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실현
세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무엇이 있을까.
평화로운 무질서?
혁명파 국왕?
국민을 위한 정치?
글쎄,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자, 그럼 허심탄회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이 프랑스의 민선의원으로서 감히 단언하건대, 피에르 베르니오는 저 협치하는 독재자야말로 가장 모순된 놈이라고 확신했다.
차라리 총칼로서 그들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다면, 그를 가로막는 모든 이들을 숙청해버리고 제 뜻을 강제했다면 분노하기는 했어도 모순되었다고 평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야 그게 바로 독재자의 본질이니까.
앞서 카이사르가 그러했으며, 그 뒤를 이은 무수한 사례들이 보여주듯이 대체로 독재자들은 작금의 체제를 비판하면서 이를 대체할 그럴싸한 대안과 함께 나타나 개혁가를 자칭하며 지지세를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 지지세가 충분해지고, 그의 반대파들이 마침내 절 십자가에 못 박아주면 부패한 구체제에 핍박당한 순교자를 자처하면서 모든 반대하는 목소리를 적폐로 몰아세우면서 스스로 누구의 비판도 용납되지 않는 불가침의 성역에 오른다.
그런데도 우민은 계속되는 성공과 통쾌한 행보에 그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며, 이러한 우민의 목소리가 일부 현명하고 지각 있는 지성인들의 지적 목소리마저 압도하게 되면서 그 사회는 점차 그 한 사람의 목소리만 남게 된다.
"중앙은행, 뭐 좋다 이겁니다. 선거까지 진 마당에 저희가 이제 와서 반대해봐야 뭐하겠습니까? 하지만 이것 한 가지만 더 약속해주십시오."
"좋습니다. 발언해주십시오. 무엇입니까?"
"당신들이 이 공금을 제멋대로 쓰지 않을 거라는 보장을 해달란 말입니다. 아니, 보장도 아니지요. 안전장치들을 설치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진짜로 저 영란은행처럼 유대인들이 운영하게 한다던가, 진짜 완벽하게 수익 우선으로 운영한다던가. 뭐 이런 거 말입니다."
"아주 웃기고 있군. 이봐, 직전에 선거까지 져놓고서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대체-."
"마라 의원, 아직 페티옹 의원의 발언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계속 경청해주십시오."
그런데 도대체 이 모순된 모습은 무엇이란 말인가.
왜 원내 의석의 8할 가까이 제 계파로 가득 채우면서 입법 독재를 휘두르고도 남을 놈이 오히려 제 사람들을 견제하고 있는가.
지금까지의 진행으로 봐서는 오히려 급진당이 아니라 베르니오와 같은 야권에서 배출한 수상이 아닌가 싶어질 정도였다.
물론 저 로베스피에르가 이렇게까지 그들을 배려해주지 않았다면 애초에 선거 이래로 간신히 2할을 채운 야권이 지금처럼 발언할 기회가 돌아오지도 않았겠지만-.
'···아니 애초에 왜 배려해주고 있는 거야?'
모른다.
진짜로 모르겠다.
물론 덕분에 그들 야권이야 한숨 돌리긴 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절 지지하던 급진당 의원들이 내심 불편해하고 있잖은가.
다들 아직 첫날이고 첫 번째 회기다 보니 대놓고 말은 못 하고 있지만, 의원들의 면면만 봐도 작금의 상황을 만족스러워하는 의원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는 배려받고 있는 야권에서조차 기뻐하거나 안도하기보다는 굴욕적이라고 받아들이거나 더욱 의심스러워하는 반응들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척.
"예, 베르니오 의원님. 발언해주십시오."
결국 보다 못한 베르니오가 손을 들어 올렸고, 상석에 선 로베스피에르는 그 즉시 그에게 발언권을 부여했다.
그럼 그가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이날 회의에 참여한 모두를 대변하여 베르니오는 잠시 숨을 고른 다음 되물었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입니까?"
"뭐 하는 짓이냐니요?"
"원내 의석의 8할을 가져가셨잖습니까. 길거리의 민중들은 누구나 당신을 예찬하고 있고요. 그럼 그냥 솔직히 구시면 되는 거지, 이게 무슨 되지도 않는 연극입니까?"
폭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동의할 의문점이기도 했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저 카이사르처럼 민중의 대전사를 사칭하며 여론을 선동하고, 지지세를 끌어모아 여기까지 왔으면 그냥 솔직하게 카이사르처럼 굴면 될 것 아닌가?
뭘 여기까지 왔으면서 절차를 존중하는 척, 그들과 같은 반대파와 토의하려는 척하고 있는 건가?
원로원마저 만족시켰다는 아우구스투스라도 되고 싶은건가?
그렇다면-.
"그래서 솔직하게 굴고 있잖습니까."
"···예?"
"남들 눈치를 안 보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굴고 있다고요."
너무나 당당한 대답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대답이었고.
베르니오가 도대체 이걸 뭐라고 반박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눈만 깜빡거리고 있자니, 상석의 로베스피에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전 언제나 이렇게 토의하고 싶었습니다. 각기 다른 두 모순된 주장이 정면으로 맞부딪히면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마침내 서로의 결점을 보완하는 완벽한 한 쌍이 되도록 말이지요."
"아니 그게 대체 무슨-."
"그런데 아무도 토의하려고 하지 않더군요. 하기야 그러니까 다들 혁명을 꿈꾸신 거겠지만, 토의를 통해 상호보완을 하려는 게 아니라 서로 이기려고만 하는데 저 혼자 토의하려고 해봐야 뭐하겠습니까."
고로.
"이를 가능하게 할 절대권력을 쟁취한 겁니다."
설명됐습니까?
태연자약한 설명에 베르니오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저 설명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려면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저 독재자의 신념을 조롱하거나 비꼴 방법이라면 그보다 더 많았고.
그러나.
'···미친놈.'
반박하고, 조롱하고, 모욕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저 미치광이와 두 눈을 마주한 지금 이 순간 비로소 베르니오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오히려 아득바득 반박하려 하면 할수록 저 로베스피에르라는 인간은 기뻐할 것이라는 걸.
애초에 저 인간의 목표는 군림하는 것도, 지배하는 것도, 개인의 영달 같은 부귀영화도 아니다.
오로지 본인의 이상을 현실에 실현하는 것만을 인생의 목표로 삼은 광인이었다.
그리고 이 경우엔 그의 이상이 하필이면 토의와 협치였을 뿐.
고로 그의 반대자들이 반감을 품고 그의 논리에 반박하려 한다면 저 독재자는 기꺼이 그들과 어울려줄 것이다.
반대로 그의 지지자들이 그의 논리를 무조건 따르려고 한다면 저 독재자는 그들을 기꺼이 혐오할 것이다.
반대자를 위하여 존재하는 독재자라는 이율배반이자 모순성.
저 고대 로마의 술라를 능가하는 미치광이가 지금 프랑스의 정점에 오른 실권자라는 걸 비로소 베르니오는 이해했다.
"애초에 이 지폐라는 것 자체가 위조하기 너무 쉽다는 게 문제입니다. 금과 은이 부족하다면 하다못해 구리가 되었건 철이 되었건 신권은 동전으로 발행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전쟁이 눈앞까지 다가온 와중에 구리와 철을 허비하겠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차라리 과학 아카데미에 위조할 수 없거나 어렵게 하는 특수한 재질을 개발하도록 주문해봅시다."
"그건 좀 너무 무책임한 소리 아닙니까? 그래서 과학 아카데미에서 개발에 실패한다면요?"
"그럼 개발이 될 때까지 두 배로 독촉하면 됩니다."
"성모님 맙소사."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실제로 저 로베스피에르가 야권을 배려해주면서 어느 정도 대등하게 토의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
물론 이 토의와는 별개로 입안되고 있는 거 급진당에서 요구하고 또 공약으로 내세웠던 정책들 뿐이었지만-그게 뭐 문제라도 되던가.
아무튼 이번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건 급진당이다.
곧 민의가 그들을 선택했다는 증거였고, 혁명 이래로 이 나라 프랑스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명시한 이상 다음 선거까지 저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이를 트집 잡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닌 말로 그들을 투명인간 취급한다고 해도 입법 절차엔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테니까.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아직 발언이 끝나지 않았을 텐데요."
"우선 흥분을 가라앉혀 주시겠습니까? 우리 의원 동지들을 선동할 생각이 없으시다면, 말이지요."
"···좋습니다. 그 부분은 긍정적으로 검토해보지요."
하지만 저 로베스피에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 반대파를 존중하는 시늉이 아니라, 진짜로 존중해주고 있었다.
하나하나 경청하고, 여론이 한쪽으로 치우치려 하면 제지하고, 선이 넘은 발언은 그때그때 지적하며,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제안이라는 걸 뻔히 얼굴에 드러내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반대의견을 수용했다.
심지어는 이에 반대하는 그의 당파를 몸소 설득하는 수고를 감수하면서까지 말이다.
'이건 대체···.'
뭘까.
이것도 독재의 일종이라고 봐야 하나?
베르니오로서는 선뜻 답할 수 없었다.
다만, 이날 의회는 미치광이 수상의 영도 아래 혁명 이래로 가장 신사적이고 건전한 의사 결정절차를 통해서 무수한 주요 현안들을 입안시킬 수 있었다.
***
마침내 적법한 입법 절차를 통하여 중앙은행 설치가 확정되고 나자 그 다음으로 시급한 현안은 다름 아닌 신권 도입이었다.
이 주주들의 토지와 농장을 담보로 쓰는 건 어떻게든 입법 독재로 강제할 수 있다고 쳐도, 없는 신용을 되살릴 순 없었다.
그야 그간 아시냐가 보여준 게 있는데 새로운 법정화폐를 발행한다고 해봐야 누가 그걸 믿고 써주겠는가?
라부아지에 이하 과학 아카데미를 달달 볶아 위조를 막을 방도를 강구하고, 아시냐를 모조리 불사르고 파괴하는 정치적 쇼로 울분을 풀어줘 봐야 언 발에 오줌 누기일 뿐.
발권량에 상한을 두는 것조차 과연 얼마나 실효가 있을까 다들 고심하던 찰나.
"그럼 신권에 잔 다르크의 성화를 인쇄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잔 다르크?"
어느 날 우리의 공밀ㄹ-가 아니라 라부아지에가 묘한 이야기를 꺼냈다.
"왜 하필이면 잔 다르크인가?"
"그야 누구나 한 번쯤 그 일대기를 들어본 구국의 성녀-라는 이유도 물론 있습니다만. 그녀가 민중에게 사랑받고 계몽주의자들에게 미움받기 때문입니다."
[사실일세.]
집주인 놈의 설명에 따르자면, 계몽주의자에게 있어서 잔 다르크란 한마디로 줄여서「제가 신에게 계시받았다고 주장한 미친 여자, 혹은 사기꾼」이라고 했다.
이 세상엔 기적도, 계시도, 당연히 성녀도 없으니 잔 다르크란 가톨릭교회나 프랑스 왕실에서 지어낸 사기극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아니 뭐, 나도 빙의라는 오컬트를 경험하기 전까지는 유물론적 관점을 견지했으니 아주 이런 관점을 부정하는 건 아닌데.
이보셔.
[왜 그러나?]
···성녀도 아니고 그냥 과도한 스트레스에 미쳐버린 시골 소녀가 목에 장궁을 맞고 몇 미터 위에서 추락했는데도 멀쩡히 살아서 적진에 돌격했다는 게 더 비이성적인 가정 아니냐?
그리고 미쳐버린 시골 소녀가 나라를 구할 동안 영국한테 나라의 반절을 빼앗긴 머저리들은 일부러 나라를 팔려고 태업한 거고?
역시 잔 다르크의 최후가 그 모양이었던 건 영국에 나라를 팔려고 했는데 못 파니까 대신 미친 시골 소녀라도 내다 판 거였네.
[···커흠.]
"무엇보다 로마 교황청은 프랑스 민중의 거듭된 시성 요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시복조차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적으로는 그녀를 가톨릭의 성인이라고 인식하고, 심지어는 계몽주의자들도 가톨릭적인 인물이라는 이유로 공격하고 있죠.
다시 말해서-."
"복자조차 아닌, 어디까지나 프랑스의 민중들 사이에서만 존경받는 위인이니 로마 교황청과 아무런 갈등도 빚지 않으면서도 가톨릭 교회의 신뢰를 빌려서 신권을 발행할 수 있다, 이 말이군."
"바로 그겁니다. 과연 수상 각하, 명석하시군요."
햐, 역시 괜히 세기의 천재가 아니네.
매번 만날 때마다 딸랑딸랑하는 딸랑이답지 않게 꾀주머니가 따로 없다.
뭐 라부아지에 같은 경우엔 나쁜 꾀로도 밝다는 게 문제긴 한데, 이번에는 다행히도 공익을 위하여 발휘되었으니 넘어가 주자.
즉, 라부아지에의 제안은 한마디로 줄여서 이런 것이었다.
「혁명정부가 아니라 로마 교황청이나 그 관련 금융권에서 발행한 것처럼 속이자」
잔 다르크를 혐오하는 저 계몽주의 정부가 그녀를 화폐도안으로 쓸리가 없다-라는 것.
중앙은행이 정부기관이 아니라는걸 보여주려면 이보다 확실한 도안이 없다는 설명이었다.
실제로도 민간자본으로 출자금을 끌어다가 민간에서 운영하도록 설계되었고, 또 파리나 몇몇 주요 도시들을 제외하면 자치 코뮌이라고 해봐야 교회의 영향력을 짙게 받을 수밖에 없으니 절차상으론 아무 문제도 없었다.
염치가 문제였을 뿐.
그야 그동안 가톨릭교회 재산 압류해서 아시냐 같은 휴지 조각이나 찍어내던 프랑스에서 또다시 로마 교황청의 신뢰도를 훔쳐다가 화폐를 발행한다니 얼마나 후안무치한 발상이란 말인가?
내가 생각해도 너무 치사하고 치졸하긴 한데-.
"그래, 그럼 이참에 아예 신권에 라틴어 경구들까지 새겨넣는 게 좋겠군. 혹시 이탈리아반도에서만 자주 쓰는 색료나 섬유 같은 것들 없나? 과학 아카데미 회원들과 함께 최선을 다해서 위조해주게."
"물론입니다, 수상 각하. 최선을 다해서 위조해보지요. 아, 혹시 마르세유에 표본을 들여와달라고 요청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거야 어려운 것도 없지. 지금 당장 파발을 보내보겠네."
치사고 나발이고 당장 경제가 망했는데 뭐 어쩌라고.
무엇보다 이 시대의 로마 교황청을 21세기의 바티칸 시국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아직 통일 이탈리아라는 나라가 존재하지 않는 이 시대의 로마 교황청은 도시 로마를 포함하여 이탈리아반도 중부의 기름진 땅을 점유한 주권국가이자, 지중해 세계의 해운과 전 가톨릭 세계로부터 들어온 막대한 헌금을 이용해 자체적인 금융가까지 거느린 견실한 부국이다.
까놓고 최근까지 아시냐 같은 말도 안 되는 휴지 조각을 법정통화로 쓰고 있던 프랑스 따위와 비교될 신뢰도가 아니지.
그리고 아시냐는 실질적으로 이 교황청 소유의 토지재산을 무단 압류하여 발행한 화폐였으니, 신권에 잔 다르크를 내세워 가톨릭적인 이미지를 강조한다면 전 정권과는 달리 어느 정도 화해의 여지가 남아있음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나마 문제시 될만한 게 이사회의 반발, 이었는데-.
"장차 프랑스 은행(Banque de France)에서 발행할 신권 초안입니다."
"뭐야, 잔 다르크?"
"거기에 라틴어까지 빼곡하게 채워놓았군. 뭐 하나같이 애국심에 호소하는 경구들이긴 한데-."
"대놓고 사기를 치자는 거네. 뭐, 정직하게 망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기왕에 사기 치는 거 아예 어부의 반지 같은 것도 집어넣는 거 어때?"
"그건 좀, 너무 대놓고 외교 문제로 번질 거 같은데···."
막상 그 이사회는 반대하기는커녕 만장일치로 찬성.
오히려 정치권이나 호사가들이 불평하는 것조차 싹 묵살해버리고 무조건 잔 다르크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차라리 나랏돈이면 반대를 하건 장난이라도 쳐보건 하겠는데 지들 자산을 담보로 쓴 신권이 망했다간 본인들도 뒤가 없겠구나, 싶었던 거겠지.
[그보단 누가 봐도 계몽주의자들이 고른 시안이 아니었으니 이참에 우리 정부와 거리를 벌려두려는 것 아니었겠는가?]
뭐, 그것도 말은 되네.
"아이고, 고우시다!"
"그래, 그래. 그놈의 독수리랑 파스케스 보단 훨씬 낫네."
"누가 아니래. 일단 우리 성녀님 얼굴이 실리니까 화사해 보이잖아?"
"아니 애초에 아시냐에 숫자보다 글자를 크게 넣자고 한 놈 누구야?"
여하튼 일단 시안까지 정해지자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아무리 선거유세였다지만 아시냐란 아시냐는 모조리 불사른 참이라 하루빨리 신권을 발행해서 빈자리를 채워야 했거든.
선거가 끝난 지 채 보름이 되지 않아 프랑스 은행에서 찍어낸 신권 프랑(Franc)이 시장에 유통되기 시작했고, 왕실과 계몽주의자들을 제외한 보편적 다수의 사랑을 받아온 성녀는 그간 정부를 증오해온 반혁명파에게조차 손쉽게 받아들여졌다.
가격안정이나 신뢰회복이야 아직 멀었어도 최소한 아시냐라는 불쏘시개 보다는 나은 상품 교환권으로라도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정부와 계약한 몇몇 소매상들에게 편의를 봐주는 대신에 정해진 가격에 신권을 받고 식료품 등의 생필품을 공급하도록 부추긴게 컸다.
뭐 야권에서는 배급제다, 국영상점이다 뭐다 투덜거렸지만-대신 정부와 계약한 업소들은 영업세 빼주겠다고 하니까 개나소나 달려들더라.
은근슬쩍 장부 끼워넣어서 탈세하려는 속셈이 뻔히 보이긴 했는데, 당장은 물가안정과 신권보급이 우선이었으니 당분간 눈감아주기로 했다.
그리고 이 신권이 비로소 보급되고, 끝장을 달리던 민심이 수습되자.
"각하! 생도맹그에서 연락선이···!"
마침내 뒤마 장군으로부터 답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