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초전
"염병하지 말라는데요."
"뭐 그렇겠지."
푸르륵.
그리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대꾸하며 라파예트 후작이 제 애마의 등에 올랐다.
가택연금 처분을 당한 지 근 반년 만에 육군정복 차림새였다.
"나 같아도 그럴걸세. 당장 눈앞에 왕위가 어른거리니 오죽하겠나? 이제 한창 반군을 모아서 파리로 상경해야 하는데 항복하라니, 웃기지 말라고 하겠지."
"호오, 지금 왕당파라고 싸고 도는 겁니까?"
"아니, 카이사르로서의 경험담이라네."
···이 양반도 많이 뻔뻔해졌군.
기회가 날 때마다 승마 교실 핑계로 들락날락하며 옆에서 놀려댔더니 이제는 제 입으로 얼굴에 똥칠하면서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다.
뭐, 뻔뻔한 건 승마 교실이라면서 말 한번 안 탄 나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말이야.
[그러게, 말 정도쯤은 탈 줄 안대도.]
네, 네.
그러시겠지요.
"그럼 난 이만 왕국을 향한 충성을 증명하고 오겠네."
어디로, 같은 건 이제 와서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당연히 프로방스 백작의 야심을 박살내주기 위하여 브르타뉴로 출병하려는 참이다.
저쪽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기절초풍이겠지.
비록 자유주의에 치우치긴 했어도 누구나 이름을 아는 왕당파에 심지어는 최근에 파리 교외에서 의회와 정면충돌한 사람이 진압군을 끌고 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하고 있을 테니까.
솔직히 내가 반대 입장이라도 직접 파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보고 듣지 않았다면 라파예트 후작이 군대를 끌고 온다는 소식을 들어도 아, 진압군이구나-가 아니라 라파예트가 왕당파에 힘을 실어주러 오는 거구나! 라고 생각할 거다.
그놈의 전쟁 위기 때문에 구렁이 담 넘듯이 넘어가긴 했어도 원래라면 청문회에 출두해서 군인으로서의 명예와 경력을 박탈당해야 했을 사람이니까.
샹 드 마르스의 행진 이래로 근 반년간 가택연금 당한 상태였으니 더더욱 의회에 앙심을 품고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했겠지.
그러니까 저쪽의 의표를 찌르려면 최고의 조커패이긴 한데-쓰읍.
"솔직히 못미더운데요."
"이봐, 설마 이제 와서 내가 프로방스 백작에게 투항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한번 의회랑 기 싸움을 하려고 군대 끌고 오신 분이 두번인들 못하겠습니까."
이번에는 요근래 눈에 띄게 뻔뻔해진 라파예트 후작도 차마 답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네가 네 죄를 알렸다는 거지.
마지막까지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자각도 없이 일방적인 힐난만 쏟아내던 루이 카페에 비하면 최소한 이 양반은 부끄러운 줄은 아는 느낌이다.
[다름 아닌 그 루이 카페에 비교당하는 시점에서 그게 칭찬이 맞나?]
그러게.
사람은 좋았다는 게 칭찬이 아닌 전형적인 사례였지.
일단 퇴위하고 난 다음에는 부부 모두 왕세자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조용히 별궁에 처박혀 있는 거 갈긴 한데 솔직히 또 나도 모르는 곳에서 사고 치고 있을 것 같아서 슬슬 진저리가 나려고 한다.
그 집안은 내가 매일 같이 국왕을 죽이라고 노래를 부르는 마라랑 에베르와 주먹다짐해가며 목숨이라도 살려준 거 과연 알까?
"···뒤마 대령은 두고 가겠네."
봐봐.
저 친구는 결국 끝내 둘러댈 논리를 생각 못해서 말을 돌리고 있잖아.
그래도 제 죄를 알고는 있다는 소리니 얼마나 좋아?
시민 루이 카페씨를 한번 겪고 보고 나니 누굴 겪어도 상대적 선녀 같다.
아, 푸셰 놈 빼고.
"그가 지휘하는 용기병 연대도 말이야. 모쪼록 쓸 일이 없기를 바라네만, 혹여 도움이 필요할 일이 생긴다면 언제건 뒤마 대령을 사적으로 부려도 좋네."
"흠, 그럼 제가 이 용기병 연대로 쿠데타를 시도하진 않을까요?"
"쿠데타를 시도할 사람이었으면 구태여 왕세자 전하에게 기회를 주지도 않았겠지. 마음만 먹었으면 얼마든지 요리해버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라파예트 후작이 쓰게 웃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여기까지 해줄 거라곤 기대도 안 하고 있었네. 자네를 불신한 거지. 알다시피 자네는 대표적인 극좌 인사잖은가? 나로선 어떻게 해야 자네가 방심한 틈을 타 폐하를 탈출시킬 수 있을까, 그런 궁리뿐이었네."
···뭔가 불온한 이야기가 들린 것 같은데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줄까.
그리고 이보셔요, 뭘 멋대로 다 끝난 이야기처럼 지껄이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왕세자 전하의 생존 여부는 오히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 아닙니까?"
"그래, 그렇지. 그러니까 자네에게 용기병 연대를 맡기고 떠나는 것 아닌가."
이 아저씨도 너스레가 늘었구만.
그렇지만 뭘 걱정하고 있는지는 대략 짐작이 간다.
라파예트가 사실상 의회와의 대결에서 완패하고 가택연금 당한 이래로 그의 빈자리를 차지한 건 뒤무리에 장군.
프랑스령 플랑드르 출신의 노장으로, 본인만의 계파를 이끌던 라파예트 후작과는 달리 명백하게 오를레앙 공작에게 줄을 댄 인물이다.
한마디로 현재 국민위병은 오를레앙 파벌의 수중에 떨어졌다.
고참들이야 여전히 마음 한편으로는 라파예트에게 충성하고 있겠지만 유사시엔 직속상관인 뒤무리에 장군의 명령을 우선할 수밖에 없다는 거지.
한데 그 라파예트 후작까지 왕당파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파리를 떠나게 된다면?
아무리 애틋하고 각별한 사이였어도 멀리 지내다 보면 자연히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다.
라파예트가 무슨 축지법의 달인이라서 한 달 안에 프로방스 백작과 그 밖의 소소하게 정부에 반항하는 군벌들을 토벌하고 금의환향할 수 있는 게 아닌 이상에야 장차 국민위병은 조금씩 오를레앙 파벌에 물들게 될 거다.
[시기 한번 공교롭기도 하지.]
···그래.
하필이면 그간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이나 당하던 라파예트 후작을 콕 집어서 지방으로 내쫓은 것도 그렇고 아직 왕세자가 정식으로 즉위식을 치르기 전, 가장 정통성이 취약한 시기를 틈타 뭔가 한바탕 저질러보려는 속내가 팍팍 느껴지는 움직임이다.
그나마 나폴레옹을 시켜서 샹 드 마르스 행진 때 내가 이끌었던 의회군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군내 사조직을 만들어보라고 했는데-그다지 잘 풀리지는 않는 모양이다.
일전에 술에 취한 주정뱅이들에게 치욕을 당하게 한데에 이어서 아녀자들에게까지 비웃음을 사게 만들면서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군인들을 연일 우스갯거리로 만들고 있다나, 뭐라나.
아무튼 턱에 칭칭 붕대를 감은 에베르가 신이 나서 손짓·발짓해가며 비꼬아 댄 거 보면 내가 루이 카페를 퇴위시킬 때 거리에선 뭔가 심기 불편할 만한 일이 있긴 했던 모양이다.
아니 그런데 이번엔 진짜로 억울해.
애초에 인솔을 뭐같이해서 인식 조져놓은 건 나폴레옹인데 왜 우리까지 싸잡혀서 같은 취급이야?
[거꾸로 오를레앙파가 군인들을 우스갯거리로 삼았다면?]
그야 당연히 천인공노할 몰지각한 짓이고 한 놈의 일탈이라도 천배만배 확대해석해서 만천하에 공론화 시켜야지.
왜. 뭐. 왜.
나만 더러워?
"내가 없는 동안 왕세자 전하를, 아니 루이 샤를을 지켜주게."
라파예트 후작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힘들 거라는 거 알고 있네. 하지만 기왕에 일이 이렇게 된 거 사나이 대장부가 끝을 봐야지 않겠나. 면목 없다는 거 알고 있지만, 이렇게 또 부탁하지."
"하이고. 어련하시겠습니까."
당신도 미안한 일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지?
알고 있으면 전쟁영웅의 위명에 걸맞은 신위로 보답하셔.
괜히 또 저쪽에 쪼르르 달려가 붙지 말고.
그런데 잠깐.
"왜 루이 17세가 아니라?"
나야 공화파라 그렇다 치고 당신은 왕당파니까 루이 17세라고 불러줘야 하는 거 아닌가?
라파예트 후작이 잠시 침묵하더니 내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며 되물었다.
"가능하겠나?"
···힘들 거 같긴 한데.
그걸 당신 입으로 듣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네.
"왕세자 전하께서 섭정 의회를 끝내고 친정에 나서시려면 적어도 10년은 더 기다려야겠지."
다시 어엿한 왕으로 인정받으려면 10년이 더 필요할 테고.
라파예트가 덧붙였다.
"아무리 노력해봐야 내년에나 가능할 대관식조차 위태로워 보이는 와중에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 어린 분께 장차 20년을 더 목숨을 걸어달라 강요하겠는가?"
어···.
[잠깐, 지금 공화정을 인정하겠다는 소리인가?]
내가 듣기에도 그렇게 들렸는데.
물론 왕정을 유지할 수단이 있다면 당연히 왕정을 선택할 양반이긴 한데, 달리 대안이 없다면 공화정도 인정하지 못할 것도 없다 정도로는 해석할 수 있을 거다.
라파예트 본인에겐 차선도 아닌 차악이겠지만.
아무튼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군.
"뒤마 대령에겐 내가 없는 동안 자네를 나를 섬기듯 따르라 전해두겠네."
탓.
그것이 라파예트의 고별사였다.
가볍게 말 옆구리를 걷어찬 전쟁영웅은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그의 애마와 함께 삽시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렇게 개폼 잡고 출전해서 박살 나면 아주 개망신일 텐데.
[그럴 일은 없을걸세.]
그래, 그렇겠지.
나름 프랑스가 자랑하는 전쟁영웅이고 젊은 시절엔 민병대 소리도 아까운 아메리카 대륙군으로 천하의 레드코트를 보란 듯이 썰어대던 양반이니까.
정치가로서의 라파예트라면 영 못미더운 팔푼이지만 군인으로서의 라파예트는 나폴레옹과 어깨를 나란히 하진 못해도 바로 그 아랫줄은 채우고도 남는다.
그러니까 지금은 우리 처지에 라파예트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오늘따라 수다 떠는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적막한 파리가 을씨년스럽게만 느껴졌다.
***
오를레앙 저.
"···비겁한 놈들."
젊은 루이필리프가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분골쇄신하여 충성을 다 바칠 생각도 없을 공화주의 폭도가 6살 먹은 왕세자 뒤에 숨다니."
지난날 그 6살 먹은 왕세자를 어떻게 해할지만 궁리하던 이들이 할 말은 아니었으나, 아무튼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
루이 16세, 아니 루이 오귀스트 카페는 더는 이 나라 프랑스의 국왕이 아니다.
그럼 살리카법에 따르자면 차기 국왕은 올해로 6살 먹은 루이 샤를.
말하자면 루이 17세겠으나, 막상 며칠째 의회는 새 왕의 대관식을 차일피일 미루며 시간을 질질 끌어대고 있었다.
대외적인 핑계는 물론 재정고갈과 섭정지명 문제였지만 그 속이 뻔히 보이는 핑계를 믿어줄 순박한 머저리가 과연 이 파리에 몇이나 될지.
결국 이는 어떻게 해서건 이참에 새 왕조를 열려는 오를레앙파와 이를 저지하려는 법통파와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정면충돌이 빚어진 결과였고, 현시점에서 힘의 균형은 완벽한 동수.
즉,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지지부진한 대치 상태를 이어가는 와중이었다.
순수하게 계파의 힘으로만 따지자면 압도적인 오를레앙파는 섭정 즉위와 즉각적인 왕조 교체로 의견이 갈린 반면 당초 속수무책으로 밀릴 것 같았던 법통파는 가톨릭 교회와 급진공화파라는 뜻하지 않은 아군을 등에 업은 덕택이었다.
여기에 실제로 암살시도가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나면서 거국적인 단합이 이루어진 건 덤.
차라리 공화파 지지자들의 폭동이나 쿠데타 시도라면 모를까, 법통파는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던 오를레앙파로서는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가 정말로 합스부르크가 개입하게 될지도 모르오."
"아니 공화파 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렇게 반전 타령하던 놈들이 오스트리아에 침략 명분을 마구 떠먹여 주고 있잖아요!"
"그, 어차피 원래 주전파도 공화파 아니었소?"
"평소 눈치 없다는 소리 자주 듣지 않으십니까?"
당장 오늘만 해도 그랬다.
다들 입으로만 호들갑 떨며 법통파를 힐난하고 위기감을 조성하고 있을 뿐.
막상 누구 한 사람 나서서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하고 의견을 제시해보려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좌우지간 정통성만 따지자면 왕세자를 등에 업은 법통파가 압도적이니까.
혹여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괜히 역적 소리나 듣게 될까 두려워서 서로 눈치만 보면서 나 말고 다른 놈이 총대를 메주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 이렇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들만 모였는지 원.'
한창 야심에 불타오르는 젊은 루이필리프로선 절로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는 추악한 광경이었다.
이래서야 도대체 누가 이 나라 프랑스가 기사의 나라라고 하겠는가.
어딜 봐도 순 불알 두 쪽 다 없는 그리스 환관 놈들만 가득하구만.
결국 보다 못한 루이필리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투견처럼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이 두 가지만 물고 늘어집시다."
마치 총대를 메주기만 기다렸다는 듯이 청중의 시선이 일제히 젊은 오를레앙에 몰린 건 물론이었다.
"저 합스부르크 놈들이 아직 어린 왕세자를 꼬드겨 나라를 오스트리아에 팔아치우도록 조종하고 있다고요. 우리 왕국의 오스트리아를 향한 국민감정이야 유구하니 다들 한 번쯤은 귀담아들어 주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그럼 오히려 외가에 조종당하는 왕세자가 불쌍하다는 동정론만 더욱 부풀지 않을까요?"
아니 그럼 네가 이것보다 나은 대안을 내보던가.
트집쟁이에게 무언의 눈총을 날린 루이필리프가 마지못해서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건 저 왕세자의 더러운 핏줄을 부각해야죠. 뭐 프랑스어보다도 오스트리아어를 먼저 배웠다던가, 6살이 되도록 파리 생활에 적응을 못 했다던가. 뭐 억지로 낭설을 퍼트리려면 많잖습니까."
그건 좀.
그리 말하듯 청중이 일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식적으로 제아무리 합스부르크의 피를 이어받았다지만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왕자가 프랑스어는커녕 프랑스 문화도 모를 리가 있나?
"그럼 그쪽에서 뭔가 책을 내보시던가!!!"
결국 참다못한 젊은 오를레앙이 언성을 드높였다.
"다들 아무런 대안도 없이 걱정만 하고 있으니까 지금 제가 뭐라도 지혜를 쥐어짜고 있는 거잖습니까! 제가 그렇게 미덥지 않으면 당신들이 직접 뭐라도 해보시던가요!"
물론, 결과는 당연하다는 듯이 침묵.
외려 괜히 언성을 드높인다는 듯 수군대며 젊은 오를레앙만 이상한 놈 취급하기 시작했다.
이 기막힌 작태에 혈압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젊은 오를레앙이 목덜미를 잡고 졸도하려던 찰나.
"로베스피에르."
상석에서 이들의 촌극을 가만히 구경하고만 있던 늙은 오를레앙-오를레앙공이 입을 열었다.
"그 친구, 분명 갈리아주의자 아니던가."
"갈리아주의자?"
"아, 그러고 보니 그 친구 게르만족이니 골족이니 떠들었었지?"
"맞아맞아. 이제 기억나는구만."
그제야 이날 저택에 모인 손님들은 저마다 수군덕대며 주군의 발언 하나하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래, 로베스피에르는 갈리아 순수주의자다.
그것도 고위 귀족들이 즐비한 원내에서 공공연히 미개한 게르만족이라고 비하할 정도로 강경한 갈리아주의자.
"한데 그런 친구가 합스부르크의 혈통을 이은 루이 왕세자 전하를 지지한다니."
오를레앙공이 조소를 터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안 맞지 않는가. 골족, 법통파. 둘 중의 하나는 새빨간 거짓말인 거고 위선인 거지."
"오오, 과연···!"
사방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물론 뻔한 아부이기도 했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온 안도이기도 했다.
만일 이대로 공화파와 법통파를 떼어내거나 하다못해 내분이라도 일으킬 수 있다면 당장에 원내 균형은 그들 오를레앙파를 향해 기울게 될 테니까.
비로소 반격의 실마리를 잡은 식객들은 저마다 미주알고주알 떠들며 의견을 제시하기 시작했고-.
"감찰위원회 놈들이 판관들을 마구 잡아 가두고 있다고?!"
동시에 적들의 총공세 또한 막을 올렸다.
"그게 지금 대체 무슨 소리야! 유무죄를 판결할 판관이 저런 무지렁이 폭도들에게 기소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렇다면 지금 내가 거짓을 고했다는 거요? 아니 글쎄 저 천둥벌거숭이들이 이 나라의 사법 질서를 아예 무너트리려 들고 있다니까!"
"기가 차구만. 아주 기가 차! 이러라고 감찰권을 넘길 줄 아나?"
"내 말이 지금 그 말이오! 행정권이 사법권을 마구 침범하는데 도대체 뭘 믿고 공정한 판결을 내리라는 건지 원!"
회장이 성토회가 되는 데에는 불과 1분도 필요하지 않았다.
모두 하나같이 이 프랑스 절대정을 지탱해온 법복귀족이거나, 법복귀족들과 직간접적인 인연을 맺었던 집안들이었다.
가난뱅이 상퀼로트의 관점에서 설명하자면 사법불신의 원흉이오, 적폐들이었던 셈이다.
"그게 그렇게들 놀랄 일인가?"
상석에 선 오를레앙공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곤혹스러움이 가득한 식객들과는 달리 기가 막힌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적은 제3신분일세. 귀하게 대접해준 적도 없으면서 귀하게 싸워주길 기대하면 쓰나."
반격하게.
오를레앙공이 짧게 지시를 내렸다.
파리 전역이 쌍방의 행정 공방으로 뒤덮이는 데에는 그 한마디면 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