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154)

Quo vadis, domine

아니 내가 최대한 빨리 섭정 잡아오라고 하긴 했는데.

"라파예트가 벌써 섭정군을 궤멸시키고 상경을 준비하고 있다고요?"

"예."

세상에.

오만함마저 느껴지는 단답이었으나, 이번만큼은 뒤마 대령에게 전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수준차가 나도 그렇지 무슨 진짜로 출병한 지 간신히 1달인데 벌써 승전보래.

지가 무슨 홍길동이야?

"그, 섭정군이 추정 3만 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 맞습니다."

"진압군이 제가 듣기로 1만 명을 간신히 넘겼고요."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니까 거의 세배 차이 나는 적을 상대로 정면승부를 걸어서 회전 한번에 섬멸했다?"

삼국지라던가 이런저런 매체에서 지휘관 하기에 따라서 이런 쾌승을 거두는 사례도 드물게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는데.

"라파예트 사령관 각하께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것보다 간단한 일이셨겠지요."

"···허."

미친놈.

막상 내가 눈앞에서 그런 쾌승을 거뒀다는 보고를 듣고 있자니 진짜로 이 소리 밖에는 안 나온다.

이게 정치가로서가 아닌 군인으로서의 본 실력이다, 이건가?

어차피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 정규군과 싸우는 것도 아니겠다 시간이야 좀 걸려도 승리하여 돌아올 거라 믿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내가 주문한 요구사항까지 후다닥 해치우고 상경하겠다 할 줄은 몰랐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은가. 얼마나 쉽게 이기냐가 문제지 그 친구가 절대로 질 리는 없다고.]

그래, 이번만큼은 전적으로 내 판단오류다.

솔직히 라파예트를 전쟁영웅이라는 명성만 거창한 양반이라고 과소평가하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부전승에 가깝긴 해도 회전에서 한번 잡아보기도 했으니 더더욱 얕잡아 보였는지도 모르지.

새삼 왜 오를레앙공이 원내에서 라파예트를 언급할 때마다 지레 겁을 집어먹고 벌벌 떨었는지 알 것 같다.

당장 파리에서 브르타뉴까지 거리가 있는데 뭐 도착하자마자 반란군을 박살 내고 적장을 포로로 잡았으면 말 다 했지.

저 양반도 순수한 군인이라기보다는 거무튀튀한 야심을 간직한 정치군인이니까 어느 정도 전공을 과장하긴 했겠지만, 적군과 포로의 숫자를 과장했을지언정 최소한 이 프로방스 백작은 있는 그대로 보고한 게 맞을 거다.

다른 거야 집계상 착오가 있다고 둘러댈 수 있지만 섭정을 포로로 잡았다고 한 건 사실 착각이었습니다-라고 하는 순간 삼진 아웃이거든.

본인도 지난번 청문회 건으로 풀카운트 꽉 채운 거 뻔히 알 테니 알아서 꼼꼼하게 확인한 다음 보고했겠지.

그렇긴 한데.

"다만 라파예트 경의 상경을 논하기엔 다소 이른 것 같군요."

"···어째서입니까?"

어쭈, 인상 찌푸리는 것 봐라.

보아하니 내가 라파예트를 견제하려고 각을 잡는 거라 생각하나 본데.

"오를레앙 공작이 라파예트 경의 상경을 허락해줄 것 같습니까?"

상식적으로 저놈들이 그 꼴을 봐주겠냐고.

아직 라파예트가 자리를 비운 지 1달 밖에 안 되었으니 뒤무리에도 온전히 국민위병을 제 것으로 만들지 못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프로방스 백작이 파리로 상경하면 오를레앙공의 입장이 붕 뜨게 된다.

분명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현 프랑스의 섭정은 오를레앙공이고, 또 실제로도 그렇게 활동하고 있긴 한데 막상 선왕에게 지목받은 섭정은 아니거든.

의회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건 어쨌건 선왕이 섭정으로 지목한 건 어디까지나 프로방스 백작이고, 오를레앙 공작은 왕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의회에 의해서 추대된 섭정이다.

즉, 한 나라에 섭정만 둘이 공존하게 되는 거지.

라파예트 하나만으로도 성가셔서 멀리 지방으로 내쫓은 오를레앙파가 프로방스 백작이라는 핵폭탄까지 더해진 저 상경 행렬을 받아줄 리가 없다.

"물론 보고라면 당연히 숨기는 것 없이 해야겠지요. 상경 의사를 전하는 것도 좋습니다. 다만,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아···."

그제야 대강의 사정을 짐작한 듯 뒤마 대령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궜다.

이거 하나만 봐도 누구에게 충성하고 누구를 경계하고 있는지가 뻔히 보여서 솔직히 좀 마음이 그렇긴 한데.

"대신 의회에서 이리저리 둘러대며 상경을 막거든 괜히 진 빼지 말고 곧장 방데로 가보시는 것 어떠냐고 권해주십시오."

아무렴 뭐 어떠냐?

우리에겐 나폴레옹이 있는데.

그놈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인중여포 뮈라까지 옆구리에 끼고 다닐 때는 프랑스인의 황제가 자꾸 어른거리는 것 같아서 좀 섬뜩하긴 했지만, 당장은 이 또한 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해가 될 리는 없었다.

그러니까 괜히 남의 것에 눈독 들일 시간에 내 사람들이나 철저히 관리해야지.

"방데, 말씀이십니까?"

"예. 그곳에 법통파 의용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마침 라파예트 후작께서는 유명한 국민영웅이시며 법통파이니, 분명 큰 힘이 되어주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지난날 자크 루 동지에게 부탁한 방데 탐구는 생각과는 달리 지지부진하게 끝났다.

자크 루 동지 본인이 가톨릭 교회에서 이단적인 인물이다 보니 순순히 협력하려는 사람들이 일단 드물었고, 또 협력하는 사람들은 다들 완전히 혁명에 치우쳐서 중립적인 정보를 늘어놓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거든.

다만, 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비판한 점을 근거로 저 방데에서 왜 파리를 싫어하게 되었을지 대강의 그림을 그려볼 순 있었다.

[협동조합이라. 나 참,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지.]

말이 되었으니까 실제 모델들이 즐비했겠지?

요는 공동노동, 공동소유, 공동분배라는 향촌경제였다.

한국 사람들에겐 교과서에서 나오는 두레나 계(契)로 잘 알려진 잉여생산물이 충분치 않으며 도시 중심의 상업활동이 미발달한 지역에서 나타나는 원시적 협동조합 체제.

이 변증법적 유물론자의 관점에서 봐도 그럭저럭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불러줄 만한 체제를 교회를 중심으로 굴리고 있었던 지역에 대뜸 교회 재산 몰수를 때려버렸으니 그야 당연히 조반유리가 일어날 수밖에.

뭐 물론 저쪽은 털보 아저씨 이전 유토피아 사회주의고, 이쪽은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기는 한데.

"이참에 지방에서 섭정의 영향력을 거세하자고 말씀드리면 라파예트 경이라면 어련히 기대에 부응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아 좌익 인민전선은 못 참지.

당장 저 방데 지방의 원시적 협동조합 모델에 기초해서 전국단위로 확대적용하면 그냥 사회주의 농민 경제 뚝딱일 텐데 이걸 참는다고?

어유, 절대로 못 참지.

지금 뭐 도시 노동자들이 제대로 있는 것도 아니고 지지기반이라고 해봐야 무산계급 이하 극빈층 상퀼로트 뿐인데 앞에 공상적이 붙긴 해도 사회주의 지지하는 농민과 사제를 대거 영입할 절호의 기회라면 이걸 그냥 흘려보낼 순 없다.

기왕 법통파라는 간판까지 단김에 깡그리 이쪽으로 회유해서 아시냐고 뭐고 국민의회에서 조져놓은 토지정책이나 종교정책들까지 싹 갈아엎어야지.

[이 빨갱이 놈이 또.]

말은 그렇게 하면서 몸은 솔직하시구려.

솔직히 그쪽도 농민들 지지세 끌어모으려면 이게 직방이라는 거 뻔히 알고 있으면서 뭘.

어차피 21세기인의 경제 상식으로 봤을 때 현재 프랑스의 경제는 멸망했다.

이걸 자유시장경제로 극복해보겠다는 건 대공황으로 꼬라박은 각종 경제지표 자연반등할 때까지 존버하겠다는 후버나 할 발상이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정부개입은 필요 불가피.

나는 그저 거기에 내 사소한 취향 하나만 더했을 뿐이라고.

켈켈켈.

[···어휴.]

"예, 물론입니다. 의원님."

척.

하여튼 내 설명에 만족했는지 뒤마 대령이 군례를 올렸다.

그냥 악수로 하자니까 도저히 익숙하지 않아서 안 되겠다고 자꾸 빼더라고.

아마 나름의 심리적 거리감을 유지하기 위한 수일 텐데,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괜히 악수하자고 강요해봤자 물라토라 얕잡아보는 거냐고 피해의식을 가질 수도 있으니까.

"그럼 다음번엔 더 좋은 소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할 일이 있으면 언제건 찾아와주십시오."

"하하하! 저로선 그럴 일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만-예. 도움이 필요할 일이 생기면 언제건 찾아가지요!"

척.

그러니 하다못해 한국식 경례로 받아치는 것 정도는 저쪽에서도 이해해주겠지.

저쪽에서 보기엔 손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내 경례는 날림 그 자체겠지만, 어차피 나야 군경력도 없는 민간인이라는 거 다들 알 테니 괜히 트집 잡진 않을 거다.

휙.

그걸로 끝.

볼일을 마친 뒤마 대령은 그대로 돌아서서 자리를 나섰고, 우리만 멀뚱멀뚱 홀로 남게 되었다.

자, 이제 다음에 만나는 건 진짜로 라파예트의 상경일이 정해진 뒤-였으면 좋겠지만.

[조만간 또 찾게 될 거라는 뉘앙스인데.]

···그래.

만약 오를레앙공이 이제라도 섭정이나 수상에서 만족하기로 했다면 아무 일도 없을 거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꼭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라파예트가 상경하기 전에 하루빨리 실력행사에 나서려 들겠지.]

결국 의회에서 제아무리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라파예트의 상경을 한참 뒤로 미뤄도 결국 올해 안엔 파리로 돌아오게 될 거다.

무려 선왕에게 직접 섭정으로 임명받은 프로방스 백작이라는 핵폭탄과 함께 말이지.

그러고 나면 오를레앙 공을 어떻게든 왕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멸사봉공할 충신들이라면 모를까, 오를레앙이 주도하는 입헌군주정쯤을 생각하던 우익인사들은 하나둘 생각을 달리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느 쪽일 것 같은가?]

뭐, 반반이라고 봐야지.

오를레앙공이 섭정자리를 두고 프로방스 백작과 다투기 위해 새로운 떡밥을 깔려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이판사판 공사판을 내려고 들 수도 있다.

전자라면 구태여 뒤마 대령까지 찾아갈 필요는 없겠지만, 후자라면 라파예트에게 어쩔 수 없이 빚을 지게 되겠지.

모쪼록, 오를레앙공이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길 바랄 따름이다.

[차라리 사자가 고기를 끊지, 퍽이나.]

***

노트르담 대성당.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이럴수가 있나."

오를레앙공이 천천히 천장을 우러러보았다.

스테인드글라스에 비친 구세주가 오늘따라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정말로 사소한, 지극히 사소한 흠결조차 아무것도 찾질 못하겠는가?"

"그, 그것이···."

시종장은 차마 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 고개를 떨궜다.

그거면 족했다.

"지독한 놈."

절로 치가 떨렸다.

물론 평소에 청렴결백하다고 으스대던 거야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치판에 제가 청렴결백하다고 자칭하는 놈이 어디 한둘이던가?

보통 그런 놈일수록 어딘가 음습한 구석이 있는 게 보통이었고, 그게 아니라면 아예 청렴결백이라는 겉모습 자체가 추잡한 위선이오, 누구보다 부패한 속내를 숨기고 있는 게 당연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 먼지 하나 안 나올 수가 있는 거지?"

한데 이 로베스피에르라는 놈은 진짜로 청렴결백했다.

그래도 이렇게 뒤졌으면 한가지쯤은 걸리겠지.

진짜로 귀족도 아니고 일개 제3신분이 이렇게까지 부패할 수 있냐는 감탄이 나왔던 당통만큼은 아니라도 가난한 어린 시절이 되었건, 출세한 뒤가 되었건 뭔가 한가지쯤은 있겠지.

부질없는 희망이라기보다도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하에 오를레앙 공작가의 사재와 인맥을 탈탈 털어서 어쩌면 저 로베스피에르 당사자보다도 그의 인생사에 대해서 정확하게 좔좔 낭송할 수 있을 지경까지 파헤쳤는데도.

정말로, 진짜로 단 하나도 없었다.

국민의 혈세로 사치할 수 없다며 설탕조차 어쩌다 가끔만 집에 들여다 놓고, 따로 비서랄 것도 없이 본인이 매일 아침 흰 가발과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국민의회에 가까이 사는 것도 아니면서 마차조차 없이 새벽같이 일어나 걸어서 출퇴근한다.

다같이 마셔야할 날이 아니면 술도 입에 대지 않고, 담배도 하지 않으며, 도박이나 취미생활에 지출하는 비용도 전무.

독서조차 도서관에서 꼬박꼬박 대여하고, 정말로 마음에 드는 책이 아니라면 수집욕조차 보이지 않으며, 토론이나 웅변은 직업을 생각하면 그게 여가생활이라고 해야하나 의문스러운 지경이다.

변호사 시험에 통과하거나 루이 16세의 어전에서 재학생 대표로 축사를 낭독한 것 또한 어떠한 학맥이나 인맥에 의지하지 않은 순전히 본인 실력으로 이룬 것.

의원으로서 선거에 출마한 것도, 당선된 것도 본인의 웅변 실력으로 이룬 것.

본인 명의의 토지나 건물은커녕 주식조차 없으며, 본인 명의로 사업을 하는 것도 없고, 본인 명의를 빌려준 적도 없으며, 남에게 돈을 빌리거나 다시 빌려준 적도 없고 기껏해야 의원으로서의 품위유지비와 급진당 당수로서 받는 배당금이 경제생활의 전부.

그마저도 이 보잘것없는 수입조차 저 자신을 가꾸거나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 쓰는 게 아니라 공익을 위해 투자하거나 그도 아니면 그냥 전액저축하고만 있다.

정말로 흠결이라는게 공화파라는 점과 공화파 활동에 충실했다는 것 밖에 없었던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런 정치범 혐의는 이제와서 기소해봐야 적을 더욱 영웅으로 만들어줄 뿐이니 쓸 수 없었다.

"수도승도 이놈보단 사치스럽게 살걸세."

결국 오를레앙공은 청렴결백 이전에 무언가 변태적인 결벽증마저 느껴지는 현실의 벽 앞에 좌절하고야 말았다.

제아무리 급진공화파 패거리들을 잡아 가두고 그들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면 뭐 하는가?

우두머리가 끄떡도 없는데.

아니, 오히려 로베스피에르라는 인간을 조사하고 그의 인생사가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그 너무나 찬란한 백지에 억지트집 잡기나 누명 뒤집어씌우기엔 도가 튼 천하의 판관들조차 할 말을 잃게 될 지경이었다.

저놈만큼은 진짜로 손댈 방법이 없다.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같은 왕당파가 봐도 억지로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수준으로 막 나갈 게 아니라면 저 로베스피에르를 쓰러트릴 수 없다.

거꾸로 그들은 로베스피에르가 대충 눈감고 아무 죄목이나 툭 하나 어림짐작으로 뱉어도 적어도 한 명은 그 눈먼 돌에 맞아 죽을 판인데.

이래서야 필패 일 수밖에 없다.

당장 겉으로 보이는 양상이야 오를레앙파가 일방적으로 법통파를 주물러주는 형국일지라도 끝에는 마지막까지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로베스피에르와는 달리 오를레앙공은 적어도 한번은 군무감찰위원회에게 붙들리게 될 거다.

처음부터 이 난타전을 받아칠 게 아니라 억지를 부려서라도 묵살하거나 도망쳐야 했던 것이다.

"그, 그래도 소득이 없진 않았습니다! 아무튼 이제 파리 시민들도 법통파라는 게 사실 존재하지 않는, 저 폭도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잖습니까? 결국 이대로 가다 보면 머지않아-."

벌컥.

"라파예트 후작이 역도들을 크게 무찔렀다고 하옵니다!"

그럼에도 낙심한 주인을 대신하여 언성을 드높이던 시종장이었으나, 때마침 문을 박차고 들어온 전령이 전해온 두 번째 악재 앞에서는 더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장 로베스피에르 놈도 어떻게 쓰러트려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데 라파예트까지 조만간 상경할 예정이라니.

"체크메이트로군."

오를레앙공이 쓰게 웃었다.

"자넨 이만 그 아이에게 가보게."

"하오나 전하."

"이 오를레앙 공작가의 시종장이라는 사람이 지금 우리 둘 중 누구에게 자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지 진정 모르겠나? 가보라면 가봐."

싸늘한 고별사였다.

충성스러운 시종장은 울먹이면서도 끝내 주군의 명령에 반박하지 못하고 뒤돌아섰다.

그럼 만일의 경우에라도 알아서 처리해주겠지.

장남이 아직 혈기 왕성할 나이라 경험이 부족하긴 해도 그를 닮아 총명하고, 그를 닮지 않아 심성은 선하니 최소한 가문의 대가 끊기진 않을 거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분명 그도 이렇게 되기를 바라진 않았다.

하지만 누구를 탓하랴.

지금도 눈을 감으면 당장 텅 빈 옥좌가 어른거리거늘.

지난날 그가 로베스피에르의 행보를 붉은 천을 던지는 투우사에 비유했던가.

결국 그 말이 옳았다.

오를레앙 공은 붉은 천에 사족을 못 쓰는 투우였다.

허나, 투우의 결말이 언제나 투우사의 화려한 승리로 끝나던가?

운 나쁘게 실족하여, 혹은 순전히 본인의 실력 부족으로 마무리가 어설퍼서 거꾸로 숨통이 끊어진 젊은 투우사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의 적은 눈앞에 있다.

텅 빈 옥좌는 바로 그 뒤에 있다.

그렇다면 명예로운 기사답게 당당히 그를 가로막는 모든 것을 랜스로 때려 부수고 원하는 것을 취할 뿐.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

이 일이 끝나고 나면 이 또한 자연히 알게 될 터.

오를레앙공은 다만 이 모든 결말을 알고 또한 안배하셨을 전지전능한 조물주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셨기를 경건히 기도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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