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154)

생쥐스트

"지금 당장 저 경제사범들을 모조리 단두대에서 공개처형해야만 합니다."

어···.

[···이 늦은 시간에 당사까지 찾아와서 할 말은 아닌 거 같군.]

누가 아니래.

사상사만 공부한 나조차 이 친구의 악명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대뜸 공개처형 이야기부터 할 줄은 몰랐다.

통칭, 죽음의 대천사.

「모든 혁명에는 혁명을 수호할 철인 독재자와 혁명을 수호할 도덕적인 검열이 필요하다」, 「반동분자뿐만 아니라 회색분자들도 사형에 처해야 한다」 등등 하나같이 주옥같은 명언을 남긴 젊은 천재다.

오죽하면 혁명 이후「생쥐스트식 발언」이라는 고유명사가 만들어졌을 지경이니 말 다 했지.

최루탄 교수님도 잠깐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설명할 때 사실 로베스피에르는 얼굴마담이고 저 생쥐스트라는 친구가 진짜 단두대로 정치한 흑막이라고 농담삼아 이야기했던 기억이 똑똑히 남아있다.

과격함으로는 「30만 명을 단두대로 보내서 프랑스를 정화하자」라고 했던 마라도 만만치 않다고는 하는데, 마라의 광기가 보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생쥐스트는 독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게 차별점.

사실상 후대의 강철남이나 볼셰비키 체제의 토대를 제시한 양반이라고 할까.

[그저 싹싹하고 머리 좋은 친구인 줄만 알았더니 술라 꿈나무였나···.]

그 술라 꿈나무가 당신 절친 겸 오른팔이 될 예정이었다는걸 잊지 말자고, 집주인 양반.

저 친구가 술라 꿈나무면 당신이 바로 그 술라야.

"그래, 분명 생쥐스트라고 했었지."

"예. 기억해주고 계셨는군요."

"그럼 경제사범들을 공개 처형한다면 이번 사태도 자연스레 해결된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생쥐스트가 단언했다.

"저들에게 노역형이나 벌금형을 구형한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래서 그 형벌이 저 죄인들에게 고통이나 공포가 될 수 있을까요? 이미 막대한 부와 인맥을 구축한 저들에게 노역형을 구형해봐야 손쉽게 도중에 풀려나거나 농땡이를 피울 수 있을 겁니다. 하물며 벌금형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지요."

젊은 혈기라는 이름의 자신감과 독선으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

"결국 단두대로 모조리 목을 잘라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이야말로 누구에게나 공정하고, 동등한 공포이자 고통이니까요. 저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우리 사회의 도덕을 무너트리고 혁명을 더럽히는 자유의 적들을 죽여 없애지 않는다면 장차 누가 혁명의 순수성을 믿으려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먼저 본보기를 만들어서 자유의 적들과 그 공범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예, 그렇습니다."

햐, 이 맑은 눈의 광인 좀 봐라.

진짜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모습이다.

아니 나도 논리 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는데, 중간중간에 너무 빠진 게 많은 거 아닌가?

대체 왜 문제를 일으킨 놈들만 사라지면 자연스레 문제도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데.

왜 이런 사태가 일어났는지에 대한 구조적인 고찰과 해결방안이 먼저 나와야 하는 거 아냐?

[그야 루소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인간의 본성은 이타적이고 인간의 이성은 언제나 궁극적으로는 합리적인 선택을 도출하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봉건적인 압제자와 탐욕 같은 충동에 몸을 맡긴 분탕종자들만 사라지면 이타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사회는 자연스레 개선될 거다?

[뭐, 썩 만족스러운 해석은 아니지만. 대충 의미는 통한다고 할 수 있겠군.]

하이고, 염병하시고 있네 진짜.

슬기슬기 사람종이 그렇게 선량하고 이성적이었으면 진작에 탈지구했지 진짜.

포스트모더니즘 맛 좀 볼텨?

"나쁘지 않지만, 생쥐스트 동무. 자네의 주장엔 한 가지 중요한 점이 빠졌군."

뭐, 하지만 덕택에 대충 왜 이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는 알겠다.

아직 인간의 본성이나 인간사회에 대한 고찰이 루소 단계에서 끝난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호모 사피엔스란 어디까지나 선량하고 합리적인 존재다.

이 선량하고 합리적인 인간을 망치고 있는 건 그릇된 봉건사회와 이기적인 폭군들.

고로 혁명이란 이를 바로잡고 인간 본연의 선량하고 합리적인 모습을 되찾는 과정이다.

자유시장경제를 왜들 이리 철통같이 믿느냐고?

그야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타적이니 인간의 본성을 왜곡시키는 규제와 압제를 모조리 철폐하면 당연히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테니까.

왜 생쥐스트가 무작정 경제사범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자고 하냐고?

지금 시장을 어지럽히고 있는 건 탐욕이라는 충동에 몸을 맡긴 소수의 분탕 종자들이지 이타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의 본성이 이 난장판을 원했을 리가 없으니까.

[씁, 이게 아주 잘못된 설명은 아니긴 한데···.]

그쪽도 내 지론을 들으면 할 말 많아질 테니 그냥 넘어가자고.

인간의 본성은 선량하지도, 이타적이지도 않으며 이성이란 인간이 창조한 허구일 뿐이다.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문명화되었다고 착각하는 한낱 짐승일 뿐이지.

그러니까 규제와 토의가 필요한 것.

당신도 여기에 동의해줄 생각 없잖아.

"로베스피에르 동지께서 제가 놓친 게 있다고 말씀하시니 기꺼이 경청하겠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래서 우리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에게 어떻게 빵을 나눠줄 것이냐. 이 점이 빠졌잖은가. 저들의 목을 자른다고 없던 빵이 하늘에서 떨어지던가? 이 사회의 구조가 자유의 적들을 옹호하고 있다면 먼저 그 구조부터 뜯어고칠 방안을 제시해야지."

"아···."

그제야 생쥐스트의 동공에서 자신감이 아주 조금이나마 사그라들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니, 괜찮네. 아직 젊은 친구니 그럴 수도 있지."

어차피 내가 저들의 인간관을 무너트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는다.

당장 내 지식을 어느 정도 공유하게 된 집주인 놈도 무슨 소린지는 알겠지만,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는 식인데 애초에 내 인간관을 들으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을 놈들에게 백날 설명해봐야 뭐 하겠어?

그럴 바에야 차라리.

"지금 우리가 단두대로 잘라내야 하는 건 한낱 경제사범들이 아니라 이 체제일세."

저쪽의 인간관을 긍정해주는 시늉을 하면서 내 생각대로 이끌어갈 궁리를 해봐야지.

저 친구도 나름 불꽃처럼 살다 간 젊은 천재니까 이렇게만 말해도 대충 무슨 소리인지 알 거다.

"왜 우리의 적들을 이롭게 해주려고 하는가? 저 수치스러운 작자들이 단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적은 나약해지며 우리는 더욱 강하게 원하는 바를 밀어붙일 수 있네. 저들에게 온당한 건 짧고 강렬한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명예의 죽음일세."

"그건···저들이 범한 죄악에 비하여 너무 온당한 처벌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저들을 용서하자고 한 적 없네. 우리가 이용하자고 한 거지. 혁명의 가장 큰 힘은 분노로부터 나오는 법일세. 하지만 사람들이 이미 죽은 사람에게 분노하던가? 죽으면 머지않아 잊히고, 잊히면 분노도 사그라지며,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는 열의도 무뎌지게 되어있네."

그러니까.

"섵불리 민중의 분노가 새어나가도록 두지 말게."

"···물을 끓이고 계신 거였군요."

꿀꺽.

생쥐스트의 동공이 요동쳤다.

원 역사에서 공포정치와 독재를 옹호한 친구니까 오히려 이게 무슨 소리인지 잘 알 거다.

사형이란 그 무엇보다 끔찍한 형벌이기에 오히려 일단 집행해버리고 나면 사람들도 이걸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인지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이번 사태처럼 불특정 다수가 피해를 본 상황에서 저놈들이 원흉이다! 라고 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까 다들 저놈들만 죽여버리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믿고 막상 그다음 진짜 중요한 개혁이나 변혁에 힘을 실어주는 건 귀찮아하게 되는 거지.

하지만 그런다고 해결될리가 없다.

이 시대 사람들이라도 슬슬 이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시냐를 폐지해야 한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고, 하나둘 정부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무언가 대책을 내놓을 것을 요구해올 거다.

우리가 노려야 하는 건 바로 그 순간이다.

정말로 이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공화적 이상에 반하는 강경한 조치라도 묵인해줄 그 순간.

"때를 기다리게."

벌써 경제 사범들 목을 단두대로 치기 시작했다간 막상 그때 쓸 힘이 분산된다.

우리의 목표는 먼저 이 분노가 최대치로 차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거지, 괜히 공개처형이라는 쇼로 대중적인 스트레스를 중간중간 해소 시켜줬다간 불완전 연소가 되고 말 거다.

오히려 지금은 저쪽에서 공개처형하자고 해도 죄수 인권 핑계를 대면서 결사반대해야지.

"저 반동들이 뭐라고 투정을 부리건 분노한 민중이 우리에게 정당한 힘을 위임할 때까지 기다리란 말이야. 내 말 알겠나?"

"이 생쥐스트, 위원장 동지의 가르침에 비로소 개안하였나이다!"

털썩.

그제야 생쥐스트는 제자리에 무릎 꿇으며 내게 경의를 표했다.

맑은 눈의 광기가 더욱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게 어지간히도 내 계획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나야 좋긴 한데.

[지금 이 친구, 우리가 이참에 종신독재관에 취임할 속셈이라고 믿고 있는 거 같군.]

···아무래도 그렇지?

지금 이 친구의 반응은 모로 봐도 숭배지 경외나 지지와는 거리가 멀다.

원 역사에서도 「모든 혁명에는 혁명을 수호할 독재자가 필요하다」라고 했던 친구이니 바로 그 독재자가 되어줄 사람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난 그럴 생각 없지만 말이야.

아니 진짜로 나 시켜준다고 해도 싫어.

절대로 안 해.

"자, 어서 계도하여주소서! 이 프랑스를 위하여! 인민을 위하여! 혁명을 위하여! 이 애송이 놈이 가야 할 길을 보여주소서!"

"···알겠으니까 좀 진정하게."

틀렸어.

이 자식, 이미 내 변론을 들을 생각 자체가 없다.

아니 그보다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 모양이야?

[지금껏 우리가 해온 일들을 생각해보게.]

우리가 해 온 거?

[보자. 샹 드 마르스에서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라파예트를 제압했고, 뒤이어 루이 오귀스트를 퇴위시켰고, 오를레앙을 제압했으며, 그걸로도 모자라 수상에 취임했군. 오히려 사적인 만남이 적었으니 더욱 우상화하기도 쉬웠지 않았겠나?]

···젠장, 듣고 보니 그렇네.

차라리 원내 의원들이나 나폴레옹이야 곁에서 봐온 게 있으니까 시대가 낳은 풍운아 정도로 봐주겠지만 이제 막 출마연령 채워서 원내 진출하려는 급진 공화파 관점에선 그냥 백마 탄 초인이 따로 없겠는데.

"자, 어서!!!"

"내 제발 진정하라는 소리 안 들리나!!!"

그다음부터는 그야말로 창과 방패의 대결이었다.

어떻게든 숭배하려는 생쥐스트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변론하는 나.

우리 두 사람의 대결은 「역시 독재를 혐오하는 것이야말로 공화국의 독재관이 될 으뜸 자질이다」라는 생쥐스트의 정신 승리로 끝났고, 그렇게 생쥐스트가 두 번 다시 독재 타령은 입에 담지도 않으면서 나의 승리로 끝났다.

[···그, 킨키나투스의 고사까지 나왔으면 우리가 진 거 같은데.]

입 닥쳐, 막시밀리앙.

확 숭배해버린다?

***

재무위원회.

"···이대로는 더 버티기 어렵습니다."

한 재무 위원의 무거운 발언에 사방에서 짠 듯이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거야 당연한 소리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무언가 대책이 필요하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다만 그 조치에 나선다는 것 자체가 시장 질서를 왜곡시키지는 않을까, 또다시 로베스피에르에게 힘을 실어주진 않을까 두려워했을 뿐.

그러나 이 탄식을 더 말해보라는 의미로 여겼는지 재무 위원이 발언을 이어 나갔다.

"우선 토지개혁에 앞서서 이 아시냐를 폐지하거나 최소한의 가치를 보장할 별도의 무언가를 물색했어야만 했습니다.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가치를 보장할 수 없는 화폐가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입니까? 어서-."

"하다못해 구권으로 돌아가자, 뭐 그런 소리인가?"

시에예스 주교가 냉소했다.

"자네도 그게 왜 안되는지 알고 있을 텐데."

"···그렇다고 해도 저 아시냐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이보게, 나라고 그 생각을 해보지 않았겠나? 그렇지만 지금 이 나라에 금이 없어. 은이 없다고. 국고에 귀금속이 없는데 뭔 수로 리브르로 돌아가자는 말인가?"

재무 위원은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결국 시에예스의 말대로였으니까.

중앙은행?

일개 정부 부처에서 모든 걸 통제하자고?

어디 뜻대로 해보라고 해라.

은 없는 은본위제, 금 없는 금본위제라니 분명 역사에 남을만한 멍청한 정책으로 기록될 테니까.

애당초 구권 리브르로도 통화수요를 충족시킬 만큼 금과 은이 충분했으면 왜 그들이 토지채권 아시냐를 법정화폐로 만들었겠는가?

"그래, 밀이나 감자로 화폐를 만든다면 어떻게 가능할 수도 있겠군."

시에예스가 조소했다.

"그러니 괜한 허튼 소리하지 말고 그 죽일 놈의 경제사범들이나 열심히 단속하라고 하게. 지금으로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 망할 지폐 위조범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는 것뿐이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정말로 의례적인, 상관에 대한 최소한의 경의로 할법한 대답조차 없었다.

그야 그동안은 최선을 다해서 단속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감찰위원회에 협조를 구하기도 하고, 또 그들 자신도 최선을 다 해봤고, 민간 탐정을 고용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하다못해 뭐 특수한 재질의 종이나 잉크처럼 무언가 위조지폐와 구분되는 요소가 있었으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다.

얼마나 찍어냈는지 기록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이 순간 시장에 얼마나 되는 아시냐가 유통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건 침몰선이다.

이미 용골이 무너지고 곳곳에 구멍이 뚫린 폐선.

정말로 제정신이라면, 이 위기 상황을 직시하고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수명을 연장해볼 게 아니라 당장 이 배를 버리고 탈출해야만 했다.

"···차라리 채무불이행을 선언하시죠."

마침내 한 재무 위원이 총대를 메고 나섰다.

"그다음 신권을 발행하건, 아니면 구권으로 돌아가건 합시다."

"허, 자네도 금 없는 금본위제, 은 없는 은본위제를 하자는 건가?"

"토지 없는 토지 지폐보단 낫잖습니까."

침묵.

마침내 시에예스마저 침묵하자 사내가 더욱 언성을 드높였다.

"이미 이자 지급도 포기한 마당에 채무불이행이 대수입니까? 괜히 이 저주받은 놈에게 더 미련 가져봐야 어차피 다 같이 죽을 건 똑같습니다. 그럴 바에야···!"

"안된다는 거 뻔히 알면서 자네 진짜 이럴 텐가!!!"

끝내는 시에예스도 절규했다.

"그래, 이놈도 원래는 토지채권이었지! 그래서 그 토지채권을 가장 먼저 사 간 게 누구였는가? 저 지방의 농노들? 사제들? 아니! 이 파리의 금융가들이었네. 그리고 부르주아지들이고 지주였지! 한데 채무불이행? 정말로 이 나라째로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서 이러나!"

"그건-."

재무 위원으로서는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그놈의 이기주의 때문에?

채무불이행을 지지했다는 욕은 욕대로 먹고 제 계급을 배신했다는 손가락질까지 당하며 정치생명에 마침표를 찍을까 봐?

물론 그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저 폭도들이 두려웠다.

언제 어느 시대에나 그들 부르주아지의 가장 큰 힘은 금권에서부터 나왔으니까.

제한선거제라는 든든한 안전장치마저 무너지고 이웃나라들과의 전쟁 위기가 건재한 지금 채무불이행 선언은 프랑스라는 국가의 종말과 더불어 부르주아지 혁명의 종말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미치겠군."

털썩.

하지만 시에예스 그 자신도 모르진 않았다.

아시냐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

이제 와서 경제사범들을 처벌해봐야 유예시간만 벌 수 있을 뿐.

첫째로 화폐개혁이 절실했고, 둘째로 나날이 무너져가는 시장 질서를 바로잡아야만 했다.

하지만 화폐의 가치를 보장할 귀금속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화폐개혁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저 토지채권을 폐기하려면 최소한 원금은 상환해야 할 것이고, 그 원금을 상환하려면 위조품과 진품을 구분할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정부가 시장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것도 그 자체가 자유시장경제를 파괴하는 압제니 논외고.

분명 무언가를 시도해야 할 국면이건만 보다 온건한 대책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보다 과감한 대책은 그들의 신념이 불가능하게 한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죽여라!!!""""

누구를.

그런 건 이제 와선 궁금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죽일 놈이야 각자 어련히 찾았겠지.

창 너머에서 또다시 폭도들의 함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 순간, 재무위원회는 누구나 신이 위임했다는 초법적인 절대권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었다는 절대군주의 신화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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