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54)

아 다르고 어 다르고

지난 세월 나 박민혁과 집주인이 가장 격렬하고 극명한 견해차이를 빚었던 쟁점이 있다면 단연 토지개혁이었다.

[말은 똑바로 하게. 행정독재에 의한 사유재산권 침해와 입법절차 왜곡이잖은가.]

하이고, 어련하실까.

왕조가 바뀌거나 뭐 빡시게 개혁의 첫 삽을 뜨거나 하면 당연히 토지개혁부터 갈기고 보는 게 기본인 유교 드래곤으로서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관점이지만.

여하튼 이 친구는 설령 토지개혁에 나서더라도 무조건 토지거래, 혹은 경매를 통해 재분배해야 한다고 했지, 균전제는 죽어도 안 된다고 버텼다.

국가가 개인의 사유재산을 함부로 재분배하기 시작하는 게 독재의 전조라나, 뭐라나.

이게 진짜 이 정신기생체 없었으면 알아서 독재하셨을 양반이 해도 될 소리인가 싶었다.

[오히려 난 자네가 왜 이렇게 행정독재를 향한 경계심이 희박한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군.]

어이쿠, 또 시작인가?

[애초에 행정력이란 게 무엇인가? 권력자가 개인과 사회를 보다 편리하게 관리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인위적인 폭력이잖은가. 행정기구에 의한 사유재산 압류를 허용함이란 곧 저들에게 개인의 권리를 제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예외를 만들어주는 것이고, 이런 예외적인 조치가 조금씩 늘어난 결과가 작금의 절대정일세.

관료란 언제 어느 시대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여 권력자들을 이롭게 할 궁리만 하는 유사 귀족 집단이었으며, 이 집단이기주의와 보신주의로 똘똘 뭉친 적폐들이 더욱 큰 힘을 가질수록 민간은 그만큼 힘을 잃게 되네. 자유가 사라지게 되는 거지.]

네이, 네이.

이 부분에선 피차 절대로 상대방 의견 이해할 생각 없다는 거 잘 알겠고요.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방법론에 있어서는 견해차가 극명함에도 극단적인 빈부격차와 지방의 봉건 질서 타파를 위해서라도 농민들을 위한 당근이 필요하다는 것만큼은 우리 둘 다 공감하던바.

그럼 하다못해 토지거래에 가까운 경자유전이라던가, 아니면 지주들만 인위적으로 경매에서 배제한다던가 구매 제한을 두는 등 다양한 대안을 논의했다.

그리고 그렇게 본격적인 토의가 시작된 지도 몇 날 며칠이 지나고 슬슬 그냥 실력행사로 끝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아, 둔전이라면 내 당연히 지지하고말고.]

우리의 토지개혁 논의는 정말로 예상치도 못했던 교접점을 만나면서 해결되었다.

···아니 이보쇼.

이제 와서 병농일치라고?

[이제와서 병농일치라니, 자네야말로 무슨 소리인가? 옛 로마 공화국이 어떻게 고대 지중해 세계를 제패했는지 잘 알 텐데. 군역은 시민의 가장 신성한 의무이자 권리일세. 누군가의 강요가 아닌 그 자신의 자유의지로 공동체의 자유를 위해 희생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인가?

이제 우리 프랑스도 모든 국민에게 참정권을 나눠주며 본격적인 시민군을 조직할 기틀이 닦였으니, 우리의 고결한 애국자들과 그 가족을 위한 둔전이라면야 당연히 지지해야지. 그래야 다들 기쁘게 공동체의 자유를 위해 싸우러 나가지 않겠나.]

···음, 모르겠다.

대충 로마 뽕이라는 건 이해하겠는데 그래서 이게 그냥 경자유전이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아니 어차피 국민개병제할 작정이었잖아.

둔전 나눠주기나 토지개혁이나 똑같은 거 아니야?

[국가가 신성한 사유재산을 재분배하는 것과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아 가는 것이 대체 어떻게 같다는 건가?]

결과가 똑같잖아!!!

아니, 진짜로 이해가 안 가네!

결국 이거나 저거나 똑같은 경자유전, 병농일치 부병제인데 왜 이건 되고 저건 안 되는데!

"아, 로마식 둔전제를 변용해보자는 말인가? 흠, 발상이 좀 낡긴 했어도 토지균전법보다야 훨씬 낫겠군."

···그런데 콩도르세 후작도 똑같은 반응이더라.

브리소나 당통도 그렇고 마라에서 카미유에 에베르까지 다들 어, 그거라면 나쁘지 않네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나마 질색한 건 왜 원래 당연히 농민들 소유여야 할 부동산을 돌려주는데 그런 거창한 대가까지 필요하냐고 반응한 자크 루 동지뿐.

원내 의원들은 죄다 무작정 경자유전이니 균전제니 하는 것보다 이게 훨씬 건전하고 시장 질서 왜곡도 덜하다면서 긍정해줬다.

아니 도대체 왜 그렇게 되는 건데?

[둔전은 통화나 수확물 같은 눈에 보이는 재화 외에도 그 사람의 시간과 신변의 자유라는 비가시적인 재화까지 덩달아 지불하게 되잖은가. 더 나아가자면, 본디 기사와 국왕 간의 봉건 계약으로 왜곡된 토지소유권을 시민과 국가 간의 문서화 된 사회계약으로 바로잡는 셈이지. 루소도 분명 연옥에서 기뻐할걸세.]

구주천지복잡기괴.

대충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는데, 끝내 왜 그게 다른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동서양 문화차이라고 넘어가는 수밖에.

"그런데 이 프랑스에서, 그것도 지금 둔전으로 사용할 수 있는 토지는 극히 적은데 그 점은 어떻게 해결할 생각인가?"

여하튼 이제야 이쪽 이야기를 들어볼 의향이 생긴 듯한 콩도르세에게 대꾸했다.

"일차적으로는 지주들에게 일정 가치 이상의 농지를 병역세로 지불하면 군역을 면제해주려고 합니다. 그다음 재정이 어느 정도 확보되고 토지개혁이 본궤도에 오르고 나면 그때부터는 제값을 지불하고 토지를 사들여야겠지요."

"그럼 토지가 처음부터 없는 이들은 몰라도 토지가 아슬아슬하게 모자라서 군역을 지게 된 이들의 불만이 적잖을 텐데."

"그들이 과연 아쉬워할까요? 땅이 썩어나는 지주들이나 토지를 지불하여 면제받을 생각을 하지 대부분은 차라리 군대에 갈지언정 면제를 위해 토지를 바치려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내가 비록 농업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나 토지를 향한 농민들의 열망과 갈망만큼은 잘 알고 있다.

괜히 역사적으로 역성혁명이 터지면 가장 먼저 시도하는 게 토지개혁이고 일단 이것만 성공적으로 끝나고 나면 아, 이 왕조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고 보는 게 아니지.

하물며 지금 프랑스는 아직 대가족 단위 생활이 당연시 여겨지는 산업화 이전 농본사회.

벌써 최후의 한 명까지 쥐어짤 것도 아니고 어지간하면 보충역, 전시근로역, 면제로 빼버리면 오히려 마을 어르신들이 할 일도 없는데 너 군대 가서 땅이나 받아오라고 할 개연성도 다대하다.

개인의 인권이나 교육열 같은 게 바닥을 치고 있을 테니 더더욱 쉽게 허락이 떨어지겠지.

"어차피 당장에 국민개병제를 도입해봐야 또 파리에서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할 겁니다. 의회에서 제아무리 전쟁 위기라고 떠들어봐야 지금 전쟁 중인 것도 아니니까 더더욱 그렇겠지요. 차라리 당분간은 기존 국민위병-연맹병 체제를 더욱 확대하여 모병제 원칙으로 갑시다.

그렇게 먼저 자발적으로 국민군에 입대한 이들에게 둔전을 나눠준 다음, 이들의 사례가 유인책이 되어서 경쟁률이 일정 이상 올라가고 나면 그때 국민개병제를 도입합시다. 그럼 기존 입대희망자들도 만족할 테고, 강제징병 되는 이들도 심리적 거부감이 한결 덜해진 상황에서 입대하게 될 테니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겁니다."

"오호라···."

[그래, 이렇게 잘 할 수 있었던 친구가 그동안 왜 자꾸 고집을 부렸나?]

무조건 토지개혁은 사유재산 침해니까 안 된다면서!

이번엔 난 진짜로 억울하다, 이 코쟁이들아!

아니 경자유전 균전제 갈겼으면 당연히 병농일치 부병제까지 한 세트지 왜 남의 머리에서 쥐가 날 때까지 반대만 하는 건데!

[반대로 왜 그 각기 다른 두 가지가 하나로 묶일 수 있다는 말인가?]

아아악!!!

"그럼 존경하는 수상님, 제가 한번 이번 개혁안을 순차적으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카미유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언해주십시오."

"기존 국유지로 자원입대자들을 받아서 둔전제를 도입하고, 그다음 그들의 사례를 보고 더욱 많은 입대희망자가 모여들면 그때 국민개병제를 도입하며, 군 면제를 위해 토지기부를 장려하여 이 둔전제가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재화를 마련하고 이 둔전병들을 이용해 지방장악력을 재건합니다.

이를 통해 안정적인 세수를 보장받을 수 있으며, 이렇게 마련된 국가재정으로 조금씩 지역유지들로부터 토지를 정당하게 구매하여 둔전에 기초한 자영농들을 육성. 최종적으로 이 프랑스에서 더는 둔전으로 사용할 수 있는 토지가 남지 않게 되었을 때 효용을 다한 둔전제를 폐지하고 별도의 토지정책으로 대체합니다."

어때.

"나쁘지 않지요?"

실제로 내가 처음 경자유전을 입에 담았을 때만 해도 뭐 저런 빨갱이 같은 놈이 다 있나, 라는 식으로 쳐다보던 의원들이 그럭저럭 들어줄 만하다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다.

뭐 그래도 끝내 제 욕심 못 버리고 투덜거리는 놈들이 눈에 띄기는 하는데.

그래서 뭐 어쩔 거야.

꼬우면 보통 선거권을 틀어막았어야지.

겨우 2표 차이건 어쨌건 개헌안이 통과되고 당장 다음 선거 때부터 파리 시민들이 몰표 찍어준 급진당 의원들이 우르르 원내 진출할 텐데 지금 뻗대봐야 그때 가면 더 과격한 개혁안 나오라는 거 뻔히 알 거다.

그래도 싫다고 덤빌 거면 뭐, 지부터 군대 가라지.

냉병기도 아니고 총알과 포탄이 날아드는 전장에서 혼자 만인지적 찍어주면 내가 졌소하고 토지개혁이고 국민개병제고 다 포기해주마.

[그야말로 기사도 문학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군.]

누가 아니래?

그보다도 이거 결국 둔전병 내세워서 지방의 반발을 총칼로 찍어누르겠다는 소리 아닌가?

행정독재는 그렇게 경계하시는 분들이 왜 둔전병으로 지역유지들 압박하겠다는 건 아무도 트집 안 잡는 거야?

[자네, 로마가 도시 공화국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대제국을 유지했는지 아는가?]

아뇨, 알고 싶지 않은데요.

붓보다 칼이 더 정당한 집행 절차라니 참 알다가도 모르겠군.

크흑, 맹자님. 오늘따라 모두 까기 인형 같던 당신이 유독 더 그립읍니다···.

"그럼 별다른 이의가 없다면 이대로 표결을 시작하겠습니다."

땅·땅·땅.

여하튼, 그리하여 국민개병제-토지개혁법 두 가지를 사실상 하나로 묶어버린 우리 급진당의 둔전법안은 이날 무사히 과반수의 찬성표를 받아 통과될 수 있었다.

본격적인 논의와 진행은 농업위원회와 전쟁위원회, 재정위원회 3곳이 협력하기로 했고 여기에 임시로 집행위원회를 신설.

사실상 욕받이 담당으로 절차상의 행정소송이나 법정 공방 같은 반발을 밀어버리는 역할을 떠맡겼고, 위원장으로는 만장일치로 그날 파리에 없었던 프로방스 백작을 추대했다.

나름 막대한 권한이 부여되니까 요직이라면 요직이긴 한데, 둔전제까지야 아무튼 조만간 국민개병제 도입하면서 먹을 욕까지 생각하면 다들 엄두가 안 나더라고.

"일개 민선의원 나부랭이들인 우리가 이런 초법적인 조치를 아무 때나 휘두르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이미 한차례 토지개혁에 실패한 의회에서 기존정책을 갈아엎었다고 선전하는 것보다야 복되신 섭정께서 잘못을 바로잡으셨다고 선전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음, 듣고 보니 아주 그럴싸하구만."

"섭정께서 책임지고 본인 명의로 징병령을 내리시겠다면야 어쩔 수 없지."

"그럼 이 집행위원회는 각 위원회에서 선출한 대표자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도록 합시다."

"그럽시다. 어차피 임시기구인데 가끔 수상께서 의견조율만 해주시면 되겠지요."

그래서 우리 복되신 섭정님의 이름만 빌리기로 했다는 이야기다.

솔직히 이 양반도 반란 일으켰다가 포로로 붙잡혔던 거잖아?

오를레앙공처럼 단두대 끌려갈 거 아니면 하다못해 이런 식으로라도 밥값을 해줘야지.

***

'이게 아니야.'

만세!!!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농민들의 함성을 애써 모른체하며 프로방스 백작은 언제나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떠올렸다.

그래, 물론 언제나 이런 상황을 꿈꿔왔던 건 맞다.

그를 향해 환호하는 충성스러우며 신실한 백성들.

그런데도 그의 추잡한 가면 속 본모습은 폭로되지 않았으며, 누군가는 그를 음흉한 놈이라고 흉보겠지만 대다수는 그를 그저 선량하고 의롭다고만 여길 뿐이다.

그러니까 라파예트에게 포로로 사로잡힌 이래로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대중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지금이야말로 진정 보람차고, 그가 원하던 일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역시! 내 이럴 줄 알았어! 선하신 국왕 폐하께서 우리를 버렸을 리가 있나!"

"폐하! 우리 모두 기꺼이 당신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사옵니다! 그러니 제발 토지를 거두어가지 마소서!"

"역적들을 죽여라! 간신들을 죽여라! 탐관오리들을 죽여라!"

"""법통파 만세! 주여! 선하신 국왕과 복되신 섭정께 자비를 베푸시옵소서!"""

이거 아무리 봐도 혁명 그 자체잖아.

벌써 몇 번째일까 모를 광기 어린 지지 집회 한복판에서 프로방스 백작은 생각했다.

방데를 시작으로 라파예트가 이끄는 군대가 당도할 때마다 혁명의 광기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물론 저들이 제 입으로 혁명을 이야기한 건 아니오, 이제와서 파리의 폭도들을 지지한 건 더더욱 아니었으나-잠시 두 눈을 부릅뜨고 이 처참한 현장을 관찰해보자.

저기 폭도들에게 날달걀 따위의 오물을 두들겨 맞고 있는 게 누구지?

장대에 매달려서 아직도 자갈돌을 두들겨 맞고 있는 건 누구인가?

제3신분이 구체제를 상징하는 인사들을 공개적으로 조리돌리면서 그들의 재산을 탐하는 전개가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는데 이게 진짜 혁명이 아니라고?

'···미치겠군.'

프로방스 백작은 온몸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이 흐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땀샘이 고장 난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 광기 어린 농민혁명 현장에서 도망쳐서 어디로건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방데를 시작으로 너무나 많은 지역에서 얼굴과 신분을 노출해 버렸다.

이제 세간에서는 당연히 프로방스 백작이 이 농민혁명의 주동자이자 후원자라고 믿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폭도들에게 포로로 붙들려 이리저리 팔려 다니는 한심한 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도 아니면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군을 끌고 올 때는 언제고 라파예트에게 패배하자마자 금세 시류에 따라 신념을 고친 철새라고 생각하겠지.

이 중 그나마 어느 쪽이 추후 그의 정치생명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인가?

프로방스 백작은 벌써 며칠째 선뜻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라파예트와 그의 병사들에게 이끌려 프랑스 전역을 순회하고 있었다.

"···찬탈자 자식."

퉷.

그때 장대에 매달려있던 남작이 프로방스 백작을 향해 가래침을 뱉었다.

도대체 농민들이 어떻게 저 높은 장대에 저놈을 매달았을까 궁금해질 정도로 살이 뒤룩뒤룩 찐 돼지인간 같은 사내였다.

"그래, 나야 죽일 놈이라고 치자. 그래서 넌 얼마나 깨끗하냐? 국왕이 아직 10살도 안 된 갓난아이인데 섭정이라는 놈이 파리에 있어 주는 게 아니라 지 명망이나 얻고 다녀? 에라이-."

안돼.

이대로 더 말하게 둬서는 안 된다.

철썩.

"그 입 닥치지 못하겠느냐!"

미처 머리가 대책을 내뱉기도 전에 척수 반사적으로 달려간 프로방스 백작이 회초리를 들고 남작의 뺨을 번갈아 가며 후려갈겼다.

다분히 신경질적이고, 필사적인 반박이었다.

"모두 거짓!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렇게 돼지남작을 기절 시키며 간신히 한숨을 돌린 프로방스 백작이 조금 전과 달리 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농민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래, 내가 물론 파리를 비워둔 건 사실이노라. 하지만 만일 내가 섭정된 몸으로서 직접 나서지 않았다면 토지개혁이라는 게 어디 가능하기나 할 성싶은가? 아니, 이 더러운 돼지 놈들이 보나 마나 또 모든 걸 망쳐놓았을 테지!"

"하, 하오나 전하.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여기 있는 라파예트 후작을 보거라!"

척.

프로방스 백작이 뒷짐을 지고 서 있던 라파예트를 가리켰다.

"이 부르봉 왕조의 충신이자 전쟁영웅이 나와 함께 이 먼 곳까지 나선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그만큼 적들이 막강해서? 그것도 물론 있겠지! 하지만, 그 전에 폐하의 안전이 보장되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오오, 과연!“

라파예트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럼 프로방스 백작으로서는 이 틈에 서둘러 최후변론을 마무리 지어야만 했다.

"저 무뢰배의 헛소리에 속아 넘어가지 말거라! 왕국은 건재하며, 국왕 폐하께서는 안전하시니라! 이 또한 자비로우신 성모와 그리스도의 안배일지니!"

"""섭정 전하 만세! 국왕 폐하 만세! 혁명 만만세!!!"""

거봐.

결국 이 소리까지 튀어나왔잖아.

한순간의 위기를 피하려고 졸지에 제2신분을 배신하게 된 프로방스 백작이 남몰래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허나 이제와서 누구를 탓하랴?

끝내 라파예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프로방스 백작은 법통파의 기치 아래 곳곳에 농민혁명을 퍼트리고 다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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