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해방
생도맹그.
"···맙소사."
아지랑이를 일으키며 영롱하게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 투생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노예 문서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이 비단 오늘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 혁명군이 노예농장이나 관공서를 습격하여 불사른 것이었으며 그나마도 일시적인 해방이 되는 경우가 흔했다.
노예 혁명 뒤에도 변함없이 생도맹그는 프랑스령이었으며 주요 도시들은 프랑스 식민당국과 식민지군의 통제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니 기껏 노예 문서를 태워봤자 투생을 비롯한 혁명 지도자들이 장악한 해방구까지 성공적으로 도망치지 못한다면 금세 다시 노예로 전락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방구까지 도망치는 데 성공해봐야 유격전의 한계상 비전투 인원까지 풍족하게 생활하기엔 물자가 모자라서, 혹은 혁명군의 군대식 규율이 낯설어서 도로 노예주에게 도망치는 이들도 왕왕 보였고.
고로, 그들이 아닌 백인의 손으로-그것도 일시적인 분서가 아닌 공식적인 효력 정지로 불살라지는 노예 문서를 목격한 것 투생의 인생을 통틀어서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물며 이 생도맹그의 모든 노예 문서를 일괄적으로 효력 정지시킨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고.
"그래서, 기분이 좀 어떠신가?"
"글쎄요···."
뒤마 장군의 너스레에 투생은 말꼬리를 흐렸다.
처음에는 물라토가 교섭역이라고 해서 얼마나 실망했었는지.
저 본국에서 생도맹그 혁명군을 조롱할 목적으로 아무 물라토 노예에게 대충 예복을 입혀다가 보낸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심지어는 장군 견장조차 가짜라느니, 대충 물감으로 색칠한 모형이라느니, 물라토가 아니라 그냥 타르로 피부를 시꺼멓게 칠한 백인이라느니 하는 뒷담들이 얼마나 나왔는지도 모른다.
뭐, 그 뒤마 장군이 주둔지를 무단으로 이탈하여 민가를 약탈한 백인 병사를 공개적으로 흠씬 채찍질해버리는 모습을 보여준 뒤로는 아무도 그런 소리를 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때 누구 편을 들어줘야 할지 몰라 얼이 빠져있던 행정관들의 면면을 떠올려보자면 투생으로선 아직도 코웃음이 절로 나오는 듯했다.
"솔직히 아무런 생각도 안 듭니다. 그냥 현실감이 좀 없네요. 조금 있다가 해가 중천인데 뭘 꾸물거리고 있냐는 익숙한 불호성과 함께 따귀가 날아들 것 같아서 좀 무섭습니다."
"뭐, 그야 그렇겠지."
당연하다는 듯이 뒤마 장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아직 어린 시절에 아버지께서 날 시장에 내다 파신 적이 있으니 누구보다 그 기분 잘 알고말고."
"···아버지가 장군님을 내다 팔았다고요?"
"그래."
뭐, 금방 다시 사 오셨지만 말이야.
뒤마 장군이 껄껄대며 덧붙였다.
분명 농담조일 텐데, 어째서인지 투생에겐 도저히 농담으로 들리질 않았다.
기실 그리 드문 사례도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랬으리라.
"축하하네."
뒤마 장군이 가볍게 투생의 등을 두드렸다.
"이제 두 번 다시 저 지긋지긋한 설탕은 쳐다도 보지 않아도 되겠군. 자네들은 자유야. 아니, 우리 모두가 자유로워진 거지."
"자유···."
글쎄, 과연 그럴까.
만면에 자랑스럽고 속 시원해하는 기색이 가득한 뒤마와는 달리 투생은 선뜻 함께 웃어줄 수 없었다.
그야 태어나기야 서인도제도에서 태어났어도 본국에서 자란 뒤마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이겠지만, 이 땅에 노예제가 사라진다고 저 플랜테이션 농장들이 사라지진 않을 테니까.
그걸 운영하는 주체와 그 농장에서 일하는 게 노예냐, 노예나 다름없는 농부냐만 달라질 뿐.
앞으로도 생도맹그는 계속하여 이 저주받은 플랜테이션을 운영하고 또 대대손손 자손들에게 물려줘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플랜테이션 없이는 이 섬의 경제와 사람들의 생활을 유지할 수 없을 테니까.
마침내 이 노예노동으로부터 해방되었다며 기뻐한 해방 노예들은 며칠 후 일자리를 찾아서 또다시 저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결국 이들이 이 저주받은 섬에서 태어나 한평생 배우고 익혀온 모든 건 저 노예농장을 유지하고 운영하기 위한 기술들 뿐이기에.
"···잘 모르겠습니다."
"이봐, 기껏 여기까지 와놓고서 이럴 텐가?"
"그러게 말입니다. 저 지긋지긋한 노예 문서가 사라졌으니 이제 자유로움을 느껴야 하는데-."
그리고 이 점이 그간 투생이 고질적인 불신과 증오에도 불구하고 본국과의 협상을 통한 공존을 추구한 주된 이유였다.
이 설탕을 내다 팔려면 결국 배를 띄우고 시장을 개척해야 하니까.
제아무리 백인들이 밉고 또 저들의 달콤한 꼬드김을 신뢰할 수 없어도 저들과의 모든 관계를 거부한다면 결국 카리브해의 작은 섬 생도맹그는 서서히 고사해가는 길밖에 남아있지 않다.
투생이라면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왜 이렇게 갑갑하고 답답해지는 건지."
오히려 그들이 꿈꿔온 진정한 자유는 더욱 멀어져 버린 듯했다.
저 망할 노예 문서만 사라진다면, 그들 물라토도 저 백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게 된다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어째서인지 머릿속에는 변함없이 자유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미래상만 또렷하게 그려져 가고 있었다.
"결국 공식적인 명칭만 바뀌었을 뿐 저 노예 문서는 그대로인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흠, 그래서 그렇지 않아도 제안이 있었는데."
"···예?"
제안이라니.
공식적인 협의 말고 숨겨져 있는 독소조항이 있었다는 말인가?
잠시나마 녹아내렸던 투생의 마음이 또다시 얼음장처럼 얼어붙으려는 찰나.
"아, 내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라 우리 로베스피에르 동지의 서신에서 언급된 걸 그대로 읊어주고 있는 점 미리 말해두겠네."
뒤마 장군이 한 발짝 물러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공동노동, 공동소유, 공동분배. ···라고 하면 어떤 인상이 드는가?"
"···몽상가들의 이야기 아닙니까?"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동지께선 자네들 생도맹그의 해방 노예들이 그와 같이 농장을 운영해보면 좋을 것 같다고 하시더군."
이건 또 대체 무슨 소리지.
투생이 멍하니 눈동자를 깜빡거리자니 뒤마가 설명을 덧붙이길.
"어차피 이 농장들을 누군가는 소유하고 운영해야 하잖은가?"
"그야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하지만 누군가 소유하고 운영하는 순간 노예주의 인종만 바뀐 채 또다시 노예농장이 부활하게 되겠지."
투생은 차마 답할 수 없었다.
그가 바로 직전까지 고심하고 있었던 게 바로 이런 문제였으니까.
"그러니까 공동노동, 공동소유, 공동분배의 삼 원칙으로 상부상조해보면 어떻겠나, 라고 제의하셨네."
뒤마 장군의 설명은 이랬다.
1. 어차피 물라토 혁명군의 요구대로 노예제 폐지, 시민권 인정, 자치권 부여 3가지가 받아들여지는 순간 수적으로 절대적 열세인 백인 농장주들은 생도맹그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2. 그럼 섬을 떠나는 농장주들은 하루빨리 재산을 매각하고 떠나려 할 것이고, 이를 생도맹그의 흑인 공동체가 공동명의로 매수하라.
3. 그리하여 모두가 동등하게 경영 지분을 나누어 가지며 의결 시 민주적으로 1표씩을 행사하게 된다면 수익성은 다소 희생될지라도 불평등과 노예노동은 크게 억제될 것이다.
"뭐, 분명히 말했듯이 수익성은 다소 희생될걸세."
그러니까 명령이 아니라 제안을 하신 거겠지.
뒤마 장군이 덧붙였다.
"하지만 모든 생도맹그의 농장들은 아니라도 일부나마 동지의 생각대로 운영될 수 있다면 필히 전 카리브 해역의 부러움을 사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확실히.
정말로 저 로베스피에르의 생각대로만 이뤄진다면 분명 오늘 불사른 노예 문서는 단순한 분서가 아니라 진정한 노예노동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 생각대로 이뤄진다는 게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여서 그렇지.
아무렴 물라토나 흑인들이라고 이기심이 없겠는가?
이 생도맹그 섬의 해방 노예 중 태반이 문맹임을 고려하면 공동명의로 매수한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도 위험하고 극소수 엘리트층에 의해 왜곡될 위험도 컸다.
지금이야 자유와 노예해방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동지 중 과연 몇이나 무지한 동포들을 속여서 백인 노예주와 같은 사치와 향락을 누리고 싶다는 유혹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그 모든 유혹을 이겨내더라도 수익 문제로 도중에 좌초되거나 일부의 선전·선동에 속아 넘어가 절차만 민주적일 뿐 노예농장과 별다른 바 없이 운영될 수도 있고.
솔직히 투생이 생각해도 비관적이기 그지없는 전망이었으나-.
"도전해볼 가치는 있을 것 같군요."
아무렴 궐기는 쉬운 길이었는가?
이번이라고 달라질 이유는 없다.
기껏 노예신세로부터 벗어난 동포들이 또 다른 노예노동에 신음하게 된다면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위하여 투쟁해왔다는 말인가?
이 또한 노예해방의 일환이었다.
곧 그의 일생을 걸고 도전해야 할 혁명과업이었다.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장군. 덕분에 새로운 목표가 생겼습니다."
"감사하기는 무슨."
척.
뒤마 장군이 동쪽을 가리켰다.
그의 검지 너머로 군함 한 척이 항구에 들어오고 있었다.
아마 저들이 본국에서 보낸 연락선에 나와 있던 지원군을 태운 배겠지.
"···동족 상잔의 시간이로군요."
또다시 우울해진 투생이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이면 옛 상관이 이끄는 옛 동지들과 총검을 마주하게 된다니.
마치 조울증에 걸린 기분이었다.
기분이 조금만 풀어지려 하면 또 이렇게 새로운 비극과 과제들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으려 드니 원.
"아니, 그게 아닐세."
하지만 뒤마 장군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저 동쪽에 저 수송선 말고 달리 무엇이 있다고-.
"동족 해방의 시간이지."
···산토도밍고.
스페인령 히스파니올라.
그제야 투생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랬다.
생도맹그의 노예제가 사라졌다고 하여 저들까지 덩달아 해방된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 카리브해에 넘쳐나는 것이 바로 노예제와 그 피해자들이었다.
"저들이 먼저 싸움을 걸어왔으니 응당 기사답게 반격해줘야지 않겠나?"
뒤마 장군이 사나운 장난을 꾸미는 악동처럼 미소 지었다.
저 너머로 죄수 복장의 백인들이 사슬에 묶인 채 하나둘 하선하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물라토 장군을 위하여 물라토 병사들을 이끄는 백인 정치범들이라니.
"···허."
너무도 기가 막혀서 투생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조금 전까지 그의 가슴을 옥죄던 답답함과 막막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이날, 생도맹그의 노예 혁명군은 이 카리브 군도에서 기독교인 노예제를 근절하기 위한 십자군을 선포했다.
***
파리.
"말씀드리기 대단히 조심스럽습니다만···."
로마 교황청의 전권대사 루이 드 로앙 추기경이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성하께서는 귀국의 전향적인 태도 변화는 대단히 인상적이긴 하나, 아직 양국 간의 관계가 회복되기엔 상호 간의 신뢰가 충분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뭐, 그렇겠지요."
그리 놀랍지도 않다.
어차피 아시냐도 폐지했겠다, 노트르담 성당에서 날 오를레앙공에게 팔아먹었던 전적을 비롯해서 이래저래 가톨릭교회와 인연을 쌓은 김에 성직자 기본법 폐지까지 밀어붙였지만 역시 고작 이 정도로 업보청산은 어렵겠지.
나야 국왕이 도망친 뒤에나 휘말렸으니 진짜로 무고해도 로마에서 보는 로베스피에르는 성직자 기본법에 동참했다가 일이 자꾸만 꼬이니까 슬그머니 한발 뺀 기회주의자일 테니까.
[···커흠!]
아, 덧붙여서 이 성직자 기본법이라는 놈은 한마디로 프랑스 가톨릭 교회를 어용 교단으로 만들려 했던 악법이다.
십일조도 금지해, 교회와 성직자 재산도 깡그리 몰수해, 원래 교황청에서 도맡아 하던 사제서품권도 박탈해서 혁명정부에서 직접 사제교육 시키고 주교까지 직접 선출하는 건 기본.
최종적으로는 프랑스 국내의 사제들에게 「난 교황청과 아무 관련도 없고, 오직 프랑스 정부에만 충성한다」라는 내용의 맹세까지 시켰다.
본인 재산이랑 수익 창출할 수단이란 수단은 모조리 빼앗아놓고서 사실상 무급으로 혁명정부의 나팔수로서 봉사하라고 강요한 거지.
···아니 아무리 구한말 서원 꼬락서니였다지만 이럴 거면 그냥 국가무신론하던가 이게 대체 뭐 하는 짓거리래.
[콜록콜록콜록!!!]
아무튼 돈이 급했던 건 알겠고, 또 교권을 길들이려 한 건 알겠는데, 진짜 이게 최선이었나?
심지어 이놈이랑 아시냐가 한 세트라니 대체 무슨 약하셨길래 이따위 입법하셨어요?
[거 알겠으니까 좀 적당히 못 하겠나!]
입 닥쳐, 막시밀리앙.
"당연히 성하께서 보시기엔 못마땅하시겠지요. 하지만 결국 이 또한 아국의 업보인 것을 어쩌겠습니까? 관계 정상화까지 얼마나 시간이 더 걸리건 기꺼이 기다려드리겠습니다. 다만, 작금의 상황은 전적으로 전 정권의 의향이었을 뿐. 본 정부는 우리 교인들의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재건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는 점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양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앙 추기경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비굴하게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흠, 내가 그렇게 감동적인 말을 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야 당연하지. 저 친구는 원래 알자스 담당이거든.]
···엥?
잠깐, 그럼 이 양반이 원래 프랑스 추기경이었다는겨?
[아, 내가 말 안 했던가? 정확한 명칭은 스트라스-뭐시기 담당이었던 것 같은데 잘 모르겠고. 아무튼 선왕 시절에 빈에서 프랑스 대사로 일하기도 했던 양반이야. 그 유명한 목걸이 사건에서 백작 부인에게 속아 왕비를 물 먹였던 주인공이지.]
아니 이보쇼.
그 이야기를 가장 먼저 해줬어야지.
[아뿔싸···!]
아뿔싸 좋아하시네 진짜.
아무튼 그럼 이 양반이 왜 굽신거리는지, 왜 교황청에서 이 양반을 보냈는지 알겠다.
열심히 내 집 찾기 중이었구만.
교황청에서는 네 집은 네가 알아서 찾으라고 한 거고.
···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이 양반이랑 만난 적은 없지?
[있을 리가 있나. 내가 출세한 게 89년이고 저 양반은 그 이듬해에 프랑스를 떠났는데. 설령 중간에 한번 봤어도 기억 못할걸세.]
그럼 됐어.
덥석.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잘 모르는 놈이 갑자기 친한 척하면 알아서 수상하게 봐주겠지.
추기경 쯔음 되는 사람이면 알아서 내 심계까지 짐작해줄거고.
"다 지난 일 아니겠습니까? 설령 혁명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더라도 지금까지와 같은 마구잡이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 당이 책임지고 이 프랑스에 새로운 질서를 재건해 보이겠습니다. 약속드리지요. 예하께서는 기필코 교구를 되찾게 되실 것입니다."
"오오···!"
로앙 추기경이 파르르 볼살을 떨며 내 손을 마주 잡았다.
진짜로 기뻐한다기보다는 연기하는 느낌이었으니 퍼펙트 커뮤니케이션이었다고 봐야겠지.
난 이 사람에게 스위트홈을 돌려주고, 이 사람은 나를 위해 교황청에 긍정적인 인상을 준다.
이게 바로 상부상조? 아닐까!
"그렇게만 된다면 이 늙은 몸이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수상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하하핫!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아, 그보다도 신권은-."
"성녀 잔 다르크야 민중 신앙일 뿐, 로마의 공식적인 입장은 한낱 어린양일 뿐입니다."
즉, 애초에 로마 교황청과 아무 관련 없는 프랑스의 전쟁영웅일 뿐이니 구태여 트집 잡지 않겠다는 것.
역시 눈치 하나는 빠르시군.
뭐, 어차피 신권이니 뭐니 해봐야 아직 파리와 그 근교에서나 쓰이는 수준이니 구태여 트집 잡을 가치도 못 느낀 거겠지만.
"그럼 수상님께 주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저 또한 조만간 추기경 예하께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도하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의례적인 인사와 함께 헤어졌다.
어차피 더 붙잡고 있어 봐야 뭔가 진전이 있기에는 처음부터 배후에서 교황청을 움직인 건 따로 있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직 정상화하자고 말을 꺼낸 적도 없는데 저쪽에서 대뜸 먼저 「우린 관계정상화할 생각없다」라고 할리가 있나.
마침내 제위 세습을 끝마친 합스부르크의 카이저가 움직였다.
같은날, 런던은 파리의 급진적인 식민지 정책 변화가 불필요한 긴장을 초래하고 있다며 유감을 표했다.
러시아는 폴란드 최후의 저항을 성공적으로 분쇄했고, 프로이센은 동맹 폴란드를 배신한 것과 추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러시아를 돕는 대가로 영토분할을 요구했다.
더하여, 스페인은 부르봉 왕조의 혈맥을 핑계삼아 루이16세와 17세 부자의 신변을 보장하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유럽의 봉건 군주들이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더듬듯이 혁명을 가늠하려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