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통파
튈르리 궁.
"방데?"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니요.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아서."
알다마다.
자크 루 동지에게 미래지식이 어쩌고저쩌고 떠들어봐야 별 득도 없을 것이고 괜히 미친 사람 취급 밖에 안 당할 테니 설명할 생각은 없지만 내가 방데를 모를 린 없다.
교과서나 혁명사 공부하면서 제대로 배운 지식이 아니라 인터넷 돌아다니다가 접한 찌라시라서 그렇지.
솔직히 보면서도 당장 온 나라가 전쟁 치르는 와중 지들이 먼저 후방에서 반란 일으켜놓고서 정부군이 좀 과격하게 진압했다는 게 왜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되냐 싶긴 했는데.
[지금은 아니라는 뉘앙스군.]
그야 혁명정부 꼬라지가 이 모양이면 역사의 선형적 진보를 저해하는 수구반동의 부질없는 저항이 아니라 혁명무죄 조반유리지.
혁명 공화국이 나라를 잘 이끌고 있는데 아직도 구체제를 못 잊은 수구반동들이 들고 일어난 게 아니라 관점에 따라선 절대정 시절보다 더한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까 더는 못 견디고 사슬을 끊고 들고일어난 거잖아.
당장 동학농민혁명이 근왕주의 성향의 농민봉기였다지만 그렇다고 시대에 도태된 낙오자들이라고 평가절하당하지는 않는다.
농민이 도시 사람보다 보수적인 건 지극히 당연한 이치다.
끝없이 변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도시 생활과는 달리 농경은 괜히 멋모르고 함부로 바꾸려 들었다가는 한해 농사를 망치고 집안까지 덩달아 망하게 되니까.
그렇다면 이 경우 주목해야 할 건 저들의 보수적 타성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모험을 권장하는 도시와는 달리 위험을 감수하길 극히 꺼려야 할 농민들이 왜 원 역사에서 농민봉기라는 지극히 위험한 길을 선택했을까, 하는 점.
"혹시 동지께서는 방데 지방에 대해서 잘 아십니까?"
"나 말인가?"
자크 루 동지가 대꾸했다.
"나야 파리로 오기 전까지는 농민들과 자주 어울려왔으니까 어느 정도는 알겠지. 하지만 직접 가본 적은 없으니 잘 안다고 말하긴 좀 모자란 사람일세. 그냥 웬만큼은 안다고 하는 게 맞겠군."
"그럼 저 농민들이 자진해서 법통파 의용군을 결성한다는 게 일반적인 사례라고 생각하십니까?"
"일반적인 사례라."
자크 루 동지가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보아하니 지금 형제는 이미 일반적이지 않은 사례라고 단정 지은 듯한데."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뭐,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해두지. 파리야 가까이에서 지켜본 게 있다 보니 다들 국왕에 대한 환상이 진작에 깨진 지 오래지만, 지방의 농민들은 또 이야기가 다르거든.
농민들은 아직도 국왕은 선량한 피해자고, 국왕의 눈과 귀를 가리고 왕권을 나약하게 만든 간신모리배들과 오스트리아 왕후야말로 모든 악의 원흉이라고 믿는다네."
그것참 익숙한 이야기군.
사극에서 자주 나오는 전형적인 나약한 국왕, 사악하고 타락한 권신 구도다.
뭐, 이 경우엔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외세가 있긴 한데 이것도 사극에서 선역으로 나온 전적이 거의 없는 외척에 대입하면 되겠지.
대륙 반대편이라지만 농민들이 생각하는 건 프랑스나 조선이나 거기서 거기다, 이건가.
"그러니 방데 지방의 농민들이 변함없이 국왕을 동정하고 아끼고 있다면 그 국왕의 피를 이어받은 왕세자를 지지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다만 형제가 무엇을 근거로 자발적이라고 단정 지었는지 나로선 짐작조차 가지 않는군.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그 지역의 봉건영주나 교구에서 출세를 위해 무지렁이 농민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보네만."
"그냥 감입니다, 감. 아니면 그랬으면 좋겠다는 소망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래, 감이다.
거기에 어떤 과장과 거짓 날조가 뒤섞여있을 줄 알고 인터넷 찌라시글로 읽었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는 말인가.
지금 이 순간 내가 알고 있는 정보 중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건 대혁명 와중 방데라는 지방에서 반란이 있었다는 것과 참혹하게 진압당했다 이 두 가지뿐.
고로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내 행동의 근간은 팩트에 기초한 합리가 아닌 직감에 불과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멋대로 앞서가지 말자.
[그렇게 조심하고 합리를 따지는 놈이 한다는게 고작 빨갱이짓이라니 참. 심지어 자네 시대엔 이미 패망했다면서?]
입 닥쳐, 막시밀리앙.
"혹시 동지께서 그 방데 지방을 조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왜 그들이 멋대로 의용군을 일으켰는지, 이번 사례가 우리의 혁명에 득이 될지 해가 될지, 또 그들의 사례를 다른 지역에 적용할 순 없을지.
꼭 완벽하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개략적인 맥락이나마 짐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거야 어려운 것도 없겠군. 맡겨만 주시게. 저 친구들도 교회 정도는 다닐 테니 우리 제1신분 형제들에게 수소문하면 금방 좋은 소식이 있을걸세."
오오, 역시 자크 루 동지.
뭐, 시대적 한계상 저쪽에서 보내줄 보고서나 서신이라고 해봐야 가톨릭교회의 관점이 강하게 묻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그게 어디야.
[꼭 자네 시대엔 안 그렇다는 듯이 말하는군.]
그야 21세기는 사견이 짙게 드러나도 교차검증이 가능하니까.
오히려 그게 단점으로 작용하는 때도 있다지만 이걸로 미주알고주알 떠들 생각은 없으니 적당히 넘어가기로 하고.
"다 끝나셨나요?"
하여튼 이리하여 자크 루 동지를 돌려보내자니 뒤편에서 누군가 내 등을 콕콕 찔러댔다.
키 작은 노총각 로베스피에르보다도 머리 하나만큼이 자그마한 말괄량이 꼬마 아가씨.
"아, 마리 공주님이셨군요."
"여성의 이름을 이렇게 막 부르시는 법이 어디 있죠?"
기가 막힌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치켜들지만, 솔직히 그냥 귀엽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박민혁을 기준으로 잡아도 10년 차이에 로베스피에르 육체 나이 기준으로는 20년 차이 나는 딸뻘 소녀가 여성은 무슨.
"죄송합니다, 마드모아젤(Mademoiselle)."
"···이건 이것대로 놀리는 것 같은데. 그냥 마리 공주님이라고 불러요."
"네, 그렇게 하지요."
[우리 하나 내기할까? 난 저 아가씨가 자네에게 호감이 있다에 걸겠네.]
이보셔, 이 몸뚱아리는 원래 당신거니까 그럼 저 공주님이 서른 먹은 노총각에게 호감이 있다는 자뻑이 되는데.
[아뿔싸···!]
아무튼 나야 일단 법통파를 자칭하고 있으니까 가끔 이렇게 왕세자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 얼굴을 비춰야 하는 게 맞긴 한데, 이 아가씨는 왜 우리한테 자꾸 살갑게 구는지 도통 모르겠다.
당장 우리의 선량하신 왕세자 전하께서는 내가 근처에만 나타나도 지레 겁을 집어먹고 딸꾹질을 시작하는데 말이야.
원역사의 단두대를 생각하면 분명 내가 왕실에 나름대로 호의를 베푼 건 맞지만 그걸 저쪽이 뭔 수로 알겠어.
오히려 부모님을 속이고 퇴위를 강요한 무시무시한 역적 내지는 권신이라며 거리를 두는 게 정상적인 반응일 텐데.
"···? 제 얼굴에 뭐가 묻어 있나요?"
글쎄요, 얼굴보다는 간덩이에 뭐가 들러붙은 것 갈긴 한데요.
"아뇨. 그냥 새삼스레 공주마마께서 제게 이와 같은 영광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뭘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이제 와서 겨우 생각했다고요?"
"세간에서 떠도는 소문을 아시잖습니까. 갈리아 순수론자에 공화파 역도가 아무리 호위가 있다지만 공주마마를 독대한다니,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아무튼 괜히 혼자서 고민하는 것보다야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더 빠를 것 같으니 이참에 운을 떠보기로 했다.
그러자 마리 테레즈 공주는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래서요?"
하고, 태연하게 되물었다.
"오를레앙은 음흉한 아저씨죠. 주교님들은 무력하고요. 지금 꼬맹이 루이에게 보탬이 되는 사람은 그나마 당신뿐이잖아요. 누나로서 동생을 지키려는 게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나요?"
"···국왕 폐하, 아니지. 루이 오귀스트 공께서는 절 대단히 미워하시는 것 같았는데요."
"그거야 아바마마께서는 예전부터 눈이 안 좋으셔서 가까이 있는 걸 잘 보지 못하셨거든요. 아니지, 반대로 멀리 있는 걸 잘 못 보시던가? 아무튼 뭔가 오해가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마리 테레즈 공주가 단언했다.
"전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지금껏 살면서 이 궁정에서 우릴 이용하려 드는 사람들을 어디 한둘 본 줄 알아요? 당신이 어떤 사람이건 간에 최소한 저 음흉한 오를레앙보단 믿을만한 사람이고, 그거면 충분해요."
됐죠?
한차례 장광설을 끝마친 마리 테레즈가 가슴을 활짝 펴며 으스댔다.
뭐, 중간중간 어떻게든 어른스러워 보이려고 애쓰는 게 참 가엾기도 기특하기도 했는데.
[최소한 제 아비보단 똑똑한 아이군.]
그것만큼은 동감.
아직 어려서 그런지 공화파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거나 그 단어로부터 오는 무게감을 괄시하고 사람을 덜컥 믿는 등 소소한 단점이 눈에 띄긴 하는데, 그걸 감안해도 루이 카페보단 낫다.
왕위계승법상 이 아가씨에게까진 절대로 왕위가 넘어갈 수 없다는 걸 감사히 여겨야 하나.
"자, 어때요. 이만하면 설명이 되었나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덜컥 믿는 걸 보니 장래가 큰일이겠구나, 라는 건 잘 알겠습니다."
"이이익, 이 아저씨가 진짜···!"
흥!
의성어가 아니라 정말로 입으로 저 소리를 내더니 마리 테레즈 공주는 제자리에서 돌아섰다.
기분이 언짢아졌다는걸 알기 쉽게 보여주면서도 그렇다고 떠나가진 않는 건 어서 기분에 맞추어 달라는 걸까?
'이것 참.'
골리는 재미는 있겠군.
그러다 정떨어져서 자연스레 멀어질 수 있다면 더더욱 좋고.
[우리 다시 내기할까?]
입 닥쳐, 막시밀리앙.
***
붉게 물든 하늘.
한때 인간이었던 고깃덩어리들과 지독한 매연, 탄흔으로 뒤덮인 대지.
그리고-목숨을 구걸하며 사방팔방으로 어지러이 흩어지고 있는 병사들.
"···말도 안 돼."
쿠쿵!
대포 소리를 들으며 용병들과 함께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던 프로방스 백작은 홀로 생각했다.
무엇이 말도 안된다는 걸까?
당연히 그들에게 합류하러 오는 줄 알았던 라파예트가 사실은 진압군이었다는 것?
수적으로는 두 배를 훌쩍 넘던 섭정군이 간단하게 격파되어 이런 이름 모를 민가에서 적에게 포위된 것?
그도 아니면, 당연히 정의로운 섭정군에게 승리를 약속할 거라 믿었던 하늘이 그들을 저버린 것?
혹은 전부인가?
쿠쿠쿵!
"으으윽···!"
모르겠다.
저 요란스러운 대포 탓에 골이 흔들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저 겁에 질려서인지 몰라도 도저히 머리가 돌아가지를 않았다.
쿵!
"화약이 다 떨어졌습니다!"
포연을 뒤집어쓰면서도 다급하게 고용주를 찾는 용병대장에게 프로방스 백작이 대꾸했다.
"영국인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게···잘 모르겠습니다. 이미 이곳으로 오기 전부터 행방이 묘해진지라."
"···개자식들."
전황이 불리해지는 듯하니 얼른 내뺀 건가.
어차피 저들이 신의를 지키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토사구팽하려 드니 화도 나지 않았다.
그냥 너희가 그럴 줄 알았다, 너흴 믿은 내가 바보였다는 허탈감만 앞설 뿐.
프로방스 백작은 은근히 항복을 권하는 용병대장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뱉었다.
"···? 포성이 멈췄습니다."
때마침 상황이 돌변하기 시작했다.
혹시 저들도 마침내 화약이 떨어진 게 아닐까.
그들 섭정군을 기습하기 위하여 강행군을 벌이다 보니 지친 건 아닐까-하는 기대가 살짝 들기도 했지만.
'아니야.'
그럴 리 없다.
프로방스 백작은 단호하게 불필요한 미련을 잘라냈다.
상대는 그 라파예트다.
적장을 사로잡을 둘도 없는 적기를 눈앞에 두고서 화약 재고나 병사들의 피로를 놓치는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할 것 같은가?
'항복을 권할 작정이군.'
그래, 틀림없을 거다.
비관적이기 그지없는 관점이었으나, 프로방스 백작은 오히려 그렇기에 제 판단이 옳다고 자신했다.
애당초 오늘 전투에서 섭정군이 라파예트가 이끄는 반란군에게 패한 건 적들의 놀라운 기책에 깜빡 속아 넘어가서가 아니었다.
다들 영국에서 지원해준 제식소총으로 잘 무장하고 있었으니 무기의 성능이 그렇게 모자란 것도 아니었고, 어차피 적들도 그나마 경험있고 잘 조련된 민병대에 불과하니 훈련도에서 그렇게 차이가 나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순수한 역량 차이.
무언가 대응이 필요한 시기마다 내려오는 적절한 지시와 즉각적인 반응, 그리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몸을 사리지 않는 과감성까지.
라파예트가 그만큼 사기진작에 능한건지, 혁명이라는게 문제인지는 몰라도 반란군은 제아무리 무모한 명령이라도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으며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무명의 지휘관을 믿지 못하여 무언가 지시가 내려올 때마다 채찍이라도 휘두르지 않으면 제때 병사들이 움직여주지 않는 섭정군으로선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할 유기적인 공세였다.
결과 섭정군은 반란군과의 초전에서 중군이 붕괴.
중군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투입된 예비대가 연달아 축차소모 되는 와중 피로를 덜어줄 예비대도 없이 적 기병대와 경보병대의 차륜전에 시달리던 좌우익이 연달아 붕괴하면서 군단 자체가 반나절 사이 증발.
지휘체계마저 붕괴하여 무질서한 패주가 벌어지는 와중 경기병들에게 몰이사냥 당하면서 투항하거나 듬섬듬섬 보이는 사과 나무를 제외하면 방어적 이점이라고는 눈씻고 찾아봐도 없는 외딴 농장에 몰아넣어진게 섭정군의 현황이었다.
군사적 지식이나 경험이 일천한 프로방스 백작조차 라파예트를 탓할지언정 패장의 졸전을 탓할 수 없는, 정말로 무언가 변명할 여지도 없이 격의 차이만 실감하게 된 참혹한 하루였다.
"백기를 들까요?"
고로 용병대장이 마침내 기사로서의 불명예를 권할 때조차 프로방스 백작은 차마 그를 탓할 수 없었다.
저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그를 따라온 용병들은 최선을 다해줬다.
오히려 저런 푼돈에 제 목숨마저 팔아치우는 용병 나부랭이가 프로방스 백작을 돕기 위하여 찾아온 영국인들조차 꽁무니를 빼는 와중 보기 드물게 기사다운 신의를 보여줬다고 높이 평가해야 마땅했다.
"···그래. 그렇게 하게."
결국 프로방스 백작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어차피 더 싸워봐야 승산도 없을진대 이들에게 그와 같이 죽어달라고 강요할 순 없었다.
오히려 괜히 저 용병들마저 적으로 돌리고 말 터.
그럴 바에야 차라리 저 반란군에게 자비를 구걸해서라도 훗날을 기약하기로 마음먹은 프로방스 백작은 그의 셔츠를 벗어서 용병들이 백기 대신에 흔들도록 했다.
항복 교섭을 위해 라파예트 후작이 호위대와 함께 몸소 그를 찾아온 건 그로부터 약 1시간 뒤였다.
"날 영국으로 추방해주시오."
프로방스 백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와 식물인간으로나마 프로방스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소. 영국이 되었건 러시아가 되었건, 이제 와 부르봉이나 합스부르크령으로 돌아가진 못할 테니 어디 마음대로 추방하시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라파예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연히 내쫓길 거라 여겼던 프로방스 백작으로서는 의아한 반응이었다.
"그럼 설마하니 이제 와서 날 풀어주겠다는 소리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코르시카나 대서양 어디 외딴섬에 유배를 보내려 하는 모양이군."
"다들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어디 배가 있어야 말이지요."
아하.
"날 파리로 끌고 가서 욕보일 작정이군?"
그제야 제게 닥쳐올 운명을 눈치챈 프로방스 백작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상대는 의회권이 신이 내리신 왕권보다 위에 있다는 폭도들이 아닌가.
그걸 뻔히 알면서도 섭정군을 일으킨 주제에 왜 이제 와 저 폭도들이 그를 봉건적인 절차로 처리해줄 거라 기대했다는 말인가.
보나 마나 공개적인 조롱거리로 삼거나, 아예 정식재판 뒤 감옥 탑에 잡아 가두거나, 여차하면 단두대로 끌고 가려 들 테지.
"그나마 근접하긴 했습니다만."
한데 라파예트는 그조차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발상이 지나치십니다."
"···그럼 도대체 날 어쩔 작정이란 말인가?"
결국 답답한 마음을 못 참고 프로방스 백작이 언성을 드높였다.
그러자 라파예트가 답하길.
"이 프랑스 왕국의 섭정이시잖습니까."
"뭐?"
"선왕 루이 16세 폐하께서 전하를 섭정으로 임명하셨으니 당연히 지금 당장 파리로 상경하셔서 오를레앙 공작으로부터 왕세자 전하를 지키셔야지요."
그게 지금 뭔 개소리야.
의회군의 포로로 전락한 프로방스 백작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그 한마디만큼은 꾹 눌러 참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