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다수
자코뱅 수도원.
"시체 처리반 아니랄까 봐. 저 해적 놈들도 참 기대를 배신하질 않는구만."
빠득.
마라가 이를 갈았다.
비록 직접 감찰에 참여한 건 아니었으나 급진공화파 중에서도 누구보다 국왕 폐위에 앞장선 만큼 갈수록 일이 꼬이니 초조해하는 눈치였다.
"좋아, 아무튼 프로방스 백작도 귀국했으니 그다음은 셋째 동생 아르투아 백작인가? 그 친구 소식 아는 사람?"
"아르투아 백작은 오지 않을걸세."
당통이 단언했다.
"그래야 승산이 높잖은가. 지방의 왕당파들을 한데 결집해야 할 시국에 왕위계승서열이 한 계단씩 밖에 차이가 안 나는 두 사람을 동시에 보내면 서로 협력할 리가 있나? 당연히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겠지."
"분탕질에 도가 튼 해적들다운 발상이군."
에베르가 비아냥거리며 덧붙였다.
그렇게 서로 다투고 경쟁하던 친구들이 이렇게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해적을 까고 있는걸 보니 저절로 가슴이 웅장해진다.
혹시 영국은 이 정치동아리에 평화와 화합을 가져다주려는 사랑의 전도사 아니었을까?
[듣기만 해도 뭣 같으니까 두 번 다시 그런 허튼소리 말게.]
넵.
오오, 민족감정이란.
"차라리 폐위를 미뤄야 할 걸 그랬나···."
어깨가 축 처진 마라가 슬쩍 원망스럽게 이쪽을 쳐다보았다가 도로 고개를 떨궜다.
뭐, 결국 증거를 모아서 국왕 부부를 압수수색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보고서를 올린 건 나라도 그때까지 왜 자꾸 봉건 군주에게 온정을 베푸냐고 갈궜던 건 마라니까 양심이 있다면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말이야.
여하튼 마라를 비롯한 감찰 기간 내내 왜 자꾸 시간을 끄냐고 투덜대던 놈들은 하나같이 막막해하는 눈치다.
일단 프로방스 백작의 무력 시위로 눈이 뒤집혀서 얼른 폐위하자고 설쳐댈 때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그 프로방스 백작이 새로운 스폰서를 등에 업고 오를레앙파까지 기세등등해지니 뒤늦게 아차 싶은 거겠지.
당통과는 다르게 이쪽은 의기는 좀 앞서도 정치동아리 회원답게 즉흥적인 면모가 강한 친구들이니까.
"아니, 오히려 지금이 적기일세."
에베르가 눈동자를 빛냈다.
어, 잠깐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대로 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진 않은데-.
"아직 공식적인 폐위선언은 나오지 않았지만, 어차피 프로방스 백작까지 상륙한 마당에 시간문제야. 더 늦기 전에 공화국 선언을 준비하세! 저 오를레앙파 놈들이 선수를 치기 전에 민중의 이름으로 쿠데타에 나서는 거야!"
미친놈.
"육군 사령관 뒤무리에가 오를레앙파인데 쿠데타를 벌이겠다고?"
"하! 틈만 나면 뻔질나게 라파예트 후작 저택에 드나든 주제에 이제 와서 내숭이신가? 정 병력이 필요하면 자네 애인에게 베갯머리 송사라도 해보면 될 것 아닌가!"
···지금 이거 우리보고 라파예트 후작이랑 이러쿵저러쿵했다는 소리 하고 있는 거 맞지?
[아무래도 맞는 것 같군.]
음, 맞는 말이야.
"지금 민심은 우리를 향하고 있네! 우리 모두가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온 순간이 다가왔는데 다들 뭘 망설이고 있는 건가? 먼저 루이 오귀스트를 끌어내리는 즉시 헌병대를 동원해서-."
처맞는 말!
퍽!
에베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턱을 정조준하여 라이트훅을 날렸다.
뽀각, 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도 못 지르고 뒤로 널브러진 게 아마 턱뼈가 빠졌지 싶다.
[그래, 바로 그거야!!! 으하핫!]
진짜로 좋아하는구만.
아무튼 일부러 입을 벌릴 때를 노려서 후려갈겼으니까 꽤 아플걸?
아무리 사상적인 동지라지만 이건 이거지.
차라리 사석이면 몰라도 동아리 회원들 보는 앞에서 라파예트와 BL드립이라니 이걸 참아줬다간 다들 우릴 개무시하려고 들 거다.
[음, 음! 그렇지! 아주 잘했네! 속이 다 시원하구만! 이제 내 기분을 이해하겠나?]
···조금은.
"에, 에베르 동지!"
"너 이 새끼가···?!"
"지금 자크 르네 에베르는 내 명예를 모욕했네."
하여튼 슬슬 정신을 차린 똘마니들이 덤벼들려고 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선을 그어두자.
겸사겸사 에베르가 지껄이던 헛소리가 다시 안 나오게 만들 수 있을 테니 지금은 안 어울려도 분위기를 잡는게 맞다.
"이 혼란한 와중에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일을 이 이상 키워야겠는가?"
물론 저쪽에선 다짜고짜 기습한 우릴 비겁하다고 생각하겠지.
루이 카페 폐위라는 시국, 대의를 위한 단결이라는 명분과 권위까지 내세웠으니 더더욱 반감이 앞설 거다.
"···엿 같은 새끼."
하지만 에베르파는 끝내 내게 주먹을 내밀지 못하고 욕지거리나 뱉으며 물러났다.
결국 괜히 덤벼봐야 본인들만 손해라는걸 안거겠지.
3년간의 임기를 보장받은 군무감찰위원장과 일반 선출직 의원이 같을 수는 없는 거니까.
아마 본인들 선전지에 두고두고 오늘 일을 까댈 테지만-뭐 그거야 카미유가 알아서 잘 설명해줄 거다.
"그래서 이제 어쩔 텐가?"
에베르파가 의식을 잃어버린 보스를 부축해 치우고 난 뒤 당통이 내게 물었다.
너무 지나쳤다던가, 왜 그랬냐는 이야기도 없이 바로 일이야기로 넘어가는 게 참 능구렁이답다니까.
"자네가 주도한 일이니 뭔가 계획이 있는 거겠지. 우리가 어떻게 움직여줬으면 하는가?"
"글쎄, 먼저 자네 생각을 듣고 싶은데."
"그런 게 지금 왜 필요하지?"
···어라.
"내분은 곧 죽음일세."
당통이 단언했다.
"루이 카페 폐위가 눈앞까지 다가왔어. 행동할 시간이라는 이야기지. 자네와 나 사이에 그간 어떤 일이 있었건 지금은 중요하지 않네. 어서 명령을 내리게."
"그러니까 의견제시조차 안 하시겠다?"
"만약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내 의견을 말하면 앞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가?"
···힘들겠지.
물론 겉으로는 다들 내 지시를 잠자코 따라주겠지만 내심 당통의 견해가 더 합리적이었다고 생각하는 놈들이 나올지도 모른다.
만약 일이 내가 말한 대로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는다면 그런 놈들은 점점 뒤로 궁시렁대면서 분열을 자초하겠지.
권위와 폭력을 내세워서 어떻게든 이러한 균열을 수습하더라도 결국 사소한 균열은 두고두고 남을 것이고.
"이는 혁명을 위한 일일세."
당통은 그것을 끝으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라도, 한쪽에서 쥐 죽은 듯이 이 광경을 구경하고 있던 카미유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숨죽여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의 지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흠.
[어때, 인상적이지?]
거기까진 아니고.
다만 평소에 그렇게 한심하고 모래알 같았던 정치동아리가 어떻게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것뿐이다.
다짜고짜 음주나 권유하고, 술집 여자나 옆구리에 낀 채 천박하게 웃어젖히던 모습은 더는 어디에도 없었다.
누구나 진중하면서도 정열과 야심에 타오르는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흐.
[솔직히 감동적이잖은가.]
입 닥쳐, 막시밀리앙.
"좋아, 동지들."
천천히 식탁 위로 올라갔다.
그냥 허리를 쭉 펴고 이야기해도 내려다볼 수 있으면 구태여 이런 고생 안해도 될 텐데, 키가 모자라서 그럼 멋이 안 살더라고.
[입 닥쳐, 민혁.]
어쭈, 이젠 반격도 하네.
"뭐, 길게 말하지는 않겠네."
탁자 위에서 천천히 동지들의 면면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이 프랑스의 국민 중 못해도 8할은 왕당파일세. 그만큼 앙시앵 레짐의 그늘이 짙다는 이야기도 될 테고, 또 지난 세월 우리 혁명정부가 충분히 민생을 보살피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될 테지."
유감스럽지만 이게 팩트다.
몇몇 불만스러운 얼굴로 반박하려는 친구들이 보이기도 했지만 앞서 당통의 발언 때문인지, 아니면 그게 현실이라는 걸 알아서인지 꾹 눌러 참는 모양새였다.
여하튼, 우리는 민의를 대변한다고 자칭하지만 막상 그 프랑스의 민중은 공화국을 원하지 않는다.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프랑스 국민 대다수는 왕실에 동정적이며, 내가 지금껏 감찰 활동하면서 여기저기 들쑤셔본바 국민이 구체제를 그리워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질 만큼 국민의회는 모든 면에서 무능과 부패를 노출했다.
고로 공화혁명은 시기상조다.
물론 너무 미뤄서도 안 되겠지만, 민의가 아직 공화국을 원하지 않는데 마음만 급해서 마구 달려봐야 괜히 안 흘려도 될 피만 낭자해질 뿐.
우리가 지금부터 해야 할 건 앞서 집주인이 발언했듯이 국외의 적과 싸우기에 앞서서 국내의 적들이 서로 다투고 소모하게 부추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체제를 건설하기에 앞선 집안 단속이고 솎아내기다.
"물론 반대로 파리 시민의 8할은 왕당파가 아니겠지만, 파리만으로 민중의 공화국을 세울 수는 없잖은가? 설마하니 지금 이 자리에 가장 고귀한 파리 공화국을 생각하고 있을 친구는 없으리라 믿겠네. 에베르, 저 머저리처럼 되지도 않는 쿠데타나 계획하고 있다면 남들 휘말리게 하지 말고 알아서 사라져주고."
"그래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한 동지가 답답하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이름이-뭐였더라.
별로 중요하진 않아 보이니까 대충 넘어가고.
"내 말했잖은가. 혁명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법이라고."
이미 샹 드 마르스 행진 때 어기 들고 앞장서는 거 뻔히 봤으면서 눈치채지 못하다니.
상상력이 참으로 빈곤한 친구구만.
"한번 계몽이니 혁명이니 하는 배부른 부르주아지나 할 소리 다 집어치우고 우리 국민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일반적인 가톨릭 도덕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시게. 루이 카페가 폐위당하고 왕위쟁탈전이 시작되면 정치와는 완전히 무관한 보편적 다수가 지지할 후보자는 누구인가?"
"그거야 당연히-."
상상력이 빈곤한 친구가 입을 다물었다.
덩달아 다른 동지들의 시선도 일제히 이쪽을 향하기 시작했다.
설마.
너 이 자식 지금 설마.
다들 입 밖에 내진 않아도 부릅뜬 눈으로 마구 눈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그래, 바로 그 설마다.
"뭣들하고 있는가? 어서 거리로 나가 민중과 함께해야지."
국민이 선출한 국회의원이라면 당연히 언제 어디서나 민의를 받들어야 하는 거잖아.
안 그래?
***
심야.
"변태 자식."
어떻게 세상에 저런 추악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거지?
마리 테레즈는 그녀의 집시 주술사를 대신하여 그들 일가를 찾아오기 시작한 푸셰라는 변태를 떠올리며 홀로 치를 떨었다.
비록 그가 지금껏 그녀에게 직접 무례한 짓을 저지른 적은 없었지만, 그 음흉한 시선과 어머니의 추방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 일가의 새로운 거처를 제멋대로 드나드는 푸셰를 보고 있자면 저절로 짜증이 치밀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훔쳐보고 있을 때마다 매번 들으라는 듯이 코웃음을 치거나, 아버님을 흉본다거나.
결국 못 참고 달려 나가면 천연덕스럽게 궤변을 늘어놓으며 그녀를 골려주고 또 은근슬쩍 듣고 싶지 않았던 비정한 현실을 들이밀며 겁을 줄 때는 생전 처음으로 사람을 흠씬 두들겨 패버리고 싶다는 생각마저 했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사람이 이런 자리까지 올라온 거야?'
프랑스의 앞날이 참으로 어둡구나.
새삼스레 마리 테레즈는 왜 매번 어른들이 어려운 정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인상이 펴질 줄을 모르는지 알 것만 같았다.
"누나, 나 무서워."
오늘만 해도 그랬다.
그녀의 7살 터울 남동생 루이는 푸셰가 돌아간 지 벌써 한나절이 지났음에도 이불속에 숨어서 덜덜 떨고만 있었다.
물론 고작해야 6살 먹은 아이가 벌써 부모님과 만나지 못한지 1주일을 바라보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다못해 그간 말동무나 놀이 상대가 되어주던 시종들조차 더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보이는 사람들이라고는 온통 낯설고 처음 보는 인물들 뿐.
그마저도 혹시 도망치지는 않나, 수상한 행동을 하지는 않나 감시하고 있을 뿐 진심으로 섬기려는 눈치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푸셰, 그 작자가 무언가 했다고 단정 지을 순 없겠지만-.
까득.
"···다 괜찮을 거야."
무언가 한 것 아닐까.
비록 아무런 근거도 없는 사춘기 소녀의 억측에 불과했으나, 마리 테레즈는 내심 이미 단정 짓고 있었다.
분명 푸셰가 그녀의 남동생 루이 샤를에게 무언가 어린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을 속삭였을 거라고.
믿고 의지할 부모님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그들을 마음껏 괴롭히고 있는 것이라고.
"여기 누나가 있잖니. 장차 이 나라의 왕이 될 사람이 이렇게 겁이 많아서야 되겠어?"
"나, 나 왕 안 할래."
루이 샤를이 바들바들 떨며 더욱 몸을 움츠렸다.
"죽기 싫어. 무서워. 나 너무 무서워···."
"얘! 지금 그게 할 말이니?"
마리 테레즈가 짐짓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엄한 시늉하여도 남동생에겐 이미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린 마음에 얘가 어떤 상처를 입었기에 이러는 걸까.
측은하기도 하고, 누나로서 마음이 아프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답답했다.
당장 어머님도, 아버님도 자리를 비운 와중 장차 집안의 기둥이 되어야 할 장남이 벌써 마음이 약해지다니.
"얘!!!"
퍽.
보다 못한 마리 테레즈가 남동생의 어깨를 있는 힘껏 내리치며 꾸짖으려던 찰나.
「「「선하신 왕세자 루이 샤를 전하 만세!!!」」」
문득, 창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으, 응?"
이게 대체 뭘까.
「「「왕세자께는 털끝 하나 손대지 못한다!」」」
벌컥.
갑작스러운 상황변화에 당혹한 것도 잠시, 마리 테레즈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창가로 달려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이제 와서 창가를 통해 탈출을 도모하기엔 너무 높고, 디디고 설 만한 틈이나 줄도 없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그들 남매에게 있어서 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실이 될 리는 없다.
사춘기 소녀의 직감으로 그리 결론을 내린 것이다.
"""찬탈자들은 물러가라!""""
그러자 때마침 그들이 갇혀있던 부르봉 궁 앞에 멈춰선 군중이 적기를 휘두르며 일제히 외치기 시작했다.
"프로방스 백작은 순수하게 국왕 일가를 도우러 온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오를레앙 공작은 의회와 헌법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그렇습니까? 우리 파리 시민들이 귀머거리, 봉사로 보입니까? 지금 당신들에게 어떠한 야심도 없다는 걸 우리보고 믿으라는 말입니까!"
"""옳소!!!"""
"우리 솔직해집시다. 우리는 지금껏 당신 같은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지켜봐 왔습니다. 당신들은 그저 루이 오귀스트 카페를 대신하여 이 나라의 왕이 되고 싶은 거잖습니까!"
자연스럽게 한 사내가 마차 위로 기어 올라가 우둑하니 섰다.
"그럼 왕세자 전하는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고작해야 6살밖에 되지 않은 분을 어찌하실 겁니까? 우리는 지금껏 더러운 권력다툼에 휘말린 무고한 어린 영혼의 비참한 말로를 너무도 많이 지켜봐 왔습니다. 이 이성과 계몽의 시대에까지 그 야만스러운 전철을 반복할 수는 없습니다!"
"""왕세자 전하 만세!"""
"물론 국왕은 파리를 등진 매국노일지 모릅니다. 허나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 프랑스가 연좌제를 따졌다는 말입니까? 아비의 죄는 아비의 죄일 뿐이요, 아직 6살밖에 안 된 갓난아이에게 죄를 묻고자 함은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일진대!"
"""주여, 가엾은 왕세자 전하를 도우소서!"""
앙칼진 구호 소리.
그제야 마리 테레즈는 지금 저 군중들이 그녀와 같은 여성이라는 걸 눈치챘다.
저 마차 위에 우둑하니 서 있는 사내를 제외하면 말이다.
왜 갑자기 저들이 이리로 몰려왔는지.
누가 보낸 사람들인지야 아직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 아이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있긴 하구나.'
다행이다.
아직도 창 너머에선 못난 남동생을 향한 만세 소리가 끊이질 않고 있었다.
비록 겁 많은 남동생은 절 걱정해주는지도 모르고 화들짝 놀라 베갯속에 파묻혀 버렸지만 말이다.
'그런데 왜 저 폭도들이 우릴?'
비록 그녀가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적기가 폭도들의 상징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왜 저 적기를 든 여인들이 이제 와 그들을 걱정해주고 있는 걸까.
문득 그녀의 집시 주술사가 떠올랐다.
그가 간절한 소원을 들어준 걸까?
아니면 푸셰의 말대로 이용하고 속이고 있을 뿐인가.
'모르겠어.'
그걸 알기에 그녀는 아직 너무도 미숙했다.
다만 남매가 요즈음 보아온 어른 중 저들이 그나마 가장 우호적인 듯 보였다.
그럼 어른들의 명명법을 따르자면 저들은 루이 샤를파인 거라고 마리 테레즈는 제멋대로 이름 붙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