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154)

신화

원내.

"지금 당장 영국에 선전포고합시다."

아니 이 미친놈들아 제발 쫌.

"스페인, 네덜란드, 사르데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카이저에게 부역한 제노바는 당연하고, 우리 프랑스 민족의 적법한 생활권역을 도둑질한 스위스에도 선전포고합시다!"

"구태여 선전포고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런 외교적인 절차 자체가 저 폭군들이 제멋대로 만들어낸 악습이잖습니까? 우리가 앙시앵 레짐에 선전포고를 한 뒤에 바스티유를 습격했던가요?"

"옳소, 옳소! 자고로 힘이 존중을 만들어내는 법! 우리 무적의 혁명군이 도대체 왜 폭군들의 악습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이오!"

"형제들이여, 마침내 때가 왔습니다! 로마를 재건할 그날이! 카이사르의 잘못을 바로잡고, 다시 한번 전 유럽이 단일 공화정의 기치 아래 하나 될 그 순간이! 우리의 혁명은 처음부터 로마를 재건하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띤 과업이었던 것입니다!!! "

"""혁명 만세! 프랑스 만세! 팍스 로마나 만만세!!!"""

···틀렸어, 완전히 다들 맛탱이가 갔다.

이미 이렇게 될 거라고 각오하긴 했지만 연일 계속되는 승전보에 원내 찬전여론은 수습할 수 있는 선을 아득하니 넘어선 지 오래였다.

벌써 혁명 전부터 자연국경선 타령하던 놈들이 이제는 아예 로마 재건이라는 헛소리를 진지하게 떠들기 시작했으니 말 다했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나는 야욕과 광기가 눈에 다 선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뭐···나 같아도 같은 입장이었다면 저러고 있었을 것 같긴 하군.]

브루투스 너마저도?!

[반대로 생각해보게.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대표적인 유럽의 육군대국이야. 루스나 튀르크야 애초에 유럽이 아니니까 논외로 치고, 직전까지 지지리 궁상이었던 우리가 그 두 나라를 동시에 상대하면서 연전연승하고 있으면 헛바람이 안 들게 생겼나?]

보자, 그러니까 한국에 대입하자면 망국 직전이었던 대한제국에서 혁명이 터져서 이에 맞선 반한국 포위망이 만들어지고 다시 혁명군이 개전과 동시에 청나라와 일본제국을 쥐어패고 있다는-흠.

그게 과연 현실성이 있는 이야기인가 와는 별개로 확실히 뽕이 찰 것 같기는 하네.

그럼 자연국경선 타령은 고구려 고토 수복이라고 생각하면 되나?

로마 재건 타령은 우리로 치면 천명 계승인 거고.

그렇게 생각하면 확실히 이해 못 해줄 건 아니긴 한데.

"더 지체할 필요 뭐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 저지대를 합병합시다!"

"저지대로 되겠습니까? 우리 프랑스의 위대한 영웅! 나폴레옹 장군께 라인란트의 혁명 지사들을 도와 합병 여론을 도모하자고 하시죠!"

"오오! 과연! 그럼 마세나 사령관에게도 토스카나에서 멈추지 말고 곧장 로마냐까지 남하하라고 전합시다! 교황을 납치해와야지요!"

"으하핫! 이렇게 쉽게 교권 투쟁이 해결될 줄이야! 정말이지 혁명군 만세입니다, 만세!"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지 이 사람아.

이거 진짜 어쩔 건데.

[커흠.]

아니 뭐 하다못해 뭔가 간간이 합리적인 이야기가 나와야 몇 마디 거들건, 아니면 수상으로서 중재하건 하지.

개나 소나 입만 열면 노빠꾸로 국제외교에서 영구추방 당할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으니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교황 납치는 뭐야.

전 가톨릭 세계랑 원수질일 있냐?

[어···그게. 고작 교황 납치로 가톨릭 교회와 원수질 거면 이미 우리 프랑스는 수 세기 전에 영구 제명당하고도 남았을걸세.]

심지어 납치 시도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햐, 역시 괜히 유럽중궈가 아니구나.

혁명 때문에 외교가 엉망진창이 된 줄 알았더니 처음부터 그냥 외교보단 주먹이 앞서는 깡패였구만.

[···커흠!]

여하튼 당장 전선으로부터 속속 파리로 전해 들어오고 있는 소식들은 더할 나위 없다.

우선 우리의 유망주 나보코인은 순조롭게 라인란트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으며 핵 추진 로켓 달고 화성으로 날아가는 중.

보다 못한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과 상회가 사병과 용병을 몽땅 끌어모은 토벌군마저 박살을 내버리면서 글자 그대로 신화를 써 내려가고 있다.

제아무리 이쪽은 국민군이고 저쪽은 돈만 보고 모여든 용병이라지만 세배를 훌쩍 넘는 적군을 야전에서 격파했으니 그야 신화가 될 수밖에.

정확하게는 야전 한 번에 격파한 건 아니고, 적들이 지휘체계가 각자 따로 노는 연합군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신들린 기동력으로 쪼개놓은 다음 총 여섯 번에 걸쳐서 연달아 격파한 거라는데···.

솔직히 설명을 듣고도 어떻게 이긴 줄은 알겠는데 나로서는 그게 왜 가능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무슨 맵핵이라도 킨 것도 아니고, 본인에게 전자통신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적진 한복판에서 그 지역 토박이들을 상대로 본인에게 유리한 전장에서만 싸우는 게 어떻게 가능한 건데.

심지어 이 여섯 번에 걸쳐서 싸워 이긴 게 뭐 한 2, 3일에 걸쳐서 끝낸 것도 아니고 새벽같이 출격해서 해가 저물기 전에 모조리 항복시키고 또 패주 시켰단다.

덕분에 제아무리 카이저 직속의 제국군이 아닌 제후-상회 연맹이었다지만 고작 비스바덴 전투 한 번에 2만하고도 수천에 달하는 대군이 와해당한 라인란트 일대는 그야말로 무주공산 화.

이 패전의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날로 나라를 포기하고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 카이저에게 영지를 가져다 바친 제후들도 수두룩했단다.

물론 이 비스바덴 전투의 신화적인 승리에 열광한 독일계 의용군들도 하루가 다르게 훌쩍 불어나고 있고.

마침내는 이 나폴레옹 사단-아니 군단이 근처에 나타났다는 소문만 돌아도 다들 알아서 성문 활짝 열고 나와서 필요한 물자나 인력을 가져다 바치는 지경이라는데, 내가 꽂아 넣긴 했지만 진짜로 뭐라 할 말이 없다.

괜히 전략 나폴레옹이 아니구나.

비록 상대가 뭐 이름난 명장이나 정예병이 아니라 아무렇게나 모여든 어중이떠중이들이기야 했지만, 3배에 달하는 적을 상대로 3배에 달하는 교환비를 기록한 게 군신이 아니라면 대체 뭐란 말인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아싸 나폴레옹, 번역기 베르티에 유머글을 봤던 기억에 냅다 참모장으로 꽂아 넣어줬던 게 괜한 수고가 아니었다는 뿌듯함과 함께 한편으로는 두려움마저 들 지경이다.

진짜로 나중에 가면 나도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있을 것 같아서.

[그래, 이제 좀 후회되나 보지?]

후회는 개뿔이.

그래서 전략 나폴레옹 없었으면 이런 오합지졸들로 초전부터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을 것 같아?

아무튼 이 전략 나폴레옹이 비스바덴 전투를 시작으로 군사적 신화를 써 내려가면서 덩달아 용기백배한 다른 전선들도 연달아 승전보를 전해오고 있었다.

시작은 초전의 패배를 설욕하는 데 성공한 뒤무리에였다.

뭐, 보고서에 나온 것만 봐도 아군 사상자가 적군 사상자의 5배는 훌쩍 넘던데···아무튼 본인이 승리했다고 했고 또 병사들도 똑같이 증언했으니 승리인 거겠지.

아무튼 이 2차례에 걸친 스트라스부르 전투 끝에 페르디난트가 이끄는 연합군은 알자스 공략을 포기하고 라인란트로 후퇴.

다시 진지를 박차고 나온 뒤무리에가 이를 끈덕지게 따라붙으면서 나폴레옹이 종횡무진할 시간과 공간을 열심히 벌어주고 있다.

어째 싸울 때마다 평균적으로 가볍게 3 대 1, 4 대 1, 어쩌다 양호하면 2 대 1 뭐 이런 식으로 깨지고 있긴 한데···.

어떻게든 페르디난트가 나폴레옹을 찌르지 못하도록 열심히 따라붙는 건 충분히 해내고 있고, 또 그렇게 죽어 나가면서도 군단을 무너트리지 않고 있다는 건 높이 평가해줄 만하다.

어차피 이쪽은 남아도는 게 병사고 사람이니까 그렇게 막 죽어 나가도 전선이 무너지거나 하지 않는다면 뭐 대단한 피해는 아니기도 하고.

오히려 교환비로는 압도하고 있는 적군이 갈수록 누적되는 인명피해에 질겁하면서 몸을 사리려 하고 있다.

이런 점도 유럽중궈 같구만.

[쓰읍, 어째 칭찬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그야 칭찬하는 게 아니니까.

하여튼 뒤무리에가 모루의 역할을 톡톡히 해주면서 트루아에 진을 친 라파예트는 예비대를 이끌고 저지대 전선으로 이동.

그동안 열심히 보급선과 진지를 구축한 켈레르만과 협동해서 쉴 틈 없이 합스부르크의 저지대 주둔군을 두들기고 있다.

비록 양쪽 모두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또 질적으로는 연합군이 압도적인 만큼 신화를 써 내려가는 나폴레옹과는 달리 여긴 교환비가 잘 나와봐야 1대1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라파예트가 나폴레옹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바로 점이나 선이 아닌 면 단위 공세를 펼치고 있다는 것.

물론 근본적으로 각자 지휘하는 부대단위가 방면군과 사단이라는 차이점도 있겠지만, 하루에 많아야 한번 교전하는 식인 나폴레옹과는 달리 라파예트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것도 각기 다른 전장을 침투하고 다시 병력을 회수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덕택에 처음에는 물샐틈없이 완벽하다던 적 방어선은 사방에서 침투해오는 라파예트 군을 막기 위해 갈수록 넓어지고 또 얕아지면서 빠르게 해체되어가는 중.

이에 따라 벨기에 독립운동을 견제하던 치안 병력까지 덩달아 뿔뿔이 흩어지면서 적 저지대 방위선은 제대로 된 대규모 회전조차 치르지 못한 채 내부적으로 무너져가고 있다.

미국 독립전쟁 때 뭔 수로 민병대라는 소리도 아까운 대륙군으로 레드코트를 무너트렸나 했더니 저런식이었구만.

일단 한판 제대로 붙기만 하면 말도 안 되게 크게 따오는 나폴레옹과 대단한 한방은 없어도 대전략 단위에서 조금씩 적을 무너트리는 라파예트.

이들 중 누가 더 나은가 하는 개인적인 평가와는 별개로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북이탈리아의 마세나는···.

[바르바리 해적이지.]

···부정은 못 하겠다.

솔직히 내가 아니라 라자르 카르노, 그 친구가 이탈리아 쪽으로 보낼 사람이 없어서 그 근처에서 가장 큰 의용군 부대를 이끌던 양반을 전쟁위원장으로서의 재량으로 급하게 발탁한 건데.

지금까지의 활약상만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해적이다.

혁명 전에 퇴역하고 밀수업했던 양반이라 원래부터 바르바리 해적들과 면식이 있었다는데, 암만 그래도 그렇지 대놓고 포로들로 노예무역하고 온갖 문화재란 문화재는 죄다 약탈해오고 있는데 이게 어떻게 혁명군이야.

아무튼 그렇게 해서 번 돈은 파리에 꼬박꼬박 보내오고 있고, 전쟁 대금 마련할 때 덕을 본 적도 많으며 또 그래서 좋아하는 친구들도 많지만 난 솔직히 긍정적인 평가는 못 해주겠다.

그나마 나폴레옹은 라인란트의 부자나 귀족들만 털고 있지만 저 친구는 차별 없이 깡그리 털고 있잖아.

토벌군이 몰려들 때마다 박살내고 있는건 똑같지만.

자, 아무튼 그래서 전황은 순풍만법인데.

"나폴레옹 그는 군신이야!"

"그렇지만 선생님들, 프랑스는 로마 그 자체란 말이외다!"

"아직도 분위기 파악들이 안 되시오? 진짜로 유럽 딸 수 있다니까!"

"카이저! 어서 서명하시오! 신성로마제국은 그저 게르만 대추장국이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문제는 저 원내의 사이다패스들이다.

우리의 적은 간부, 가 아니라 국회의원인 거지.

솔직히 이 친구들이 오늘처럼 폭주할 때마다 비스바덴 전투의 영웅 나폴레옹이 내 파벌 사람이라는 걸로 빈번히 합죽이 만들었던지라 이제 와선 나폴레옹 욕도 못 하겠다.

그 친구가 신화를 써 내려가지 않았다면 이 사이다패스들도 로마 타령까진 안 했겠지만 반대로 나폴레옹이 신화를 써주지 않았다면 내 발언권까지 다수의 폭주에 덩달아 묻혔을 테니까.

좋게도 나쁘게도 나폴레옹 탓이고 덕이네, 거참.

[그러게, 그 카이사르 놈 싸고돌아서 좋을 거 하나 없데도.]

입 닥쳐, 막시밀리앙.

"정숙."

땅·땅·땅!

아무튼 내가 정숙하라고 해도 들은 척도 않던 개전 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망치를 들자마자 조용해졌다.

자고로 정치인의 권위는 그가 이룩한 업적과 일치하는 법.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다는 점, 그리고 저 나폴레옹을 발탁해서 요직에 꽂아 넣은 당사자라는 점이 전시 수상으로서의 권위를 완성해준 것이다.

뭐, 이것 때문에 나더러 독재관이라고 욕하는 놈들도 그만큼 많아졌지만 그건 차치하고서.

"유럽 정복도 좋고, 로마 재건도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보다도 중요한 논의가 있을 텐데요."

"아니 전쟁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뻔한 볼멘소리.

에베르 흉내나 내면서도 그 근처에 가보지도 못한 우리 열화판 친구를 위해 방긋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물론 민주 공화정입니다."

정적.

새삼스러운 언급에 저마다 눈치를 살피는 사이 나는 배에 힘을 주고 더욱 크게 외쳤다.

"이제 우리 혁명정부가 바스티유 습격 이래로 비로소 전 프랑스에 내세울 만한 공훈이 생겼으니 바야흐로 전 국민을 상대로 민주공화국 건국을 공론화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옳소!!!"""

그제야 사방에서 환호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야 우리가 그동안 법통파라고 자칭해왔다지만 누가 그걸 진심으로 믿었겠는가?

귀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덕분에 의원 노릇 하던 제한선거제 시절의 의회라면 모를까, 파리와 그 근교만을 위한 보통선거제 실시 이후 온통 급진당이나 급진당보다 더한 친구들만 모인 이번 의회에 왕당파는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로베스피에르가 혹여 진심으로 루이 17세를 내세운 입헌군주정에 안주하려는 것 아닌가 의심하고 있을 시기에 딱 맞추어 내 입으로 먼저 민주 공화정을 꺼냈으니 환호가 터져 나올 수밖에는 없었다.

벌떡.

당장에 한껏 흥이 오른 생쥐스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표결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공론화하자고 했지, 의회에서 표결하자고는 한마디도 안 했다.

그리고 지금 원내 표결로 끝내면 백이면 백 만장일치로 왕정 폐지잖아.

"우리 프랑스는 지난 개헌 이래로 모든 성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인권선언의 대의를 받들어 진정으로 만민의 생각과 뜻을 대표하는 민주적인 정부를 만들어놓겠다고 국민이 보는 앞에서 선서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진정 전 프랑스를 대표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예. 지금 우리는 고작해야 파리와 그 근교의 의회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저 파리 너머에 아직도 흘러넘치는 게 왕당파인데 원내가 공화파로 가득 찼다는 게 무슨 의미겠어.

이런 판에 의회에서 왕정 폐지를 결의해봐야 기뻐하는 건 파리 하나 뿐일 거다.

그럼 선하신 국왕과 섭정을 위해 국민개병제까지 참아준 농민들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일단 말로 하자고 하지는 않을걸.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병사들은 조국을 위하여, 혁명을 위하여, 민주주의를 위하여 압제자에 맞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싸우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와 그들을 배신한다면 대체 무슨 낯으로 죽은 자들을 볼 텐가.

"그들이 생각하는 조국이란 공화국이거나, 왕국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혁명이란 부르주아지일수도 있고, 상퀼로트일수도 있으며, 농민이나 신앙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만큼은 모두 같다.

"우리가 진정 꿈꾸는 것이 민주 공화정이라면 응당 그 모든 생각을 담아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지만 모두가 이 새로운 조국의 탄생을 축복할 테니까.

민중의 공포를 사며 군림하는 게 아니라, 사랑받으며 어우러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함께 피 흘려준 프랑스의 모든 국민에게 우리의 뜻을 여쭙시다. 우리 국민의 대표자가 아닌, 이 프랑스의 모든 유권자가 직접 이 역사적인 토의와 의결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준비해나갑시다."

"존경하는 수상님, 이런 말씀 드리기 그렇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예산 낭비이고 또 시간 낭비입니다."

브리소가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이겼습니다. 허울뿐인 왕정은 이미 식물 신세고, 지금 이 자리에서 표결에 부치기만 한다면 그 즉시 공화 혁명이 완성되겠지요. 한데 대체 왜 우리가 그런 수고를 거쳐야만 합니까? 아직도 법통파라는 허울에 미련이 남으신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야 왜냐하면.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의회 따위가 아니라.

"···옹고집 같으니라고."

결국 질렸다는 듯이 브리소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물론 이는 고작해야 시작이오, 순조롭게 통과되긴커녕 사방에서 우릴 기회주의자, 왕당파라 물어뜯고 공격하며 한바탕 혼란이 빚어졌다.

허나, 그렇기에 흡수합병과 로마 재건 등의 야욕은 일단 자취를 감췄다.

곧 내가 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무명의 애국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국가란 신화 위에서 만들어지는 법이라고 누군가 그랬던가?

그렇다면 그 신화의 주인공은 응당 저들이 되어야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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