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154)

자유권

콩도르세 저.

꾸깃.

"멍청한 놈들."

새벽같이 일어나 조간신문을 읽다 말고 콩도르세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공화주의자라는 놈들이 궁지에 몰리니까 기껏 생각해냈다는 게 쿠데타라니."

그것도 금주 들어서 벌써 3번째 쿠데타 모의였다.

물론 갈수록 급진당의 압승이 확실시되어가면서 야권 내에서 공포와 불안이 번지고 있던 것도 사실이고, 이 친구도 아마 술라가 되기를 꿈꾸었던거겠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콩도르세는 이 베르나도트라는 친구의 쿠데타 모의를 긍정해줄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정 쿠데타를 도모할 거면 오를레앙 공작이 쿠데타에 나설 때 동참했어야지, 이제 와서 괜히 나서봐야 얼굴에 먹칠밖에 더하겠는가.

기사의 명예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으며, 도덕에 구애받지 않는 마키아벨리적인 정략이라고 하기에도 형편없다.

한 페이지를 통째로 쿠데타를 모의한 의로운(?) 장교들을 옹호하고 그들의 명예를 더럽힌 폭도의 야만을 폭로하는데 할애한 기자에겐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콩도르세의 눈에 비친 저들은 그저 길동무를 찾아 필사적으로 팔을 휘젓는 익사자일 뿐이었다.

'하다못해 프로방스 백작이라도 파리로 돌아와 줬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으련만···.'

유감스럽게도 그 자칭 섭정께선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처음에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상경 명령이 떨어지니 좋아라 하는 기색이 프로방스 백작의 서신에서 막 눈에 띌 지경이었으나 그것도 잠시.

잔꾀에만 밝다는 절친한 지인들의 평가대로 뭔가 지금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서신 너머로 눈치채자마자 곧장 경제난에 신음하는 농민들을 근심하는 복된 섭정으로 변신해버렸다.

파리의 시민들에게는 애국심과 사명의식으로 투철한 의원들이 있지만 프랑스의 농민들에게는 아무도 없다나, 뭐라나.

그들이 온갖 핑계를 대고 당근을 제시해가면서 이제 그만 상경하라고 애걸해도 그때마다 농민들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쓸데없이 화려한 필력으로 아주 구구절절하고 생생하게 묘사하는데 콩도르세로선 아주 그냥 진저리가 날 지경이었다.

설령 파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건 의회가 책임질 일이요, 프로방스 백작은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다음 최후의 구세주로 등장하건 아예 프랑스를 떠나건 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힌 것이다.

'쥐새끼 같은 놈.'

하지만 어쩌겠는가.

따지고 보면 애초에 저 약삭빠른 찬탈자가 격동의 파리를 등질 합법적인 명분을 제공해준 그들의 잘못인 것을.

이미 동료들은 참패만은 피해보자며 마지막까지 선거참여를 독려한 콩도르세의 리더십을 등지고 봉기나 암살, 최악의 경우 망명할 궁리만 하고 있었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외골수만을 고집하는 패장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거봐라, 너희도 실패하지 않았느냐며 자위하는 것뿐.

답답한 마음에 콩도르세는 간편한 복장으로 정문을 나섰다.

"잠시 나갔다 오리다."

"어머, 주일미사라도 다녀오시려고요?"

"설마."

반종교론자인 그가 뭣 하러 교회에 가겠는가.

콩도르세에게 주일이란 그저 일주일에 단 하루 있는 공휴일에 불과했다.

하필이면 선거일을 그 단 하루 있는 공휴일로 정한 건···솔직히 반종교론자인 그가 봐도 선 넘었다고 생각하지만.

"잠깐 근처에서 산책이나 다녀오려고 그러니 부인은 신경 쓰지 말고 편히 계시오."

"네에, 평온한 주일 되세요∼."

덜컥.

평온이라.

"죽은 다음에나 얻을 수 있겠지."

차마 부인이 듣는 곳에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나마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내전이나 다름없던 파리의 혼란상도 잠시 가라앉았으나 이는 필히 거짓된 평온이요, 폭풍전야일 뿐.

신성한 주일에도 활발하게 발간되고 있는 선전지들이 작금의 파리가 변함없이 내전 와중임을 선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야, 오늘은 선거일이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어디로 가야 할까.'

머리를 잠시나마 식힐 작정으로 거리로 나서긴 했으나, 막상 문을 나서니 어디에서 저녁까지 시간을 보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남들이야 주일이니 다들 교회나 투표소로 갔겠지만, 동지들에게마저 버림 받은 콩도르세가 이제와서 참회를 구해봐야 비웃음만 사지 않겠는가?

그들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이 깃든 테니스 코트장을 가볼까, 아니면 투표소 앞에서 홀로 길거리 유세라도 한 번 더 해볼까.

모처럼 그를 안내해줄 수행원도 없이 파리 구석구석을 헤매며 혼자 상념에 잠겨있던 찰나.

"···응?"

저 골목 사이로 시꺼먼 매연이 피어오르는 게 콩도르세의 시야에 잡혔다.

더하여 들려오는 사람들의 비명소리.

그리고 웃음소리.

"또 폭동인가···!"

전자라면 몰라도 매연이 피어오르는데 후자가 뒤섞인 시점에서 결론은 불 보듯 뻔했다.

폭동이었다.

순간 근래 조폐소를 습격하며 난동을 피우던 마라와 그 지지자들의 난동이 떠올랐으나, 다행히도 총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마라는 불과 이틀 전 검거되어 유치장에 갇혔으니 모방범이라면 몰라도 본인은 아닐 터.

"지금 도대체 뭣들하고 있는 것이오!"

그럼 대강의 상황 파악을 마친 콩도르세가 해야 할 일이야 정해져 있었다.

어떻게든 이 폭동이 더욱 확대되기 전에, 그리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약탈자들을 치안대가 놓치지 않도록 시간을 끌어야만 했다.

조만간 불을 끄기 위해 출동한 자경단이건, 아니면 신고를 듣고 출동한 치안대건 현장에 도착할 테니까.

딱 그때까지만 시간을 끌면 족했다.

"이 신성한 주일에 이게 무슨-!"

"교회도 다니지 않으시는 분께서 무슨 헛소리입니까?"

귀에 익은 목소리.

그리고 낯익은 낯짝.

현장에 도착한 즉시 직전까지의 사명감이나 급박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콩도르세에게는 이 낯익은 주동자를 향한 적의와 경멸이 마구 용솟음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자크 르네 에베르."

"그렇게 어렵게 부르시지 않아도 됩니다. 이 신성한 주일에 교회도 안 간 동지들끼리 뭘 남사스럽게-."

"자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당연하지만, 몰라서 묻는 말일 리가 없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지폐 조각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고작 그 사실에 왜 저 폭도들이 환호하고 있는가, 이게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진 행위인가.

생각해보면 결론은 너무나 명백했다.

단지 이게 에베르 개인의 폭주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사주인가를 짐작하기 위한 시간과 정보를 벌려고 한 것뿐.

"뭐 하는 짓이냐, 라."

그러자 에베르가 양팔을 벌리며 조소했다.

"보면 아시잖습니까. 자유시장경제가 인민에게 부여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중이지요."

"자네, 실성했나?"

"개나 소나 화폐를 찍어내는 건 되는데 왜 개나 소나 화폐를 불태우는 건 안 됩니까?"

콩도르세는 답하지 않았다.

아니, 답할 수 없었다.

"예? 어디 이 가난뱅이 상퀼로트도 이해할 수 있게 분명히 설명해주십시오. 누가 따로 감시하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손이 화폐 유통량을 조절해줄 거라고 하셨잖습니까. 모든 걸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민간시장에 맡기면 해결될 거라고요."

에베르가 이죽거리며 오른손을 내밀어 보였다.

"자, 여기 그 보이지 않는 손보다 강력한 보이는 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오른손으로 지갑에서 한 무더기의 아시냐를 꺼내더니 불덩이를 향해 집어 던졌다.

"우리의 보이는 손이 파리에 흘러넘치던 화폐 유통량을 조절해줬네요?"

짝짝짝.

에베르가 감격스럽다는 듯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런데 왜 이리 화를 내고 계시는 겁니까? 설마하니 교회도 안 다니시는 분이 신성한 주일에 일하는 거로 화를 내고 계시는 것도 아닐 테고. 아, 혹시 교회 재산을 훔쳐서 찍어낸 채권 태운 것 때문에 화가 나신 겁니까? 그렇다면 삼가 정중히 사죄드리지요."

"이놈···!"

결국 분을 참다못한 콩도르세가 한 발짝 앞으로 내디디는 찰나.

"어디 저희도 그 좋은 자유 좀 누려봅시다."

에베르가 시뻘건 안광을 빛내며 쏘아붙였다.

"예? 왜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먹어야 하는 빵으로 장난질 칠 자유는 있는데 사람 목숨으로 장난질 치는 놈들 목숨으로 장난칠 자유는 없습니까? 왜 휴지 조각으로 사람을 한 달 동안 부려 먹을 자유는 있는데 그 휴지 조각으로 물건을 마음껏 살 자유는 없습니까?

상대의 자유를 침해할 자유는 없는 거잖습니까. 그게 원칙이었고요. 그런데 왜 그쪽에서 먼저 우리의 자유를 침해했는데 그쪽의 자유는 시장 논리고 우리의 자유는 시장 논리에 반하는 반체제적 행위입니까?"

"자네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가···?!"

"그걸 알지 않아도 되는 자유도 추가하겠습니다."

푸하핫!!!

사방에서 콩도르세를 향해 폭도들의 조소가 터져 나왔다.

콩도르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에베르는 감질이 난다는 듯이 양팔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혹시 우리 모두 모르는 사이에 자유의 사전적인 정의가 달라지기라도 한 겁니까? 도대체 언제부터 자유라는 게 남에게 똥 한 무더기를 퍼먹이고도 저 혼자 무사할 권리를 의미하게 되었습니까? 남에게 똥을 퍼먹였으면 저도 똥 무더기 퍼먹을 각오를 다진다. 그게 공명정대한 기사도 정신 아니었습니까!"

"""옳소!!!"""

"저들이 아직도 남을 엿 먹이고도 간섭받지 않을 자유를 이리 당당히 요구하니, 전 저들에게 간섭할 자유를 요구하겠습니다! 저의 간섭할 자유가 옹호받을 수 없다면, 보복할 자유를 요구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보복할 자유마저 인정받을 수 없다면!"

쿵!

에베르가 있는 힘껏 발을 굴렀다.

"혁명할 자유를 요구하겠습니다! 아니, 요구하지도 않겠습니다. 우리 손으로 쟁취합시다! 그까짓 법이 대수입니까? 지난날 바스티유는 합법이었습니까? 악법도 법이라고요? 그럼 당신도 소크라테스처럼 당당하게 혼자 고독히 감방에서 독약 먹고 뒈지기나 하십시오!"

"그건 독재자 카이사르의 논리요!!!"

"제발 우리 같은 멀쩡하고 배고픈 사람들까지 제멋대로 당신네 미치광이들 고집에 휘말리게 만들지 좀 말라고!!!"

척.

에베르와 콩도르세가 동시에 서로에게 삿대질을 날렸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래! 우리도 제발 좀 먹고살자!"

"기껏 계획까지 다 짜놓고 선거까지 1달을 꼬박 기다리게 만들어?!"

"야 이 개놈아, 1달이 우습지! 어엉? 그래, 등 따습고 배부른 너희에겐 우스웠겠지!"

"암만 고집을 부려도 하루 이틀이지, 왜 우리까지 너희 고집에 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데!"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에베르의 좌우로 사열한 폭도들이 일제히 콩도르세의 죽음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이미 그가 뭐라고 말하건 폭도들의 연호에 묻힐 뿐이오, 새빨갛게 물든 동공에는 오직 광기와 분노만이 가득했다.

잿더미가 되어가는 아시냐가 그에게 남은 시간을 보여주는 듯했다.

둥!

우렁찬 북소리.

놀란 폭도들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나는 순간 사방에서 요란스러운 함성과 연주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당장 해산하라!"

"이 신성한 선거일에 대체 뭣들하고 있는 게야!"

"당황하지 마시오, 동지들! 우리가 저 병사들과 싸울 필요는 없소! 아시냐를 불태우시오! 온 프랑스의 저주를 불사르시오!!!"

천만다행히도 유혈 충돌은 끝내 빚어지지 않았다.

에베르의 지령대로 폭도들은 빈손으로 병사들에게 맞서는 대신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또 병사들은 아시냐를 불태우기 위하여 이동하는 폭도들을 뒤쫓아갔다.

하지만 아무도 불을 끄려고 하지는 않았다.

홀로 남은 콩도르세만이 애써 불이 민가까지 번지지 않도록 수습했을 뿐, 누구도 이 저주받은 휴지 조각을 돌아보지 않았다.

파리 전역에서 아시냐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는 이를 두고 「신성한 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의 토지가 마침내 귀천(歸天)하였다」고 평했다.

***

"""혁명 만세! 급진당 만세! 로베스피에르 위원장 만만세!!!"""

···음, 이건 이것대로 썩 기분 좋은 모닝콜은 아닌데.

[또 뭐가 문제인가?]

이건 어떻게 들어도 경외나 지지가 아니라 숭배잖아.

솔직히 기쁘다기보단 징그럽다.

막 자그마한 땅거미 무리가 우글우글 내 살갗을 타고 기어오르는 듯한 느낌.

[자네도 참···. 아니, 더 말하진 않겠네.]

이미 다 말씀하셨거든요?

여하튼 저 징그러운 만세삼창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언제나처럼 꽃단장하고 하숙방을 나섰다.

처음에는 가발부터 시작해서 도대체 뭘 어떻게 손보라는 건지 감도 안 잡혔는데, 매일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매일 똑같이 반복하니까 이젠 눈감고도 해치울 수 있게 되었다.

역시 인간이란 적응의 동물이라니까.

참 이게 21세기의 귀차니스트 박민혁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군.

덜컥.

"좋은 아침입니다, 엘레오노르."

"참, 단둘이 있을 때는 코르넬리(Corneli)라고 불러달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아, 그랬었죠. 그럼 다시 한번. 좋은 아침입니다, 코르넬리."

아침부터 아주 집주인 놈을 가지고 노는 게 우리 뒤플레 아가씨도 참 많이 성숙하셨군.

아, 덧붙여서 저 코르넬리라는 건 그라쿠스 형제를 낳고 기른 위대한 어머니 코르넬리아 그라쿠스에서 따온 애칭이다.

무려 그 시대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 재혼도 하지 않으면서 열둘이나 되는 아이를 혼자 길렀으니 지고지순한 현모양처는 맞긴 한데···.

집주인 놈 연애사에 괜히 관여할 생각은 없지만, 아무리 위대한 공화 정치가들의 어머니라도 요절한 남편을 둔 사람을 애인 애칭으로 쓰는 건 좀;;

[입 닥쳐, 민혁.]

어허, 이놈이 사랑에 눈이 멀어서는.

자고로 이름에는 마력이 깃든다고 하였거늘!

아무리 뒤플레 아가씨가 자칭했다지만 난 코르넬리는 반대일세!

"오늘도 저녁밥과 함께 기다리고 있을까요?"

"유감스럽지만, 오늘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운이 나쁘면 내일 아침에 돌아올 수도 있고요."

"어머나, 세상에."

어째서, 라는 질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야 뒤플레 아가씨도 눈이 있고 귀가 있는데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를 리도 없겠지.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하숙방이 아니라 전선이라는 것도 말이다.

"네. 그럼 다녀오세요."

"예. 다녀오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배시시 미소를 주고받았고. 마침내 파리로 향하는 마지막 문이 열렸다.

"위원장 동지!!!"

···귀 터지겠네.

뭐, 내가 일찌감치 문 앞에서 대기하라고 말해두긴 했지만 생쥐스트는 그야말로 광인이라는 표현조차 부족한 모습이었다.

평소의 생쥐스트가 맑은 눈의 광인이라면 지금은 그냥 광인.

동공에 자글자글 실핏줄이 돋고 안면근육이란 근육은 모조리 경직되었으며 홍조까지 띄워져 있다.

아주 조커가 따로 없군.

"그래, 몇이나 모였는가?"

"족히 3만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고요! 모두가 각하의 혁명을 목도하기 위하여 모여든 의로운 시민 동지들입니다!!!"

아니 그러게 귀 터지겠다니까.

여하튼, 한눈에 보아도 생쥐스트가 괜한 허풍을 떨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겠다.

그야말로 온 골목길이 시뻘건 적기로 가득 차 있었다.

누군가는 삼색기를 휘두르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부르봉 왕조의 새하얀 어기에 시뻘건 색으로 「자유! 평등! 연대!」라고 아로새겼다.

모로 봐도 사람 한둘쯤은 가뿐하게 장대에 매달고도 남을 흉흉한 분위기였다.

"좋아, 그럼 다들 모였으니 출발하세."

그걸 확인했으면 충분했다.

생쥐스트에게 건네받은 적기를 들고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혁명 만세! 급진당 만세! 로베스피에르 위원장 만만세!!!"""

또다시 듣기 싫은 함성소리.

"좋습니다! 기쁘게 따르고 말고요! 자아, 어서 우리를 이끌어주소서! 당신의 적기로서 민중을 자유로이 하소서!"

시작부터 피곤해져서 그냥 돌아갈까 생각하는데, 그보다 황홀경에 빠진 생쥐스트가 앞섰다.

"먼저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다시 한번 바스티유? 허수아비 국왕이 기다리는 왕궁? 오를레앙에 맞서 위원장께서 혁명 신화를 써 내려가셨던 의회? 그도 아니면-."

"투표소."

"···예?"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

혹시 내가 잘못 들었나, 하고 있길래 또박또박 분명하게 말해주었다.

"우린 이제부터 다같이 국민의 신성한 권리를 행사하고 유권자들의 투표권 행사를 독려하기 위하여 투표소로 갈 걸세."

"하, 하지만-."

"선거일이잖은가."

지금이 21세기도 아니고 선거 차량에서 홍보 방송 틀어줄 순 없잖아?

18세기에 쌍팔년도식 대규모 동원 유세 정도면 최신식이지.

프랑스에 한국처럼 선거운동 기간에만 선거운동 해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역사상 첫 번째 보통선거가 탈 없이 끝날 수 있도록 준법 시민으로서 모범을 보여야지."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적기를 휘두르는 3만 명의 시위대는 비무장 상태로 질서정연하게 지정된 투표소를 향해 돌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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