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무위원회
예산은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듯이, 제아무리 이상이 드높고 각오가 굳건해도 주머니가 허전하면 현실과 타협하게 되기 마련이다.
내가 원하는 게 수억짜리 슈퍼카라도 내 월수입이 할부액도 나오지 않으면 카푸어 될 각오고 뭐고 아무 소용없는 거랑 똑같은 거지.
마찬가지로 국가 운영이라고 해도 다를 건 없다.
설령 우리가 하려는 일이 아무리 고결하고 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걸 해내고자 하더라도 예산이 없으면 아무 소용 없는 거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 나라 도대체 어떻게 안 망한 겁니까?"
"망했으니까 혁명이 터진 거지."
아하.
뭐, 확실히 시에예스 주교의 말대로긴 한데 하여튼 내가 수상에 취임하여 직접 확인한 국가재정 상황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우선 혁명 이전 프랑스 왕국의 부채는 약 50억 리브르.
이는 루이 16세 즉위 이전의 3배에 달하는 액수인 동시에 당시 프랑스의 통화유통량인 25억 리브르에 무려 두 배에 달하는 액수로, 절대왕정은 이를 내년도 예산에서 가불하는 식으로 십여 년간 돌려막기를 해왔다.
그렇게 가불하고, 또 가불하다가 더는 참다 못해서 터진 게 우리가 아는 대혁명.
이 대혁명 결과 교회 재산이 압류되었고, 왕실에서 쓰던 은쟁반 은식기를 포함하여 돈이 될만한 것들은 모조리 매각되었으며, 혁명정부는 4억 리브르에 달하는 옛 교회와 왕실소유 토지들을 담보삼아 발행된 토지채권 아시냐로 매달 꾸준히 국채를 갚아나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게 대체 무슨 문제냐고?
위에서 혁명 직전에 루이 16세가 떠안게 된 국채가 얼마였는지 다시 읽고 오도록.
이 나라 프랑스가 혁명 직전 떠안고 있던 빛이 50억 리브르.
그리고 아시냐를 발행하기 위하여 담보로 사용된 교회 재산이 4억 리브르.
덧붙여서 혁명 전에 루이 16세가 사들였던 성 한 채가 1천만 리브르다.
우리 집주인 놈은 52 리브르의 세금을 감당하기 위해 부업까지 뛰어야 했고, 파리의 상퀼로트는 고작 1.5 리브르의 세금도 내지 못해서 참정권을 박탈당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게 대충 어느 정도 되는 규모의 빚인지 짐작이 갈 거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묻건대.
"아니 진짜로 이 나라 어떻게 아직 안 망한 건데요?"
시에예스 주교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실내에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창 너머 먼 곳을 바라봤을 뿐.
오늘 회의에 참여한 다른 재무위원회 위원들이나 참고인들도 별다른 바는 없어서, 다들 헛기침하거나 먼 곳을 바라보며 국가의 앞날을 근심했다.
아, 프랑스의 앞날이 어둡구나.
아니 진짜로 어둡다 못해 새까만 칠흑인데.
루이야, 지금 이게 진짜로 나라니?
루이 15세 재위 기간이 60년이고 네 재위 기간이 20년도 안 되는데 할아버지가 60년 동안 물려준 빚을 고작 3분의 1밖에 안 되는 재위 기간으로 3배로 뻥튀기시켰다고?
붉은 혜성보다도 3배 더 빠르잖아!
뭔 교회 소유 토지랑 왕실 소유 토지 담보로 쓴 게 4억인데 50억???
와우, 뒷골이야.
[이제 우리 기분을 좀 알겠나?]
140%로 이해했습니다.
햐, 그냥 그날 오를레앙 공 옆에서 같이 눕혀서 사이좋게 보내줄 걸 내가 괜히 살려줬네.
내가 죄인이지, 내가 진짜 죄인이야.
"그나마 이번 혁명재판소로 한숨 돌리긴 했네."
쿵.
시에예스 주교가 비서관들을 시켜서 가볍게 내 앉은키를 넘어서는 서류뭉치를 가져왔다.
죄다 이번 오를레앙 파 쿠데타로 붙들린 놈들과 민간감찰단이 잡아넣은 탐관오리들의 재판기록들이었다.
저것도 실제 사례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일 거라는 사실에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올해 목표치는 이걸로 이미 초과 달성이지. 저 판사들이라고 해봐야 전 재산 털어서 꼴랑 100만 리브르도 안되는 놈들투성이인데, 무려 공작 전하가 걸리셨으니 원."
뭐, 성 한 채가 보통 수백만 리브르니 꼴랑 100만 리브르라는 건 좀 시에예스 주교의 과장이겠지만.
성을 고작 한 채만 가지고 있을리가 없는 오를레앙공이 비교 대상이라면 우리의 판사님들도 인정하실 수밖에 없을 거다.
오를레앙 가문 한곳에서 가지고 있었던 재산이 올해 프랑스 정부에서 발행할 예정이었던 국채와 맞먹는 수준이었다고 하면 짐작이 가는가?
여기에 겸사겸사 군무감찰위원회에서 잡아넣은 판관들이나 세리들, 온갖 탐관오리들까지 다 더해보면 저 올해 목표치는 초과 달성이라는 게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몇몇 고위 귀족 가문들이 국가와 맞먹는 수준의 부를 독점하고 있었으니까 현 프랑스 정부가 가난한 거라는 설명도 될 테고.
[하, 혁명 마렵다.]
···어, 그거 원래 내가 하던 소리인데.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와서는 오를레앙 공작께서 그날 쿠데타를 결의해주셨음에 감사한 마음뿐이네."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죽어서까지 아낌없이 이 빈궁한 정부에 예산을 마구 퍼주시다니.
오를레앙공 그는 신인가?
크흑, 제가 매년 제삿날 제삿밥은 꼭 챙겨드리겠읍니다.
보자. 제사는 원래 제사상이 아니라 본인의 성의가 가장 중요한 거라고 했으니까 냉수만 정성껏 떠 놓으면 되겠지?
"덕분에 올해는 이자에 상환액까지 지불하고서도 그래도 자네가 말한 둔전제라던가 이것저것 시도해볼 만한 여유가 생기긴 했네."
시에예스 주교가 쓰게 웃었다.
"뭐, 그래봐야 내년이면 또 원상태로 돌아가겠지만 말이야. 지금으로선 오를레앙공 같은 애국자가 또 한 사람 나와주길 고대하는 수밖에 없겠군."
"우라질, 애초에 왜 우리가 그 루이 오귀스트 놈 빚까지 대신 갚아줘야 하는 거야?"
마라가 투덜거렸다.
그래, 우리 미친개. 너도 참 변하는 게 없어서 보기 좋구나.
"그리고 이 50억 중에서 20억은 신대륙 놈들 돕다가 진 빚이잖아. 그럼 쉽군. 절반은 우리가 갚고, 나머지 절반은 저 합중국 놈들에게 갚으라 하자고. 우리도 지금 벌써 수십 년째 조금씩 갚고 있으니 저놈들도 그러면 되겠네."
어, 좀 솔깃한데.
[저 미국 친구들이 퍽이나 갚아주겠군.]
뭐, 나도 그냥 해본 소리다.
21세기의 초강대국 미합중국이면 몰라도 아직 조지 워싱턴 생전에 프랑스도 감당이 안 가서 죽는 소리 내는 빚을 갚으라는 건 좀 너무했지.
마라도 그냥 그만큼 빚의 규모가 너무 불합리하다는 소리일 거다.
"안 그래?"
···아니 그런데 이 친구가 진담으로 받으려고 드네.
험.
"하다못해 아시냐 발행을 중앙화할 수는 없겠습니까?"
이대로 가면 건설적인 논의보다는 저 빚을 누구에게 떠넘길까만 계속 떠들 것 같길래 내가 직접 총대를 메기로 했다.
"발행을 중앙화하자니···정부 부처라도 만들겠다는 건가?"
"뭐, 비슷합니다. 말하자면 중앙은행입니다. 아시냐가 시장에서 선호 받지 못하는 이유에는 설계상 결함이 다대한 것도 있지만, 각 부처에서 필요할 때마다 마구 찍어내고 있으니 더 큰 문제로 번진 거잖습니까."
이게 무슨 소리인고 하니, 지금 프랑스 정부는 아시냐가 시장에 정확히 얼마나 유통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비유도 뭣도 아니라 진짜로 모른다.
아시냐가 토지채권일 때 담보로 쓴 4억 리브르 어치 토지로 찍어낸 게 12억 리브르.
이게 벌써 2년 전이고, 100 리브르권에서 50 리브르권으로도 모자라 5리브르짜리 소액권까지 찍어낼 계획이 잡힌 지금은 얼마인지 집계자체가 안된다.
의회에서 급전이 필요할 때마다 마구잡이로 윤전기를 돌려댄데다가 이 아시냐라는 놈이 금속화폐가 아니라 지폐다보니 위조도 쉬웠거든.
이미 최초 발행시부터 4억을 12억으로 3배 뻥튀기했으니 지금쯤 10배 이상이지 않을까, 어림짐작만 가능할 뿐이다.
"하다못해 이 유통량을 조정하고, 신용도를 유지하며 통화정책을 관리해줄 금융전문부처만 신설해도 다소의 신용도는 회복될 겁니다."
감찰위원장으로서 아시냐 폐지 여론 만들어보려고 건수 캐다가 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진짜로 미치고 환장하는 줄 알았다.
왜 크툴루 신화 같은 곳에서 알지 말아야 하는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성을 잃고 발광하게 되는지 짐작이 된다고 해야 하나.
주여, 제발 살인하게 하소서.
윤전기 돌린 놈이랑 지폐위조하는 놈들 지옥 보내고 저도 지옥 가겠습니다.
"글쎄, 일개 정부 기관에서 금융권을 독점하겠다는 건 좀 너무 위험한 발상인 거 같은데···."
그런데 또 뭐가 문제야!
왜!
이 난리를 쳐놓고서 또 뭐가 문제인데!
[말 그대로야. 결국 자네 말은 일개 정부부처가 이 나라의 금융계를 쥐락펴락하게 만들겠다는 소리 아닌가? 그런 발상 자체가 절대군주나 할 압제고 시장 질서를 왜곡하는 비공화적인 정책인걸세.]
이 미개한 바게트 놈들이 대공황 처맞아봐야 정신을 차리지!
아니 잠깐, 이미 처맞았나?
지금 프랑스 꼬라지 보면 대공황보다 더한 걸 처맞았다고 봐야겠지?
그럼 얘네들은 처맞고도 아직 제정신을 못 차린 거네!
아아악!!!
"물론 아시냐 유통을 단일화 시켜야 한다는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네. 하지만 일개 정부부처가 금융정책을 관리하겠다는 발상은 선뜻 동의하기 어렵군. 무엇보다 현 정부의 신뢰도가 바닥을 치는데 정부가 금융정책을 관리한다고 시장의 신뢰도가 회복되겠는가? 아니, 오히려 반발만 더 커지겠지.
항상 하는 생각이네만, 자네는 조금만 더 온건해질 필요가 있어."
"그럼 뭐, 진짜로 모든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무화폐 경제 한번 가볼까요? 노동 본위 교환권 보여드립니까?"
[···이봐.]
아, 더는 진짜 못 참겠다.
토지개혁 때도 어떻게든 참고 열심히 설득하려는 노력은 해봤는데, 이번에는 진짜로 해줄 말이 없다.
"이 통화정책에 있어서 제 최종적인 목표는 아시냐 폐지와 신권 도입, 혹은 구권 리브르 체제로 회귀입니다. 이 중앙은행은 까놓고 말해서 1차 목표는커녕 「당연히」 만들어져야 하는 수준의 기관에 불과해요."
"···지금 토론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아뇨, 토론의 여지는 남겨두겠습니다. 단, 제가 당신들을 설득하는 게 아니라 당신들이 절 설득하십시오. 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아시냐라는 저주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걸 봐야겠습니다."
물론 나라고 통화정책에 통달한 건 아니다.
애초에 내 전공은 정치학이랑 사상 쪽이었지 경제 쪽이 아니었으니까 당연하지.
하지만 비전공자인 내가 봐도 이건 절대로 아니다.
아무리 지금 이 프랑스 정부가 빚더미에 떠안았다지만 이런 식으로 갔다간 하이퍼인플레이션만 반복되면서 나중엔 이자도 갚기 어려워질 거다.
어떻게든 이 저주받은 악순환을 손봐야 한다면 지금 당장이 맞고, 오를레앙공 덕택에 잠시 숨이 트이기도 했으니 더더욱 지금이 적기다.
"좋아, 그럼 설득해보지."
드르륵.
시에예스 주교와 그의 동료 위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어디 두고 보자, 이거겠지.
물론 나로선 필요한 조치긴 했지만, 저쪽 입장에선 안 그래도 독재각 설락말락했던 친구가 마침내 마각을 드러냈다고 생각할 거다.
[나 참, 안 그러던 친구가 오늘은 또 왜 그랬나?]
너 그럼 내 지식이랑 상식들로 저 친구들 설득할 수 있겠어?
[···힘들겠지.]
그래, 힘들다.
아무리 내가 21세기인으로서 대공황을 비롯해 피로 쓰인 경제사와 그 교훈을 알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전공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오히려 진짜 전공자들은 저쪽이지.
내가 이래서 정답이 정해진 문제가 싫어.
끝까지 인내심 있게 참아주고 싶어도 결국 내가 정답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상대가 너무 말도 안 되는 오답을 고르고 있으면 억지로 정답으로 이끌어주게 되니까.
심지어는 내가 그 주제를 잘 모르더라도.
"···흠, 그러니까 자네는 민생안정을 위해 통화가치를 안정시키기 위한 즉각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인가?"
그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던 마라가 내게 되물었다.
"뭐, 그렇지."
"그렇다면 나는 찬성일세."
즉답이었다.
"저놈들이 뭐라고 지껄여대건 개의치 말게. 최소한 자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했고, 내가 보기에는 충분히 그럴싸한 이야기였네."
그럼 그놈의 절차가 대관절 무슨 상관인가?
마라가 덧붙였다.
"토의라는 건 서로 의견이 맞부딪힐 때나 필요한걸세. 그럼 저놈들이 반대하려면 먼저 대안을 제시해야지, 대안도 없이 반대하고 보는 게 무슨 토의인가? 생떼지. 기운 내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난 자네 편이야."
"하핫, 말만으로도 고맙네."
[···자네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 보는 것 같군.]
부정하진 않겠다.
정말로 이번만큼 내 편이 이렇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적이 없었다.
진짜로 단순히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내 생각까지 이해하고 곁에서 몇 마디라도 덧붙여줄 사람.
나의, 우리의 생각이나 목표까지 이해하고 알아서 자율주행해 줄 오른팔.
혁명이나 당파가 아닌 오롯이 내 편을 들거나, 반대로 꾸짖어줄 보좌관이 필요했다.
***
번화가.
"왜 자유의 적에게 자유가 필요합니까?"
"···뭐?"
테이블 건너 미청년의 발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뮈라가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그와 같은 군인에, 같은 급진당 당원이며, 무엇보다 올해 선거에 출마가 예정되었다는 소리에 좀 친해지려고 술을 권하던 게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정치 이야기를 꺼낸 게 잘못이었나?
잠시 청년의 말을 곱씹던 뮈라가 되물었다.
"미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입니다. 누구에게도 자유를 침해할 자유는 없잖습니까."
"뭐 그렇지."
머리 나쁜 뮈라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은 났다.
내 자유가 소중한 만큼 남의 자유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나, 뭐라나.
"자유의 적, 가령 국왕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허나 청년은 이를 더 이야기해보라는 소리라고 착각했는지 더욱 장황한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국왕 개인과 프랑스 국민 전체. 이 둘 중 누가 더 귀하고 중요합니까?"
"···국민 아닌가?"
"그렇습니다, 당연히 국민이지요. 하지만 현실은 어땠습니까? 불과 5년 전만해도 프랑스 국민은 저 국왕 개인의 영달과 사치를 위해 착취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나라의 모든 재화는 오직 저 절대군주만을 위하여 존재했고, 또한 사용되었습니다."
고로.
"국왕이라는 객체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프랑스 국민 전체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청년이 단언했다.
"따라서 자유의 적에겐 어떠한 자유도 허락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사회의 구조가 그들이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죄악을 범하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이며, 먼저 이 구조를 바꿀 수 없다면 저들은 존재하는 자유조차 허락받아서는 안 됩니다."
"어···."
한참을 청년의 설교를 곱씹던 뮈라가 되물었다.
"그건 그러니까, 저 자유의 적들을 모조리 죽여없애야 한다는 소리지?"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지요."
"아, 뭐야. 괜히 고민했네. 걱정 붙들어 매셔. 다른 건 몰라도 이 형님이 멀쩡한 사람 병신 만들어놓는 거 하나는 이골이 난 사람이거든."
꿀꺽.
제 다부진 알통을 과시하던 뮈라는 그 자리에서 럼주 1병을 비워버렸다.
이 미청년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허세이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그 자신을 위한 기분전환이었다.
'···십헐, 재수 옴 붙었네.'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천진난만한 미친놈이 튀어나온 거야?
하루빨리 이 미친놈에게서 멀어지라는 제 육감의 경고를 받아들인 뮈라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보다 너, 입터는 실력 하나는 대단한데? 너 오늘처럼만 하면 올해 간신히 출마연령 채운 애송이라고는 아무도 안 믿어줄걸."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그래봐야 아직 당선도 전인걸요."
"아니, 진심이야. 내가 저번에 로베스피에르 씨랑 잠깐 같이 일했다고 말했던가? 직접 만나본 사람으로서 말하는 건데, 너도 딱 그 사람이 좋아할 과야."
"···그렇습니까?"
그 순간.
그 맑은 눈동자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광기를 발견한 순간.
뮈라는 제가 조금 전 섣불리 발언한 모든 겉치레를 후회하고, 다시 주워 담고자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놈의 관심을 끌어서는 안 된다고.
이런 놈과 가까이 지내서는 안 된다고 그의 동물적인 육감이 절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영광이고 말고요."
하지만 청년은 다행히도 뮈라에게 흥미를 잃어버린 듯했다.
그의 관심은 온통 뮈라가 아닌 조금 전 뮈라의 발언에 쏠려있었기에.
청년은 뮈라가 술값조차 계산하지 않고 도망치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혼자 골똘히 그만의 세상에 빠져있었다.
곧, 「죽음의 대천사(L'Archange de la Mort)」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가 결심을 굳히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