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이제 슬슬 전쟁 준비도 무르익었으니 지금 당장 오스트리아를 기습공격합시다."
···어, 아니 나도 전략 나폴레옹 투하해서 혁명 수출하는 겸사겸사 삥뜯어올 생각 중이긴 했는데.
선생님, 암만 그래도 그렇지 견제구 좀 날아왔다고 바로 전쟁은 진도가 너무 빠릅니다.
"그러니까 선전포고도 없이 선제공격하자는 말입니까?"
"아뇨."
깜짝이야.
브리소 저 친구는 도대체가 전쟁에 반대하는 걸 본 적이 없네.
사실 다락방에 혈신을 위한 제단이 준비되어 있고 그런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선전포고를 전달한 다음 저들에게 대응할 시간도 주지 말고 곧장 국경을 넘어서 오스트리아령 저지대를 해방 시키자는 말입니다. 저 알토란 같은 합스부르크의 금고를 초전부터 째버린다면 저들이 무슨 수로 1년을 더 버티겠습니까?"
"그, 잠깐 진정 좀-."
"무엇보다 저 땅은 이미 수년 전 벨기에 합중국이 1년간 존속한 바 있는 우리 혁명 지사들의 땅이잖습니까. 이제 우리가 저 봉건 군주들의 압제를 깨부수고 혁명의 기치 아래 하나 되자 제의한다면 저들도 응당 기뻐하며 동참할 것입니다."
[···제단이 없는 게 더 이상하겠군.]
그렇지?
처음에는 벨기에 합중국을 부활시켜주자는 이야기인 줄 알았더니만 듣자 하니 이건 그냥 우리 프랑스가 합병해버리자는 이야기다.
합스부르크 같은 봉건 압제자와는 달리 우리 혁명정부는 자유라는 기치를 공유하는 혁명동지니까 프랑스가 오스트리아령 벨기에를 합병한다면 곧 벨기에 해방과 같은 효과라는 건데···.
"저 태양왕조차 이루지 못하였던 우리 프랑스의 신성한 자연국경선을 혁명정부가 쟁취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것 참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란 말이야.
새삼스럽지만 세계대전의 광기가 괜히 튀어나온 게 아니라는 실감이 들었다.
이거 다 이때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려져 온 수백 년짜리 광기였구만.
그런데 자연 국경선이라는 게 대충 어느 정도쯤인겨?
[피레네산맥 북쪽, 알프스산맥 서쪽, 라인강 서쪽 전부 다.]
보자, 그럼 일단 네덜란드랑 벨기에, 룩셈부르크 삼국은 기본으로 호로록 합병해야 하는 거고.
이미 확보한 알자스-로렌은 기본에 라인란트 뜯고 스위스에도 한번 시비 걸고 이탈리아반도도 침공해서 영토 조각을 깡그리 뜯어오자는 소리인데 어···.
···아니 이거 완전 레벤스라움 아닌가?
스케일만 좀 작다 뿐이지 완전 그 자체인데?
[뭘. 다들 자네도 저 브리소처럼 자연국경선 지지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텐데.]
내가???
[원내에서 공공연히 골족 타령한 갈리아주의자 잖은가. 자연국경선 자체가 제정 로마 시대의 고대 갈리아령 회복을 목표로 하는 주장이니 당연히 자네도 공범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걸.]
아뿔싸···!
[아뿔싸 좋아하시는군.]
시꺼.
여하튼 덕분에 브리소 저 녀석이 연설하는 내내 이쪽에 뜨거운 시선을 보내온 이유를 알 것 같다.
당연히 나도 한마디 거들어줄 거라고 믿고 있는 거였구먼, 이거.
지난번 노예제 폐지 때도 가장 열심히 날 지지해준 게 브리소였으니까 나름 한배를 탄 사이라는 인식도 있었을 테고.
아니 급진당 가입도 안 한 양반이 왜 자꾸 치근덕거리신대.
[그야 지금까지 자네가 보여준 행적을 보면 안 좋아하게 생겼는가?]
···젠장, 입 닥쳐 막시밀리앙 주제에 또 비겁하게 팩트로 때리다니.
벌떡.
"브리소 의원님의 제의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봐!]
시꺼, 아무튼 대외적인 인식이 벌써 그렇게 짜였다면서.
이제 와서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것도 모냥 빠지고, 차라리 갈리아주의자는 맞지만 그래도 좀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자연국경선을 추구하는 내셔널리스트로 포장해야지.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내셔널리즘과 직결된 아젠다인거잖아.
내셔널리즘으로 어영부영 괜히 박쥐 노릇 하려다가는 매국노 딱지에 기회주의자 딱지 날아오는 건 순식간이라고.
"다만 기습공격안에 관련해서는 동의해드릴 수 없겠군요."
"어째서입니까?"
"그야 물론 아군은 오합지졸이지만 적들은 훌륭히 조련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설령 벨기에인들이 우군을 돕는다고 한들 적의 원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벨기에를 장악한다는 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습니까? 이는 적어도 혁명 이전의 기강을 회복한 뒤에나 생각해볼 만한 모험이지, 잘 무장한 민병대로는 어림도 없을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는 다들 그럭저럭 인정하겠지.
브리소를 비롯한 지난날의 찬전파 의원들은 여전히 하고 싶은 말들이 굴뚝 같은 눈치들이지만, 대다수는 옳소옳소하면서 고개를 연신 주억거리고 있다.
까놓고 말해서 국민개병제도 아직인데 선방어 후공격도 아니고 기습공격부터 갈기자니, 정신력만 있으면 어떤 전쟁이라도 이길 수 있다는 일붕이도 그런 소리는 안 하겠다.
그리고 심지어 벨기에 합중국을 해방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정복하자며.
그럼 걔네들이 당장은 우리와 손잡고 들고 일어나도 합병선언 들으면 게거품 물면서 싸우려고 덤비지 않을까?
"물론 저들이 우리 시민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려고 하는 건 사실입니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끌수록 아국의 고립은 더욱 심화할 것이며, 무엇보다 재정난으로 인한 경제 붕괴가 가속되겠지요. 하지만 설령 우리가 다가오는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한들 그것이 국운을 건 모험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국제법을 준수하는-."
"봉건 군주들이 제멋대로 입법한 악법을 대체 왜 우리 혁명군이 지켜야 합니까?"
···아니 이보세요 쫌.
암만 국제연맹도 없는 시대라지만 국제법이라는 개념은 이미 만들어진 시대잖아?
제발 문명인답게 굴자고!
"저들이 말하는 국제법이란 자연법에 기초한 합리적인 성문법이 아닌 전쟁을 하나의 유희로써 즐기기 위한 관습에 불과합니다. 그로 인해 죽어갈 힘없는 병사들이나 약탈 따위에 고통받게 될 민중에 대한 고려는 추호도 없지요. 한데 왜 우리가 보편적 다수에 대한 고려가 생략된 압제자들의 법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옳소!!!"""
하지만 어림도 없지.
내가 머릿속으로 기도한다고 문명인처럼 굴어줬으면 천하의 국민공회가 아니다.
"민중의 이름으로 우리 프랑스의 법제를 재정비했듯이 이 참에 국제법 또한 우리 손으로 재정비해야만 합니다!"
"오직 프랑스만을 위한 혁명이라면 대체 우리가 크롬웰과 그 추종자들과 다를 게 뭐란 말입니까!"
"우리의 혁명은 세계제국 로마가 그러했듯이 응당 이 유럽을! 나아가 세계를 위하고 또한 포용하여야만 합니다!"
땅·땅·땅!
"정숙!"
···어지럽다.
열심히 망치 두드리면서 정숙하라고 하는데 이것들이 하나도 들은 척도 안 한다.
차라리 이게 야권에서만 발작하는 거면 입다물라고 눈치라도 줄 텐데 우리 급진당 쪽도 별다른 바는 없다.
저기 신나서 옆 사람들 일으켜가며 만세 외치고 있는 거 에베르랑 생쥐스트랑 기타 등등 맞지?
아니 나도 전략 나폴레옹부터 던질 생각 하고 있던 원죄가 있긴 한데, 우리 친구들은 진짜 더하네.
암만 국제법이 압제자들만을 위하는 악법이라지만 그거 개무시하고 제멋대로 폭주하면 진짜 전 유럽이랑 싸우게 될 판이라는 생각은 안 하는 거야, 아니면 그래도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거야?
[자네가 참게. 하나같이 앞으로 일상적으로 듣게 될 말들인데 벌써 약한 소리 하면 쓰나.]
···이걸 일상적으로 들어줘야 한다고???
미치겠네.
괜히 프랑스 혁명전쟁 때 전 유럽과 싸운 게 아니구만.
루이 16세 단두대도 솔직히 그냥 핑계고 계기지, 어떻게든 살려뒀어도 알아서 전 유럽과 전쟁했을 기세들이다.
아니 애초에 이거 루이 16세 죽인 게 계기가 된 건 맞기는 한거야?
그냥 전 유럽을 아우르는 영토욕이랑 패권욕 때문에 전쟁 치른 거 같은데?
[커흠.]
"정숙!!!"
결국 참다못해 소리를 빽-지른 다음에야 원내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아무렴 명색이 수상인데 이 정도 권위는 서야지.
"정숙은 무슨!"
"아니 수상 각하! 당신도 동의한다고 하셨잖소!"
"그래! 벌써 연말이고 당장 내년이면 전쟁 준비 기간도 끝나는데 고작 논의가 조금 격해진 정도 가지고 뭘!"
"우우! 독재관은 유권자들과의 약속을 지켜라! 인민은 폭군의 피를 갈망한다! 혁명전쟁 만세! 카이저를 단두대로 보내자!"
"···경비대, 저 사람들 지금 좀 너무 흥분한 거 같으니 잠시 휴게실로 끌어내 주십시오."
"""무단정치 결사반대!!!""
···그래, 사실은 내가 아니라 의회 경비대가 강제로 되찾아줬다.
아니 그렇게 데이고 또 독재관이라고 면전에서 비아냥거리는 주제에 왜 아무도 날 무서워하지를 않는 거야.
나보고 폭군이라며?
[고작 우릴 무서워할 친구들이면 애초에 혁명을 안 했지.]
젠장, 또 비겁하게 팩트로 때리다니.
아, 이런 사람들과 협치할 생각을 하다니 내가 진짜로 미쳤었구나!
그냥 독재관 시켜줄 때 얌전히 할걸!
[그걸 이제야 알았는가?]
입 닥쳐, 막시밀리앙.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지금 저 친구들이 진짜로 자연국경선을 꿈꾸는 건지, 혁명 수출을 생각하고 있는 거지, 아니면 나처럼 전략 나폴레옹 투하로 주변국들 삥뜯어올 궁리를 하고 있는지야 아무래도 좋다.
아무튼 결론은 다들 하루빨리 전쟁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호전광 집단이라는 거니까.
그나마 저번 의회는 핏줄 귀하게 태어난 덕분에 의원 노릇 하던 양반들이 수두룩하다 보니 가끔 반동적으로 굴긴 해도 상대적으로 과격함은 덜했는데, 이번엔 모조리 보통선거로 선출되었다 보니 진짜배기 혁명광들만 모였다.
지난번에 내가 반전파를 이끌던 명분부터가 내부의 적부터 단속 하자였으니, 그 내부의 적과 병폐를 해소했으면 이번에는 나도 반대할 명분도 없고.
그 이전에 하루빨리 전략 나폴레옹 투하해서 금태환이건 은태환이건 해야 할 판에 반대할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하다 못해서.
"우선 벨기에 망명정부를 파리로 초대합시다."
"···그런 게 아직 남아있었습니까?"
"뭐, 혁명 당시 정부를 이끌던 요인 중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게 망명정부인 거지요. 그들의 주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수교한 다음 혁명 이후 텅텅 빈 외교공관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웁시다."
이러면 최소한의 명분은 설 테니까.
슬쩍 브리소를 돌아보니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반전파였던 시절부터 저 친구는 망명 인사들 모아다가 전쟁 준비하고 있었으니 도중에 내쫓지 않았다면 당연히 한두 명쯤은 수집해뒀을 거라 짐작했다.
그리고.
"폴란드와의 동맹을 추진합시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미 폴란드 최후의 저항마저 부질없는 패전으로 돌아가고 언제 합병될까만 점치는 망국과 동맹을 추진하겠다고 하니 그야 어리둥절하겠지.
설령 우리가 동맹을 체결한다고 해봐야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없을 테고, 무엇보다 러시아가 장악한 괴뢰정부가 이제 와서 동맹을 구할 리도 없다.
"···그게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당연히 불가능하겠지요."
고로 내가 기대하는 건 실질적인 외교관계가 아니다.
제아무리 부질없고 저쪽에서 보기엔 기괴해도 최소한 우리가 외교라는 걸 고려는 하고 있다는걸 보여주려는 거지.
무작정 영토욕과 패권욕만 내세우면서 전 유럽을 적으로 돌리려 하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의 국가 대전략과 외교적 아젠다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조금이나마 온건한 대외적 인상이다.
사고방식이 좀 색다를 뿐 아무튼 대화도 통하고, 교섭도 가능하다는 인상.
"하지만 어차피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우리의 숙적입니다. 러시아-는 구태여 이쪽에서 먼저 적대할 필요까진 없었으나, 저들이 먼저 우리를 적대하려 들고 있지요. 그럼 저쪽에서 먼저 우릴 고립시키려 하고 있으니 우리도 나름대로 적들을 포위해보려 시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설령 말씀하신 대로 진행되더라도 망명정부와 조만간 망국할 나라가 제대로 된 동맹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런 나라들 말고는 아무도 우리와 동맹하려 하지 않을 텐데 어쩌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남 말할 처지 아닌 거 알지?
나도 전략 나폴레옹이라는 백지수표가 있으니까 정신 줄 꽉 잡고 있는 거지, 아니었으면 아시냐 터진 시점에서 그냥 정신줄을 놓아버렸을 거다.
"만에 하나라도 성공한다면 우리 귀하디귀한 프랑스 국민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더 아낄 수 있습니다. 또, 우리의 혁명이 진정 프랑스만이 아닌 전 유럽의 약자들을 위하고 있음을 과시할 수 있을 테고요. 실패한다고 해봐야 뭐 대단한 돈을 잃는 것도 아니고, 이미 대국관계는 엉망진창이죠. 충분히 시도해볼 법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어떻습니까?
슬쩍 좌중을 둘러보니 이조차 못마땅해하는 이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기는 해도 대놓고 반대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아무튼 저쪽에서 원하는 대로 내년도 개전은 기본전제로 깐 상태에서 전쟁 명분을 어떻게 준비할까를 두고 짱구를 굴린거였으니 어떻게든 넘어가 준 것이다.
···햐, 이 미친 호전광들 진짜.
[지금 자네가 남 말할 처지인가?]
몇 번을 말해.
난 전략 나폴레옹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는 거고, 저 친구들은 믿는 구석도 없이 전쟁부터 외치고 있는 거라고.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전쟁을 지지하는 거랑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아무튼 목표 달성하려면 전쟁해야 하니까 전쟁 지지하는 거랑 같냐?
"그럼, 표결에 부치겠습니다."
표결 결과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압도적인 찬성.
내가 제안한 망명정부 유치 및 동맹 추진 같은 것들보다도 내년도 군비증강과 애국채 추가발행, 국민개병제 조기도입 추진 같은 게 더 많은 찬성표를 끌어모으는걸 보고 있자니 진짜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아니 나보고 독재관이라면서.
의회가 독재관보다 과격하고 호전적이면 어쩌자는 건데?
[어쩌긴. 고생해야지.]
오냐, 그래.
나 혼자는 절대 안 죽는다 이놈아.
주여, 이 집 주인 놈 지옥 보내고 저도 같이 지옥 가겠습니다.
아니, 여기가 지옥인가?
***
그래, 여기가 지옥이로구나.
온통 포연과 시체로 가득한 마르쿠셰프를 둘러보며 폴란드군 중장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는 절망에 잠겼다.
그들이 패하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끝내 러시아군을 무찌르고 승리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조국은 적국 러시아에 무릎을 꿇고, 망국의 장수가 될지언정 조국과 함께 죽을 작정으로 몸소 총알이 날아드는 적진을 향해 돌격하여 용맹하게 싸웠건만.
그들이 이기고야 말았다.
나라는 패하고, 머지않아 망국을 맞이할 텐데 그들만 승리하고야 말았다.
그래서 전황이 바뀌었는가?
그의 조국은 이번 승리 덕분에 단 1년이라도, 단 하루라도 더 연명할 수 있을까?
그조차 아니었다.
실로 무의미하고, 끔찍한 승리가 아닌가.
조국과 함께 죽지도 못하고, 조국을 구하지도 못하고 단지 살아남았을 뿐인 승리라니.
패주하는 러시아군을 바라보며 유제프는 남몰래 피가래를 삼켰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장군?"
그의 부관이 질문을 던졌다.
처참하고, 지쳤으며, 쇠약하여 갈라진 목소리였다.
"차라리 바르샤바로 가시죠. 아직 싸우고자 하는 국민이 남아있으니 저 매국노들만 축출하면 며칠은 더 싸울 수 있을 겁니다."
"그럼 그게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연방인가?"
유제프가 한숨을 몰아쉬었다.
"설마하니 나더러 이 나라의 차르가 되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하오나 각하."
"그만."
삼촌 폐하께서 정하신 일이다.
그가 폐하의 조카라고 하여 이제 와 쿠데타를 도모한다면, 연방의 새 군주가 되어서 러시아와 맞서고자 한다면 장차 이 나라가 어찌 되겠는가?
이미 망국이라는 재난을 맞이한 조국에게 왕위 다툼이라는 근심까지 떠안겨 줄 수는 없었다.
"설령 제아무리 한심하고 추악한 이들이라고 한들, 그들이 이 나라의 의회임을 잊지 말게."
부관은 대꾸하지 않았다.
다들 승리하였음에도 만세를 부르긴커녕 그저 기진맥진한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정녕 러시아에 투항하여야만 하는가?
조국을 지키고, 국민을 지키던 그들이 이제는 저 압제자들을 지키기 위하여 총검을 들어야 하는가?
아니.
뚝.
유제프는 주저 없이 장군 견장을 어깨에서 뜯어버렸다.
순금으로 만들어진 금실이 그의 억센 손아귀에서 바스러졌다.
"이만 떠나세나."
어디가 되었건 간에.
침략자 러시아와, 배신자 프로이센과, 배은망덕한 오스트리아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곳으로.
망국의 개선장군에게 허락된 운명은 오직 죽음, 아니면 해방된 조국에서의 개선식뿐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