만, 그렇다고 티를 내진 않았다.
다만 언제나처럼 판에 박아 찍어낸 듯 냉담한 미소를 떠올렸을 뿐.
"아아, 역시 안에 계셨군요. 그럼 이제 그만 저와 제 친구들을 안으로 들여보내 주시겠습니까?"
"그게 지금 이 나라의 국부와 국모를 섬기는 자세인가요?"
"제 충성은 오로지 이 나라 프랑스를 향합니다."
푸셰가 답했다.
참으로 뻔뻔한 거짓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사적인 감정은 없습니다. 금일 오전 회기 중 의회는 만장일치로 우리 군무감찰위원회의 압수수색 요청서를 수리했으며, 이는 그에 따른 행정상 집행절차에 불과함을 알아주셨으면 좋겠군요."
"···위원장이 우리를 배신한 거군요."
"배신이라니요. 처음부터 우리 위원회의 임무는 감찰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배신하셨다고 말씀하시는지야 잘 모르겠습니다만. 사견을 덧붙이자면 감찰관을 신뢰한 게 실수 아닐는지요."
한마디로 속은 놈이 바보라는 것.
정치가로서 부정할 수 없는 논리에 귀부인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름다운 귀부인이 수치심과 절망감에 일그러지는 모습은 어찌나 이리도 짜릿한지!
푸셰로서는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추악한 배덕감에 척수가 다 저려올 지경이었다.
"만일 순순히 협조해주신다면 신변상의 안전은 보장해드리겠습니다."
푸셰가 덧붙였다.
"살리카 법과 일반형법 중 어느 쪽 법을 선호하실지 제가 이제 와서 여쭐 필요가 있을까요?"
"지독한 사람."
국모가 분노와 증오를 담아 노려보았다.
마지막까지 계승법을 들먹이며 아직 어린 왕자를 인질처럼 휘두르니 제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끝내 분노가 임계에 달한 것이다.
"지옥의 옥졸들이 당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아, 물론 그렇겠지요. 금세 출세해서 지옥의 1등 옥졸이 될 인재일 테니까."
"···뭐 이런 사람이."
하지만 그녀가 표정을 일그러트리면 일그러트릴수록 그저 푸셰의 개인적인 즐거움만 더해질 뿐이었으니.
또다시 낭패감에 인상을 찌푸린 국모-아니 마리아 안토니아를 비웃은 푸셰가 국가헌병대에 명령했다.
"뭣들 하고 있는가? 자네들도 이럴 때 어서 눈에 들어야 출세하지. 저 가라앉는 침몰선과 운명을 함께할 작정인가? 이만 시작하게."
"""옛!"""
출세.
그 마법 같은 글자를 속삭이는 즉시 마지막 남은 망설임마저 사라진 헌병대가 일제히 궁정을 흙발로 더럽히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스위스 용병들이 총검으로 위협하며 시간을 끌어보았지만 결국 그것뿐.
파리 탈출 사건 이후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는 왕권으로서는 민의를 등에 업고 기세등등해진 의회권의 폭주를 더는 막아 세울 수 없었다.
"진작에 이랬어야지."
망연자실한 마리아, 그리고 혼절한 듯 보이는 국왕이 헌병대원들에게 붙들려 나가는 걸 잠시 흘겨보던 푸셰가 홀로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야 좀 출세하고 있다는 실감이 드는 듯했다.
아, 물론 겸사겸사 개인적인 취미생활도 챙기고.
나중에라도 저 루이 왕자가 금의환향하여 이날의 원한을 갚으려 든다면 자칫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확률은 없지.'
당장 왕위에 도전하겠다고 야심을 내비친 도전자만 오를레앙 공작에 프로방스 백작까지 쟁쟁하고 음습한 놈들 뿐이다.
한창 반혁명 여론을 선동하다가 합스부르크 눈 밖에 나서 영국으로 쫓겨난 셋째 동생 아르투아 백작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고, 이들 중 철없는 루이 왕자를 살해하는데 망설일 선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여기에 이 틈에 왕정 그 자체를 폐지하려고 벼르고 있는 공화파는 보너스.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을 저들 부부에겐 유감스러운 이야기지만, 이미 루이 왕자에게 남은 결말은 왕위쟁탈전 도중에 친척들에게 살해당하거나 꼭두각시가 되어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바보로 살아가는 것뿐.
어느쪽이건 사람으로서의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보자. 이걸로 전국에 내 이름을 당당히 알렸으니 한동안은 사려야겠군.'
지금이야 로베스피에르 파벌로 분류되고 있고, 또 그의 덕을 본 것도 많지만 미래야 아무도 모르는 일.
혹시 저 제왕병자들 중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된 비전을 제시하여 공화파를 꺾고 체제를 정비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미리 대비해둬야 했다.
아무튼 지금 그는 군무감찰위원회이기 이전에 의회의 명령을 받들어 행정 집행에 앞장선 것뿐이니 의회 그 자체를 트집 잡는 게 아닌 이상에야 푸셰에게까지 불똥이 튀지는 않을 터.
당분간은 국왕 일가의 호위역겸 심문역을 자처해 원내정치에서 슬쩍 물러나 누가 이기게 될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 보면-.
"박쥐."
퉷.
순간 헌병대에게 붙들려 나가던 소녀가 푸셰를 향해 가래침을 뱉었다.
물론 거리가 멀어서 닿지는 않았으나 푸셰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했다.
문득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공주라는 이름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와중, 소녀가 또 한마디 내뱉었다.
"시시한 변태 자식."
"···."
푸셰는 대꾸하지 않았다.
절대로 정곡을 찔려서는 아니었다.
다만, 저 국왕 부부를 가까이 두고 괴롭혀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어난 듯싶었다.
***
뤽상부르 궁전.
쿵!
"더는 두고 볼 것도 없습니다!"
프랑스 육군 사령관 샤를프랑수아 뒤 페리에 뒤무리에가 언성을 드높였다.
"지금이 아니면 도대체 언제 저 가증스러운 폭도들을 제압하고 입헌정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 아니 루이 오귀스트가 기소된 지금 당장 전하의 즉위를 서둘러야만 합니다!"
"경, 우선 진정하시게."
오를레앙공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폐위 절차가 마무리된 것도 아니잖은가. 그렇게 서둘러서야 되겠나."
"당연히 서둘러야지요. 이대로는 왕세자가 보위에 오를 판이잖습니까! 안 그래도 프랑수아 백작이 해방군을 끌고 왔다는 소문이 자자한 와중에 더 기다려서야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이번에는 오를레앙공의 장남 루이필리프가 언성을 드높였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한창 혈기 왕성한 청년이라서일까?
그의 눈동자는 이미 아버지가 보위에 오르기라도 한 듯 야심과 정열에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건 저 루이 오귀스트의 혐의를 확대하여 왕세자까지 확실하게 왕위계승권을 박탈해야만 합니다!"
"그건 좀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닙니까? 괜히 시민들 사이에서 동정여론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릅니다!"
"그래요! 차라리 꼭두각시로 삼읍시다! 일단 1, 2년 정도 지켜보다가 적당한 핑계를 대서 치워버려도 되는 거잖습니까!"
"그러다가 합스부르크가 개입하면 어쩔거요?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거 우리 모두 독하게 마음 먹어야합니다!"
아니, 비단 젊은 루이필리프만이 아니었다.
이날 뤽상부르 궁전에 모인 모두가 이미 승리감에 도취하여 어떻게 하면 그들의 주군이 단 하루라도 더 빠르게 보위에 오를 수 있을까만 궁리할 뿐이었다.
당장 이 뤽상부르 궁전이 어떤 궁전이었던가?
지금으로부터 근 200년 전 루이 13세가 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에게 물려주었던 기념비적인 궁전이 아니던가.
곧 오를레앙조의 시작을 상징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뜻깊은 자리에 육군 사령관 뒤무리에를 비롯하여 누구 한 사람 새 시대의 얼굴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쟁쟁한 이들이 모였다.
어찌 기분이 들뜨지 않을쏜가?
"이제 부르봉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상석에 올라선 젊은 루이필리프가 부르짖었다.
"일찍이 발루아가 부르봉에 당했듯이 똑같이 그 전철을 밟게 된 것이지요. 우리 모두 머지않아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고, 다만 저들만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전지전능하신 조물주의 은총으로 마침내 저들도 알게 되었으니, 참으로 경사스러운 날이 아니겠습니까!"
실로 그러하다.
이날 뤽상부르 궁전에 모인 오를레앙파라면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 저들이 과연 누구인지?
그에 대해선 따로 고민할 필요도 물론 부연 설명을 덧붙일 필요도 없었다.
물론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이다.
곧 새로운 오를레앙조의 탄생을 위한 성찬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호적수들이다.
"이것은 다만 시작일 뿐입니다! 루이 오귀스트를 끌어내린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누가 이 혼란한 프랑스를 휘어잡고 질서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그 누가 이 기나긴 난세를 황금기로 다시 태어나게 하겠습니까!"
"""물론 오를레앙공이시오!!!"""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무질서에 맞서 싸웁시다! 우리의 신성한 강토를 모욕하고 자유를 짓이기려는 추악한 찬탈자들과 압제의 무리와 싸워 이겨나갑시다! 왕국 만세! 헌법 만세! 프랑스 만세!"
"""만세!!!"""
쨍-.
마침내 하늘 높이 치켜든 와인잔과 잔이 맞부딪히고 축하연도 절정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 자리의 주인공, 오를레앙공은 도통 웃을 줄 몰랐다.
물론 겉으로야 사람 좋게 허허 웃고만 있지만 혈육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보다 못한 루이필리프가 왁자지껄한 틈을 타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다들 아버지를 보러온 귀하신 손님들 아닙니까. 그럼 아버지께서 직접 나서서 저들을 환영해주셔야지요. 이 집의 가장께서 축하하지를 않으시는데 대체 누가 연회를 즐길 수 있단 말입니까?"
"···축하라."
오를레앙공이 쓰게 웃었다.
"네가 보기엔 지금 이게 축하할 일로 보이더냐?"
"···네?"
"난 이미 같은 실수를 해봤다. 그때도 똑같았지. 왕위에만 신경 쓰다가 하마터면 라파예트와 전장에서 맞붙을 뻔했어."
짤랑.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은 붉은 와인이 결을 따라 휘청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 손으로 루이 오귀스트를 아예 치워주겠다는군. 마치 투우사가 붉은 천을 던지는 것처럼 말이야."
"또 그 이야기이십니까?"
젊은 루이필리프가 언성을 드높였다.
"그래서 망설이면 뭐가 달라집니까? 제게 변화를 두려워하며 움츠리고 숨어있다간 시시한 놈밖에 안 된다고 가르침을 주신 건 아버지셨습니다!"
"그래, 그랬지."
"물론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왕위 다툼이라는 게 언제나 그렇잖습니까? 아직 어린 왕자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만일에 대비해 합스부르크의 피를 이은 그 아이들은 죽게 될 거고 그러고 나면 그토록 그리던 옥좌가 비겠지요. 그럼 지금은 다소의 출혈을 각오하고서라도 돌진해야지 않겠습니까!"
쿵.
젊은 루이필리프가 답답하다는 듯이 발을 굴렀다.
무례하다고 성을 낼 법도 하건만, 오를레앙공은 그의 아들이 뭐라고 말하건 쳐다도 보지 않았다.
홀짝.
다만 마침내 붉은 와인을 한 모금 머금고, 다시 내뱉었을 뿐.
퉷.
"안 달려들 수도 없으니까 문제인 거야."
어지러이 흩어진 붉은 와인이 마치 그가 토한 피처럼 비추었다.
오스트리아에서 내쫓긴 프로방스 백작과 그 일당이 영국 국적의 여객선을 타고 브르타뉴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도착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