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154)

선수

"무시무시하시군."

루이 카페의 서약서를 들고 심문실을 나서자니 시에예스 주교가 내 쪽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파리의 아녀자들을 선동해서 아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한편으로 아들의 목숨을 들먹여 아비를 협박하다니."

"우리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합시다. 제가 사지에 밀어 넣은 게 아니라 이미 사지에 서 있던 애를 위해 뒷배가 되어준 거잖습니까."

솔직히 내가 가만히 있었다고 걔가 무사하진 않았을걸.

나 없이 흘러갔던 역사에서도 그랬지만 어차피 공화 혁명이 없었더라도 저 왕세자의 앞날이 밝지는 않았을 거다.

거듭 말하지만 제 목적을 위해 형님 부부를 사지로 몰아넣는 프로방스 백작과 오를레앙 공작이 걜 살려뒀을 리가 있나.

오히려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당하는 꼴이긴 해도 지금 이게 저 아들 루이에겐 그나마 목숨이나마 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거다.

목숨의 은인인 셈이지.

[오늘따라 혓바닥이 유난히 길군.]

시꺼.

자기합리화 좀 하겠다는데 뭐 어때서.

나도 사람인데 양심의 가책 정도는 느낄 수도 있지.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이용하고 있는건데.

"아무튼 이번 일로 파리의 민심은 동정론으로 기울게 되겠지요. 파리 너머야 원래부터 동정론이 주류였으니 이번 퇴위 선언까지 더해지면 민의는 완전히 법통파로 수렴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무시무시하다는 거야."

시에예스 주교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입헌정을 세울 것도 아닌 놈이 순전히 분란을 부추길 작정으로 가장 보잘것없어야 할 갓난아이에게 힘을 실어준다는 게 진정 초선의원이 할만한 발상인가? 내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사실 지금 내 앞에 있는 게 사람이 아니라 사람 거죽을 뒤집어쓴 메피스토펠레스가 아닌가 싶어질 지경이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주교님.

[저게 어떻게 칭찬인가?]

정적이 날 보고 교활하고 악랄하다는데 칭찬 중에서도 극찬이지 뭐.

지금이야 종교정책 관련해서 임시로 협력하는 관계지만 이 주교님은 제한선거권을 지지하는 우익이고 우린 보편선거권을 지지하는 좌익이니 언제까지 함께 가긴 어렵다.

미래의 정적으로부터 메피스토펠레스 소리까지 들었으니 극찬이라고 해야지.

"그럼 이 항복선언서는 이만 주교님께 넘겨 드리겠습니다."

아무튼 더 듣고 있어 봐야 좋은 소리는 안 해줄 것 같으니 어서 음모나 마무리 짓자.

급진공화파에 감찰위원장인 내가 저 퇴위선언서를 들고 나타나면 다들 뭐라고 생각하겠어?

당연히 권위가 되었건 폭력이 되었건 협박해서 억지로 받아낸 거라고 생각하겠지.

사실 따지고 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긴 한데, 하여튼 이 종이는 내가 들고 있어 봐야 아무런 득이 될 게 없는 저주받은 성물이다.

하지만 이 종이가 우익인사이자 고위 성직자인 시에예스 주교 손에 쥐어져 있다면?

궁지에 몰린 루이 16세가 하다못해 왕세자의 앞날에 민폐를 끼치진 않으려고 마지막 한 수를 쥐어짠 거라고 여기겠지.

우리 집주인 놈의 설명에 따르자면 원래 프랑스 가톨릭 교회는 왕권과 한 몸이나 다를 바 없었다고 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대주교나 추기경도 아니고 일개 주교 손에 쥐어지긴 좀 과분한 물건이긴 한데, 그 고위 성직자들이 죄다 국민의회와 싸우다 내쫓기거나 도망쳐서 자리를 비운 상황이니 다들 이 정도는 가감해줄 거다.

또 시에예스 주교쯤 되면 현 프랑스에선 라파예트와 함께 인권선언서를 작성했던 초특급 유명 인사기도 하고.

"혹시나 해서 여쭙는 거지만, 아직 은연중에 연락이 되는 추기경이라던가 대주교분 혹시 안 계십니까? 어차피 가톨릭 교회에서 발표할 거면 고위급 성직자분일수록 신빙성이 높아질 텐데."

"설령 있다고 해도 내가 자네에게 말해줄 것 같은가? 그리고 고위급 성직자라는 건 그만큼 교황청과 가깝다는 이야기일세. 설마하니 이번 일에 교황청을 끼워 넣고 싶은 건 아닐 테지."

"아하, 그렇군요. 그럼 아쉬운 대로 주교님으로 만족하겠습니다."

"별 미친."

영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의 시에예스 주교였지만, 입으로 자꾸만 퉁명스러운 소리를 내는 것과는 달리 막상 행실은 고분고분했다.

저 사람도 사제로서 인륜이 다소 목에 걸릴지언정 지금은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게 최선이라는걸 아는 거겠지.

아무튼 루이 16세의 퇴위선언서가 시에예스 주교에 의하여 발표되면 혁명 이래로 줄곧 끽소리도 못 하고 있었던 가톨릭 교회에서도 몇 마디 정도는 덧붙일 수 있을 테니까.

특히나 왕세자의 교육 문제 같은 건 전통적으로 가톨릭 교회에서 막대한 지분을 차지하던 영역이라고 들었다.

만일 오늘 거래가 우리 둘의 계획대로만 잘 풀린다면 그간 줄곧 국민의회에 적대적이었던 지방 교구들을 법통파라는 이름으로 포용하는 한편 혁명 이후 소멸하다시피 한 파리에서의 가톨릭 교회 영향력을 부활시킬 수 있겠지.

물론 혁명 전의 반동적인 모습 따윈 온데간데없는 시뻘건 인조 키메라겠지만 말이야.

"아,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늘 일은 저와 주교님만의 비밀인 겁니다. 어차피 알 사람은 다들 알겠지만 일단 그런 거로 해주십시오."

"어련하실까. 난 이만 메피스토펠레스에게 홀려 영혼을 빼앗기기 전에 가보겠네."

그렇게 마지막까지 시에예스 주교는 낮게 혀를 차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물론 오래 머물렀다가 괜히 다른 사람 눈에 띄는 것보다야 얼른 헤어지는 게 낫다지만 여기까지 칠색 팔색을 하는 건 개인적인 적의와 혐오도 다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겠지.

뭐, 내가 생각해봐도 미움을 살만한 짚이는 구석이 한둘이 아니니까 그리 놀라울 것도 없겠지만.

그보다도.

"언제까지 거기 숨어있을 생각인가."

슬쩍 뒷짐을 지고 큰소리를 내봤다.

[···? 만날 사람이 또 있었던가?]

만나기로 한 '사람'은 없었지.

하지만 없으면 이상할 '놈'이라면 하나 있다.

본인이 직접 왔을지, 아니면 쫄다구가 왔을지야 모르겠는데.

뭐, 그냥 내 피해망상이라면 쪽팔리고 끝내면 그만인 일이고.

"끝까지 나오지 않겠다면 내일 어디에 있었는지 직접 확인해봐도 되겠는가?"

"···아뇨, 명을 받들겠습니다."

봐봐.

역시나 있었잖아.

쥐새끼 같은 푸셰 놈.

솔직히 뒤를 밟히고 있다는 낌새는 전혀 눈치 못 체긴 했는데, 진작에 미행 한둘쯤은 붙여뒀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여기에 뒤플레 일가를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심지어 마차조차 타지 않고 걸어서 왔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루이 카페의 심문실 문 앞에서 마주쳤다?

우연이라기엔 좀 너무 공교롭지.

설마하니 본인이 직접 튀어나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흠. 그렇다면 일부러 비밀을 공유하기 위하여 신분을 노출한 것 아니겠는가?]

그럴 수도 있겠군.

본인 혼자 알고 있어 봐야 약점이 되기엔 좀 물증을 남기기 애매하고 그렇다고 흘려보내기엔 아쉬운 거래니까.

차라리 이참에 「사실 우연히 나도 이 자리에 있었다」라며 공범 행세를 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영악한 놈.

"죄송합니다. 제가 의도해서 엿듣게 된 건 아니었습니다."

어이구, 퍽이나.

역시 공범 작전이군.

"다만 간밤에 심문실에 수상한 자가 나타났다고 하여···오늘 있었던 일들은 전부 잊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주제넘었던 점 사죄드립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네."

네가 잊으라고 한다고 해서 순순히 잊을 놈이냐.

단 한 번도 줏대를 가져본 적 없다는 점에서 지조를 지켰다는 평가나 들은 놈인데.

처음부터 내게 충성하리라고 기대했던 적도 없고, 이렇게 뒤를 밟고 있었다는 걸 자백한 이상 더더욱 믿을 생각 따윈 없다.

그러니까.

"자네 혹시 권총 있나?"

"···? 있긴 합니다만."

"잘됐군. 이리 줘보게."

다짜고짜 손을 내밀었다.

푸셰는 뭔가 불안한 낌새를 느낀 듯 한참을 망설였으나, 끝내 내게 권총을 건네주고야 말았다.

자의건 타의건 직전에 내 뒤를 밟고 있었다는 걸 들켜버렸으니 그야 제아무리 불합리하게 들리는 명령이라도 일단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

그리고 나는 푸셰에게 건네받은 권총을 그대로 루이 카페가 있는 심문실을 향해 겨눈 다음.

타앙!

발포했다.

흑색화약이라 그런지 매연도 지독하고 사격감도 별로였지만 아무튼 돌벽에 제법 크게 탄흔이 생겼다.

그거면 충분했다.

"자, 이제 이 권총을 들고 먼저 여기서 나가게."

"·········."

이거 꽤 즐거운데.

권총을 돌려받은 푸셰가 눈으로 내게 오만가지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다.

어차피 문도 닫혀있겠다, 루이 카페 말고는 달리 아무도 없겠다 딱히 다친 사람은 없겠지만 총성이 좀 크던가?

꽤 늦은 시간이긴 해도 나름 주요 시설이니 분명 야간당직자건 행인이건 한둘쯤 총성을 들은 사람이 나올 테고 삽시간에 입소문이 돌게 될 거다.

즉, 푸셰도 오늘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커녕 오늘 이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발설할 수 없는 진짜배기 공범이 된 거지.

"아니면 그냥 여기다가 버리고 가도 상관없네. 하지만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괜히 아무 눈에나 띄면 피차 곤란해질 테니까."

"···버리고 가겠습니다."

휙.

내게 허락이 떨어지지 말자 푸셰가 냅다 권총을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나름 금박 장식도 붙어있는 게 비싼 총 같아 보였지만 괜히 들고 있다가 용의자 취급당하는 것보다야 낫다고 본 거겠지.

뭐, 혹시나 저걸 만든 장인이 저 권총 푸셰에게 팔았던 거라고 증언하면 일이 커지겠지만 그 전에 적당히 묻어주자.

아무튼 이걸로 진짜 공범이 된 거니까.

"난 오른쪽으로 나가겠네. 자네는 왼쪽으로 가게. 아니면 자네가 오른쪽으로 갈 텐가?"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번만큼은 천하의 푸셰도 여유가 없었는지 퉁명스레 대꾸하고선 후다닥 내빼기 시작했다.

흠, 이럴 때는 오히려 천천히 걸어서 나가는 게 의심을 덜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거기까진 생각이 안 갔나?

[···반대로 자넨 왜 이렇게 유유자적한 건가?]

나야 루이 16세 퇴위라는 핑계가 있으니까.

만약 붙들리면 내가 쏜 거 맞고 하도 퇴위 안 하겠다 뻐팅기길래 위협할 목적으로 쏜 거라고 변론할 거다.

그럼 그 협박해서 받아낸 퇴위서 들고 나간 가톨릭 교회와 내 화끈한 모습에 환호할 우리 혁명 지사들이 열심히 변호해주겠지.

안 들키고 무사히 빠져나간다면 뭐, 저 찬탈자들이 루이 16세를 암살하려고 들었다는 낭설이 돌 테니까 왕세자 동정론에 마침표를 찍어줄 테고.

어느 쪽이건 다소의 타격은 있어도 빠져나갈 구석이라면 충분하다.

[미친놈.]

칭찬 감사요.

아무튼 푸셰 저 미친놈도 이번 일로 매운맛을 제대로 봤을 테니 또 함부로 미행 같은 거 붙이려고 들지는 않겠지.

괜히 안 좋게 엮였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을 테니까.

이래도 느끼지 못했다면 뭐-차차 몸으로 실감하게 만들어주면 될 테고.

어차피 저놈은 정점에 서기보단 적당히 높은 자리에 올라서 흑막 노릇을 하는 걸 선호하는 놈이니 아예 파멸시키긴 어려워도 내 앞길에서 치워버리긴 비교적 간단하다.

[이래도 자네가 사라진 게 자네 조국에 홍복이 아니라고?]

···그러게.

솔직히 나도 슬슬 자신이 없어지던 참이다.

***

브르타뉴 지방.

"폐위가 아니라 퇴위다?"

"예. 의회에서 사실상 폐위를 선언하기 직전에 간발에 차이로 스스로 보위에서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런가. 다행히 형님 폐하의 곁에도 총명한 충신이 있었나 보군."

'그렇게 똑똑한 놈이면 얼른 도망치기나 할 것이지, 괜한 짓을 하다니.'

내심 이를 갈면서도 프로방스 백작 루이 스타니슬라스 그자비에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렴 제아무리 검은 흉계를 숨기고 있다지만 그는 대외적으로 엄연히 루이 16세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해방군을 이끌고 온 충신이자 프랑스 왕국의 섭정을 자칭하고 있는 몸.

사실상 폐위에 가까운 퇴위라고는 해도 덕택에 조카 루이 왕세자가 정상적으로 왕직을 계승 받게 되었는데 아쉬워하는 기색을 내비칠 수는 없었다.

"그럼 조카님, 아니지. 왕세자 전하의 즉위식은 언제쯤이 될 예정이라고 하던가?"

"아직 전해 들은 바 없습니다."

"···그건 세작이 부족하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정말로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바가 없는 듯합니다. 소문에 의하면 지금 파리에선 오를레앙 공작을 새 왕으로 옹립하려는 이들도 적잖은 모양이라···."

그것참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

내심 쾌성을 내지르려던걸 애써 참으며 프로방스 백작이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이젠 폭도들로도 모자라 찬탈자들까지 소란인가."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제아무리 파리의 폭도들이 기세등등하다고 하나 전 프랑스의 의분과 조물주의 의지가 함께하는데 무슨 수로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왕세자 전하께서 정식으로 보위에 오르시거든 마침내 합스부르크에서도 결단을 내릴 터이니 머지않았사옵니다."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그래서 문제인 거야 이 멍청한 놈아.'

이번에도 내면의 목소리가 튀어나올 뻔했으나 프로방스 백작은 애써 웃는 낯으로 기적적인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와 합스부르크가 개입하는 게 도대체 뭐가 든든하다는 말인가?

멍청한 형님 루이 오귀스트가 보위를 지키던 시절이라면 모를까, 그가 퇴위를 선언해버린 이상 외가인 합스부르크에서 어린 왕세자를 위해 섭정역을 파견할 명분이 만들어져버렸는데.

물론 그 경우 이 프랑스 왕국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괴뢰정권으로 전락하게 될 거고, 나아가 프로방스 백작을 비롯하여 왕위를 노리는 야심가들도 졸지에 뭐 쫓던 새가 되고야 말 거다.

곧 사실상 전 기독교 세계가 합스부르크와 그들의 피를 이은 괴뢰정권 손아귀에 떨어지는 순간이다.

그간 멀리서 주판이나 튕기던 영국이 프로방스 백작을 지지하고 나선 것 또한 그와 같은 외교적 참사를 사전에 저지하기 위함 일터.

'차라리 지금 죽여둬야 하나?'

불현듯 거무튀튀한 야욕이 그에게 친족살해를 권하기도 했으나, 이내 프로방스 백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조금만 사람 좋은 미소나 지으면서 기다리고 있다 보면 오를레앙 공작이 알아서 손을 더럽혀줄 텐데 뭣 하러 그가 나선단 말인가?

꼭 오를레앙 공작이 아니더라도 혁명 타령하는 공화파 폭도들도 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합스부르크조 프랑스만큼은 저지하려고 들 런던도 있다.

지금 파리에 있는 건 이미 시한부를 선고받은 산송장에 불과하다.

어디까지나 충신이자 해방군으로서 인망을 쌓아야 할 프로방스 백작이 구태여 확인 사살까지 나설 필요는 없었다.

"파리에 미리 루이 17세의 즉위를 축하한다는 파발을 보내두게."

마침내 결심을 굳힌 프로방스 백작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각 교구엔 파리에서 어떤 결론이 나건 간에 이 프로방스 백작 루이는 선왕 폐하의 아우이자 섭정으로서 루이 17세 폐하께 모든 걸 바치리라 전해두고."

"명 받들겠나이다, 전하."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직전까지만 해도 조카를 죽일까 말까 고민하던 사람이 갑자기 제 모든 걸 다 바칠 턱이 있는가?

이는 결국 전면적인 군사 반란에 앞선 명분 쌓기에 불과했고, 구출을 핑계로 삼건 복수를 핑계로 삼건 프로방스 백작은 이참에 영국을 등에 업고 파리로 상경할 작정이었다.

물론 그 경우 먼저 라파예트 후작과 싸워 이겨야겠지만-.

'그 친구야 누구나 아는 왕당파 아닌가.'

차라리 프로방스 백작이 이끄는 왕당파 군단에 붙었으면 붙었지, 맞서 싸우려 들 리가 있나?

다른 장군들도 비슷비슷하게 왕당파이거나 최소한 반공화주의자이니 본격적인 왕위쟁탈전이 시작되면 중립을 지키려 할 터.

'자, 그럼 어디 오를레앙 놈이 먼저 사고를 칠지 폭도들이 칠지 두고 보실까.'

어느 쪽이 선수를 치건 간에 그 나름대로 이점이 있을 테니 서두를 필요도 없을 터.

프로방스 백작은 언제나처럼 남몰래 음흉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어서 맹세한 그대로 파리로 상경해 모든 것을 바치라는 답변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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