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154)

건설적인 논의

[···조금 지나쳤던 거 아닌가?]

뭐가?

[그래도 카이저를 대신하여 찾아온 제국 수상에게 그렇게 과한 치욕을 안겨줄 필요까지는 없었잖은가. 어차피 당장 제국을 해체할 생각도 없었으면서 말이야.]

아니, 전혀.

내가 이 시대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파고든 적은 없지만 이것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게 알고 있다.

바로 나폴레옹이 혁명을 배신한 뒤에도 끝내 유럽의 군주들과 화해하지는 못했다는 거.

물론 나폴레옹 본인이 끝도 없는 야심을 내비치기도 했고, 그냥 실력으로 적국이란 적국은 모조리 박살을 내버리면서 화해(유럽정복)이 한동안 이뤄지기도 했는데.

결국 나폴레옹이 패망할때까지 유럽에서 프랑스 혁명제국은 별종 취급이었고 나폴레옹이 패배하자 그는 유럽의 여느 봉건 군주 중 한 사람이 아니라 반란군 지도자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으면서 대서양의 외딴섬에 유배당해 쓸쓸히 죽었다.

그런 보나파르트 가문이 유럽의 명문가로 인정받게 된 건 나폴레옹이 죽고서도 한세대가 더 지난 다음이었고, 심지어 그놈은 나폴레옹 혈통도 아닌 뻐꾸기였지.

그런데 나폴레옹처럼 혁명제국 만들면서 봉건 군주들과 통혼할 것도 아니고 혁명 공화국 만들 작정인 내가 봉건 군주들과 화해를 추구해?

그거야말로 미친 소리지.

차라리 기회가 날 때마다 저쪽의 자존심을 박박 긁어버리는 게 낫다.

그럼 저쪽에서 이를 아득바득 갈면서 복수의 칼을 갈아줄 테니까.

그리고 이렇게 뒤탈 없이 노빠꾸로 날뛸 수 있을 때 날뛰어줘야 이번에 수상 취임하고 협치한답시고 쌓인 불만이나 불신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겠지.

당장 나더러 언제나 약한 소리만 한다고 투덜대던 원내 사이다패스들이 내가 카우니츠에 신성로마제국 해체와 시민 합스부르크를 요구하겠다고 했더니 일제히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던데 뭘.

[글쎄, 좋다고 박수 치던 놈들이 더 많았던 것 같은데···.]

아무튼 개표상으로는 반대파가 더 많았고 실제로도 부결되었잖아?

뭐, 이자 상환에 실패해서 채무불이행 터질 판이라는 급보 덕분이긴 했지만.

애초에 그 소식을 회기 직전까지 숨기고 있었던 게 나와 프로방스 백작이었으니까 계획대로다.

결과적으로는 이 로베스피에르 주도로 신성로마제국과 총력전 찍으려다가 어쩔 수 없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서 당장 시급한 돈부터 뜯는 쪽으로 선회한 걸로 포장되었으니 경사 났네, 경사 났어.

[역시 자네가 사라진 건 자네 조국의-.]

입 닥쳐, 막시밀리앙.

여하튼, 지금 원내나 파리 민심 꼬라지 보면 앞으로 전쟁이 몇 번이고 더 터질 판인데 그때마다 원내 의원들 살살 달래면서 명분 만들 바에야 차라리 저쪽에서 선빵치게 만드는 게 낫다.

어떻게 된 게 지금 우리 파리 친구들은 반전론이라는 게 없어요.

다들 혁명 수출을 위해서 전쟁하자, 자연국경선을 위해서 전쟁하자, 경제난 회복을 위해서 전쟁하자고만 소리치고 있지 한창 자신감이 붙어서 그런가 반전론의 ㅂ자만 꺼내도 겁쟁이고 반혁명적인 매국노 취급이다.

이게 다 에베르랑 리틀 에베르들이 열심히 마녀사냥 하면서 찬전론 조성한 탓이긴 한데, 솔직히 이번엔 나도 괜히 불똥 튈까 봐 입 꾹 다물고 모른 척하고 있었던 원죄가 있으니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동안 열심히 야당 편들고 협치 강요하면서 호감 쌓은 업보였으니 누굴 원망할 수도 없고.

[그렇다는 건, 처음부터 2차전을 생각하고 있었던 거 군.]

그야 당연하지.

내가 알기로 프랑스 혁명부터 나폴레옹 전쟁까지 다 합해서 대충 한 2, 30년쯤 될걸?

물론 그 기간 중 일어난 모든 전쟁이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하게 시작된 전쟁은 아니지만 그만큼 구체제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튼튼하다는 증거다.

이번에 싸워서 이긴 건 우리 프랑스에 전략 나폴레옹이 있다, 함부로 얕보고 덤볐다가는 오스트리아랑 프로이센 꼴 난다-를 보여준 것과 경제재건을 위한 약탈경제에 의의를 둬야지 고작 한번 싸워 이겼다고 도미노 혁명이라도 기대했다간 트로츠키 꼴 난다.

자고로 먼저 내실이 튼튼해야 체제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법.

지금 파리가 광기에 빠진 것도 경제난과 생활고 탓이 적지 않으니 이번에 나폴레옹이 약탈해온 몫과 배상금으로 슬슬 여유가 생기면 조금은 나아질 거라고 기대해보자고.

[···끄응, 생각처럼 쉽지 않구만.]

뭐. 혁명 초기의 장밋빛 전망이 현시창에 부딪혀 무너지는거야 흔해빠진 일 아니갔소, 막시밀리앙 동지?

그나마 우리 손엔 전략 나폴레옹이라는 백지수표가 있었으니 천만다행이지.

이번에 너무 크게 따버리는 바람에 두 번은 쓰기 어려운 놈이 되어버렸지만도.

"···여기까지가 내 정치생명을 걸고 양보할 수 있는 최대한도요."

"흠, 어디 한번 봅시다."

여하튼 불과 몇 시간 사이 10년은 폭삭 늙어버린 카우니츠에게서 건네받은 항복조약서를 요약하자면 크게 다음과 같았다.

1. 오스트리아령 저지대의 분리독립을 승인함.

2. 신성로마제국은 프랑스에 5억 프랑의 전쟁배상금을 은으로 지급함.

3. 혁명 이후 혁명정부에 의해 무력 병탄 당한 알자스 지방 내 독일계 소국들의 멸국을 공인함.

4. 라인강을 기준으로 그 이서의 라인란트 지방을 프랑스에 할양하는 대신 프랑스 군은 라인강 이동의 점령지를 반환함.

5.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현 혁명정부만이 프랑스의 유일 정통정부임을 공인함.

6. 합스부르크조와 호엔촐레른조는 프랑스 부르봉조의 부채상환을 공동보증함.

크게 정리하면 대략 이정도고, 세세하게 관세나 무역에서 이권을 제공한다던가 이런저런 잡찌끄레기들이 많긴 한데-할렐루야.

이겼다, 혁명전쟁 끝!

[이봐! 전초전에 불과하다고 말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치만 내가 지금 안 이러게 생겼냐?

5억이란다, 5억!

1 프랑을 1 르브르로 잡았으니까 이게 5억 리브르인거지?

아시냐가 담보로 쓴 토지가 4억이었는데 현물로 5억 이히힛!

"고작 이게 전부입니까?"

하지만 이런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서야 정치인 실격이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면서 툴툴대니까 카우니츠가 동공으로 육두문자를 쏟아내면서 말대꾸했다.

"이것보다 더한 조건을 바란다면 우리가 아니라 존귀하신 분들께 직접 오라고 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제게 허락된 직권 하에서 제국의 존폐를 걸고 빈과 베를린을 설득하려면 이 조건 이하는 가능해도 이상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흐음-."

너무 시작부터 세게 나갔나.

슬슬 죽이건 살리건 마음대로 하라는 식이네.

뭐, 나 같아도 21세기까지 손꼽히는 산업지대인 라인란트나 벨기에를 통째로 내주고 자그마치 5억 리브르에 달하는 배상금을 지급한다고 했는데도 반응이 이런 식이면 그야 그럴 것 같기는 한데···.

[아주 대놓고 복수의 칼을 갈고 있군.]

아무리 봐도 그렇지?

일단 첫째로, 눈 크게 뜨고 살펴도 상비군을 제한한다는 조항이나 그 비슷한 식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구문이 전혀 안 보인다.

비무장지대나 완충지대 같은 건 두말할 필요도 없고.

한마디로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저쪽에서 대대적인 군비증강에 나선다고 해도 조약위반은 아니다.

뭐, 5억 리브르라는 돈이 어디 땅 파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쉽지야 않겠지만-괴도 프린스 오브 웨일스께서 버티고 계시는 이상 아예 불가능한 가정도 아니지.

그리고 두 번째 문제인데···다른 부분은 전부 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그 밖에 독일계 협상 당사국들은 하나하나 백국까지 이름을 적어뒀으면서 배상금과 관련된 조항에서만 신성로마제국이라고 써놨다.

그러니까 명목상 신성로마제국을 다스리는 합스부르크에서 지급해야 하는 배상금이긴 한데, 또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신성로마제국 전체가 나눠서 분담해야 하는 빚이라고 볼 수도 있는 거다.

금액이 워낙에 천문학적이라 놓치기 쉽지만 지금 신성하지도, 로마도, 제국도 아닌 나라가 수십수백개 소국들의 연합체라는 걸 생각해보면 각각이 분담하기에 따라서는 그렇게까지 합스부르크에게 엄청난 빚이 아닐 수도 있다.

무엇보다 오스트리아랑 프로이센이 각자 5억 리브르씩 준비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이 두 나라를 합쳐서 신성로마제국이 5억 리브르를 분담한 거니까.

마지막으로 국가명이 아니라 왕조의 이름으로 부채상환을 공동보증한 건···뭐 애초에 저 국채 중 태반이 부르봉조 명의의 빚이니까 이정도는 눈감아줄 수 있는 장난질이긴 하지.

지금은 왕실재정과 국가재정이 따로 분리되어있는 영국이 대단히 예외적인 사례에 속하는 시대니까.

만약 우리가 전쟁 전에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했으면 모를까 현재로선 부르봉조의 부채를 보증하겠다고 명시하는게 훨씬 직접적이다.

애초에 혁명 전 프랑스에는 정규적인 예산편성제도가 없었거든.

혁명 전 프랑스 왕국의 최초이자 최후의 예산안은 혁명 터지기 1년 전에 작성되었고, 그전까지는 신이 내리신 절대왕권을 휘두르는 부르봉 국왕께서 온 나라의 돈을 제 것처럼 쓰는 게 보통이었다.

그래서 이 예산안이 올라온 다음에야 부랴부랴 빚 갚으려고 삼부회 소집했다가 혁명이 터졌고.

[하, 혁명 마렵다.]

그래서 혁명했잖수.

"대단히 얄팍한 수로군요."

아무튼 그래도 영-눈에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 친구가 아직 매운맛을 덜 봤나 보고만.

"벌써 2차전 준비라니, 아직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카우니츠가 이를 악물며 대꾸했다.

"정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당신들이 직접 요구하면 됩니다. 나는 나의 카이저와 조국의 이권을 대변하기 위하여 지금 이 자리에 있고, 내가 이 항복조약서를 손수 작성한 건 그들을 위한 헌신이고 책임이지 당신들을 위한 봉사가 아닙니다."

타당한 이야기다.

슬슬 공포가 가시면서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는걸 눈치챈 건가?

아니면 최후의 저항을 위한 허세인가.

"좋습니다, 그럼 요구하지요."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

직접 교정하라고 하신다면야 당연히 바라는 대로 해드려야지.

"···이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전하. 별로 대단한 조건은 아니니까요."

예정에 없던 이야기에 우리 섭정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정말로 대단한 조건은 아니다.

그래.

"폴란드 안건이 빠졌잖습니까."

"···그, 무슨."

"설마 잊으셨다고는 말씀하시지 않겠지요. 파리가 폴란드와 동맹을 체결하기 위하여 평화로이 사절단을 보내는데 당신들이 이를 야만스레 가로막았던 게 이번 전쟁의 발단이었잖습니까."

물론 저쪽에선 기일 미사를 직접적인 계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엿이나 먹으라고 해라.

꼬우면 전쟁에서 이겼어야지 누구 마음대로 피해자인척하려고?

앞으로 국내에 뭐라고 선전할지야 저놈들의 자유지만, 이제 국제외교가에서 공식적인 전쟁 발발 원인은 이 사절단 사건이 될 거다.

국가 간 수교라는 주권국가로서 너무나 당연한 권리를 침해당했으니 어쩔 수 없이 반격한 거라고 말이지.

"파리가 바르샤바와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건 두 번 다시 참견하지 마십시오. 베를린은 폴란드와의 국경을 2차 분할 이전으로 되돌려야 할 것이며, 바르샤바와의 동맹을 무단으로 파기하고 신의를 저버린 데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사과하십시오.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프로이센 왕국은 이번 항복 협상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간주하겠습니다."

카우니츠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야 그는 오스트리아의 이익을 대변하여 이 자리에 온 거지 프로이센을 위해줄 이유가 없으니 구태여 발언권을 허비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이쪽에서 배상금이나 상비군 제한이 아니라 오스트리아가 참여하지도 않았던 2차 분할문제를 트집 잡았으면 싸게 먹힌 거지.

만약 프로이센에서 잡아떼기 시작한다면 이제 와선 차라리 내 편을 들어줄 거다.

"그, 그건-."

반면 프로이센 측 협상단은 한참을 갈팡질팡할 뿐 선뜻 대꾸하지 못했다.

애초에 시작부터 프로이센 국왕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고 말했으니 주문서에 없던 폴란드 문제를 들먹이기 시작하면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겠지.

이 시절 외교 관습이 으레 그렇듯이 몇주씩 무도회에서 춤추면서 술 마시고 놀다가 가끔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협상하는 방식을 생각하고 있었을 테니 무슨 문제가 터지더라도 가끔 지령서 받고 대응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거겠지만-.

[자네는 오늘 하루로 끝낼 작정이라고 했지.]

그래, 종전 협상은 오늘 하루 안에 끝낸다.

차라리 우리 쪽에서 이걸 통과시켜줄까 말까로 몇주씩 토의를 하면 모를까 먹고 춤추고 노는 게 무슨 외교협상이야?

심지어 협상하는 시간보다 먹고 놀고 춤추는 시간이 더 긴게 일반적이라며?

햐, 진짜 혁명 마렵다.

나랏돈으로 호의호식하는 푸른 기생충 놈들 싹 다 단두대로 보내주고 싶다!!!

"그리고 이번 베르사유 조약이 의회의 승인을 얻는 즉시 모든 오스트리아 측 포로들의 무사 송환을 보장하지요."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로베스피에르 경."

카우니츠가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뻔한 너스레였고, 또 프로이센 측 협상단을 향한 무언의 압박이었다.

오늘 프랑스에 항복한 건 오스트리아뿐이니 이대로 입 꾹 다물고 있으면 프로이센과의 전쟁만을 재개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지, 지금 당장 파발을 보내겠습니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분명 좋은 대답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제발···!"

그제야 프로이센 측 협상단은 전향적인 자세로 조율에 나섰고, 결국 파리에서 요구한 모든 조건을 수용해야만 했다.

그럼 자연국경선, 자연국경선 노래만 부르던 원내에서 이 베르사유 조약을 거부할 이유가 없던바.

파리는 마침내 필부의 시대가 막이 올랐다며 전 유럽을 향해 위풍당당이 선언했다.

***

영국 귀족원.

"런던은 신성로마제국의 부채상환을 전폭적으로 후원해야만 합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만장일치였다.

당파나 작위야 각기 달라도 누구나 조국을 위하는 애국심만큼은 같다는 자부심.

그리고 노예제 문제에 지금 이것의 절반이라도 되는 지지세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는 안타까움이 뒤섞여 윌리엄 피트는 잠시 먼 곳을 바라봤다.

"이대로 저들이 파산하게 둬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도대체 누가 득을 본다는 말입니까?"

"그야 두말할 필요도 없이 파리겠지요. 저 대륙의 폭군이 설치게 두어서 지금껏 우리에게 좋았던 순간이 단 한 번이라도 있습니까?"

"고작 상환을 돕는 정도로 되겠습니까? 아예 시티 오브 런던에서 전액 보증해줍시다! 그래야 저 두 나라가 나폴레옹의 공포에 무릎 꿇기보다도 복수를 다짐할 겁니다!"

"좋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유럽의 자유를 위하여 우리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나서야 할 차례입니다!"

그리고 총리가 홀로 다른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귀족원은 열띤 토의를 주고받으며 더욱더 건설적이고 유럽 대륙의 균형과 조국의 국익을 도모하기 위한 구상을 하나둘 구체화 시켜나가고 있었다.

아무렴 프랑스의 독주를 막을 수만 있다면 그까짓 5억 리브르가 대수인가?

지금 이대로 신성로마제국에서 무거운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서 군비를 줄이거나 복수를 뒤로 미루기라도 한다면 그만큼 프랑스의 대륙 패권만 더욱 공고해질 터.

차라리 런던이 5억 리브르를 통째로 떠안고 말지 차마 그 꼴을 봐줄 수는 없었다.

당장 5억 리브르를 현물로 상환하라고 독촉한다면 천하의 시티 오브 런던도 그야 피를 토하게 되겠지만, 빚으로 달아둔다고 생각하면 그들 영국에겐 딱히 감당하지 못할 액수도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라는 두 육군 대국이 가장 힘들고 비참한 시기에 가장 싼 값으로 저점매수 했다고 생각하면 런던으로선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벨기카 공화국은···."

"···으음."

다만, 그런 귀족원조차 논의가 여기까지 흐르자 선뜻 뭔가 주장이나 제안이라 할만한 게 나오질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애초에 파리가 협의를 지킬 거라 믿었던 의원이 지금 이 자리에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당연히 합병하거나 실효 지배할 거라 생각했고, 그로 인해 네덜란드가 발작하게 될 거라 여겼으며, 그럼 이를 핑계 삼아서 이래저래 개입해볼 궁리만 하고 있었다.

태양왕 이래로 언제나 협상보단 승전이 쉽다는 게 프랑스식 외교(?)였으니까.

"일단 두고 봅시다."

그제야 기운을 되찾은 피트가 입을 열었다.

"우리도 당장 파리와 전쟁을 치르려는 건 아니잖습니까? 우선 우리의 동맹들이 이번 패전으로 용기를 잃지 않도록 정성껏 북돋아 주며 후일을 기약합시다."

"좋습니다. 괜히 무리해서 뇌관을 건드릴 필요는 없지요."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우리도 혁명정부를 프랑스의 유일 정통정부로 공인합시다."

"잠깐, 그럼 아르투아 백작은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긴요. 그 친구도 당연히 저장해둬야지."

"암암. 약점은 원래 두고두고 아껴쓰고 나눠쓰는 법."

참으로 런던답고, 훈훈하며, 건설적인 논의가 아닐 수 없었다.

이날,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뒤이어 세 번째로 프랑스 혁명정부와의 정식수교를 결의했다.

작가의 말

제정 이전 프랑스 제1공화국의 최대판도이자 당통과 라자르 카르노가 주장한 자연국경선입니다.

벨기카 공화국이 독립한 점, 사보이와 니스가 사르데냐령이라는 점을 제하면 작중 판도와도 일치합니다.

PS.뜻밖의 사실이지만 제1공화국의 자연국경선 확보에 나폴레옹은 기여한바 없습니다(당시 이탈리아,이집트에 있었음).

자연국경선 확보는 총력전 체제를 완편하여 연간14만정의 소총을 생산했던「승리의 조직자」라자르 카르노와 30만 대군의 공이었으며, 나폴레옹이 복직 했을 당시 프랑스군은 이미 네덜란드를 멸망시키고 스페인, 프로이센과 화친한 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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