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54)

대용품

"자, 잠시만! 한 번만 더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요한 씨!"

평소 구두 제작을 배우던 수습도제 로랑이 그를 가르치던 직인(職人)에게 필사적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아직 제가 이 일을 배우기 시작한 지 1년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저번에 요한 씨께서 제가 우울해하고 있으니까 아직 실수 한두 번쯤은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잖아요! 지금은 실수로부터 더욱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시기라고!"

"···그래, 그랬었지. 정말로 일이 이렇게 되어서 미안하게 됐다."

"아뇨! 제게 미안해하지 말아주세요! 예? 대체 왜 그러십니까?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라도 가르쳐주세요! 그래야 뭐라도 한 가지 더 배울 수 있는 거잖아요. 그게 장인정신이라고 가르쳐주셨잖아요!"

하아-.

하지만 로랑의 필사적인 애걸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쉴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치 정말로 본의가 아니라는 것처럼.

그도 마음 한편으로는 여전히 그를 사제로서 아끼고 있다는 것처럼.

허나 일말의 인정이 로랑에겐 오히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절 내치겠다는 것처럼만 보였다

"제발, 제발요. 저 진짜로 여기서 내쫓기면 갈 곳도 없단 말이에요···!"

털썩.

결국 견디다 못한 로랑이 닭똥 같은 눈물을 쏟으며 요한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렸다.

그까짓 자존심보다도, 그가 언제나 꿈꿔온 구두 장인으로서의 장밋빛 미래보다도 당장 오늘 밤 마음 편히 잠들 수 있는 그만의 공간이 사라질 거라는 사실이 더욱 두려웠다.

"제발 한 번만···!"

"나도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말이다."

요한이 뒷덜미를 긁적이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의 무쇠 같은 양팔이 차마 바짓가랑이에 매달리는 꼬마 하나 떼어내지 못하고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뭘 어쩌겠냐. 사장님이 그러시라는데. 사장님이 이제 진짜 진짜 돈이 없어서 인건비라도 아끼자고 하시는 데 따라야지."

그제야 로랑의 머릿속에서 요즈음 장사가 어렵다며 한숨을 푹푹 내쉬던 사장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구두가 팔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들이 만든 구두가 파리에서 제일간다는 소리를 들을만한 명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고정적인 거래처를 여럿 거느린 중견급 사업장이었고 정 구두가 팔리지 않는다면 하다못해 기존에 산 걸 고치려고 찾아오는 손님들이라도 꾸준히 있었다.

그럼 그 구두를 수선해주고 수고비를 받아내는 게 로랑이 평소 하던 일이었고.

다만-물가가 단기간에 너무 많이 올라버렸다.

평소처럼 장사하고, 평소처럼 수선해서는 도저히 현상 유지도 안 될 정도로.

처음에는 화도 나고 두렵기도 했던 게 나중에 가서는 도대체 어디까지 오르려고 이러나, 하고 반쯤 체념하게 될 지경으로 오르고 또 올랐다.

수습도제 로랑의 지갑 사정으로는 단지 하루하루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 버겁게 되었을 무렵.

마침내 그들도 가격을 올렸다.

그 올라간 가격 때문에 단골들과 갈등이 빚어지고, 벌써 수차례 감히 사람이 입에 담아서는 안 될 험한 말들을 듣거나 반대로 입에 담거나 하면서 이 사업장에 뼈를 묻을 각오로 충성을 다 바친 결과.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이었다.

로랑은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으흑!"

서러움에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양볼을 타고 흐르는 게 물이 아니라 피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억울했고, 그저 절망스러웠다.

도대체 누굴 원망해야 할 줄도 알지 못한 채 로랑은 제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우리 사업장이 뭐 옛날처럼 길드식으로 종신 고용해주는 것도 아니고. 사장님이 내보내라고 하면 내보내야지."

툭.

요한이 힘없이 그런 로랑을 밀었다.

이미 제 한 몸조차 가눌 수 없었던 로랑은 뒤로 널브러져 버렸다.

"어쩌겠냐, 진짜. 정말로 미안하게 됐다. 모쪼록 건강하고, 어쩌다 길 가다 만나게 되면 서로 안부 인사나 하자."

쿵.

그 짤막한 고별사를 끝으로 요한은 끝내 문을 닫고 작업장으로 돌아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너무나 간단하게 끊어져 버린 사형사제 간의 인연에 로랑은 한참을 멍하니 그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저 문에 다가가서 있는 힘껏 잡아당긴다면 언제나처럼 직인들이 정겹게 막내를 반겨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없으리라.

그들의 인연은 이미 끊어지고야 말았으니.

앞으로 두 번 다시 운명의 세 여신이 자아내는 이 실이 이어질 일은 없으리라.

'···이제 어떻게 하지?'

고아인 로랑에게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식구 중 가장 먼저 그가 잘려 나간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를 제외하면 다들 부양해야 할 식구가 있었으니까.

반대로 여기서 내쫓기면 달리 갈 곳이 없는 그를 마지막까지 싸고돌아야 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원망도 들었지만.

이제와서는 부질없는 일이었다.

결국 로랑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먼지를 털고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그래, 차라리 탐정 일이라도 해보자.'

요즈음 평소 어떤 일을 하다가 왔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곧장 취직시켜주는 직종은 탐정 정도뿐이니까.

물론 그만큼 탐관오리들의 보복을 받아 해를 당하거나 심하면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었으나, 당장 오늘 밤 잠들 곳이 없는 판에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새삼 저가 평소 한심하고 야만적이라며 괄시하던 상퀼로트가 되고야 말았다는 사실에 쓴웃음을 지으며 한걸음 뒤로 내디디려던 순간.

툭.

낯선 인기척과 어깨가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

반사적으로 사죄를 전하고 지나치려는데, 오히려 그 낯선 남자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잠깐, 지금 어디 가는 거요?"

"예?"

"여기 면접 보려고 온 사람 아니었소?"

···그게 지금 무슨 소리지.

당장 인건비가 모자라서 그래도 1년을 동고동락한 막내도 내쫓은 판에 면접은 무슨.

"뭔가 잘못 아신 것 같은데요. 제가 알기로 당분간 면접 같은 건 없을 겁니다. 하도 장사도 안되고 무엇보다 박봉이라서 저도 지금 그만두고 나오는 판인데."

차마 해고당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던 건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래요?"

한데, 그 사내의 뒤쪽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의아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어림잡아 다섯 명 이상.

조금 전 사업장에서 내쫓긴 로랑보다도 훨씬 꾀죄죄하고 쿰쿰한 냄새를 풍기는 부랑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상하다, 분명 공고가 나왔었는데?"

"저 젊은 친구가 뭔가 잘못 안거 아냐?"

"그렇겠지. 한 놈이 멍청한 거면 몰라도 우리가 전부 다 착각했다는 게 말이 되나."

"낄낄낄! 말이 안 될 이유가 뭐 있나? 다들 술 퍼마시다가 뇌가 망가졌나 보지 뭘!"

"아하, 그럴 수도 있겠구만!"

도대체 뭐가 그렇게도 우스운지.

사내들은 저들만 아는 천박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갑자기 껄껄대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웃지 못하는 건 로랑 뿐이었다.

덜컥.

때마침 문이 열렸다.

그가 무슨 수를 써서도 두 번 다시 지나칠 수 없었던 그 문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이 낯설고 천박한 사내들을 받아들였다.

이방인들이 떠난 거리에는 오직 길 잃은 도제만이 우둑하니 서 있었다.

***

사실 공장식 노동의 우월성이니 뭐니 떠들긴 했지만, 사실 나는 이번 음모가 꽃을 피우려면 적어도 1년은 기다려야 할 거라고 믿었다.

왜냐?

그야 당연히 기계화, 분업화, 규격화라는 게 얼마나 복잡하고 번거로운 일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아직 증기기관이 보편적으로 보급된 시대도 아니고 고작해야 인력과 수력으로 효율을 극대화한다고 해봐야 그게 장인들이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들어낸 것과 비교하여 그렇게까지 차이가 나지도 않는다.

물론 상대 비교로는 훨씬 낫겠지만 그래서 생전 처음 보는 공장식 생산체제나 운영체제를 공부하는 수고에 비할 바인가, 하면 사실 사람에 따라서 대답이 달라지는 게 정상이란 말이지.

투자 비용 대비 수익이 정말로 기대한 만큼 나오기는 할지.

그렇게 고생고생해가며 바꿔봐야 처참하게 실패하고 자칫 오랜 세월 거래하던 장인들과 얼굴 붉힐 일이나 만드는 건 아닌지.

애초에 파리조병창이라는 특별한 장소에서나 가능한 기적이나 예외가 아닐지 의심하고 망설이는 게 정상적인 사람의 사고방식 아닐까?

분명 그게 정상적이었을 텐데-.

"잠깐, 우리에겐 아시냐가 있잖아."

"흠, 그래서?"

"저 꼬장꼬장한 장인들한테 아시냐 같은 거 줬다간 뼈도 못 추리겠지만 일할 수 있게만 해주어도 감사할 거렁뱅이들이 상대라면 적당히 위조해서 월급으로 줘도 모르는 거? 아닐까!"

"이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 생각이란 말이니!"

···그래.

이 위대한 나라 프랑스엔 아시냐가 있었다.

어차피 아무나 위조해도 위조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고 심지어는 정부에서조차 얼마나 찍어냈는지 집계 자체를 포기해버렸다는 무적의 지폐.

아직 본격적인 자본주의 사회가 태동하기 전임에도 우리의 자낳괴들은 지들은 쳐다도 보기 싫어하는 이 아시냐라는 놈이 푼돈으로 사람을 착취하는데 대단히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야 말았다.

웬만큼 사회생활 하면서 눈칫밥을 배불리 먹고 필요하다면 사회적인 지위를 이용해 고용주에게 당당히 어깃장을 놓을 수 있는 장인들과는 달리 힘없는 노동자들은 설령 이 아시냐가 위조지폐라는 걸 알아도 항의할 수조차 없다는 것도 말이다.

그야 관공서에 들고 가봤자 이게 위조지폐인지 아니면 진짜로 모 부서에서 급전을 댕겨야 해서 너무 조잡하게 윤전기를 돌린 건지 구별이 안 되는데 일개 일용직 노동자가 뭘 어쩌겠는가.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아시냐를 사용하지 않는 거고, 실제로도 웬만큼 사는 집이나 부르주아지들은 거들떠도 안 보는 게 이 휴지 조각이었으나 당장 먹고살기 급한 사람들에겐 이야기가 달랐다.

저 꼬장꼬장한 장인들은 오직 구권 리브르를 지급해야지만 정상적으로 고용할 수 있었으나, 싸구려 공장 노동자들은 위조한 아시냐만 손에 쥐여줘도 알아서 감지덕지하며 받아 간다는 차별점이 발견된 것이다.

"월봉 50 리브르! 추후 교섭도 가능!"

"5, 50 리브르라고?!"

"에이, 사기겠지. 뭐 전설의 기사님과 함께 마법의 성에 갇힌 공주님이라도 구하러 가냐?"

"사기면 뭐 어때? 적어도 1달 동안은 저 50 리브르 생각만 해도 행복할 텐데!

"다 비켜! 십헐 나도 인생 역전 한번 해보자!!!"

결과 그날부로 파리의 취업시장에선 어딜 가나 50 리브르를 외치는 구인공고를 일상적으로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100 리브르처럼 말도 안 되는 고액을 부르면 아무도 속지 않을 테니 그나마 현실적으로 가능한 액수인 50 리브르 권을 마지노선으로 잡은 것이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고작 공장에서 좀 1달 빡세게 구른다고 50 리브르나 되는 거금을 주겠다는 걸 사람들이 믿을 리가 없었으나.

"잠깐, 토지개혁을 갈아엎는다고?"

"뭐, 졸속입안에 졸속행정이었으니까. 충분히 그럴만하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럼 아시냐는? 올해까지야 그렇다치고, 내년부터 그 토지채권은 어떻게 되는건데?"

"···휴지조각이 되겠지?"

때마침 의회가 기존 토지개혁안을 폐기하고 둔전으로 이를 대체할 것이라는 소식이 시장까지 전파.

안 그래도 아시냐에 대한 시장의 신뢰도가 바닥을 넘어서 마이너스인 상황에서 아예 가까운 시일 내에 폐기될 휴지 조각이라는 꼬리표까지 붙어버렸다.

결과 마지막까지 아시냐를 금고에 쟁여두던 사람들조차 단기간에 마구 시장에 이 고액권을 풀어버렸고, 토지개혁 전까진 어떻게든 이 휴지조각을 처분해야한다는 절박함에 물가가 폭등하기 시작했다.

"그래, 물가도 3배 4배씩 뛰는데 일급도 3배 4배씩 오를 수도 있는 거지!"

"50 리브르 가즈아! 어차피 쓰지도 못할 돈 하다못해 만져나 보고 죽자!"

"나, 나도 공장취직 할 거야!"

"따흐흑, 이 미쳐버린 시대에 이토록 양심적인 봉급이라니 당신은 그저 빛빛빛···."

그다음은 그냥 누가 봐도 광기 그 자체였다.

둔전법 발표로 아시냐의 가치를 보장해주던 최후의 신뢰가 무너지고 개나 소나 이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는 고액권을 위조하는 가운데 물가는 폭등하고 처음에는 누구나 사기일 거라고 믿었던 50 리브르짜리 공장노동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우후죽순 늘어났다.

설령 그게 사기라는 걸 뻔히 알더라도 당장 물가가 폭등하고 있으니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취직하는 수밖에 없었고.

"잠깐, 이건 아시냐잖아!"

"내 50 리브르는? 내 반짝반짝 빛나는 리브르 50개는?!"

"어허, 이 사람들이 지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자, 여기 50 리브르 권이라고 분명히 인쇄되어있잖은가!"

"야야, 너 잠깐 지갑 까봐! 너 진짜 지갑에 아시냐 한 장이라도 없으면 내 손에 뒈진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두말할 것도 없는 파멸 그 자체.

사실상 1달 동안 공장주를 위해 무료로 일해준 건 물론이오, 책임지고 먹여 살려야 할 처자식들이 딸린 가장들은 이 휴지 조각 한 장으로 그와 그의 가족들이 한 달 동안 버틸 식자재와 월세를 마련해야 한다는 난제에 맞닥뜨렸다.

일가족과 함께 거리로 내몰리느냐, 뭔가 무법적인 조치를 동원해서라도 일가족을 부양할 것이냐 중 선택을 강요받게 된 것이다.

"아니, 당신 미쳤어? 이건 아시냐잖아!"

"염병! 그래서 뭐? 이것도 돈이잖아! 돈을 받았으면 물건을 줘야지!"

"진짜 개소리하고 자빠졌네! 난 거래 안해! 이거 받고는 못 팔아! 당장 저리 꺼지지 못해!?"

"나, 나도 처자식이 있는 사람이야! 같은 처지끼리 좀 돕고 살 수도 있는 거잖아! 내가 돈을 안 내겠다는 것도 아닌데 좀 팔아주면 어디가 덧나냐?!"

이 선택의 갈림길에서 절 고용한 공장주를 들이박으러 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를 넘어서 사실상 전무했다.

그 멍청한 놈이 직원들 다 모여있는 곳에서 아시냐를 나눠주고 그 자리에서 폭동이 일어나 원시적인 노조 활동이 벌어지는 게 아닌 이상에야 나약하고 가난한 일개 공장 노동자가 고용주와 싸워서 리브르를 돌려받는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결국 이들이 표적으로 삼게 되는 건 같은 처지의 소상공인이었고, 아무튼 50 리브르를 지불했으니 강도가 아닌 정당한 구매라는 핑계로 상점가를 습격하는 사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완전히 땅 짚고 헤엄치기잖아?"

"인건비도 안 내고, 뒷감당도 딴 놈이 하고, 욕은 정부에서 처먹고 돈만 벌면 되는데 이걸 안 한다고?"

"나는 오늘부로 자유시장경제를 향한 지지를 철회한다. 지지를 철회하고 그와 한 몸이 된다!"

"이런 개꿀 노다지가 있었는데 그동안 장인들이랑 멱살이나 끄들며 놀았다니···. 흑흑! 인생의 절반 손해 봤어!"

그럼 이제 산업 부르주아지들로서는 공장 노동자를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완전한 사기 계약으로 노동자를 1달간 공짜로 부려 먹고 심지어 그 뒷감당은 그들이 아닌 소상공인들이 한다는 사실을 발견해버렸으니 이들로선 뜻하지 않게 엘도라도를 발견한 격이었다.

물론 끝까지 이를 거부하고 직원들과의 의리를 지키겠다는 사업주들도 없지는 않았으나 이들은 이 말도 안 되는 하이퍼 인플레이션 와중에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더미를 감당하지 못하고서 가장 먼저 절멸.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오랜 철칙 그대로 가장 추잡하고 더러운 이들만 더욱 번영하여 이 화폐가치 폭락 와중 그나마 영향이 덜한 현물자산들을 착복하며 뭇 부르주아지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끔찍하군.]

누가 아니래?

사실 내 토지개혁안이 토지채권 아시냐의 숨통을 끊으면서 예상보다 훨씬 일이 빠르게, 끔찍한 규모로 커지긴 했지만, 어차피 이대로 아시냐를 방치해뒀어도 머지않아 이렇게 되었을거다.

이 저주받은 화폐의 가장 큰 문제는 위조하기 너무 쉽고, 아무 때나 찍어낼 수 있으며, 말도 안 되는 고액권인데다가 지폐 그 자체로선 가치가 보증되지 않는다는 점이지 자낳괴들의 탐욕은 이 모순을 최악의 방식으로 이용했을 뿐이니까.

결국 정부의 개입을 완전히 배제한 순수한 자유시장경제의 자체모순이 저들을 죽인 거다.

[반대로 완전한 통제경제도 모순덩어리긴 매한가지잖은가.]

오우,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인 통제경제를 운영하신 분께서 지금 그게 할소리신가?

[내가?!]

여하튼 상황이 순조롭게 파멸로 치닫고, 갈수록 노랗게 질려가는 원내 의원들의 면면을 구경하면서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려 할 때쯤.

똑똑.

"반갑습니다, 동지. 생쥐스트라고 혹시 기억해주실는지요?"

예상치 못했던 복덩어리가 우리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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