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154)

수상취임식(이 편부터 유료화입니다)

오를레앙공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 임시로 수상에 취임하게 된 건 콩도르세 후작이었다.

오를레앙파가 몰락한 뒤에도 원내의원들만 따지면 우리 급진공화파보단「입헌군주정도 나쁘지 않다」라는 온건파나 「입헌군주정만 인정하겠다」라는 왕당파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법통파라는 거짓된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공공의 적이 될 수 밖에 없는 급진파의 한계라고 해야겠지.

1대1로는 확실히 이겨볼만하더라도 상호견제가 호흡처럼 이뤄져야 하는 1대1대1 상황에선 아무래도 한발자국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여하튼 이런 상황이었으니만큼 차기 수상은 누구나 콩도르세가 될 거라고 여겼고, 또 우리도 여차하면 양보하려고 했지만.

"나는 수상이 될 자격이 없네."

웬걸.

콩도르세 후작이 먼저 사양해버렸다.

"아니 임시로 떠맡으신 김에 계속하시지 왜 되지도 않는 내숭이십니까?"

"되지도 않는지야 내가 알아서 판단할 문제고. 난 비록 쿠데타에 동참하지는 않았으나 그날 의회에 출석함으로써 루이필리프를 도운 공범일세. 그런데 내가 수상이 된다면 누가 혁명재판소의 단죄가 제대로 이뤄졌다고 여기겠는가?"

확실히 그의 말대로였다.

물론 콩도르세 후작은 쿠데타 자체에 동참하진 않았고, 그날 수상으로서의 직권을 남용한 오를레앙공의 소집 명령에 따라 의회에 출석했을 뿐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오를레앙공이 그날 궐석하면서 콩도르세 후작은 우리와 함께 쿠데타를 진압하는데 기여하게 되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결과론.

오를레앙공의 계획대로 진행되었으면 그날 의회에 출석한 우익의원들은 우리를 국가의 적이라며 일방적으로 선포했을 것이고, 콩도르세 후작은 신생 오를레앙 왕조의 개국공신으로 후대 받았을 것이다.

그래야 오를레앙공 입장에서도 콩도르세를 확실한 공범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으니까.

"이건 의회와 법치의 신뢰가 달린 문제일세. 내가 자네들을 탐탁지 않아 한다고 이런 역사적인 사건에 정치적인 견해나 감정을 끼워 넣어서야 되겠나. 나, 니콜라 드 콩도르세는 인류의 빛나는 이성에 맹세코 결코 수상에 취임하지 않을걸세."

"뭐, 그러시다면야."

마지막까지 그리스도나 성모가 아니라 인류와 이성에 맹세한 건 참으로 반종교론자인 콩도르세다웠다고 할 수 있겠다.

여하간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콩도르세 후작이 쿠데타에 간접적으로 동참했음을 들어서 수상직을 거부하면서 지난날 오를레앙파 쿠데타에 직간접적으로 동참했던 우익후보들까지 덩달아 침몰.

사실상 모든 후보가 출마를 거부하거나 눈치 없이 출마하겠다고 덤볐다가 네가 뭔데 혼자 나서냐고 흠씬 두들겨 맞으면서 자연스레 지난 쿠데타 당시 원내 입성 후 최악의 위기를 맞이했던 우리 좌익진영의 부전승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럼 우리 정치동아리에서 수상이 될 사람이야 당연히-.

"우리 혁명진영의 영웅!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의 수상 취임을 축하하며! 우리 모두의 승리를 위하여!"

"""건배!!!"""

쨍-.

···뭐, 그렇게 되었다.

다들 기분 좋게 또 선술집 하나 대절해서 승리를 축하하려는 자리에 참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은데, 마라 넌 진짜로 나중에 일찍 죽어도 누굴 탓할 생각은 마라.

아니 무슨 환자가 요양해야지 또 또 또 포도주 500cc를 원샷으로 들이키고 있다냐.

피부병이야 만성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치는데 너 쿠데타 때 자코뱅 수도원에서 총에 맞았다며.

지금도 어깻죽지에 엄지손가락이 들락날락하는 놈이 한 손으로 술 퍼마시는 게 지금 자랑이니?

[뭐어, 포도주는 주님의 피라고들 하지 않는가? 그날 마라는 출혈이 심했으니까 이럴 때 피를 보충해줘야지. 그리고 자네의 지식을 살짝 빌려보자면 알코올에는 소독효과라는게 있다고 하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좋은 거 아니겠나.

흘린 피도 보충해주고, 더러움도 씻어주고. 환자에게 좋은게 두 가지씩이나 들어갔으니 우리 프랑스의 포도주란 참으로 조물주께서 내리신 선물임이 틀림없군.]

21세기인의 의학상식을 모욕하지 마!!!

민간요법도 정도가 있는 거지 포도주는 주님의 피니까 피 많이 흘린 사람에게 포도주로 철분 보충하라는 게 지금 할 말이냐!

하여간 정치동아리 회원 아니랄까 봐 음주가무에 관련된 이야기만 되면 다들 IQ가 아주 쫙쫙 떨어지시네!

"아니 막시밀리앙, 이 친구야! 또 뭘 혼자서 점잔빼고 있는 건가? 오늘 자리의 주인공이 모범을 보여야지!"

"그래! 어디 우리 수상 각하께서는 주량도 각하급인지 보자고!"

···아니 그런데 이 미친놈들이 술통을 통째로 가져왔네.

나야 그날 자코뱅 수도원에 없었으니까 그나마 멀쩡하다 쳐도 다들 총알 한두 방은 맞았던 놈들이 붕대 칭칭 메고 음주 강요하고 싶나 진짜?

[큭큭큭. 뭐 어떤가. 이 좋은 날에 사내놈들과 모였으면 당연히 이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시꺼.

난 못해.

아니, 안해.

원래 당신 친구들이니까 당신이 알아서 책임지셔.

[으, 응? 잠깐 이 친ㄱ-.]

우웨에엑!!!

두 덩치가 내 입에 포도주를 술통째로 퍼붓던 타이밍에 집주인 놈에게 몸을 돌려주었다.

당연히 식도가 채 열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입안 한가득 포도주가 때려부워진 집주인 놈은 그대로 침몰.

연신 포도주를 피가래 마냥 토해내고 헛구역질로 허여멀건 액까지 토해낸 다음에야 간신히 숨이 되돌아올 수 있었다.

아주 꼴좋군.

[콜록! 아니 이 친구가 하다못해 말이라도 해주던가···!]

말을 해줬으면 당연히 마음의 준비를 했겠지?

이 알코올 혐오자에게 음주를 강요하는 아주 못된 친구들을 둔 네 업보를 탓하거라.

"낄낄낄! 아니 수상 각하! 이 아까운 포도주를 다 흘리시면 어떻게 합니까?"

"아이고, 괜히 나서지 마시고 편-히 있다 가십시오! 이 오탁은 쇤네 들이 다 알아서 치우겠습니다요!"

"여봐라, 우리 로베스피에르 각하께서 술이 너무 싸구려라 몸에 안 맞으신단다! 어서 수상 체통에 걸맞은 고급술과 안주를 대령하지 못할까!"

"그거야 이를 말일깝쇼!"

푸하하핫-!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유쾌한 웃음소리.

저마다 붕대 한둘씩은 휘감고 있으면서도 술 퍼마시고 팔자 좋게 웃어젖히고 있는 게 참 뭐라고 할까.

좋게도 나쁘게도 굳세다는 실감이 든다.

중간중간 빈자리가 보이는데도 전혀 그런 티를 안 내고 있으니.

[뭐, 그거야 한두 번 경험한 일이어야지.]

···그런가.

하기야, 쿠데타였지.

결국 주모자였던 오를레앙공은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고 뒤무리에는 백의종군, 그 밖에 오를레앙파도 죄다 어떤 식으로건 법의 단죄를 받았지만 이런걸 보면 과연 공정한 결과였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쪽은 아무런 죄도 없는 친구들도 몇몇 쿠데타 와중에 운명을 달리했는데 막상 법에 따른 단죄로 저쪽에서 목숨까지 잃어버린 건 오를레앙 공작 한사람 뿐이니까.

아무리 혁명 이후 평등해졌다지만 귀족 목숨과 평민 목숨은 다르다, 이건가.

[너무 마음에 두지 말게. 아무튼 적 수괴의 목을 베지 않았나. 덩달아 그에게 기생하던 거물들도 여럿 몰락시켰고. 반면에 우린 간부들 중 누구 한 사람도 잃지 않았으니 이번 일은 우리의 완승일세. 떠나간 이들도 그리하는걸 기뻐할 테지.]

굳세기도 하셔라.

아니면, 그냥 익숙해진 건가?

하기야 바스티유 감옥이 원래 정치범들을 잡아 가두는 정치범수용소였다고 했으니 이미 혁명 전부터 유명을 달리한 친구들도 많았겠군.

어쩌면 그래서 이렇게 요란스레 웃고 떠드는 문화가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안 그러면 또 금방 우울해질 테니까.

홀짝.

괜히 기분이 멜랑콜리해져서 포도주를 한 모금 머금자니 당통이 슬쩍 내 곁에 다가와 앉았다.

"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었나?"

"그냥, 이런저런 생각들이지."

"어련하실까. 어제 코르들리에 지구에서 아주 요란하게 노셨던데."

어제?

아아, 그 급진당 지지집회 말이구만.

"한번 본색을 드러내 봤네."

[웃기는군. 그냥 인기영합이지.]

시꺼.

"이제 나도 슬슬 입지를 굳혔으니 남들 뒷담이나 깔 게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장차 어떻게 이 나라를 바꿔나갈 건지 보여줘야지 않겠나. 해서 우리 동지들에게 부탁해봤네."

"···그게 본색이라고?"

"그렇다면?"

설마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답해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한동안 당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멍하니 두 눈을 깜빡거릴 뿐.

그렇게 한참을 침묵하더니.

"좋아, 그럼 나도 급진당에 가입하게 해주게."

라고, 대뜸 뜻밖의 소리를 꺼냈다.

"···자네가?"

"그래. 혹시 안될 이유라도 있나?"

"안되고 자시고-."

당신 반드시 부패하는 자잖수.

여기 모인 사람 중에서 가장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작자고.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급진당 색채에 어울리는 인간상은 아닌 거 같은데.

"평소 자네의 정치관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뭐, 부정하지는 않겠네."

물론 그렇게 솔직히 말할 순 없으니 일단 적당히 둘러댔다.

표정이 잠깐 일그러졌던 건 대충 무슨 의도인지 알아들어서라고 봐야겠지?

"하지만 모로 봐도 그게 작금의 민의와 가장 가까워 보이더군."

당통이 단언했다.

"우리의 가장 큰 힘은 민중의 지지일세. 하지만 에베르가 이미 몇 차례 지적했듯이 우린 민중을 잘 몰라. 그들이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저 천박하고 무질서한 폭도들을 어떻게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하는지 같은 것 말이야."

"글쎄, 그런 것 치고는 지금껏 잘해오지 않았나?"

"아니,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네. 먼저 민중이 분노했고, 우린 거기에 올라타서 우리가 원하는 일들을 했었지. 민중의 분노가 사그라지면 우린 금세 길을 잃고 말걸세."

[즉, 단일화하자는 소리군.]

아마도.

지금 급진당이 한창 자극적인 구호를 내세우면서 보편적인 지지세를 끌어오고 있으니 이참에 곁에서 정당 운영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곁눈질로 배워가겠다는 속셈일 거다.

이 친구도 사회적 지위보단 민중의 지지로 먹고사는 입장이니 오를레앙파 쿠데타나 샹 드 마르스 행진에서 보여준 선동 능력이 부러웠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연이은 성공으로 반대진영에서 적그리스도 소리까지 듣고 있는 내 대중적인 인기도 탐이 났겠지.

마침 나도 수상으로 취임한 이상 빅텐트 아래 끌어안은 계파를 늘릴 수만 있다면 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해가 될 이유는 없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을 달겠네."

"그 정도야 얼마든지. 어떤 조건인가?"

벌떡.

당통이 동의함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식탁 위로 올라간 다음.

"여기 우리 탐관오리 짱구가 내 급진당에 가입하겠다는데!!!"

하고, 있는 힘껏 외쳤다.

"아, 아니! 이봐! 갑자기 무슨-?!"

"어때, 기왕 이렇게 된 거 다 같이 한솥밥 먹어보지 않겠는가? 이 수상 각하께서 책임지고 무덤까지 팍팍 등을 떠밀어주겠네!"

반응이 좀 미묘한 것 같길래 식탁에 놓여있던 호출용 종을 들어 올려 있는 힘껏 흔들렸다.

땡땡땡-.

그런데 프랑스에서도 술자리에서 골든벨 울리나?

모르겠다.

없으면 내가 만들지 뭐.

"이 기쁜 날 어찌 마시지 않고 배길쏜가? 오늘은 내가 쏜다!!!"

"어이쿠, 시작인가?"

"그래, 그렇게 나오셔야지! 이제야 좀 사내대장부답구만!"

"낄낄낄! 살다 살다 내가 저 난쟁이 노총각 놈 덕을 다 보게 생겼네!"

"""부어라! 마셔라! 죽여라!!!"""

만세!!!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탄성.

반쯤 얼이 빠진 당통의 어깨를 두드리며 작게 속삭였다.

"자, 그럼 계산은 잘 부탁하겠네."

순간 이 짱구의 눈동자에서 검은 살기가 불타오르는 게 보였지만 아마 잘못 본 걸 거다.

아, 그리고 덧붙여서 난 여기 동아리 회원들과 다 같이 급진당에 가입하는 것과 오늘 술자리 계산 중 어느 쪽이 조건인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저 커다란 짱구로 알아서 짐작하고 대처하라지 뭐.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에이, 이정도야 애교지.

우리도 슬슬 급진당을 팍팍 키워줘야 할 시기가 오기도 했지만, 솔직히 좀 얄밉기도 했잖아?

좋게 보면 정치인의 자질인 거지만 그래도 괜히 골려주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이날 당통은 뒤이어 내가 불러온 급진당원들까지 포함하여 300명 어치 술값을 혼자서 계산해야만 했다.

***

프랑스령 생도맹그.

"급진당이라고?"

노예 혁명군 지도자 투생 루베르튀르가 뜻밖의 소식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끝내 왕정이 패망했다는 소리인가?"

"그건 또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당수인 로베스피에르는 법통파를 자칭하고 있다는 정보가···."

"본국의 소식이 갈수록 복잡기괴해져 가고 있군."

하아-.

올해도 본국의 대답을 듣기 힘들 거라는 직감에 투생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백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한 게 이렇게나 답변이 질질 끌릴 일이 될 줄이야.

아니 뭐 그들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한 것도 아니고, 본국은 혁명 이래로 갈수록 자유로워지고 있으니 해외영토인 생도맹그에서도 똑같이 적용해달라고 요구한 것뿐이잖은가.

물론 혁명 와중 폭도들이 무절제한 약탈과 보복적 성격의 살육을 벌이긴 했지만, 투생은 변함없이 그들이 대의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믿었다.

까놓고 말해서 그동안 약탈과 살육이라면 백인들이 더하면 더했지, 그들보다 덜하지는 않았으니까.

"다만, 좌우지간에 이 급진당은 노예제에 반대하고 만민평등을 지향하는 극좌성향의 당파라고 했습니다. 지금 본국의 상황이 어지러우니 가까운 시일 내에 답변을 듣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분명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그것참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

진심이었다.

지금 생도맹그는 혁명 이래로 혼란에 혼란을 거듭해가고 있었으니까.

일단 이 히스파니올라 섬의 8분의 5는 프랑스령 생도맹그가 아닌 스페인령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그들 노예혁명군이 생도맹그의 흑인 노예들을 해방해봐야 여전히 섬 대부분은 흑인 노예들을 착취하여 막대한 수익을 누리는 플랜테이션 농장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 혁명군이 국경을 넘어 저들을 도와줬다가는 프랑스로도 모자라서 스페인과도 척질 게 뻔한 상황.

무엇보다 그 스페인은 지금도 혁명군을 돕는 대신 프랑스와의 전쟁을 도와달라며 은근히 부추기고 있었다.

당장 현 생도맹그 노예혁명군의 최고사령관 조르주 비아소부터가 반란 초기 스페인 식민당국이 적극적으로 그들을 숨겨주고 도와줬기에 지금처럼 세를 키울 수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그리고 이번에도 대답이 오지 않는다면 그냥 스페인에 충성을 맹세하시지요."

그의 부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차피 본국과는 이미 척을 지지 않았습니까. 저 동쪽 섬의 동포들이야 참으로 안타깝지만,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일단 우리라도 자립하고 난 다음 차차 기회를 노리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스페인 놈들은 약속을 지킬 것 같은가?"

투생이 조소했다.

"이보게. 저 본국이야 혁명이라도 터졌지, 스페인은 일개 봉건 군주가 모든 걸 통제하고 지배하는 노예 제국이야. 저 끔찍한 식민지 카스트를 보게. 저들이 우리 같은 물라토를 사람대접해줄 것 같은가?"

"그, 그렇지만-."

"보나 마나 이 섬을 차지하고 나면 눈엣가시 같은 우리 노예 반란군까지 처리해버릴 작정인 거겠지. 그래야 노예들이 옛날처럼 군소리 없이 채찍을 맞으며 노예주를 위해 평생을 헌신할 테니까."

괜한 희망 같은 거 가지지 말게.

투생이 덧붙였다.

차마 이에 반박할 수 없었던 부관은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기다려보세."

'하지만 이번에도 묵살한다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투생 자신도 진정 이 기다림이 최선인가 확신할 수 없었다.

본국에서 또다시 진압군이 찾아올지, 그들과 타협하려 할지도 미지수다.

스페인은 믿을 수 없으며, 이웃 자메이카에서 틈틈이 침략 기회만 엿보고 있는 영국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미국···은 그나마 같은 식민지 출신이라고는 하는데 그 작자들도 결국 흑인 노예를 부리는 백인 노예주 아닌가?

그들 물라토 중에서도 흑인 노예를 부리던 마름 출신들이 있기야 하지만 그렇다고 저 백인들이 그 사실에 동료의식을 느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이것 참, 닥치고 어떻게 죽을지나 고르라는 것도 아니고.'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감과 답답함에 헛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다만 후회는 없었다.

몇 번을 과거로 돌아간다고 하여도 그들은 그 순간 똑같은 결단을 내릴 것이다.

그러니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 세상 어딘가엔 그들을 인간으로서 교섭해줄 사람이 있기를 기도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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