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54)

마지막 준비

"그럼 하다못해 경이 믿을 수 있는 심복을 감시로 붙여주게."

루이 16세.

아니 루이 오귀스트가 간절히 고개를 조아렸다.

이 양반도 참 변하지를 않네.

"경도 친인척의 장례라면, 기일이라면 응당 참여할 것 아닌가. 어찌-."

"워워, 진정하시오. 형님 폐-아니 형님. 어쩔 수 없다는 거 아시잖소."

그리고 그를 막아선 건 중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멀리 사르데냐까지 갔다가 돌아온 프로방스 백작.

이미 혁명의 나팔수로 전락하면서 사교회에서 배부르게 배신자 소리를 들어서 그런가?

사람 좋은 시늉하기 좋아한다는 사전정보와는 다르게 어째 능구렁이 같은 인상의 섭정님이었다.

"무엇보다 이런다고 우리 귀여운 조카 폐하님께 도움이 될 리도 없다는 거 알잖소. 응? 마마-가 아니라 형수님께서 조용히 계시는 게 괜히 그러시는 거겠소? 자자, 그러니까 진정하시고 이만 찬물이라도 자십시다. 아니면 이 아우가 모처럼 포도주라도 한잔 따라드릴까?"

···그, 저 사람 지금 어째 일부러 호칭들을 몽땅 틀리고 있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아마 제대로 본 게 맞을걸세.]

그렇지?

조금 전에 형님 폐하도 그렇고 은근히 루이 오귀스트에게 주제를 알라고 돌려서 말하고 있다.

아마 지금 이 자리의 섭정은 나고, 당신은 루이 17세의 친부일 뿐 더는 국왕도 뭣도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는 거겠지만-.

"하지만 기일미사라잖은가!!!"

"그렇다한들 우리 집안일이기 이전에 나랏일이요. 형님도 아시잖소?"

결국 끝까지 알아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알아들을 생각이 없었는지 루이 오귀스트는 프로방스 백작이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한 뒤에야 한결 시무룩해진 모습으로 시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물러났다.

뭐, 아직 날씨가 덜 풀려서 요즈음에는 넘쳐나는 게 찬물이니까 알아서 기분 풀겠지.

"내 형님을 대신하여 사과드리겠소, 로베스피에르 경."

프로방스 백작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어째 최근에 본 귀족 중에서 끝까지 뻣뻣하게 군 게 라파예트 한 명 뿐이구만.

"아직 폐하께서 어리셔서 사정을 모두 이해하진 못하실 거요. 다만 내 섭정으로서 최선을 다하여 왕실에 양해를 구하여볼 테니, 의회에선 모쪼록 사소한 감정변화에 너무 휘둘리지 말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려주길 바라오."

"물론입니다, 전하. 의회는 결코 외압에 굴하지 않고 프랑스의 영광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옵니다."

루이 오귀스트를 먼저 봐서 그렇겠지만 선녀가 따로없네.

짧은 공방이었지만 저 양반은 국왕의 어린 나이를 핑계 삼아 주도권을 주장하면서 본인이 섭정이라는 점, 이 문제가 본질적으로 왕실의 가족사라는 점, 그리고 의회의 우민정치를 꼬집었고 나는 그런 섭정의 주장을 외압이라고 잘라냈다.

겸사겸사 프랑스의 영광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법통파로도, 공화파로도 해석될 여지를 남겼고.

설마 저 양반 친혁명적 언행으로 사교회에서도 외면받고, 여기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기회주의자라는 평판까지 받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권력을 원하는 건가?

[차라리 사자가 고기를 끊지, 정치가가 권력을 끊을 수 있겠나?]

···씁,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이 없네.

그럼 뭐야.

저 섭정님은 진짜 친 혁명파 왕족으로서 정점에 올라볼 계획을 짠 건가?

농민들의 대변자 프로방스 백작?

[글쎄, 그건 나로서는 좀 상상이 잘 안 가는데···.]

어, 난 상상 잘 가는데.

이것도 문화차이인가?

자고로 농자천하지대본이고 천명을 잡으려면 먼저 민심부터 등에 업어야 하는 거지 암암.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우리 프랑스의 농민 중 국왕이 삼촌의 기일미사에 참가를 허락받지 못하여 전쟁 위기가 초래되었다고 하면 다들 카이저를 편들었으면 들었지, 파리를 동정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을걸세."

···잠깐. 이것도 공방인가?

잠시 고민해 봤지만 모로봐도 그런 기미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기왕 한배를 탄 김에 제발 어처구니 없는 실수만 좀 줄여달라는 호소에 가까웠지.

하기야, 나 같아도 그동안 혁명정부의 전적을 생각해보면 불안해서 한두 마디라도 더 참견하고 싶어지겠지만도.

"그러니 제발 부탁하건대, 또 말도 안 되는 자충수 두지 말고 선전을 할 거면 최소한 뭔가 다른 핑계를 대보는 노력이라도 해주게. 응? 저 오스트리아 놈들이 아직 사춘기도 안된 폐하께 말도 안 되는 강행군을 강요하려 했다던가, 아니면 대리인을 보내겠다고 했더니 무엄하게 굴었다던가.

이런 식으로 좀 파리 놈들만 듣고 분노할 이야기 말고 우리 농민들도 같이 공분해줄 만한 핑계를 대보란 말이야. 폐하께서 아직 어리시니 핑계를 대려면 얼마든지 댈 수 있잖은가."

"뭐,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그래, 정말이지 듣기만 해도 든든하군."

거짓말.

전혀 든든해 하는 눈치가 아니고만 뭘.

시적시적 돌아가는 우리 섭정님의 뒷모습이 영락없이 내 팔자야-라고 말하고 있다.

[그, 안 잘라내도 되겠나?]

뭐가?

[저 프로방스 백작 말이네. 적당히 나팔수 겸 간판으로 쓰고 버리려고 불러온 거지, 농민들을 대변하면서 세를 기르라고 불러온 게 아니잖은가?]

아니, 오히려 잘됐지.

어차피 지금 원내에 있는 놈 중 농민들 신경이나 써주는 놈이 몇이나 된다고.

다들 도시 부르주아지 아니면 상퀼로트의 대변자지 민중파라고 자칭하는 놈 중에서 실제 프랑스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의 대변자 하겠다고 나선 놈은 아무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파리의 수상으로서 방데의 공상적 사회주의 모델을 본받으라고 해봐야 프랑스의 농민 중 몇이나 따라줄까.

그럴바에야 차라리 보수적인 농민들이 좋아할 부르봉 왕가의 섭정님께서 최초의 법통파 의용군이 궐기한 방데 지방을 선전하도록 두는게 맞다.

그럼 자크 루 동지를 비롯한 이쪽 방면에 관심 많은 친구가 하나둘 섭정에게 힘을 더해주건, 방법론을 흉내내며 맞서건 하면서 상호보완이 이뤄질 테니까.

[그러다가 정말로 저 섭정에게 주도권을 내주게 된다면?]

카이사르-카이사르-카이사르 삼두정치가 조스로 보이십니까?

심지어 그 중 으뜸인 전략 나폴레옹은 내 사람이다.

저 양반이 또 저번처럼 농민들 선동해서 반동주의 퍼트리고 다닌다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잘라내야겠지만, 지금처럼 토지개혁에 앞장서는 농민혁명의 상징으로서 힘을 기르겠다면야 마다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저 섭정님의 야망을 꺾어서 그나마 농민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할 최후의 수단마저 없애버리는 것보단 적당히 티키타카 해주는 게 자칫 놓치기 쉬운 실무자들의 목소리나 소수파 의견 같은 것들까지 반영할 수 있을 테니 훨씬 건전하지.

아무튼 대외적으로는 우리 둘 다 법통파라는 한배를 탄 몸이니까 도농협치라는 측면에서도 훨씬 그럴싸해지고.

[···이해하기 어렵군.]

뭐, 나도 설명하자면 길어지니까 당분간은 권력 분산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두셔.

이제 막 역사의 선형적 발전도상 이야기 나와야 할 시대에 다원주의나 상대주의 설교할 생각은 없으니까.

하여튼 앞으로 원내 사이다패스에 저 섭정님까지 감당하려면 뼈가 시리겠군.

어떻게 된 게 내가 지금껏 만나본 루이 오귀스트의 형제나 방계 중에서 왕재가 없는 건 루이 16세 한사람 뿐이라는 게 참 기가 차다.

진짜 혁명은 하늘의 뜻이었나?

똑똑.

"들어오시게."

"위원장 동지, 생쥐스트입니다."

그래도 저 섭정님이랑 시민 루이 오귀스트도 돌아갔겠다 한동안은 조용하겠지-라고 안도하기도 잠시.

별안간 노크와 함께 생쥐스트가 기어들어 왔다.

참 저 친구도 어떻게든 나한테 한 번이라도 더 얼굴 비치려고 안달이라는 점에서 나보과란 말이야.

나보는 출세가 목적이고 이 친구는 그냥 어떻게든 단 1초라도 내 곁에 머물려는 게 목적이라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지만.

"마침내 런던의 답신이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드디어 심부름꾼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월척을 물어왔군.

"그래, 조건은?"

"하노버 선제후국의 안전을 보장할 것, 그리고 벨기에의 주권을 보장할 것. 이것 두 가지였습니다."

"···가장 귀찮은 조건을 골랐군."

차라리 뭐 해방만 하고 바로 철군하라던가 절대로 합병하지 말라던가 이런 거였으면 알기 쉽기라도 하지.

하노버야 영국과 동군연합이니까 당연한 거라고 쳐도 주권 보장이라니 결국 상황 보고 지들이 알아서 해석하겠다는 소리잖아.

막말로 이러면 나중에 민주적으로 선거해서 선출된 정부가 우리 프랑스와 동맹하겠다고 나서도 괴뢰정권 타령하면서 양국 간 협의를 어겼다고 염병할 게 뻔히 보인다.

[아무렴 해적 천성이 어디 가겠나?]

누가 아니래.

"하여간 해적 놈들 아니랄까 봐 간잽이질 못해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나."

"알겠습니다. 즉시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아니아니, 그냥 혼잣말이야! 이봐! 이 친구야, 당장 그만두지 못하겠나!!!"

···어지럽다.

생쥐스트를 만날 때마다 느끼는 건데, 이 친구는 로베스피에르에게 한정해서 지금 나와 대화하고 있는 상대가 같은 사람이라는 인지를 빼버리는 경향이 있다.

저번에 선거유세 끝나고 난 다음에는 나더러 「시대정신」이라던데-아니 제가 무슨 헤겔이냐고.

이 사람도 사람이니까 농담을 할 거다, 거짓말을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 하나 없이 무조건 숭배하려고 드니 만날 때마다 몸에서 사리가 하나씩 만들어지는 느낌이다.

[내숭 떨기는.]

입 닥쳐, 막시밀리앙.

"아무튼, 저 해적들에게는 우선 외무위원회에 의결을 부쳐보겠다고 전하게."

"···괜찮겠습니까?"

"당연히 괜찮고말고. 당장은 저 해적들이 합스부르크와 편짜고 덤벼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야."

물론 우리에겐 전략 나보가 있고, 실제로 러시아 원정전까지는 거의 이기기 직전까지 갔으니까 밀리진 않겠지만 그래도 피해나 피로를 줄일 수 있다면 좋잖아?

어차피 우리가 약속을 지킬 거라곤 저 친구들도 믿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약속을 지킨다고 저쪽에서 지킬 생각도 없을 거다.

결국 이번 협의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다음 어떻게 할지는 일단 벨기에부터 독립시키고 난 다음에 생각하자는데에 양국이 동의했다는 것.

다시 말해서, 다가올 전쟁에선 해전은 신경 끄고 오직 육전에만 몰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 혹시 런던이나 암스테르담에서 벨기에 망명정부와 독자적으로 접촉하려 시도하든가 한다면 내 지시를 기다릴 필요 없이 조치부터 한 다음 사후 보고하게. 피는 우리가 흘리고 떡은 해적들이 독식하게 둘 순 없지."

"명 받들겠습니다, 위원장 동지."

꾸벅.

···그냥 고개만 가볍게 까딱이면 된다니까 아주 절을 할 기세군.

에휴, 됐다.

더 지적해봐야 내 입만 아프지.

그렇게 생쥐스트까지 떠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집무실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래서, 자신 있는가?]

당연히 없지.

질 자신이.

원 역사처럼 무지성으로 루이 16세 목 자르고 자연국경선 타령하면서 전 유럽이랑 전쟁 치르는 것도 아니고 신성로마제국만 핀포인트 저격이다.

그것만 해도 북이탈리아에 독일에 발칸반도에 꽤 어마어마하긴 한데, 저놈들도 모든 병력을 이쪽에 집중시킬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솔직히 말하자면 전쟁 그 자체보단 원내에서 뇌절할게 더 걱정이다.

지고 있으면 지고 있는 대로 폭동 일으키고 이기고 있으면 이기고 있는 대로 레벤스라움 타령할 게 뻔한 친구들이라서.

[그거야 뭐···자네가 자초한 일이니, 자네가 감당해야지.]

거참 고맙수다.

빈말이라도 위로는 절대로 못 하시겠다 이거지?

여하튼, 이로써 내 선에서 준비할 수 있는 건 모두 준비됐다.

그러니까 슬슬 수금이나 해보자고.

솔직히 내 손에 전략 나폴레옹이 있는데 이걸 어떻게 참아?

***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그, 이런 이야기하기 좀 그렇네만. 오스트리아와 동맹 말이야, 없던 이야기로 할 수는 없겠나?"

"폐하,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솔직히 우리까지 프랑스와 전쟁할 이유가 하등 없잖은가. 보아하니 파리도 슬슬 진정세인듯한데, 이만 물러남이 어떻겠는가?"

"폐하···."

또 이 소리인가.

프로이센의 신료들은 언제나와 같은 뚱보식충(der dicke Lüderjahn)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허튼소리에 말없이 골머리를 싸맸다.

프리드리히 대왕께서 제아무리 여인의 풍만함보다도 사내의 탄탄한 복근을 선호하셨다지만 국왕으로서 눈 딱 감고 자손 한 사람만 남겨주셨어도 이 쪼잔한 뚱보가 보위에 오를 일은 없었을텐데.

저마다 남몰래 한숨을 삼키는 와중 외무장관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간언을 올렸다.

"하오나 폐하, 이미 안스바흐와 바이로이트를 양도받으셨잖습니까?"

"커흠, 그랬었나?"

"예. 그들이 폭동을 진압하지 못하여 먼저 아조에 원병을 청했다고 하나, 빈의 카이저가 이를 용인하지 않았더라면 아조가 신영토를 합병하기란 불가능하였을 것이옵니다. 그 은혜를 벌써 잊으셨사옵니까?"

프리드리히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괜히 제 휑한 두피를 쓸어올리며 딴청을 피웠을 뿐.

불과 1년 전 폴란드와의 동맹을 배신하고 영토마저 빼앗았듯이 오스트리아까지 배신할 속셈이라는 걸 눈치챈 신료들이 저마다 뒷덜미를 붙잡는 와중 외무장관이 재차 간언을 올렸다.

"어찌 저 허수아비만도 못한 폭도들을 두려워하시나이까?"

그제야 프리드리히가 신료들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전쟁장관 또한 기다렸다는 듯이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실로 그러하옵니다. 폭동 이래로 왕국군은 유명무실해졌고, 저들이 국민군이라 부르는 건 고작 몇 년 사이 급조한 민병대일 뿐이오, 연맹병이라는 족속들은 발을 맞추어 걷는 것조차 똑바로 해내지 못하는 도적무리와 다른 바 없사옵니다. 어찌 폐하께서는 저 오합지졸들을 두려워하십니까?"

"흠흠, 그렇단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하지만 저들에겐 라파예트가 있잖은가."

그리고 당신에겐 프리드리히 대왕께서 남긴 유럽 최강의 프로이센 육군이 있지!

지금 대왕께서 남기신 기라성 같은 장성들과 참모들보다 라파예트 따위가 더 대단하다는 거야, 뭐야!!!

그래도 어전이라는 사실을 몇 번이고 상기하며 어떻게든 이 두 마디를 참기 위해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한 전쟁 장관이 설명을 덧붙였다.

"라파예트가 어찌 아조와의 대결을 우선하겠습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폐하, 벨기에 평야가 있지 않습니까. 만에 하나 저들이 공세에 나선다면 풍요롭고 불안정한 벨기에 평야를 우선하지, 어찌 아조를 공격하려 하겠습니까?"

"그럼 더더욱 오스트리아의 전쟁에 괜히 휘말려들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아니 진짜 좀.

당장 작년에 폴란드 배신하고 올해에 오스트리아까지 배신하면 도대체 누가 앞으로 우리 프로이센과 동맹하려 하겠냐고.

다들 이를 악물며 그 두 마디를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내던 찰나.

"···커흠."

그제야 신료들이 애써 울화가 터지려는 걸 참아주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프리드리히가 헛기침하기 시작했다.

이미 충분히 늦긴 했으나, 다행히도 그가 보위를 잃어버릴 만큼 늦진 않았다.

그게 프로이센 왕국의 복인지, 흉인지야 차치하고서 말이다.

"···지난날 파리에서 바르샤바와 동맹을 꾀하였음을 잊지 마소서."

외무장관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린 이미 저들의 사절단을 모욕하며 내쫓았고, 그 뒤에도 파리는 뜻을 꺾기는커녕 폴란드 의용군을 꾸리며 폴란드 해방을 부르짖고 있사옵니다. 한데, 아조가 이제 와 합스부르크를 배신한다고 한들 파리가 베를린과 화친하려 하겠습니까?"

신료들의 최종권고는 그걸로 끝이었다.

더는 아무도 프리드리히에게 간언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부추기거나 힐난하지도 않았다.

다만 아무 말 없이 저 옹졸한 뚱보를 빤히 바라보며 결단을 내리기를 기다렸을 뿐.

"아, 알겠네. 날인하면 될 것 아닌가."

그제야 뚱보식충-아니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잘 들리지도 않는 자그마한 소리로 쉴 새 없이 구시렁대며 빈에서 날아온 고풍스러운 문서에 밀랍 도장을 찍었다.

쾅.

곧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양국이 프랑스와의 공식적인 전쟁에 돌입했음을 알리는 선전포고문이 효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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