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병아리
내가 우리 최루탄, 아니 최자 우자 담자 교수님에게 수학 받을 시절에 이야기다.
"최 교수님."
"옹냐. 왜?"
"왜 다들 이론에 현실을 끼워맞추려고 안달일까요?"
그러자 최루탄 교수가 날 무슨 개소리냐는 듯이 흘겨보며 대꾸하길.
"···넌 도대체 지금껏 뭘 배운 거냐?"
"변증법이요."
정명제, 반명제, 합명제.
상호모순되는 두 주장으로부터 상호보완을 끌어내는 것.
"정반합 따지겠다는 사람들이 왜들 무조건 본인 이론이 옳다고 단정하죠?"
뭐, 물론 나라고 예외는 아니다.
내 생각만 옳고 상대의 생각은 무조건 틀렸다.
어떻게 보면 이 아집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고 혁명가라는 족속들의 행동 원리겠지.
다만.
"죽여서 살인멸구 하는 게 정반합은 아니잖아요."
그건 그냥 반론의 여지를 거세하는 독선이고 토론의 여지마저 차단하는 독재지 변증법이라고 할 수 없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이미 정답이 정해진 질문이라는 게 참 싫었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문과뇌였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문제는 탐구하고, 토의하고,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남들이 질색하고 최루탄 교수님이 이거 이미 한물갔다고 말려도 이 업계에 발을 내디뎠다.
누군가는 악마의 변호사가 되어야 하니까.
정명제와 반명제가 상호보완하여 합명제를 이뤄야 비로소 변증법이니까.
냉전이 제1세계의 완승으로 마무리되고, 역사의 종말이니 뭐니 하는 독선과 사상적 독재가 당연시되어버린 21세기이기에 오히려 더욱 연구할 가치가 있는 거라고 믿었다.
정명제라면 나를 제외한 보편적 다수가 알아서 말해줄 테니까.
박민혁이라는 반골은 우리 사회의 정반합을 완성하기 위한 부품인 거라고 굳게 믿었다.
"토의해야죠. 아무리 나와 의견이 다르고 모순되게 들린다고 해도 참을성 있게 들어줘야죠. 무작정 저놈은 우리의 적이다, 저놈들 말을 들을 가치도 없다고 귀를 틀어막으면 그게 어떻게 변증법인데요?"
"예끼 이놈아, 그거 다 들어주겠다고 했다가 망한 놈들이 어디 한둘인 줄 아냐?"
"그럼 그 실패가 그 사람들의 합명제인거죠."
실패한다면 실패한 대로 배우는 것이 있을 거다.
오히려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스스로 돌아보길 게을러지니 보완하고 개선할 귀하디귀한 기회다.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나와 정치관이, 사상관이 다르다고 하여 밀어내고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무엇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자세 그 자체.
"오히려 혁명이란 실패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 아닐까요?"
혁명이 성공해버린다면 그 순간 합명제가 완성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정명제가 되어버리니까.
또 다른 반명제가 이 새로운 정명제를 부정해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고로, 나는 학살극이 싫다.
체제 존속이라는 제 아집을 위하여 반론의 여지를 거세하고 독선만을 강제하는 독재자들이 싫다.
인류문명의 발전을 위한 정반합을 방해하고 마치 신이라도 되는 양 저 혼자 위대해지려는 가짜 반골들이 싫다.
변증법의 가치는 내가 옳다는걸 인정받는 게 아니라 네가 틀렸다고 지적 받는 데에 있을진대.
"전 우리 최루탄 교수님께서 계속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던 거라고 배웠는데요."
"···맹랑한 놈."
이날 최루탄 교수님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릴 일찍 귀가시켰다.
그때 우리 최 교수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대로 일찍 자택이나 연구실로 돌아가셨을지, 아니면 또 혼자 술이라도 거나하게 마셨을지.
다만 그 이튿날 아침, 우린 9시 뉴스에서 VIP를 냅다 들이박는 최우담 교수님을 볼 수 있었다.
***
노트르담 대성당.
"···솔직히 이게 잘하는 짓인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꿀꺽.
나폴레옹이 마른침을 삼켰다.
뮈라···는 뭐 약탈할 거 없나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군.
참 일관적인 놈이라서 보기좋다.
그래도 바쁜 와중에 얘네 둘은 챙겨오길 잘했으이.
"차라리 이제라도 파리를 떠나시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다른 성당도 많을 텐데 하필이면 노트르담이라니요. 바스티유 이래로 이미 숱하게 약탈당하고 파괴된 누더기잖습니까."
뭐, 그렇긴 하지.
내가 노트르담 성당이 멀쩡할 때 와보질 않았으니까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훼손된 건지까지는 모르겠는데, 한눈에 봐도 원본의 가치가 100이라면 지금의 노트르담은 30, 40 정도밖에 안 되는 모양새다.
일단 성상이란 성상은 거의 모조리 목이 잘려 나갔다.
원래 대리석 조각상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되는 자리에는 발이나 무릎 같은 흔적밖에 남아있지 않고, 금박은 대부분 벗겨져 있으며 첨탑은 무너져내렸고 스테인드글라스에 돌이 날아든 흔적들도 구석구석 눈에 띈다.
나름 부활절 축제를 앞두고 최선을 다해서 보수해본 티는 나지만 결국 그것뿐.
과거의 노트르담이 얼마나 사치스럽고 또 경건한 종교시설이었는지야 몰라도 작금의 노트르담은 성당으로서의 가치는 물론이오. 문화재로서의 가치마저 상실한 지 오래였다.
나와 나폴레옹, 뮈라 셋이서 막 들어섰을 때 노인들과 신부님들 밖에 없었으니 말다했지.
파리 시민들은 설령 부활절이라 해도-아니 오히려 부활절이기에 괜히 그들의 죄와 앙시앵 레짐의 악몽을 연상 시키는 이 을씨년스러운 폐허를 찾고 싶지 않았던거다.
하지만.
"약탈당한 누더기니까 가치가 있는걸세."
지금 이 순간 저 파리의 시민들은 더는 우리의 아군이 아니다.
오를레앙파가 풀어놓은 선동꾼들에게 홀라당 발라당 속아 넘어가 아무나 살해하고 기물을 파괴하려고 드는 폭도들일 뿐.
오늘 하루만큼은 괜히 무모하게 여론 반전을 도모하기보단 아예 사람들이 모일만한 곳에 가지 않는 게 훨씬 안전하다.
"반대로 보나파르트 동무가 오를레앙파라고 생각해보시게. 제아무리 선동꾼들에게 명령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지만 이 노트르담 대성당에 폭도들을 몰고 오고 싶은가? 혁명 이래로 기득권 문화의 상징으로서 숱하게 파괴되고 또 약탈당한 이 신성한 집에?"
"그건···."
"하물며 부활절 연휴일세. 이 가톨릭 교회 최대의 축일이지."
가톨릭 윤리가 뿌리박혀있을 왕당파에서 이런 날에 주님의 집을 쳐들어오고 싶을까?
글쎄, 아닐 걸.
"나는 시민들에게 우리의 결백을 변론하려면 이 주님의 집보다 나은 장소는 없을 거라고 자신하네."
"그것참 정신 나간 발상이군."
때마침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를레앙 공작이었다.
···가톨릭 윤리 타령하자마자 가장 신경 안쓸 분이 직접 행차하셨군.
"이 신성한 주님의 집을 온갖 핑계를 대며 약탈하고 파괴한 걸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피와 살로 더럽혀진 전장으로 만들 셈인가?"
철컥.
그가 나타나기가 무섭게 총구를 겨눈 나폴레옹에게 손짓으로 일단 제지 명령을 내렸다.
저쪽에서 함부로 폭력을 행사할 수 없으리라 기대하고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온 건데 이쪽에서 먼저 정당한 명분을 줘서야 본말전도니까.
슥.
대신에 뮈라에겐 작전대로 종탑에 오르도록 지시했다.
여차할땐 저 인중여포만한 조커패가 없을테니까.
"눈치 한번 빠르시지."
쯧.
살금살금 계단을 오르고 있는 뮈라는 안중에도 없는 듯 오를레앙공이 혀를 찼다.
"자네가 여기서 발포했다면 나야 이 자리에서 죽어도 우리 장남에겐 왕위를 물려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어째 믿는 구석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그럼 내가 믿는 구석도 없이 부주의하게 모습을 드러낼 머저리로 보이나? 당연히 쥐새끼 한마리 빠져나오지 못하게 포위해뒀네."
역시 그런가.
안쪽에서 총성 한방만 들려도 병사들 수십 명이 우르르 돌입할 작정이군.
그런데 그보다도.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오신겁니까? 신부님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을텐데요."
"아, 그 비굴한 친구들 말인가."
오를레앙공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여기서 일하는 사제들은 죄다 자네랑 척 진 부패한 판관들과 친척이거나 사돈지간일세. 파리 대교구는 언제나 파리 최고의 땅부자였지. 국왕과 서로 짜고서 돌려가며 시민들을 등쳐먹었거든. 여긴 이름만 성당이지 주님이 아니라 금송아지를 섬기는 이단의 성전이야."
[사실이네.]
···그럼 먼저 그 이야기를 해줬어야지 이 양반아.
[아뿔싸-가 아니라. 자네가 내 말을 안들었잖은가!]
아니, 그래도 이렇게 타락했을 줄은 몰랐지.
내 명동성당 돌려줘!
왜들 그리 가톨릭 못조져서 안달인가 했더니 대원군 서원철폐였잖아!
"이만 항복하시게나."
오를레앙공이 내 두 눈을 빤히 노려보았다.
"아니면 내가 이 신성한 집을 화약 매연과 피로 더럽혀야겠는가?"
"어차피 죽어야만 한다면 오를레앙 왕조의 첫 장에 똥칠이라도 하고 죽어야지 않겠습니까?"
"빌어먹을 놈. 하여간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껄껄껄.
사내답게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기분 탓일까, 뒷짐을 지고 이쪽을 바라보는 정적은 어딘가 들뜬 듯 보였다.
"솔직히 난 자네를 아직도 잘 모르겠네."
오를레앙공이 입을 열었다.
"말로는 급진파다, 혁명파다 하는데 뭐가 진심인지 도통 모르겠단 말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자네라면 이 부활절이 오기도 전에 적당한 부랑아를 시켜서 루이 샤를 그 아이를 쏴 죽였을걸세."
충격적인.
하지만 너무나 그다운 발상이었다.
"그다음에 이 오를레앙 공작의 소행이라고 누명을 뒤집어씌웠겠지. 이미 충분히 수상하기도 했고, 역사적으로도 전례가 수두룩 한 일이니 사람들을 설득하기도 쉬웠을걸세. 물론 누군가는 자네들을 의심하겠지만, 음모란 게 어디 완벽할 수만 있는가?
그나마 이 뒤틀린 균형을 유지하던 왕세자가 사라졌으니 파리야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이고, 오스트리아 또한 카이저가 급사하면서 옴짝달싹 못 하는 천재일우의 기회에 파리의 영웅, 로베스피에르가 질서 회복과 복수를 내걸고 정점에 오른다."
오를레앙공이 오페라 배우라도 된 양 과장된 어조로 덧붙였다.
"완벽하잖은가. 이미 우리 파벌 사람들이 숱하게 자네들의 요청을 기각하며 화를 돋워놨으니 다들 자네가 참다못해 들고 일어난 거라 여겼을걸세. 공화국을 선포한다고 해도 프로방스 백작은 포로로 잡혔고 난 암살 혐의를 뒤집어썼으니 차선은 몰라도 차악 정도로는 인정받을 수 있었겠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나?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공화국을 세우겠다면서.
혁명하겠다면서 왜 이렇게 사리는 거냐.
왜 날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을 때 죽이지 않았느냐, 그렇게 묻는 듯한 반응이었다.
이대로 오를레앙파가 쿠데타를 결심하지 않았다면 오를레앙공이 섭정의 지위를 굳히건, 반대로 프로방스 백작이 섭정이 되건 간에 입헌군주정이라면 몰라도 공화국 건국은 물 건너갔을 텐데.
물론 내 대답이야 정해져 있었다.
"그게 정치입니까?"
"그럼 대체 뭐란 말인가?"
"제 아집이지요. 국민에 의하여 선출된 민선의원이 민심이 원하지 않는 걸 차악이랍시고 강요해봤자 대체 무슨 소용입니까?"
나의, 우리의 궁극적인 이상은 분명 공화혁명이다.
그렇다면 그 공화혁명은 무엇을 위함인가?
우리의 이상이, 이론이 진정 올발랐음을 만천하에 인정받기 위해서?
아니, 변증법적 토의를 통해 상호보완적인 합명제를 도출하고 보편적 다수의 보편적 행복을 도모하여 인류문명의 발전을 앞당기기 위함이다.
그럼 폭력과 집권은 수단이 되어야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도 자백하셨잖습니까? 누군가는 우리를 의심할 거라고요. 그런 의심스러운 사람과 토의하고자 할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전 공포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사랑받는 이웃이 되고 싶고, 군림하여 이끌기보다는 나란히 마주앉아서 토의하기를 원합니다."
"···맙소사."
오를레앙 공작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 일생일대의 호적수란 놈이 이런 순진한 햇병아리였다니."
"뭐, 초선의원이니까요. 가끔은 이런 맛도 있어야지요."
"아니, 제발 부탁이니까 앞으로 죽을 때까지 세상만사에 통달한 마귀처럼 굴어주게. 안 그러면 내가 너무 쪽팔려서 연옥에서 되살아올 것 같거든."
[흠, 이번만큼은 저 친구의 손을 들어줘야겠는데.]
입 닥쳐, 막시밀리앙.
"자, 그래서 햇병아리 양반."
딱.
오를레앙공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사방에서 우르르-하고 병사들이 몰려든 건 그와 동시였다.
"이제 어떻게 하실 셈인가?"
"설마 이 주님의 집을 피바다로 만들겠다고요?"
"아, 물론 주님의 집에서 자네를 해할 생각은 없네. 하지만 힘으로 끌어낼 수야 있지 않겠나?"
···그것참 합리적인 발상이군.
병사들의 복식만 봐도 저 친구들은 국민위병이 아니라 오를레앙 가문에서 거느린 사병들인 듯하니 정말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우릴 끌어내서 사살해버리겠지.
최소한 날림이라도 사법재판 정도는 받을 수 있을 줄 알았건만, 그냥 대충 총검으로 쑤셔버린 다음 센강에 집어 던질 작정인 모양이다.
어떻게, 그냥 이제라도 나폴레옹한테 총 쏘라고 할까?
부활절 축제에 국왕 부부 내통설까지 겹치면서 다들 하룻밤 정도는 가볍게 지새울 기세던데 총성처럼 큰소리가 나면 사방에서 폭도들이 우르르 몰려들지 않을까?
[최후의 발악으로는 나쁘지 않겠지만, 그때까지 우리가 버틸 수 있겠나?]
···음, 분하지만 맞는 말이군.
"제정신입니까?"
그럼 하다못해 허세라도 부려보자.
"결국 어떻게 해서든 부활절 와중에 어린양을 해치겠다는 소리잖습니까."
"어차피 천벌 같은 오컬트 따윈 믿지도 않을 친구가 마지막까지 아주 구질구질하게 구는군."
아뇨, 이제는 천벌 믿는데요.
사실 제가 오컬트 그 자체이걸랑요?
"이봐, 내가 그런 걸 신경 썼으면 프랑스 국왕 같은 저주받은 자리를 아직도 탐내고 있겠나? 결국 이 세상은 현세가 전부야. 내세의 구원? 단죄? 하!"
오를레앙공이 짜증 난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시간과 노력으로 현세부터 돌보라고 하게. 현세에 고생시키고 내세에 구원해 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구원해달라는 말이야! 전지전능하시다는 양반이 그 정도도 해주지 않으면서 대체 누굴 단죄한다는 거야!!!"
와우.
[···진짜로 우릴 살려 보내지 않을 작정이군.]
그러게.
저 친구들이야 고르고 고른 친위대일 테니 웬만한 소릴 들어도 끄떡도 하지 않겠지만 정적인 우리가 살아서 나가면 이 시대엔 뒷감당이 안될 텐데.
여차하면 그냥 이 자리에서 총검으로 쑤셔버리겠다는 기세다.
"자,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라도 있나?"
기세등등한 선고.
눈동자에 감도는 검은 살의가 내가 무슨 대답을 하건 그냥 총검으로 쑤셔버리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뭐, 나름 호적수라고까지 인정해줬으니 마지막까지 어울려준 모양인데.
"지금 몇시입니까?"
"···뭐?"
나라면 내가 종탑으로 간 뮈라를 위해 시간을 끌고 있다는 걸 눈치챈 시점에서 찔러 죽이건 쏴 죽이건 했을 거다.
뎅그렁-.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
쿵!
···그리고 그 종이 추락하는 소리.
암만 기구가 있어도 쉽지 않았을텐데, 그야말로 인중여포와 그동안 틈틈히 약탈해준 시민동지들의 승리군.
반달리즘 만세.
쿠쿠쿠쿵!
"이게 대체 무슨···?!"
연쇄적인 붕괴음에 놀란 오를레앙공이 뭐라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최하층에 도착한 종이 굉음을 일으켰다.
떠엉-!
그건 그야말로 음파 공격, 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종탑 최상층에서 최하층까지 연달아 바닥을 무너트리면서 도달한 십수톤짜리 쇳덩어리는 보잘것없이 찌그러지면서 최후의 굉음을 쏟아냈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실내에서 공명하는 음파에 노출된 오를레앙공과 그 사병들은 귀에서 피를 쏟으며 균형을 잃고 제자리에 무릎 꿇고야 말았다.
격돌 이후에도 계속되는 진동에 지면이 울리는 건 덤이었고.
"혹시 술래잡기 좋아하십니까?"
반면 일찌감치 귀를 틀어막았던 우리는 멀쩡-.
휘청.
···까지는 아니고, 그나마 제 자리에 서 있긴 했다.
그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뭐?
스피드.
아작난 종탑을 구경하기 위해 사방에서 몰려든 폭도들이 도착하기 전에 저놈들만 두고 얼른 도망쳐야지.
뮈라 그 인중여포야 뭐, 알아서 잘 도망칠거고.
"그럼 서두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전 오늘 시민들과는 만나고 싶지 않은 기분이거든요."
"이노오옴!!!"
철컥.
그제야 오를레앙공이 얼굴을 붉히며 권총을 꺼내어 겨눴다.
타앙-!
하지만 어림도 없지.
한 10분 뒤면 몰라도 지금은 균형감각이 완전히 아작이 났을텐데 조준을 해봐야 날 맞출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 오를레앙공 최후의 발악은 엉뚱한 벽을 맞추면서 끝났고, 이제 총성까지 들렸으니 더욱 많은 폭도가 3배 빠른 속도로 도착할 거다.
"어디 분노한 시민들 앞에서 최후변론 하실 준비는 되셨습니까?"
오를레앙공은 끝내 답하지 않았다.
내멋대로 긍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