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판
흠.
"이거 생각보다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은데."
아녀자 무리를 이끌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분명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있어서 되지도 않는 헛소리와 야만을 퍼트리는 파리의 폭도들은 혐오 대상에 불과했다.
하물며 그가 직접 적기를 휘두르는 군중들 틈바구니에서 대열을 이끌고 참여를 독려한다니.
만약 코르시카 고향집에서 이 작태를 목격한다면 과연 뭐라고 할까?
모르긴 몰라도 제자리에서 게거품을 물며 쓰러지거나 절연을 시도하려 들지는 않을까.
'아니, 반대로 눈치나 살살 보며 비굴하게 빌붙을지도 모르겠군.'
물론 이 경우엔 먼저 나폴레옹이 감히 코르시카의 시골 귀족 나부랭이로는 상상도 못 할 자리에 올라야 하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진 않았다.
지금만 해도 로베스피에르의 눈에 든 지 불과 반년도 안되어 영관까지 초고속 승진하지 않았던가.
이대로 로베스피에르가, 급진당이 승승장구한다면 머지않아 장성에 오르는 것도 몽상만은 아닐 터.
'그래. 뒤마, 그 물라토 사생아도 연대장 노릇을 하는 마당에 내가 장성을 못할 이유가 뭔가?'
급진당의 당론이 제아무리 만민평등을 표방한다지만 아프리카인 노예의 피가 뒤섞인 물라토와 순수한 유럽인이 어찌 같을쏜가.
할 수 있다.
몇 번 하다 보니 나름 적성도 발견한 것 같고, 무엇보다 꽤 즐겁다.
제삼자일 때는 저놈들은 할 일도 없나, 왜 자꾸 사회에 도움이 될만한 일은 못 할망정 자꾸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민폐나 끼치나-하고 비웃었지만.
막상 그가 우르르 몰려다니는 행렬을 이끌며 이놈 저놈 욕하고 다니니 이보다 유쾌할 수가 없었다.
'이것도 권력이라면 권력이라고 해야 하나?'
차라리 이참에 아예 길거리 선동꾼으로 나서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으나 이내 나폴레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뜻대로 휘두를 수조차 없는 권력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만 해도 나폴레옹은 다만 흥분한 군중들에게 편승하여 무리를 이끄는 것뿐 명령을 내리거나 통제를 시도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잘 훈련 받은 병사들과 그냥 분위기를 탄 폭도들.
둘 중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면 나폴레옹의 선택은 단연 병사들이었다.
'역시 나는 군인 체질이야.'
뿌우-.
시끄러운 나팔 소리.
"지금 뭣들하고 있는 건가!"
때마침 길 너머에서 들려온 사내의 우렁찬 호통이 나폴레옹의 상념을 깨웠다.
덩달아 폭도들의 광기도 말이다.
적기를 마구 휘두르며 정복군처럼 위풍당당하게 행진하던 여인들은 갑작스러운 군부대의 등장에 놀라 주춤거렸다.
"본인은 이 파리의 치안 총책을 겸하고 있는 프랑스 왕국 육군 사령관 샤를프랑수아 뒤 페리에 뒤무리에 장군이다!"
이를 승기로 본 건지, 그들을 마주 보고 진을 친 부대 지휘관이 언성을 드높였다.
"이런 야심한 시간에 기습적인 집회라니, 허락할 수 없다! 설령 사전 통보가 있었을지라도 쉽게 인가를 내주진 않았을 터인데 하물며 무허가 집회라니! 이게 지금 폭동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스릉.
절 뒤무리에 장군이라고 자칭한 사내가 칼을 뽑아 들었다.
과연 멀리에서 봐도 훌륭히 날이 선 곧고, 아름다운 검이었다.
권위를 나타내기엔 부족함이 없었던 셈이다.
"지금 당장 해산하라! 그럼 이번 일은 불문에 부치도록 하겠다. 하지만 물러나지 않는다면, 이 파리의 치안 총책으로서 그대들을 진압하지 않을 수 없도다!"
"아, 뒤무리에 장군이시군요."
잘 알고말고.
라파예트 후작의 대체품 아니신가?
물론 저 나름대로는 경력도 있고, 실력도 있는 노장이라지만 프랑스 본령이 아닌 프랑스령 플랑드르 출신이라는 흠결 탓에 혁명 이후에나 간신히 빛을 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다시 말해 혁명 이전부터 국민적인 영웅이었던 라파예트와는 달리 붙잡은 줄이 우파냐, 좌파냐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 작금의 나폴레옹과 하등 다를 게 없는 인물이라는 것.
"존경하는 장군님, 모쪼록 길을 비켜주실 순 없겠습니까?"
"흥! 네놈도 보아하니 장교 나부랭이인 듯한데, 폭도들 틈바구니에서 폭동을 거들고 있다니 참으로 말세로구나!"
"왜 왕세자 전하를 위한 지지집회가 폭동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고로 나폴레옹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떳떳하게 선두에 나섰다.
어차피 지금 이 자리에서 군인으로서의 계급이나 경력은 중요하지 않다.
뒤무리에는 오를레앙 공작과 그를 따르는 우익진영을 대표하여 집회를 막아선 것이고, 나폴레옹은 좌익진영을 대표하여 길을 뚫어야 한다.
즉, 지금 이 순간 그는 정규군 소속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소령이 아니라 급진당의 행동대장 나폴레옹 동지일지니.
"루이 오귀스트 카페가 폐위당한다고 하여 루이 샤를 왕세자 전하께서 계승권을 잃어버리신 건 아니잖습니까."
물러설 이유도, 물러설 수도 없었다.
저 계급장과 경력에 눌리는 순간 패하게 되는 건 나폴레옹이 아니라 급진당이었으니까.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 그를 막아선 게 혁명을 틈타 승승장구하고 있는 비주류 출신 동지라는 건 참으로 얄궂은 일이었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지금은 있는 허세 없는 허세 다 떨어봐야 할 차례였다.
"지지집회 와중 저희가 무언가 파리의 치안을 훼손했다면 이 자리를 빌려 정중히 사죄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다름 아닌 이 나라의 국본을 위한 일이잖습니까. 전하를 위한 지지집회에마저 인가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이놈이 지금 누굴 놀리려고."
"저 같은 영관 나부랭이가 어느 안전으로 장군께 감히 거짓을 고하겠나이까. 정 믿어지지 않으신다면 의심이 풀릴 때까지 심문해주소서. 소인들은 다만 홀로 남게 될 왕세자 전하를 안타깝게 여겼을 뿐이나이다."
가증스러운 거짓말이었다.
나폴레옹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이 친구가 말한 그대로예요!"
"아니 세상에, 왕세자 전하를 위한 집회까지 허락받으라는 법이 어디 있나요?"
"저기요! 당신 정말로 왕국군 맞아요? 무슨 왕국의 군인이 이런 거로 트집질이야!"
"그래, 그래! 우리만한 우국충신들이 또 어디 있다고!"
하지만 그가 상관을 향한 예우를 갖추어 고개를 숙이기가 무섭게 나폴레옹의 뒤에서 적기를 휘두르던 아낙네들이 속사포처럼 질타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건너편에 마주 보고 선 병사들이 한마디라도 반박했다간 당장에 짱돌이 날아들듯 흉흉한 분위기였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설명이 법적으로 합당한지, 왕실을 위한 지지집회라면 무허가라도 상관없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고찰은 이미 무의미했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그런 합리적인 고찰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적당한 핑계라도 있느냐, 없느냐 뿐이었으니까.
나폴레옹의 입에서 그 적당한 핑계가 튀어나온 이상 저 폭도들은 설령 군홧발에 짓이겨지더라도 마지막까지 저가 옳고 뒤무리에 일당은 정당한 지지집회를 짓이긴 압제자라고 외치리라.
"이 소갈딱지도 없는 놈들아!"
"늙다리라서 귀까지 먹었냐? 어서 꺼지라고 말하고 있잖아!"
"깔깔깔! 도대체 저런 놈들이랑 얼싸안고 살 년은 무슨 죄를 지었길래 한평생 속죄하고 사나 몰라?"
아, 물론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욕지거리들과 모욕들을 정성껏 보태서 말이다.
이미 상대방이 소총과 총검으로 무장했다는 사실 따윈 더는 안중에도 없는 듯, 파리의 아녀자들은 점차 더욱 노골적인 도발을 쏟아내며 군관들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었다.
"이, 이년들이···!"
푸르륵.
마침내는 양측 지휘관의 목소리마저 이들의 욕지거리에 파묻히자 대열에서 이탈한 한 젊은 군인이 말을 타고 폭도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제야 여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고, 군인들은 대열에서 이탈한 저 용감한 사내를 도로 불러와야 할지, 이대로 진압해야 할지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모두 진정! 진정하십시오! 이런 좁은 길목에서 마구 흩어지시면 위험합니다! 제발 제 말 좀···!"
통제라곤 통하지 않는 이 아수라장 속에서 새삼 나폴레옹이 군인으로서의 장래를 재확인하는 순간.
"어엿차!"
탁.
무리에 섞여 있던 한 사내가 가로등을 발판 삼아 뛰어올랐다.
표적은 여인들을 겁주던 기마병.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높이와 궤적으로 우아하게 날아오른 사내는 말 위에 걸터앉은 젊은 군인을 양팔로 끌어안더니.
쿵.
그대로 제 체중과 완력을 실어서 고공 낙하하며 그 군인을 머리에서부터 맨바닥에 메다꽂았다.
죽었는지 살았는지야 두고봐야겠으나 그리하여 군중을 겁주던 용감한 기사는 완전히 무력화되었고, 겁에 질린 말이 제가 떠나온 군부대를 향해 돌진하는 가운데 용기백배한 아녀자들이 벗은 신발 따위를 휘두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후퇴! 후퇴!"
그러자 차마 발포 명령으로 제 취약한 군경력에 아녀자들과의 유혈극을 추가할 수 없었던 뒤무리에가 철수 명령을 내림으로써 비로소 길이 열렸다.
곧 간밤의 대치가 나폴레옹이 이끌던 좌익진영의 승리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도대체 자네 정체가 뭔가?"
하지만 그 순간 나폴레옹을 사로잡은 건 승리의 기쁨도, 또다시 그가 보기에 불쾌한 오점을 드러낸 폭도들도 아니었다.
도저히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묘기를 보여준 사내였지.
탐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부관으로 두고 싶다!
그와 같은 야심과 약간의 탐욕을 담아 나폴레옹은 사내의 오른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아, 그게···."
조금 전의 차력쇼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곱상한 인상의 청년이 멋쩍게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뮈라. 조아생 뮈라라고 합니다. 며칠 전에 입당한 햇병아리입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일세. 급진당에 온 걸 환영하네, 동무."
인사성까지 좋구만.
나폴레옹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뜻하지 않은 곳에서 돈 주고도 못 구할 귀하디귀한 보석을 얻었음에 기뻐했다.
그것이 뻔한 내숭이었음이 밝혀지기까지는 불과 이틀도 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
가느다란 촛불만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어두컴컴한 심문실.
"참으로 말세로구나."
탁자 너머의 루이 16세, 혹은 루이 오귀스트 카페가 중얼거렸다.
"신하가 되어서 이런 야심한 밤에 허락도 없이 왕의 침소를 드나들다니."
"죄인을 감찰할 임무와 권한을 부여받은 감찰위원장이 유치장을 찾는 게 그리 특별한 일입니까?"
"이, 이미 짐을 이 지경까지 몰아놓고서 대체 뭘 더 바랄 게 있다는 말이더냐. 비웃을 거라면 마음껏 비웃거라. 나, 나는 보다시피 더는 네놈에게 아무것도 빼앗길 것이 없는 빈털터리에 불과하니."
"말씀이 좀 지나치시군요."
일부러 얄미운 미소를 만면 가득히 떠올렸다.
"폐하께서는 아직까진 이 나라의 국왕이시잖습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낮추셔서는 안 되지요. 체통을 지키셔야지 않겠습니까."
"이놈."
루이 16세가 이를 악물었다.
"짐을 끌어내리는데 앞장선 놈이 지금 누굴 놀리는 게냐?"
"우리 말은 똑바로 합시다."
로베스피에르가 국왕을 폐위시킨 게 아니다.
루이 카페가 저지른 업보가, 죄가 그를 폐위시킨 거지.
당장 내가 이 자리에 없었더라도 루이가 왕위를 지킬 수 있었을까?
반대로 그가 만일 파리 시민들을 등지고 외세를 끌어들이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어떤 술수를 쓰더라도 폐위까지 몰고 가긴 불가능했을 거다.
고로 내 죄는 궁지에 몰린 루이 카페를 더욱 부추겨 폐위를 앞당긴 거지, 폐위 그 자체가 아니다.
"폐하를 폐위시키는데 앞장선 건 루이 카페잖습니까."
"···."
루이 카페는 답하지 않았다.
뒤늦게나마 제 죄를 뉘우친 건지, 아니면 그냥 답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니까 책임지고 끝내십시오."
어차피 궁금하지도 않았다.
슥.
나름의 성의를 담아 장인이 만들었다는 만년필, 그리고 최고급 잉크와 금박으로 장식된 종이, 무엇보다도 밀랍을 준비했다.
반지 인장이야 뭐, 지금도 본인이 끼고 계시고.
아무 말없이 물끄러미 날 쳐다보며 이게 뭐냐고 묻고 있으니 답해주는 게 인지상정이겠지.
"이만 퇴위하시라는 말입니다."
그제야 루이 카페가 두 눈을 부릅떴다.
생각지도 못했다고 말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어차피 지금 의회는 폐위를 확정지은 상황입니다. 프로방스 백작이 브르타뉴에서 모으고 있다는 왕당파야 뭐, 실질적으로는 왕위쟁탈전을 위한 사병이라고 봐야겠지요."
"네, 네놈이 어찌-."
"왕세자 전하는 생각도 안 하십니까."
무력한 암군의 두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다들 사람은 좋았다고, 그냥 사람만 좋았다고 평하는 사내를.
"폐하야 똑같이 보위를 잃게 되시더라도 왕세자께 폐위와 퇴위가 같을 수는 없잖습니까."
설마 여기까지 말했는데도 못 알아듣지는 않겠지.
나야 선왕이 폐위당하면 왕세자에게 얼마나 큰 타격이 오는지야 잘 모르지만, 그래도 흠이 되었으면 되었지, 득이 될 리는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리고 왕세자의 정통성이 무너질수록 오를레앙 공작이 보위를 빼앗기도 그만큼 쉬워진다는 것도.
"이리 같은 놈."
루이 카페가 지금까지 보아 온 것 중 처음으로 내 눈동자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분노와 낭패감.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느껴지는 거룩한 도전이었다.
"지금 루이, 그 아이마저 네 목적을 위해 이용하겠다는 게냐?"
"예."
"고작해야 6살 먹은 아이다. 이놈아, 고작 6살이야! 그런 조막만 한 아이까지 네 더러운 모략에 끌어들이겠다고!!!"
쿵.
루이 카페가 있는 힘껏 탁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네가 진정 그러고도 사람이더냐? 진정 여기까지 해야겠느냐! 아니, 안된다. 차라리 꼭두각시로 부릴 거라면 이 무능한 놈을 부리거라! 내 얼마든지 네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춰주마! 제발 그 아이만큼은···!"
필사적이군.
소위 말하는 부정이라는 거겠지.
저 비난이 틀렸다, 혹은 잘못되었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지금 투정이나 부리실 때입니까?"
다만, 언제나 그래왔듯이 현명하지는 못하다.
"절 무찌른다고 하여 왕세자 전하가 무사할 것 같습니까?"
"그게 무슨-."
"합스부르크와 부르봉의 피를 이은 사내아이입니다. 무사히 장성했다면 분명 이 유럽에서 제일가는 고귀한 혈통은 루이 17세에게 크나큰 힘이 되어주었겠지요."
하지만.
"폐하께서 폐위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만한 정통성을 가져봤자 지금은 한없이 무력한 어린아이인데.
"당장 전하께서 내년, 아니 내달 아침 해를 볼 수 있을까요?"
루이 카페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부르르 떨며 고개를 떨궜을 뿐.
그도 비로소 눈치챈 거다.
지금 루이 오귀스트 카페가 폐위당하고 옥좌가 비는 순간 왕세자의 정통성은 거꾸로 제 목숨을 위협하는 저주가 될 수밖에 없다는걸.
단지 살아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합스부르크의 개입을 야기하는 인계철선 같은 눈엣가시를 대체 누가 살려두려 할까?
하물며 나라를 팔아치우려 했다는 혐의로 폐위당한 선왕을 둔 왕세자인데.
이대로 의회에 폐위당하면 루이 카페가 상왕 노릇이나 해줄 수 있을까?
"어서 서명하십시오."
그게 당신을 위해서건 왕세자를 위해서건 옳다.
물론 우리와 혁명을 위해서도.
이게 그나마 가장 불필요한 피를 적게 흘리는 길이다.
"그럼 폐하와 전하의 신변만큼은 보장해드리겠습니다."
"···개자식."
루이 카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늘이 널 용서치 않을 게다."
"용서를 구할 생각도 없습니다."
내가, 우리가 용서를 구할 상대는 오로지 민중뿐이니까.
날 이 시대에 보내준 사실에 감사할지언정 하늘에 용서를 구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지금 이 프랑스에 얼마나 많은 6살 아이들이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무엇보다 민중을 위한다는 게 꼭 선을 의미하진 않는다.
"또 그 아이들 중 몇이나 끼니를 걱정하지 않을 풍족함과 교육받을 권리를 가지는지 알고 계십니까?"
민중이란 다만 이 나라에서 가장 거대한 이해집단일 뿐.
나는 정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시시한 약자들을 위하여 지금 이 자리에 있다.
"···모르겠네."
"모르셔도 됩니다."
그러니.
"제가 알고 있으니까."
유감스럽지만, 시민 루이 카페가 아닌 루이 16세를 도울 순 없다.
그리고 이날, 루이 16세는 마침내 시민 루이 카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