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154)

혁명재판소

쿠데타 주모자들의 신병을 구속하기까지 하루도 걸리지 않은 데 비하여 혁명재판소가 열리기까지는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증거를 모으고 증언을 모으는 데 시간이 필요해서-라던가.

혁명재판소라는 기관 자체가 이번 사태에 연루된 부패한 판관들을 판관들에게 알아서 심판하라고 할 수는 없으니 임시로 의회에서 급조한 물건이라는 이유도 물론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부활절 대축일이었다.

안 그래도 성목요일, 성금요일 이틀간 이 난리가 났는데 무엇보다 거룩해야 할 일요일에 청문회나 재판을 위해 소란을 피운다?

그다음 유죄판결이 나오건, 무죄판결이 나오건 뒷감당이 안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쿵저러쿵해도 프랑스는 엄연히 로마 가톨릭을 국교로 지정한 나라였으니까.

어차피 이번 쿠데타 사태의 승리자도 정해졌겠다, 세세한 조사나 판결은 대축일이 무사히 지나고 난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 것이다.

[하여간 다들 소심해 빠져서는.]

내 신성한 대축일날 하숙집 아가씨랑 놀러 다니다가 기어이 거사 치른 양반한테 듣고 싶지는 않소.

[···커흠!]

뭐, 우리 집주인 놈 경사야 기억하고 싶지도 않으니 대충 넘어가기로 하고.

하여튼 그렇게 부활절 축제 기간이 무사히 지나고 찾아온 그 다음 주 목요일.

"나는 그저 명령에 충실히 따랐을 뿐이오."

경사스러운 혁명 이후 첫 번째 장성급 군 인사를 대상으로 한 청문회에서 뒤무리에 장군의 첫마디였다.

라파예트야 예외로 둔다고 쳐도 참 역사에 남을만한 감동적인 변론이군.

변호사 선임조차 거부하더니 난 아무것도 지은 죄가 없으니 떳떳하다 이거였나.

"그러니까 육군 사령관으로서 다만 수상의 명령에 충실히 따랐을 뿐이다?"

"그렇소."

"잠깐, 그건 이상하군요."

에베르가 비아냥거렸다.

"분명 이 나라의 국가원수는 루이 17세 폐하 아니셨습니까?"

"국민군이 도대체 언제부터 국왕의 군대였다는 말이오?"

뒤무리에 또한 지지 않고 비아냥거렸다.

저 국민군, 이라는 건 아마 국민위병을 말하는 거겠지.

"적어도 그날 그 순간까지는 이 의회의 영수는 루이필리프 조제프 드 오를레앙 수상 각하셨소. 나의 충성은 오직 의회를 향하며, 그분은 내게 의회의 이름으로 명을 내리셨으니 다만 의회의 명령에 복종한 것뿐이오."

"염병하고 있군."

마라가 조소했다.

"의회가 아니라 오를레앙 개인에게 충성한 거겠지. 헌법을 모욕하고, 민심을 개무시하고 무엇보다 경건하고 신성해야 할 부활절 와중에 제멋대로 치안병력을 움직여 이 모든 혼란을 주도해놓고서 뭐가 그리 뻔뻔하신가?"

"헌법을 모욕했다는 건 부정하지 않으리다."

다만.

"본관이 민심을 외면했다는 점은 동의할 수 없소. 이 파리의 민의는 지금껏 언제나 누군가의 죽음을 갈망하지 않았소?"

난 그저 이에 충실히 따랐을 뿐이다.

뒤무리에의 변론이 끝나자, 차마 이에 반박할 수 없었던 의원들의 쓴웃음과 한숨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럼 판결하겠습니다."

이날 임시로 설치된 혁명재판소의 재판장을 떠맡은 시에예스 주교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피고, 샤를프랑수아 뒤무리에의 군 계급을 사병으로 강등하며 10년 이하의 금고형 혹은 10만 리브르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이의 있습니까?"

"이의 있소."

피고석의 뒤무리에가 즉답했다.

"나는 이 거짓된 법정을 인정할 수 없소. 정 본관의 죄를 심판하고 싶다면 군사 법정이 있을 것이고, 또 대심원이 있지 않소. 한데 오직 우리 오를레앙파를 단죄하기 위한 혁명재판소라니, 이것이 도대체 정치 탄압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이오? 

나는 앞으로도 나의 결백이 입증되는 그날까지 항소하고, 또 항소할 것이오."

하이고, 어련하실까.

뭐, 실제로 이 혁명재판소 자체가 급조된 건 사실이니까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걸 근거로 쿠데타 시도를 정당화하려는 건 선 넘었지.

아마 저쪽도 이게 정말로 받아들여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뒤무리에의 노림수야 뻔히 보인다.

[보나 마나 전쟁이 터질 때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끌며 버티려는 거겠지.]

그야 물론.

어차피 혁명 이후로 프랑스의 외교 현황은 최악이라는 말조차 아깝고, 제위가 안정되는 즉시 루이 17세와 고모님을 핑계로 개입을 시도할 합스부르크의 젊은 카이저에서부터 다시 유럽대륙의 균형과 식민지 강탈을 위해 개입할 영국까지 전쟁이 일어날 명분이야 차고 넘친다.

한데 지금 프랑스군은 알다시피 귀족 장교들이 대거 퇴역하거나 아예 망명하면서 지휘체계에 구멍이 숭숭 뚫린 상태.

결국 혁명재판소에서 뒤무리에를 사병으로 강등하건 말건 일단 전쟁이 터지면 거의 무조건 장군계급으로 복귀시켜줄 수밖에 없다.

아무튼 실제로 군단급을 지휘할 수 있는 역량의 장군이 저 사람을 포함해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으니까.

나야 나폴레옹과 26인 원수라는 특급인재들이 숨어있다는 걸 알지만 의회에서 그걸 어떻게 알겠어?

저놈은 머지않아 제 계급이고 지위고 원상복귀 될 걸 아니까 저리 뻔뻔스레 제 결백과 정치 탄압을 주장하면서 괜히 뻐팅기고 있는 거다.

그때 가서 정의가 승리했다! 타령하면서 오를레앙파 잔당이라도 끌어안아 보려고.

"수상 각하 만세! 입헌의회 만세! 프랑스 왕국 만-!"

"피고 뒤무리에."

결국 이 요란한 정치극을 보다 못한 시에예스 주교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지금 제 탁상엔 배심원들의 의견서가 놓여있습니다. 이 무명의 선량한 시민들이 당신에게 어떤 내용의 판결을 권고했을지 그렇게도 궁금하십니까?"

침묵.

그제야 뒤무리에 장군, 아니 사병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야 배심원 의견이야 보나 마나 즉시처형일테니까.

백의종군 대신에 단두대로 끌려가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고 있으라는 거지.

아유 고소해.

결국 뒤무리에 사병은 최후까지 항소하겠다는 기개는 온데간데없이 얌전히 경비병들 손에 붙들려 퇴장했다.

"나, 나는 무죄요! 진짜로! 난 끝까지 뜯어말렸단 말이야!"

"이게 무슨 일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 그날 성당에서 가족들과 경건하게 미사나 드리고 있었다고요!"

"어헝헝, 엄마! 아빠···!"

"난 그저 오를레앙공이 명령한 대로 따랐을 뿐이오!"

"소, 솔직히 너희들이 먼저 폭동 일으켰잖아요···! 왜 우리만 가지고 그러는데!"

뒤이어진 다른 오를레앙파 피고들의 최후변론도 뒤무리에 사병과 별다른 바는 없었다.

그나마 차별점을 찾아보자면 이치들은 최소한 정치극은 안 했다, 정도?

뒤무리에가 이 프랑스에서 몇 안 되는 장성급 지휘관이라는 점을 믿고 버텼다면 얘넨 까딱하다 진짜로 단두대로 끌려갈 판이니 얄짤 없이 목숨부터 구걸하고 봤다.

"이 재판은 무효요! 재판장, 당신 법학 학위는 있어? 당신 성직자잖아! 여기가 무슨 종교재판소인 줄 알아! 우리 판사 사위는 또 어디 갔고!"

···뭐, 물론 개중에도 상황 파악 못하고 헛소리하는 놈이 한둘 끼어있긴 했지만.

이 친구들도 시에예스 주교가 배심원 의견서를 흔들기 시작하면 아무 말도 못 하고 합죽이가 되거나 바지에 오줌을 지리면서 눈물 콧물 쏟아내거나 했다.

참, 뭐라고 할까.

죽음 앞에선 누구나 똑같다는 걸 단순한 말이 아니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이었다.

[뭐, 푸른 피니 뭐니 해봐야 다 똑같이 제 목숨 아까워하는 한낱 인간이었던 거 아니겠나.]

그러게.

뒤무리에까지는 그냥 통쾌하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어른이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면서 목숨을 구걸하는 걸 몇 시간씩 보고 있자니 짜증 반, 동정 반이다.

아니 저렇게 비굴해질 거면서 애초에 쿠데타는 왜 일으킨 거야?

[잘될 거라 생각했을 테니까.]

그러니까 잘 안될 경우는 애초에 생각도 안했다?

[자네도 거기까지 고려하고 일 키운 적 없으면서 왜 저 친구들한테만 그러는가?]

···젠장, 입 닥쳐 막시밀리앙 주제에 팩트로 후려치다니.

비겁하다.

정정당당하게 선전과 날조로 승부하자!

"그래, 전부 내가 했소."

이날 혁명재판소의 마지막 피고.

오를레앙 공작이 내뱉은 첫마디였다.

"다들 내게 무모하다고 뜯어말렸지. 수상이면 족하지 왜 그 이상을 바라냐면서 말이야. 그들의 만류를 무시하고 억지로 이번 사태를 강행한 건 바로 나의 의지였소."

"···지금 모든 혐의를 자백하시겠다는 겁니까?"

시에예스 주교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소."

즉답.

성목요일 날 폭도들 손에 붙들려 흠씬 조리돌림당한 탓에 아직도 퉁퉁 부은 눈으로도 오를레앙공은  시에예스 주교의 시선을 똑바로 맞받아쳤다.

"여기 계신 모두가 알 거요. 내가 말린다고 안 할 사람이오? 이 오를레앙 공작이 권위와 권세를 내세워 억지를 부리거든 그 누가 감히 거스를 수 있겠소?"

···힘들겠지.

우리 정치동아리들이야 내가 닥치고 해! 라고 명령하면 네가 뭔데? 라고 받아치겠지만 오를레앙파는 근본적으로 오를레앙 가문과 공작 개인을 중심으로 모여든 파벌.

오를레앙 공작이 옆에서 아무리 뜯어말려도 닥치고 해! 라고 명령하면 다들 알겠습니다, 주군! 하고 고개를 조아릴 거다.

그러니까 분명 그럴듯한 주장이고, 앞에서 오를레앙파 주동자들의 변론과도 모순될 건 없지만.

"전부 내가 주도한 일이오."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벌떡.

이대로 제 목숨을 날려서라도 제 파벌만큼은 장남에게 물려주려는 계산으로 보인다면 과연 내 기분 탓일까.

아마 아닐 거다.

다들 저 양반의 속내를 뻔히 알면서도 현직 수상이 의회군에게 야당을 대상으로 한 친위쿠데타를 사주했다는 이 충격적인 사건을 적당히 덮고 넘어가고 싶은 것뿐.

왕권이 완패하고, 교회권마저 한껏 찌그러진 상황에서 의회권마저 유명무실해져 무정부 상태가 빚어지는 것보다야 적당히 모른 척 속아 넘어가 주는 게 차악이라는 계산인 거다.

그걸 모르는 건 아닌데.

"저도 그날 노트르담 대성당에 있었습니다."

[···이봐.]

이건 「죽여주시옵소서」가 아니라 「자, 어서 날 죽여라」잖아.

차마 그 꼴은 못 봐주겠다.

"그날이라고 함은···?"

"물론 성목요일 밤, 말입니다."

앞으로의 전개를 짐작한 시에예스 주교가 신음을 삼켰다.

그럼 됐다.

"전 그날 폭도들에게 포위된 각하를 똑똑히 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두 번째 추격대에게 붙잡힌 건 성금요일 새벽녘이었지요. 설령 이번 일이 전적으로 수상 각하께서 주도하신 일일지라도 적어도 반나절 이상 저들은 명령도 없이 자발적으로 이 로베스피에르를 추격했습니다."

고로, 저들은 결코 이번 일에서 무고할 순 없다.

시작이야 명령이었을지라도 끝에는 자발적으로 쿠데타에 동참했으니.

앞선 이들이 금고형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면 응당 오를레앙공 또한 이에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단죄받아야 하며, 반대로 오를레앙공이 죽어 마땅하다면 저들도 죽어 마땅하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오를레앙파는 유죄다.

"쿠데타 진영이 명령에 단지 순응하였을 뿐이라면 피고가 폭도들에게 둘러싸인 자정쯤에 진작에 투항했겠지요. 설령 피고가 이번 일의 주동자라고 한들, 그게 모든 책임을 피고가 짊어져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내가 그날 마리 앙투아네트를 중상모략했소."

···그런데 이 양반이 한술 더 뜨네.

"물론 루이 오귀스트도 말이오. 그들을 국가의 적으로 몰아 단두대에 세우기 위함이었소. 본 피고는 이 혐의를 입증할 일체의 증거와 증언을 제시할 의향이 있으며, 이 자리를 빌려 왕태후 마마를 음해하려 한 제 추악함에 깊이 반성하며 또한 사죄드리는 바요."

"·········."

졌다.

이건 내가 뭐라고 반박해도 답이 없다.

애초에 이 이야기 자체가 오늘 혁명재판소에서 처음 나왔으니까.

설령 쿠데타 모의를 비롯하여 앞에서 나온 모든 혐의를 작위 박탈, 금고형이나 벌금형으로 대체하더라도 이 나라 프랑스가 왕국인 이상에야 이건 사형을 피할 방법이 없다.

물론 어떻게 고위 귀족으로서 빠져나올 방법이야 무궁무진하겠지만, 당사자가 그걸 마다하고 잠자코 죽겠다는데 나더러 뭐 어쩌란 말인가.

"피고, 루이필리프 조제프 드 오를레앙에 법정최고형-사형을 선고한다!"

땅·땅·땅.

그걸로 끝이었다.

어떻게든 이번 쿠데타 모의로 인한 의회권의 실추를 최소화하기를 원했던 혁명재판소는 그 자리에서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 조제프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혁명 만세! 자유 만세! 프랑스 만만세!!!"

번번히 권고를 묵살당했던 배심원들은 마침내 그토록 그리던 사형선고가 이루어졌다며 환호했고, 원하던 대로 수괴를 처단한 것도 모자라서 오를레앙파에게 중상모략이라는 새로운 혐의를 덧붙이는 데 성공한 우리 법통파에서도 너나 할 것 없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다들 오를레앙공보다 먼저 재판받은 덕분에 운 좋게 목숨을 구한 오를레앙파 또한 저마다 가슴을 쓸어내렸고.

"제정신입니까?"

다만, 나 혼자서 결과에 납득하지 못하고 그날 저녁 오를레앙 공작이 갇힌 유치장을 찾아갔다.

"지금껏 아무도 중상모략에 대해서는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대체 무슨 마술을 부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당신만 입 꾹 다물고 있었다면 아무도 모르고 끝날 수 있었다고요."

"그러는 자네도 그날 노트르담 성당에 있었다는 걸 얼마든지 숨길 수 있지 않았는가."

창살 너머 화려한 의례용 옷을 차려입은 오를레앙공이 답했다.

다들 어지간히도 하루빨리 이번 일에 종지부를 찍고 싶은 모양이었다.

"성스러운 금요일에 유다의 군병들에게 붙잡혔다 화려하게 부활한 경력만 남길 수 있었으련만. 왜 그 일에 연루되었을지 모른다는 의심의 여지를 남겼는가?"

"왕실에 대한 중상모략과 반달리즘 혐의가 지금 같습니까?"

"별로 다르지도 않지. 내 목숨과 관련된 이야기니까."

나는 답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아직도 우리 오를레앙파를 공격하기 위한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던 모양인데."

제멋대로 긍정이라고 넘겨짚은 오를레앙공이 덧붙였다.

"다시 한번만 냉정하게 생각해보게, 햇병아리 양반. 그게 진정 자네의 본심인가? 우리 파벌이 쿠데타에 자진하여 협력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부호를 남기는 게 성금요일의 수난 신화를 깨면서까지 해야만 했던 일이었는가?"

"···그렇다면 아니라는 말이십니까?"

"아니고말고. 그것만 숨겼다면 자넨 적그리스도가 될 수 있었네. 자네가 사양해도 교회에서 그렇게 만들어줬겠지. 이 오를레앙 공작이 직접 행차했다고 하지만 그날 노트르담의 사제들은 명백히 자네를 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비켜줬으니 말이야."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날 신부들이 우리를 오를레앙 일당에게 팔아치운 건 두고두고 가톨릭 교회가 우리에게 진 빚이 되겠지만, 아예 내가 처음부터 몽마르트르 언덕에 있었다고 주장했을 경우에 비하면 확연히 약해졌을 거다.

자고로 비밀이라는 건 알고 있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강력해지는 법이니까.

그날 날 내다 판 사제들을 두고두고 노예로 부리는 건 물론이오, 쿠데타 와중에도 밤새도록 기도를 올린 신실한 신도라는 칭송까지 들을 수 있었겠지.

다만.

"전 존귀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숭배의 대상이 되는 순간 아무도 내 말에 반박하려 하지 못할 테니까.

그건 내 궁극적인 이상향과는 거리가 멀다.

"훗날에라도 당신네 사람들이 당신이 책임지고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전 아무런 죄도 없다는 듯이 으스대는 꼬락서니는 더더욱 보기 싫고요."

"난 존귀해지고 싶었네."

창살 너머의 오를레앙공이 조소했다.

"누구보다 존귀해지고 싶었고 말고."

"···쿠데타 주모자로서 처형 당하는게 존귀한 최후입니까?"

"카페 왕조 최초의 사형수잖은가."

자랑스럽다는 듯한 대답이었다.

"언제나 기록은 다음 세대의 몫일세. 정적에게 목숨을 애걸하여 장난감으로 전락하는 최후보다야 이만하면 다채롭게 해석될 여지를 남긴 셈 아니겠나."

···즉, 혁명이 무참히 실패하면 덩달아 오를레앙 가문도 부활할거라는건가.

그럼 중상모략을 자백한 것도 본인의 악명을 강화해서라도 부르봉 왕조를 지키기 위함이겠군.

부르봉 왕조가 세를 회복하면 덩달아 방계인 오를레앙 공작가도 그 덕을 보게 될테니까.

뭐,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럼 우리 산 사람들이 그 해석의 여지를 줄여야겠네요."

틀리게 만들어주고 싶어졌다.

"아주 기깔나게 조롱해드릴테니까 기대하고 계십시오."

"말하지 않아도 그럴 셈이었네."

오를레앙공이 껄껄대며 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내 지옥 최하층에서 자네가 떨어지기만을 고대하고 있지."

그것이 최후의 고별사였다.

이튿날 동틀녘, 시민 루이필리프 조제프는 홀연히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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