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154)

베르사유 조약

베르사유.

하필이면 이따위 치욕이 이 카우니츠의 정치 생애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다니.

시종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리며 오스트리아의 국가 재상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는 홀로 회한에 잠겼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놈의 계몽주의가 문제였다.

그가 아직 지금처럼 늙기 전 카우니츠를 총애하였고 카우니츠 또한 존경하셨던 요제프 2세 폐하께서도 계몽주의에 심취하여 무모하리만큼 급진적인 개혁과 팽창주의를 추구하다가 끝내 전장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졸하고 마셨으니.

애초에 그놈의 민족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이 대체 무엇이길래 누구보다 선량하고 현명하셨던 요제프 2세 폐하께 전쟁광이라는 오명을 쓰게 만들었다는 말인가.

그들이 베푸는 자비에 기대어서만 간신히 연명할 수 있는 저 가엾은 농노들이 대체 왜 그들과 같다는 말인가.

카우니츠로서는 끝내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늙을 대로 늙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저 계몽주의자들이 그만큼 당치도 않는 몽상에 심취해있어서인지, 그도 아니면 서로 살아가는 세계가 달라서인지는 아직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것 한 가지만은 분명해 보였다.

펑!

"""프랑스 만세! 혁명 만세! 승리 만만세-!!!"""

전지전능하신 조물주께서는 선량하고 지혜로운 그들 귀족이 아닌 저 계몽주의 폭도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우렁찬 예포와 화려하기 그지없는 불꽃놀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리를 가득 채운 역겨운 삼색기와 희희낙락하는 폭도들.

무엇 하나 카우니츠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지금 당장 마차에 다시 올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의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로 인해 지난 반백년간 합스부르크의 국가 재상으로서 쌓아 올려온 모든 경력을 잃게 되더라도 저 폭도들에게 희롱당하고 모욕당하면서 잃게 될 명예와 자존심보다는 많은 걸 남길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만일 그가 그와 같은 추태를 보인다면 이 폭도들은 라인란트를 넘어서 더욱 동쪽까지 진공하려고 들 테니까.

그 한 사람의 비겁함과 이기심으로 무고한 이들까지 저 폭도들의 침략에 신음하도록 둘 수는 없었다.

아무렴 누군가는 이 고역을 겪어야만 한다면, 지금껏 쌓아 올려온 모든 인생을 부정당해야만 한다면 이미 늙고 병들어 살날이 머지않은 카우니츠 같은 늙은이가 떠맡아야지 않겠는가.

'어디 만수무강해 보시오, 카이저 양반.'

카우니츠야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화병이 나서 쓰러지거나, 아니면 정계에서 영구추방 당할 테지만 아직 젊은 프란츠는 앞으로도 두고두고 이 고역을 감내하게 될 테니.

차라리 지금 카우니츠가 줄행랑을 치고 나폴레옹이 곧장 빈으로 진공하여 오스트리아가 멸망하는 게 프란츠라는 개인에겐 훨씬 마음고생이 덜한 전개이리라.

뭐, 본인도 그걸 알고 있으니까 빈을 떠나던 날 카우니츠를 부럽다는 듯이 한참을 배웅하고 있었던 거겠지만.

때마침 저 너머에서 익숙한 풍채의 사나이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 껍데기만 남은 프랑스 왕국의 섭정 프로방스 백작이었다.

"베르사유에 온 걸 환영하오, 카우니츠 경. 그래, 이렇게 얼굴을 보는 건 5년 만이던가?"

"무사해 보이니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전하. 그리고 빈에서 한번 뵈었으니 아직 만으로는 1년째일 겁니다."

"그랬던가? 나 참, 요즘엔 하도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서 당연히 5년은 지났을 줄 알았더니 원!"

껄껄껄.

프로방스 백작이 언제나 그래왔듯이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카우니츠의 손을 마주 잡았다.

하지만 카우니츠는 조금도 반가움을 느낄 수 없었다.

일부러 빈에서의 만남을 생략하고 아직 바스티유 습격 사건이 있기 전인 5년 전을 지목한 것 자체가 망명 생활 와중 합스부르크에서 프로방스 백작을 홀대했던 전적을 꼬집은 거였으니까.

왜 폭도들에게 부역하고 있는 거냐, 그렇게 목숨이 아까웠냐는 등의 공격을 초전에 원천 봉쇄해버린 것이다.

'···하여간 여우 같은 놈.'

아니, 이 경우엔 이 여우가 왕이 아니라 멍청한 루이 오귀스트를 왕으로 만들어준 그리스도를 원망해야 하는 건가?

만약 이 여우가 보위에 올랐다면 지금 카우니츠가 무슨 동물원 우리에 갇힌 원숭이처럼 폭도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우우! 양파튀김도 못 먹는 오스트리아 놈은 물러가라! 이건 미식계의 수치다!"

"에이, 벌써 그럼 쓰나? 내쫓을 땐 내쫓더라도 항복문서는 받아낸 다음에 내쫓아야지."

"큭큭큭! 저놈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화려한 옷을 입고 온 거야? 지 주제도 생각 안 하나?"

"어허! 다들 조용히! 조국상(喪) 치르러 오신 분께 그러면 쓰나!"

까드득.

'이 천박한 농노 주제에···!'

이 동물원 우리에 갇힌-이라는 건 비유도 뭣도 아니었다.

카우니츠가 말에서 내려서 협상장으로 향하는 내내 사방에서 구경꾼들이 끈덕지게 따라붙으며 미주알고주알 수다를 떨어대고 있었다.

삼엄한 경비대가 어떻게든 카우니츠나 그 밖의 대표단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내고 있었으나 그것뿐.

원숭이처럼 가로등이나 가로수를 타오르고, 총칼로 무장한 경비대를 아무 거리낌 없이 손으로 밀치거나 슬금슬금 바닥을 기어서 호위대 사이를 파고드는 저 구경꾼들을 모조리 단속하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하필이면 카우니츠가 프랑스어를 비롯하여 다양한 언어와 방언에 능통한 다국어 능력자라는 게 저주스러울 따름이었다.

따지고 보면 진짜 구경거리가 되어야 합당한 건 저 질서도 예의도 모르는 폭도들일 텐데 말이다.

"핫핫핫! 조만간 익숙해지실 거요."

그런 카우니츠의 심경을 뻔히 짐작한다는 듯이 프로방스 백작이 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정도야 맛보기지. 아무튼 총을 쏘거나 하는 놈들은 없잖소? 그럼-."

타타탕!

"···어이쿠야, 말하기가 무섭네."

질렸다는 듯한 반응.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라는 듯이 공포조차 느껴지지 않는 모습에 카우니츠는 아연실색했다.

잠시 뒤 밝혀진 총성의 내막은 더욱 어처구니없었다.

카우니츠나 사절단을 암살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오히려 제 딴에는 환영하는 의미에서 민병대가 허공에 대고 총질을 했다는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이게 지금 나라인가?

이런 폭도들에게 위대한 합스부르크 제국이 패했다고?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발 거짓말이라고, 카우니츠가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줬으면 했다.

하지만 끝내 그를 이 지독한 악몽에서 깨워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 어서 오십시오 카우니츠 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외려 이 악몽의 주인에게로 안내했을 뿐.

그들이 베르사유 궁전에 들어섬과 동시에 뻔한 너스레를 떨며 등장한 악마 대공-로베스피에르의 모습에 카우니츠는 남몰래 숨을 삼켰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첫인상은 그렇게까지 강렬하진 않았다.

키도 땅딸막했고, 그렇게 잘생긴 미형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의복도 장인의 주문제작품이 아니라 기성품을 그대로 차려입은 듯 조금씩 치수가 어긋났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카우니츠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 눈앞의 사나이야말로 이 혁명이라는 폭동을 형상화한 존재라고.

보잘것없고, 평범한 농노들의 대표자일 거라고.

시종들의 안내에 따라 저마다 좌석에 착석하는 내내 카우니츠와 사절단은 한시도 이 신성한 자리에 당당히 끼어든 한 사람의 폭도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야 항복하여 자비를 구걸해야 할 패자에 불과할 그들이 항복을 받아들이러 나선 적들의 수장보다도 더욱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치장을 하고 있으니 어찌 이보다 부조화스러울 수가 있으랴?

그야말로 머나먼 옛날 바르바로이들의 침략에 시달리던 그리스-로마 시절에나 볼 수 있었을 법한 아이러니한 정경에 카우니츠는 내심 얄팍한 우월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자, 그럼 시작하기에 앞서서."

때마침 로베스피에르가 입을 열었다.

상석에 앉은 섭정이 사람 좋은 미소만 짓고 있는 가운데 그가 이 자리에서 가장 먼저 발언권을 가져갔다는 사실이 이 협상장의 주도권을 누가 가졌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얼마나 넘겨주실 각오로 찾아오셨습니까?"

직구.

더할 나위 없이 폭도다운 협상법에 카우니츠는 내심 쓴웃음을 삼켰다.

"카이저 프란츠 2세 폐하께서 제게 이번 자리의 전권을 위임하셨으니 파리에서 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양보할 수 있겠지요."

"흐음, 그렇다면 프로이센은 어떻습니까?"

"전 다만 폐하께서 명하신 대로 따를 뿐입니다."

카우니츠의 곁에 자리한 프로이센의 외무장관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이번 협상에 임하는 두 나라의 태도가 극명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카이저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오스트리아, 국왕이 주문한 대로 따를 뿐이라는 프로이센.

'이 감자나 먹는 놈들이···.'

결국 여차하면 프로이센이 감당해야 할 몫까지 오스트리아에 떠넘길 작정이라는 걸 간파한 카우니츠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물론 따지고 보면 프로이센이야 오스트리아의 전쟁에 휘말린 격이긴 했지만, 그래서 그 대가로 영토도 할양받았고 러시아에 추가로 폴란드령까지 일부 넘겨받았잖은가.

한데 지금 이 자리에서 프랑스가 제아무리 무리한 요구를 해도 알자스 전역에서 주력군이 와해당하다시피 한 오스트리아로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악용하다니.

당장 주력군이 와해당한 처지라는 건 피차 똑같으면서 이렇게 저 혼자 나 몰라라 하겠다는 뻔한 속내를 내보이니 카우니츠로서는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역시 저 감자나 먹는 놈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인 게 잘못이었다. 차라리 아무리 까다롭고 오래 걸려도 런던이나 마드리드를 끌어들여야 했어!'

그럼에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도 못하고, 얼굴에 드러내지도 못하며 저 혼자 속이 타들어 가던 찰나.

"그렇다면 이야기가 간단해졌군요."

로베스피에르가 슬며시 카우니츠와 눈을 마주치며 속삭였다.

"파리는 신성로마제국의 즉각적인 해체와 합스부르크 왕조가 소유한 모든 작위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겠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카우니츠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카우니츠의 시선을 피하던 프로이센 측 사절단이나, 기타 사절단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프랑스측 협상단만이 방긋방긋 미소 짓고들 있을 뿐.

"···미쳤군."

드르륵.

한참을 침묵하던 카우니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더 들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구려. 만일 이게 농담이나 실언이 아니라면 나는 이만 돌아가 보겠소. 전장에서 다시 뵙시다."

"아, 나폴레옹 장군-아니죠. 나폴레옹 원수와의 재회가 그토록 고대 되시는 모양입니다?"

침묵.

다시 자리에 앉지도, 자리를 떠나지도 못하고 있는 카우니츠를 향해 로베스피에르가 덧붙였다.

"그렇다면 1년, 정확히 오늘부로 1년 뒤에 빈에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때는 과연 어떤 분이 어떤 조건으로 폭도들에게 자비를 애걸하게 될지 참으로 기대되는군요."

경고는 그거면 족했다.

털썩.

카우니츠는 의자가 아닌 맨바닥에 무릎 꿇고야 말았다.

덜덜 떨리는 손과 발이 그의 공포를, 절망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일말의 책임감이 앞섰다.

"자비를 베풀어주시오···!!!"

카우니츠가 로베스피에르를 향해 엎드려 절을 올렸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야 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합스부르크의 카이저를 대리하여 이 자리에 나선 그가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덩달아 카이저의 체면까지 엉망이 된다는 걸 모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해야만 했다.

주력군이 와해되고 총사령관마저 포로로 잡힌 이 순간 적들이 정말로 신성로마제국의 망국을 목표 삼아 동진하기 시작한다는 악몽을 막기 위해서라면 카우니츠는 이보다 더한 치욕이라도 감내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무방비해진 상태에서 나폴레옹이 신성로마제국을 지도상에서 지우려 한다면 1년이 아니라 1달이면 충분할 테니까.

"고작 전쟁에서 한번 패한 정도로 망국이라니, 그런 법이 도대체 어디 있다는 말이오! 세상에-."

"왜 저희 무식한 폭도들이 고명하신 귀족님들의 관습을 따라드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로베스피에르는 마치 늙은 재상의 굴욕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뻔뻔스레 덧붙였다.

"입장을 반대로 생각해봅시다. 만일 여러분들께서 이번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우리 폭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건-.

"감히 부르봉 왕조를 위협하고 신성한 왕권을 침해한 무엄한 역도로서 단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게 되었겠지요."

정론이었다.

당장 카우니츠부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또 그의 사견을 제하더라도 관습적으로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기에.

"그럼 거꾸로 감히 민중의 자유의지를 억압하고 신성한 천부인권을 침해한 무엄한 폭군들을 단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이는 게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까?"

카우니츠는 차마 답할 수 없었다.

역지사지에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로 인해 죽어갈 목숨의 머릿수만 천칭에 달아보자면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적을 테니까.

이 세상의 절대다수는 고결한 귀족이 아니라 저 보잘것없는 농노들이니까.

"우리가 이겼습니다."

로베스피에르가 사형을 선고하듯이 사절단에게 백지를 내밀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야 너무도 명백했다.

너의, 너의 가족의, 너의 조국의 사형선고서를 네 손으로 직접 적고 날인해라.

그 즉시 지옥에 떨어질 너의 동포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비겁자의 이름을 저주하고 경멸하도록.

"당신들이 졌습니다. 그럼 똑같이 당할 각오도 하셨어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카우니츠는 차마 대꾸할 수 없었다.

아니, 그 자리에 나선 누구나 그러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애걸해볼까?

아니면 그들에겐 아직 러시아가 남아있다고 반박해볼까?

전 유럽이 파리의 실체를 알게 될 거라고 위협해볼까?

하지만 그래서 저들이 그런 수작질 자체가 너무 불쾌하다며 다시 전쟁을 재개한다면?

러시아나 다른 동맹국들이 달려올 때까지 과연 그들의 조국이 버텨줄 수 있을까?

이미 패망하고 엉망진창으로 유린당한 다음 동맹국들이 프랑스군을 무찔러준다고 해봐야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이제 어찌하면 좋다는 말인가.

이걸 어떻게 해야-.

"에이,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순간, 그때까지 사람 좋은 미소만 짓고 있던 프로방스 백작이 입을 열었다.

카우니츠와 사절단에겐 전혀 예기치 못한 도움이었다.

"그리고 기왕 전쟁을 끝내기로 했으면 이 자리에서 받아낼 수 있는 걸 요구해야지, 이 친구들이 받아들인다고 베를린이나 빈에서 동의하겠나? 이럴 거였으면 카이저랑 프로이센 왕에게 직접 오라고 했어야지."

"하지만 전하, 저들에게도 본보기를 보여야지요. 자고로 공포가 존중을 만드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저들도 이제 그만 그렇게 제멋대로 굴었으면 제멋대로 당할 수도 있다는 걸 배워야 합니다."

"에이, 전쟁이 끝난다고 우리 장군들이랑 병사들이 어디 가겠나? 그 이상이야 다음번에 이기고 난 다음에 요구하면 될 것 아닌가. 다들 승전했다고 기뻐하고 있는데 우리 시민 동지들에게 아직 덜 끝났으니 연장 복무하라고 통보하고 싶지는 않네."

"끄응, 그런 이유라면야···."

이건 뭐지.

속임수인가?

아니면 진짜로 저 여우가 그들을 구한 건가?

혼란한 와중 카우니츠는 마음속 깊이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디 당신이 양보할 수 있는 최대한을 적어보십시오."

로베스피에르가 으르렁거렸다.

"그럼 외무위원회에 표결을 부치도록 하겠습니다. 만일 통과되지 않는다면 몇 번이고 다시 적어야 할 테니 신중하셔야 할 겁니다."

곧 최종 선고였다.

저 여우가 벌어준 천금 같은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면 정말로 신성로마제국 해체 같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받게 될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힌 카우니츠와 사절단은 그들이 가진 모든 지혜와 역량을 쥐어짜 내 항복 조약서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실 전날 프랑스 정부는 분기 이자 상환에 실패하여 채무불이행 선언을 앞두고 있었음을 이들은 끝내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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