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154)

주인공

벨기에 평원.

타타탕!

"···나 원, 이렇게들 사려서야."

프랑스군 부사령관 로샹보 백작이 기가 차다는 듯이 전장에서 패주하는 오스트리아군을 흘겨보았다.

물론 근본적으로 숫자만 거의 열 배 차이가 나긴 했지만, 총검 돌격이야 몰라도 최선을 다해서 총이라도 최선을 다해 쏴봐야 할 것 아닌가.

지금껏 로샹보가 보아온 프랑스 병사들은 상대가 제아무리 많건 적건 상관없이 총알이 다 떨어지면 상부의 명령이 내려오기도 전에 무작정 총검 돌격부터 하고 봤는데.

뭐, 따지고 보면 프랑스군이 좀 무모한 거고 애초에 제 고향도 아닌 식민지 겸 영지를 지키기 위하여 오스트리아군이 목숨 걸고 열 배에 달하는 적에게 달려드는 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만.

그걸 뻔히 알면서도 로샹보로서는 이 시시한 토벌전에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결국 적들의 주공은 이곳 저지대가 아니라 라인란트를 노리고 있음이 명백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번 전쟁의 주인공이 될 마지막 기회를 놓친 것이다.

"축하하네. 머지않아 브뤼셀일세."

로샹보가 그의 오랜 악우 라파예트를 돌아보았다.

그 또한 적 주공이 라인란트로 향했음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연전연승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언제나 과할 정도로 오만함으로 가득했던 라파예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하여간 어딜 가나 주인공 노릇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친구라니까.'

미국 독립 전쟁 시절부터 이어져 온 오랜 악연으로 전우의 심상을 쉬이 짐작해낸 로샹보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그 시절부터 아버지뻘 되는 로샹보는 백작이고, 저는 후작이라는 이유로 거리낌 없이 하대하며 맞먹으려 들었던 친구이니 그가 또 배려해주는 수밖에.

"얼굴 피게. 브뤼셀에 개선하고 나면 그래도 다들 환호해주지 않겠나. 어딜 가나 해방자 라파예트라고 환호하고 만세를 불러줄 거야. 어차피 이번 전쟁의 발단도 이 저지대 문제였으니, 장차 온 유럽이 신대륙과 벨기에의 해방자 라파예트라고 불러주지 않겠나?"

"우린 브뤼셀에 개선하지 않을걸세."

라파예트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교외에 진을 치고 진짜 주인공이 오기를 기다려야지."

"···진짜 주인공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로베스피에르와 망명정부 놈들 말이네."

정치공학적으로 생각해보면 합리적인 발상이었다.

다만 언제나 주인공이 되기를 꿈꾸었던 라파예트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을 뿐.

로샹보가 눈을 껌뻑거리며 되물었다.

"자네, 설마 그 친구에게 뭔가 약점 잡힌 게 있나."

"···있기야 하지."

라파예트가 복잡한 얼굴을 하며 대꾸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 수상 양반의 명령을 받든 게 아닐세. 전적으로 내 의지고 판단이지."

"허, 별일이군. 자네가 주인공이 되기를 거부하다니."

"그럼 신화 속 주인공이 등장했는데 내가 안 이러게 생겼나?"

그 신화 속 주인공이라는 놈은 또 누구인가.

그거야 일부러 확인해볼 필요도 없었다.

그제야 대강의 사정을 짐작한 로샹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사르의 등장을 경계하는 거군."

"그래, 카이사르가 별거인가. 저놈이 바로 카이사르지. 그냥 제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햇병아리인 줄 알았더니 스키피오나 마리우스보다 더한 놈이 튀어나왔어. 최소 한니발, 어쩌면 머지않아 알렉산드로스를 넘보게 될지도 모르네."

"에이, 설마."

오랜 전우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하여 애써 내숭을 떨긴 했지만, 로샹보 또한 내심 라파예트의 우려를 부정할 순 없었다.

그야 말이 좋아서 라파예트 예하 정예병력이지, 지금 저 나폴레옹 사단이라는 건 전성기 프랑스 왕국군에서는 2군 이하 3군 예비대 수준밖에 안 되는 오합지졸이었다.

오와 열은커녕 장전조차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어중이떠중이들 사이에서 그나마 이 두 가지라도 똑바로 해낼 수 있으니까 프랑스 국민군 최정예병력 소리를 듣고 있던 거지.

제가 몸소 조련시켰다는 자부심을 제하고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수배에 달하는 적들을, 그것도 객관적인 훈련도나 숙련도는 압도적인 상대를 연달아 격파할 수 있는 정예병력은 아니었다.

한데, 저 괴물 딱지는 해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나폴레옹은 라파예트와 견줄 수 없는 천상에 오르고야 말았다.

"바로 그 설마일세. 이제 앞으로 10년은 우리 모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원수와 그 떨거지들이 될 거야."

고로, 로샹보는 차마 전우의 비관론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자존심 센 라파예트가 죽었다 깨어나도 저 애송이를 이길 수 없으리라고 낙담하기까지 얼마나 기나긴 고뇌와 좌절이 있었을지 익히 짐작할 수 있었기에.

그리고 군인으로서 저 나폴레옹이 써 내려가고 있는 신화가 얼마나 위대하고 전무후무한 것인지 알고 있었기에 다만 무겁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바야흐로 나폴레옹의 시대가 열렸다.

앞으로 이 유럽에서 입신양명을 꿈꾸는 모든 군인은 나폴레옹을 동경하거나 증오하게 될 것이며, 그와 끝없이 비교당하고 또 견주며 조금이라도 더 나폴레옹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발버둥 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프랑스의 군인인 이상 죽었다 깨어나도 저 나폴레옹을 당해낼 순 없다.

차라리 적장이라면 운 좋게 딱 한 번 판정승이라도 거둬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겠지만, 아군이니 순수하게 전공과 명성만 비교될 터.

장차 라파예트와 로샹보는 파리를, 프랑스를, 나아가 온 유럽을 열광케 할 저 신화 속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들러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는 어떤가."

그는 군인이 아닌 정치인이자 혁명가이다.

그리고, 다름 아닌 저 나폴레옹을 발탁한 장본인이다.

이 프랑스에서 나폴레옹과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독재관 로베스피에르와 황제 나폴레옹 중 골라야 한다면 차라리 독재관이 낫지 않겠나."

까득.

라파예트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정말로 내키지 않는다는, 말하면서도 울화가 치민다는 반응이었다.

"아무튼, 나는 브뤼셀에 개선하지 않을걸세. 교외에 진을 치고 우리의 주인공들이 올 때까지 대기할 예정이라고 참모들에게도 대신 전해주게."

"이봐, 지금 또 나보고 욕받이 노릇이나 하라는 말인가?"

라파예트는 대꾸하지 않고 홀연히 막사로 돌아갔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또다시 로샹보에 떠넘긴 것이다.

"···나 참, 하여간 막무가내라니까."

기가 차기야 했으나, 언제나 그래왔듯이 로샹보는 전우의 어리광을 눈감아주기로 했다.

아무렴 저 주목받기 좋아하는 친구가 벨기에 해방의 영광을 제 손으로 타인에게 양보하기로 했으니 오죽 낙담이 심했겠는가?

카이사르니 뭐니 뒷말하면서도 막상 제가 직접 나서는 것보다 나폴레옹이 나서는 게 국운을 건 일전에 어울린다고 인정해버렸을 지경이니 원.

'그건 그렇다 쳐도 로베스피에르라.'

과연 그는 제가 키워준 영웅을 감당할 수 있을까?

로샹보는 잠시 그가 지금껏 보아온 로베스피에르의 행적을 돌아보았다.

그가 생각하는 로베스피에르란 모순적인 인물이었다.

분명 겉으로 내세우는 이상이나 권력을 잡기까지의 방법론은 날것 그대로의 우민 정치가이자 선동꾼에 가까웠다.

폭동을 선동하고 폭도를 동원하는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으며, 또 그렇게 법치를 왜곡시키고 민의의 폭주를 야기하는 일련의 행위를 민주주의라고 부르며 정당화했다.

하지만 막상 권력을 잡고 난 뒤의 행보는 더할 나위 없이 공화적이오, 권위적이었다.

과격한 민의를 배격하고, 다수결의 폭력을 견제하며 필요하다면 제 입지나 권력을 거리낌 없이 포기하면서까지 적법한 토의나 의결 절차를 유지하려 아등바등하고 있다.

그로 인해 당초 로베스피에르의 들러리요, 친위사단에 지나지 않았던 급진당 내부에서 조금씩 불협화음이 심화하면서 머지않아 보다 온건한 당파와 급진적인 당파로 분당이 이뤄지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솔직히 아무리 봐도 정치가할 양반은 아니란 말이지.'

독재관 자리를 차지할 인재는 더더욱 아니다.

차라리 소피스트나 정치평론가라면 모를까.

권력을 향한 본인의 강력한 열망, 그리고 이를 쟁취하는 재주와는 별개로 로샹보로서는 이 모순된 인물이 공화국이 되었건 왕국이 되었건 한 나라의 정치지도자가 될만한 인재라는 데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뭐어, 그렇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황제의 천적일지도 모르겠군."

절대로 타협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을 모순투성이의 고집쟁이니까.

죽이면 죽는 대로 순교자가 되고, 살려두면 어떻게 해서건 권좌로 돌아올 마키아벨리주의자니까.

일국의 지도자가 아닌, 순수하게 체제의 수호자이자 옥좌로 향하는 왕도의 마지막 수문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보다 까다롭고 성가신 맞수도 또 없었다.

"""혁명 만세! 프랑스 만세! 벨기에 독립 만만세-!!!"""

때마침 전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숨어있던 민중이 곳곳에서 달려 나오며 병사들에게 꽃과 음식 따위를 나눠주고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프랑스어로 말하며 프랑스 병사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리는 프랑스계 주민들이었다.

곧 갈리아주의자들이 이 땅을 장차 반드시 수복해야 할 프랑스 민족의 자연국경선으로 확신하는 주된 근거였다.

"···흠."

그럼 로베스피에르와 망명정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저 프랑스계 주민들을 조직화하여 합병 여론을 만들어 둔다면 어떨까.

고작 이 정도로 좌절하고 낙담했을 오랜 전우를 위로하지는 못해도 하다못해 소소한 심심풀이가 되어줄 순 있지 않을까?

잠시 고민해본 로샹보였으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땅을 어떻게 처분할지야 로베스피에르가 어련히 정하리라.

두 고집쟁이가 또 제 고집만 내세우는 꼴을 볼 바에야, 차라리 느긋하게 벨기에 와인이라도 즐기며 병사들이 웃고 떠들며 즐기도록 두는 게 옳았다.

***

메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 사령관 페르디난트 원수가 얼이 빠져서 중얼거렸다.

"불과 1시간 전에 내게 좌익의 3군단이 나폴레옹과 교전 중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예, 전하."

"그런데 지금 우익의 5군단이 나폴레옹을 발견했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3군단은 누구와 싸우고 있다는 말이야!"

"그건···."

콰콰쾅!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뒤무리에의 집중포화가 참모들의 대답을 파묻어 버렸다.

하지만 설령 저 천지를 뒤흔드는 포성이 없었더라도 별 소득은 없었으리라.

왜냐하면 그들도 이게 어찌 된 상황인 건지 감도 못 잡고 있었으니까.

설마하니 적의 함정에 빠져든 건가?

아니면 애초에 잘못된 정보였는가?

도대체 나폴레옹은 좌익과 우익 중 어디에-.

쾅!

"급보! 3군단 패주! 전장에서 이탈 중!!!"

그 해답을 가르쳐준 건 기초적인 예식마저 무시한 채 급히 막사로 뛰어 들어온 전령의 보고였다.

옆구리에서 피를 쏟으며 온몸에 흙 검댕을 덕지덕지 묻히고 온 그의 처참한 모습이 거짓을 고한 게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럼 결론이 나왔다.

나폴레옹은 지금 우익의 5군단과 교전 중이다.

불과 1시간, 아니 그보다 짧은 시간 만에 좌익의 3군단을 패주시기고 곧장 새 상대를 찾아서 우익까지 달려간 것이다.

"말도 안 돼."

그건 누가 한 말이었을까?

중요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모인 누구나 똑같이 비명을 지르고 싶었으니까.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라인란트에 있어야 할 나폴레옹이 저지대 접경지대에 불쑥 나타난 것만으로도 기가 찬 데, 심지어는 1시간도 안 되어서 군단 하나를 패주 시켰다고?

제아무리 뒤무리에가 그에게 1개 군단을 맡겼다지만 이게 진정 군사학적으로 가능한 일이었는가?

"···예비대를 모조리 내보내서 5군단을 지원하게."

페르디난트가 피를 토하듯이 읊조렸다.

불과 반나절 사이 원수는 족히 20년은 더 나이를 먹은 듯 보였다.

"벨기에 주둔군이건, 제후들의 사병이건, 용병이건, 모조리 말이야. 알겠나?"

"하오나 전하, 그리하면 사령부가-."

"지금 우익에 나폴레옹이 있네!!!"

페르디난트가 절규했다.

"5군단까지 3군단처럼 허무하게 잃어야 정신을 차릴 텐가? 우리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군기를 잃어야겠느냐는 말이야!"

"저, 전하···."

"이걸로 저 나폴레옹을 잡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고, 이기지 못하더라도 하다못해 시간이나마 더 끌어줄 수 있겠지! 아직 중군은 버틸 수 있네. 그러니까 예비대는 모조리 나폴레옹에게 보내!"

그러자 더는 아무도 그에게 반박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 또한 한창 중앙에서 힘겨루기가 이뤄지는 와중 예비대가 고갈되면 사령부까지 위험해진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익에 나폴레옹이 있다.

좌익을 무너트리고 달려온 나폴레옹이.

전 사령부가 그들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는 모험을 수용하는 데까지는 그 사실 하나면 족했다.

"아직, 그래. 아직일세."

후우-.

그제야 흥분을 가라앉힌 페르디난트가 최면을 걸듯이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아직 패하지 않았다.

3군단이 패주하였다고 하나 아직 좌익에는 오스트리아인들이 남아있다.

물론 그들 혼자서 프랑스군 2개 군단을 상대하려면 뼈가 시리겠지만, 그래도 아직 좌익이 소멸한 건 아니다.

그거면 됐다.

우익에서 어떻게든 나폴레옹을 붙잡아두고, 기병대가 저 오합지졸들을 무찌르고 나면 중앙에서 승부를 걸어보면 된다.

아무렴 코흘리개 시절부터 승마를 익힌 기사들이 나귀나 좀 타고 다녔을 어중이떠중이들에게 밀릴 리가 없잖은가?

그럼 튜튼 기사단의 후예들이 저 오합지졸들의 측면을 날카롭게 찌르는 동시에 중군이 총공격에 나선다면-.

와그작!

"···응?"

순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소시지 반죽이 으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뒤늦게 그것이 사람의 몸뚱어리였던 것이 내는 소리라는 걸 눈치챈 순간, 그제야 페르디난트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적 기병대가 측면을 꿰뚫었다.

곧, 튜튼 기사단의 후예들이 여관집 주인 아들이 이끄는 나귀들에게 패했다는 증거였다.

"캬하핫! 비켜라, 비켜! 목숨 아까운 놈들만 덤벼! 레이디도 아니면서 어딜 감히 내게 엥겨붙는거야!"

우지끈!

하지만, 그 순간 페르디난트에게 더욱 믿기 어려운 건 기병전에서마저 저 폭도들에게 패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사람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여관집 아들이라고 무시했던 사내가 말 위에서 기병창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팔다리가 하나씩 지워지고, 상반신과 하반신이 각기 저 멀리 튕겨 나가며, 분명 총신으로 창을 한번 받아냈음에도 총과 함께 머리까지 두 동강이 났다.

그야말로 모세의 기적을 보는 듯했다.

홍해가 아니라 전열이 실시간으로 쪼개지고 갈라지고 있다는 점을 제하면 이는 이미 모세의 기적 그 자체였다.

콰직!

"저, 저 무슨···?!"

그것이 대포알에 의한 것이 아니오, 곰이나 사자가 달려든 것도 아니고 순전히 말을 타는 기병대장 한사람이 만들어낸 기적이라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을 뿐.

진정 이게 기사의 시대가 아니라 화약의 시대 와중 일어난 사건이란 말인가?

"전하! 어서 피하셔야 하옵-."

서걱.

뒤늦게 지금이 경악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눈치챘을 무렵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적 기병대가 취약해진 사령부를 노리고 중군을 측면에서부터 삐딱한 사선을 그리며 돌파하는 데까지는 불과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랴! 이랴!!!"

두두두-.

최후의 희망이었을 중군마저 총검 돌격을 감행한 적 본대에 붙들리고, 호위대마저 대장을 뒤따라온 프랑스 기병들에게 사지가 찢겨 쓰러지는 와중 페르디난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제 애마를 다독이며 최대한 멀리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뚝.

"에이, 뭐야. 모처럼 마음에 든 놈이었는데."

그럼에도 저 여관집 주인 아들은 제가 아끼던 기병창이 망가졌다며 투정이나 부릴 뿐.

그가 지금 눈으로 확인한 것만 흉갑을 관통한 총탄이 두발, 그 밖에 살을 찢거나 파고든 상처야 하나하나 헤아리는 것조차 불가능했음에도 맹수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푸히힝-!

"어엇···?!"

결국 공포에 미친 애마가 거추장스러운 짐을 내동댕이치고 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천만다행히도 풍성한 보리풀이 늙은 원수를 받아주었지만, 그와 함께 페르디난트의 운 또한 다하여 마침내 표적을 따라잡은 맹수가 기병도를 뽑아 들었다.

스르릉.

"자, 이만 항복하쇼."

항복 권고라기에는 너무나도 천박하고, 도적이나 강도를 연상케 하는 도발적인 어휘였다.

하지만 패장 페르디난트는 다만 고개를 떨굴 뿐 감히 훈계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저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주인공임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