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
"이거 귀찮게 됐군."
"뒤마 장군이 실패한 겁니까?"
햐, 말 한마디 하자마자 바로 견제 들어오는 거 봐라.
아니 뭐 그동안 우리 급진당에서 장성급 인사는 뒤마 한 명뿐이었고, 이번 쿠데타 모의 3연타를 막아내면서 나폴레옹이 두 번째로 장성 계급을 달았으니까 견제할만하긴 했는데.
[저 친구는 항상 좀 너무 노골적이란 말이야.]
누가 아니래.
"직접 읽어보게."
펄럭.
여하튼 괜히 입 아프게 말로 해봐야 계속 견제나 하려들 그것 같길래 직접 읽고 판단하라는 의미에서 서신을 건넸다.
겸사겸사 넌 내게 올라오는 보고서를 같이 읽을 수 있는 측근이다-라는 암묵적인 메시지도 될 테고.
역시나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아주 핑핑 돌아가는 나보 놈 아니랄까 봐 나폴레옹 장군은 희희낙락하며 서신을 받아들였고-.
"···일이 아주 귀찮게 되었군요."
조금 전 나와 똑같은 반응을 돌려주었다.
이것까지 따라 했다고 생각하는 건 내 억측이겠지.
"그러니까 뒤마 장군의 말에 따르자면, 지금 물라토 반군끼리 내전을 치르기 시작했다는 말입니까?"
"그래. 어느 정도 사견이 섞여 있다고 봐야겠지만 최소한 지금 생도맹그가 두 패로 나뉘었다는 건 확실해 보이는군."
하여간 좋게 좋게 말로 풀려고 해도 뜻대로 풀리는 적이 없어요.
여하튼, 뒤마 장군의 설명에 따르자면 지금 생도맹그는 협의를 받아들인 투생 루베르튀르의 친불파와 협의를 거부한 조르주 비아소가 이끄는 반불파로 나뉘었다고 했다.
그의 서신에 담긴 내용을 100% 신뢰하자면 본국과의 타협을 지지하는 투생이 프랑스를 향한 열렬한 애국심과 동포들을 향한 사명감으로 무장한 반면 조르주 비아소는 스페인 국왕과 결탁하여 제가 이 생도맹그의 군주가 될 야망을 품었다는데···.
[그래서, 여기 담긴 내용 중 얼마나 믿을 수 있을 것 같은가?]
한 절반쯤?
투생이라면 원 역사에서도 나폴레옹의 제안에 응하여 프랑스 본국과 담판을 지으려고 홀몸으로 나섰던 의인이니 프랑스를 향한 애국심은 과장이라도 사명감은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뭐, 원 역사에서 투생은 애초에 물라토들과 타협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던 나보 놈의 함정에 빠져 감옥에서 옥사하게 되지만 말이야.
결과 투생은 그 비극적인 최후로 인해 물라토들의 순교자이자 흑인해방운동의 성자로 숭배받게 되지만-이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이만 넘어가고.
문제는 이 조르주 비아소라는 친구인데.
[오, 이 친구도 자네가 아는 친구인가 보지?]
···아니, 전혀 모르겠으니까 이러지.
이미 몇 번 생도맹그 보고서에서 물라토 반란군 사령관으로 이름이 등장했던 친구니까 나름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실제 인간 됨됨이가 어떤지는 전혀 모르겠다.
그동안 보고서에는 온통 스페인과 결탁하여 선량한 백인 농장주들을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하는 극악무도한 도적으로 등장했으니까 말이지.
물론 나야 노예 플랜테이션이 얼마나 끔찍한 건지, 이게 얼마나 인종차별적인 관점에서 서술된 보고서인 줄 알고 있었으니 대강 걸러 듣고 있기야 했는데-.
이제는 우리가 이만 타협하자고 했는데도 저쪽에서 계속 스페인과 손잡고 프랑스와 맞서 싸우겠다고 다짐한 거잖아.
이게 정말로 뒤마 장군의 말처럼 제가 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어서인지, 아니면 그냥 프랑스가 너무나 미워서+믿을 수 없어서 끝까지 무력투쟁 노선을 추구하고 있는 거지 이 서신만 읽어서는 가늠이 안 된다.
"그래서, 나폴레옹 동지가 생각하기에는 어떻게 하면 좋겠나?"
뭐, 이럴 때는 역시 전문가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빠르겠지.
순진한 투생을 속여서 옥사시킨 나보 놈이라지만 아무튼 이 시대에 전쟁 관련해서는 이 녀석을 능가할 전문가 따윈 없으니까.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나보가 답하길.
"지금 당장 뒤마 장군에게 지원군을 보내줘야 합니다."
"···그럼 저 친구들이 진압군을 보냈다고 착각하지 않겠는가?"
내가 봤을 때는 신뢰도가 0을 넘어서 마이너스를 찍은 프랑스에서 이번 생도맹그 내전에 전면 개입했다간 역시나 이놈들이 또 우릴 속였구나!할 것 같은데.
하지만 나폴레옹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페인이나 물라토 반란군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대로 가면 머지않아 영국이 개입할 것입니다."
···아.
"아니, 어쩌면 이미 개입했는지도 모르지요. 아직 저들에겐 아르투아 백작이라는 조커 패가 남아있습니다. 어차피 그 비아소라는 작자가 스페인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반역자라면 이제 와 아르투아 백작과 협력하는 게 대수겠습니까?"
"그 비아소가 꼭 영국과 협력할 거라는 보장이 있는가? 그 친구 나름대로는 신념에 따라 의롭게 봉기했을 수도 있잖은가."
"동지께서는 의롭지 않으셨습니까?"
···이놈이 아픈 구석을 때리네.
하지만 대놓고 「너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 잡았잖아」라고 말하니까 나도 반박할 말이 없다.
하기야 우리 관점에서나 반역자고 매국노지 저쪽 입장에선 애초에 프랑스 국민으로 대접해준 적도 없으면서 협력 상대가 영국이건 스페인이건 무슨 상관이겠어.
당장 무장 투쟁해야 하는데 제아무리 속이 시꺼메도 무기 빌려주겠다는 후원자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지.
내가 반대 관점이라도 영국과 협력하면 스페인에만 치우칠 때보다도 열강 사이를 줄타기하면서 균형 잡힌 실리를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할 거다.
반대로 저 비아소라는 친구가 생도맹그의 물라토 왕이 되기를 꿈꾸는 야심가라도 똑같이 생각할 거고.
"좋아, 알겠네. 우선 전쟁위원회에 건의해두지. 혹시 내가 대신 전해줘야 할 이야기가 더 있는가?"
"정 물라토들의 반발이 우려된다면 병력보다는 장교나 사관 위주로 파병하십시오. 어차피 병사야 현지에 넘쳐나고 있을 테니 제아무리 소단위라도 부대를 지휘할 수 있는 인재가 더 급할 것입니다. 또 소수 인력만 파병하게 될 테니 토벌군이라는 의심도 상대적으로 덜 받게 될 테고요."
"···장교나 사관이라."
쓰읍, 지금 우리 프랑스에서 가장 부족한 게 정부신뢰랑 지휘관들인데-.
[저번에 쿠데타 모의한 친구들이 있잖은가.]
아하.
"그럼 쿠데타 주동자들을 보내면 되겠군."
물론 뒤무리에는 빼고.
혁명재판소에서 보여준 모습 때문에 미운털이 박혀서-라는 이유도 있기는 한데, 그보다도 한때나마 육군 사령관이었던 뒤무리에를 뒤마 장군이랑 같이 붙여줬다간 사령관으로서의 권위가 무너진다.
다른 놈들이야 계급빨로 찍어누르기라도 하지 물라토 장군이 백의종군했다지만 뭔 수로 백인, 그것도 전직 육군 사령관에게 대들겠어.
안 그래도 국민위병에서 군사재판까지 치른 다음에도 죽이기엔 다들 너무 아까워서 우물쭈물하는 게 눈에 밟히던 참이었는데, 이참에 그냥 생도맹그로 보내서 뒤마 장군 밑에서 구르라고 하면 되겠다.
"그럼 이번 일은 나폴레옹 동지가 추진해보게. 외부인인 내가 직접 나섰다가는 군사재판의 독립성과 군의 권위를 침해하게 될 테니."
"알겠습니다. 아, 혹시 물라토 부대를 거부하는 죄인들이 나온다면 그 경우에는 어떻게 할까요?"
"그 모욕감까지 포함해서 민중이 내리는 형벌이라고 설명해주면 될걸세. 단두대와 물라토 부대 중 어디 내키는 대로 고르라지."
그래도 싫다고 하는 놈이면 뭐, 목숨 걸고 인종차별 하는 미친놈이라는 소리인데 죽여야지 어쩌겠어.
그런 놈은 살려서 씨를 뿌리도록 내버려 두는 게 오히려 이 사회와 인류문명에 죄를 짓는 격이다.
내 프랑스에 뻐킹 레이시스트는 필요 없다, 이거야.
"알겠습니다, 위원장 동지."
척.
뭐, 그런 식으로 따지면 지금 경례 올리는 저 나보 놈이야말로 내쳐야 하긴 하는데.
우리 세계선에서 레이시스트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어쩌겠어.
무엇보다 내가 인종차별을 혐오한다는 걸 눈치챘으니 로베스피에르 라인을 타려고 작심한 나폴레옹은 절대로 내가 보는 곳에서 그런 티를 내려고 하지 않을 거다.
그럼 시간이 교정해 주-는 건 기대도 안 하고.
그냥 평소에 꾸준히 신경 쓰면서 티만 좀 덜 내주면 감지덕지지.
덜컹.
그렇게 나폴레옹마저 떠난 뒤.
[그래서, 아직도 저 생도맹그의 혁명을 지지하는가?]
단둘이 남게 되자마자 집주인 놈이 아픈 구석을 찔러왔다.
그야 당연히-라고 답하고 싶기는 한데.
당장 프랑스 유권자들의 지지로 선출된 놈이 적국 스페인, 영국과 손잡고 프랑스에 맞서 싸우려는 무장투쟁 노선을 지지하겠다고 답하는 것도 좀.
내가 혁명을 지지하는 반골인 것과 유권자들의 민의와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민선의원인 것 중에서 우선순위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럼 생도맹그의 혁명을 부정하는가?]
그것도 아니다.
모든 형태의 노예제는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죄악이다.
스스로 노예의 사슬을 끊고서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의 열망을 부정할 순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정해졌군.]
···그래.
스페인이고 영국이고 묵사발을 내버리면 된다.
생도맹그의 혁명가들과 우릴 프랑스의 혁명가들을 싸움 붙이려는 더러운 수구반동들의 협잡질을 인민 무력으로 산산조각 내는 거다.
그럼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저 비아소라는 친구도 어쩔 수 없이 협상장에 나올 수밖에 없겠지.
마지막까지 타협을 거부하고 순교를 택한다면-비아소가 원하는 대로 경의를 담아 또 한 사람의 동지를 보내주어야 할 테고.
그가 죽어서 순교자가 될 것을 두려워하여 마지막까지 타협을 거부한 혁명가를 살려두고자 한다면 그거야말로 의인의 생애를 더럽히는 격이오, 그의 발자취를 역사에서 지우려는 반혁명적 범죄행위다.
순교를 택한 모든 순교자에겐 순교자로서 역사에 기록될 권리와 자격이 있다.
[참, 지내보면 볼수록 자네와는 의견이 잘 맞는다는 말이야.]
누가 아니래.
이제 군무감찰위원장으로서의 임기도 1년 남짓밖에는 남지 않았다.
지난날 우리가 약속했던 3년의 유예 기간 중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럼 이만 슬슬 각오를 다져야겠지.
민중의 적기가 만천하에 휘날리게 할 각오를, 말이다.
***
런던.
"···하여간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제16대 총리 윌리엄 피트가 골머리를 싸맸다.
"그러니까 아일랜드 촌놈들이 또 요란법석 하다, 이 말인가?"
"예. 풍문에 의하면 이미 프랑스로부터 원병을 약속받았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장 런던 사교회에서 2차 혁명이 터지네, 마네 내기한 지가 몇 주나 되었다고 벌써 저 개구리 놈들이 사고를 친다는 말인가?
뭐, 오히려 그렇게 궁지에 몰렸으니 더더욱 사고를 치려고 들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피트도 코웃음이나 치면서 저 상선 사관들에게조차 월급도 제대로 못 주고 있는 땅개 놈이 주제를 알라며 대꾸해줄 것이다.
지난날 부르봉 왕정에서 천문학적인 빚을 져가며 육성한 대양함대를 혁명 한번에 깡그리 날려버렸으면서 아일랜드섬에 원병을 보낸다니 프랑스 병사들은 뭐 물 위를 걷는 재주라도 있단 말인가?
결국 저 원병 타령은 어떻게든 공모자를 늘려보기 위한 역도들의 허장성세요, 거짓 선전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주모자는 누구인가?"
"아직 파악 중입니다. 다만, 벨파스트 의용군(Belfast Volunteers)이라는 공화파 단체가 이번 역모를 주도하고 있다는 건 확인했습니다."
"공화파, 란 말이지···."
하지만 정신적인 측면은 어떠한가?
물론 저들이 아일랜드인들을 위해 군대를 보내줄 수야 없겠으나, 저 프랑스인들이 전 유럽에 퍼트린 이념적인 각성이 작금의 혼란과 무관계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유감스럽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무렴 저들이 지난날 아일랜드인들을 학살하고 황무지로 내쫓은 크롬웰 호국경을 동경하여 공화국 건국을 도모하고 있을 리는 없잖은가?
결국 오늘날 유럽대륙에서 빚어지는 모든 종류의 반란은 저 파리로부터 비롯되었으며, 파리를 본보기 삼아 더욱 확산되고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는 물론이오, 목표 의식까지 나날이 뚜렷해져 가고 있었다.
곧 파리야말로 모든 반란의 어머니인 까닭이다.
뿌득.
"···지금 당장 치안 인력을 두 배로 늘리라고 전하게."
답답한 마음에 윌리엄 피트가 이를 악물었다.
무작정 힘으로 짓누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당장은 힘으로 짓누르는 것밖에 달리 선택지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예산이 되었건 절차가 되었건 내가 책임지고 마련해보겠네. 더블린에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저 추악한 역도들을 단속하는 데 집중하라 전하게."
"물론입니다, 각하."
척.
보좌관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상관의 명령에 순종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아일랜드 왕국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은 조지 3세를 공동으로 섬기는 동군연합일 뿐 엄연히 별개의 나라였으니까.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랴?
어차피 아일랜드인들조차 아일랜드 왕국이라는 나라가 실존한다고 믿진 않을텐데.
"골치 아픈 폭도 놈들."
호로록.
그렇게 보좌관마저 떠나보내고, 홀로 우아하게 티타임을 즐기며 피트는 그의 집무실 한편에 걸린 유럽 전도를 흘겨보았다.
그나마 대륙에 비하여 눈부신 자유화가 이뤄지고, 의회정치가 무르익었다고 자부한 그들 브리튼 열도에서조차 심심치 않게 반란을 모의한 역도들이 검거되는 판이었다.
꼭 공화국이 아니라도 윌리엄 피트가 이끌던 노예해방론자들이나 기타 개혁론자들 사이에서 우리도 프랑스처럼 반대파를 찍어누르고서라도 공공선을 실현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우후죽순 늘어나고 있었고.
그럼 다른 유럽 국가들은 대충 어떤 상황일까.
"보나 마나 폭발 직전이겠지."
겉으로야 아무 일 없는 척 허세를 부리고 있지만, 그럴 리가 있나.
프랑스처럼 극단적인 경우에 한정된 이례적인 상황이라고 굳게 믿고들 싶겠지만, 한번 왕 목을 잘라본 선배로서 단언하건대 이미 늦었다.
애당초 국왕 개인이 얼마나 선량한가, 프랑스에 비해서 그들 나라는 얼마나 내정이 견실한가는 둘째 문제다.
진짜 문제는 바로 왕권신수설이 부정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고, 이를 일찌감치 사회계약에 기초한 의회정과 금권으로 빈자리를 채운 왕국과는 달리 대다수는 그런 준비조차 되어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나마 아직까진 입헌군주정으로 만족해주고 있기는 한데···.'
저게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까.
이대로 수습된다면 그들 런던으로서도 생사결을 각오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법통파라는 사기극이 소년왕이 장성할 때까지 이어진다면 그건 그것대로 이 잉글랜드의 젠트리와 요먼들을 위협하진 않을까.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차라리 멍청한 루이 16세였다면 이렇게 망설일 필요도 없었건만.
하필이면 저 꼭두각시 소년왕이 합스부르크의 피를 이었다는 게 런던이 본격적인 적대행위를 유보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결국 런던이 선수를 취하는 순간 어떤 식으로건 저 신성로마제국을 자극하게 될 테니까.
설마 그럴 리가-라고 믿고 있긴 하지만, 파리와 빈 사이에 이 실낱같은 화해의 끈이라도 남아있는 이상 런던으로선 수세를 고집할 수밖에 없었다.
아르투아 백작이라는 최고의 패를 들고도 기껏해야 생도맹그 같은 식민지에서 견제구나 좀 던지고 아시냐 위폐공장이나 소소하게 네다섯개 정도 돌리면서 참고 있던 것도 그 탓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진짜로 대륙국가들과 함께 전면침공을 하건, 아니면 두번 다시 바다로 나올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주고 싶은데-.
"···잠깐, 그냥 아르투아 백작을 돌려보내고 파리와 화해를 해봐?"
그럼 하다못해 부르봉-합스부르크 체제라는 악몽만큼은 피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잠시 진지하게 고민해보기도 했으나, 이내 피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혼자 고집을 부린다고 통과될 일도 아닐뿐더러 혹시 그러다가 저 로베스피에르라는 놈이 제2의 크롬웰이 되었다간 뒷감당이 안될 테니까.
"지금으로선 인내, 또 인내가 상책인가."
호로록.
그렇게 고민한 결과가 현상 유지라는 게 울화가 치밀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단호한 조치로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고르디우스의 매듭 자르기 같은 건 크롬웰 이래로 금기가 되어버렸는데.
그가 노예제 폐지에 앞서서 먼저 노예무역 폐지를 위한 자문위원회를 설치하고, 벌써 5년 사이 몇 번씩 의회의 반대에 부딪히면서도 분노한 지지자들을 달래며 과격한 모험주의를 배격하고 있듯이 이번 문제 또한 그러해야만 했다.
파리가 해외식민지를 포함한 프랑스 전 영토에서 완전한 노예제 폐지를 결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건 그날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