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영웅
라인란트 쾰른.
""""나폴레옹! 나폴레옹! 나폴레옹!!!"""
거칠고 우악스러운 함성.
이날 거리에 나선 환영인파 중 누구 한 사람 프랑스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이가 없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구호는 단조롭고, 발음 또한 부정확했다.
하지만 백마에 올라 쾰른의 시민들을 향해 모자를 힘차게 흔들던 나폴레옹은 그 사실에 어떠한 불쾌함도 느낄 수 없었다.
어차피 프랑스어라면 나폴레옹 또한 썩 능숙하다고 자부하기 어려웠으니까.
오히려 프랑스어조차 제대로 모르는 이들이 그의 이름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이, 전 유럽이 그의 이름을 소리높여 외치고 있을 거라는 사실에 소리 없이 전율하였을 뿐.
'이게 정녕 나인가?'
그야말로 꿈속을 거니는 것만 같았다.
솔직히 아직도 그가 저 합스부르크가 벌벌 떨고 프리드리히 대왕의 후예들조차 감히 맞설 엄두도 내지 못하는 군신 나폴레옹이라는 게 실감이 느껴지지를 않았다.
혹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동명이인이 있는 건 아닐까.
그가 누군가의 인생을 도둑질하여 한여름 밤의 꿈처럼 짧고 강렬한 휴일을 보내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몇 번이고 볼을 꼬집어보아도, 아침 해가 밝으며 부스스 눈이 떠져도 이 꿈은 절대로 끝나지 않고 몇 날이고 며칠이고 계속되어가고 있었다.
그래, 내가 군신 나폴레옹이다.
이 코르시카의 젊은 촌뜨기가 전 유럽이 두려워하고 또한 열광하는 신화 속 주인공이다.
승리의 여신 니케에게 입맞춤을 받은 대전사요, 치천사 미카엘의 화염검을 받든 구체제의 심판자이다.
그 누가 감히 이 나폴레옹에게 맞서랴?
그 누가 감히-.
"장관이로군요."
나폴레옹의 곁에서 함께 백마를 타고 개선하던 베르티에가 자아도취를 일깨웠다.
"솔직히 파리도 아니고 라인란트에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환영해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건 우리가 침략군이기 때문인가?"
"그렇게까지 말씀드리지는 않았습니다."
베르티에가 정색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가 뻔한 내숭을 부리고 있다는 걸 쉽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요 몇 주 사이 보아온 베르티에는 상급자의 기분을 맞춰주는 데에는 탁월해도 동급자나 하급자를 대하면서 이따금 내비치는 본성은 기본적으로 퉁명스럽고 질투가 심한 인물이었으니까.
이번에도 상관인 나폴레옹을 배려하여 면전에서 본심을 말하지는 않겠지만, 평소처럼 이번 환영인파도 삐딱하게 생각하고 있으리라는게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했다.
"왜 우리가 침략군이란 말인가? 해방군이지."
하여, 나폴레옹은 베르티에를 골려주기 위해 뻔한 내숭을 부려보기로 했다.
그 자신도 믿지 않을 허무맹랑한 프로파간다였다.
"나와 나의 사단은 지난 몇 달 사이 라인란트의 영주들을 무찌르고 악덕 상인들을 벌주어 가난한 서민들을 돕는 의적으로서 명성을 떨쳐왔네. 우리가 약탈품을 가난하고 핍박받는 민중들에게 나눠주고 다니니 금세 어디를 가나 우릴 도우려는 의용군이 따라다녔지."
"음, 뭐 그렇긴 했습니다만···."
"어허, 그렇긴 했습니다가 아니라 그랬잖은가. 우린 이 라인란트의 앙시앵 레짐을 무너트리고 새롭고 자유로운 혁명 조국을 선물한 은인이자, 해방군일세. 저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게. 저들이 우릴 두려워하는 것 같은가?"
"저기, 외람되옵니다만 각하."
베르티에가 잠시 숨을 고르며 나폴레옹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지금 저들은 우리 프랑스나 혁명이 아니라 각하에게 열광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
나폴레옹은 답하지 않았다.
그 또한 내심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
"저 환영인파들을 보십시오."
척.
베르티에가 기다렸다는 듯이 꽃다발을 건네는 처녀들을 가리켰다.
"온통 젊은 처녀들과 청년들, 그리고 어린이들만 가득하잖습니까. 늙고 병든 이들은 물론이고, 나이를 먹어서 가정을 꾸렸을 장년층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그거야 늙다리들이 혁명을 좋아할 리가 있는가? 저들이 바로 이 라인란트의 친혁명파이고 친불파인거지."
"물론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렇다면 오늘 저들은 프랑스나 혁명을 부르짖고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쾰른의 시민들을 한목소리로 나폴레옹을 부르짖었다.
젊고, 잘생기고, 전 유럽을 두려움과 놀라움에 떨게 한 영웅의 등장에 열광하고 있었다.
보잘것없는 변방의 귀족으로 태어나 젊은 나이에 입신양명하여 당당히 용맹을 떨치고 있는 아름답고 위대한 초인의 등장에.
베르티에는 그런 나폴레옹을 향해 분명하게 속삭였다.
"저들은 흠모하는 각하를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만나 뵙기 위하여 찾아온 환영인파입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말인가.
그 속내를 뻔히 알면서도 나폴레옹은 차마 대꾸하지 못했다.
그만큼 베르티에의 속삭임은 달콤했다.
하지만, 위험하기도 했다.
정계에 깊이 연루된 군인과 정치에 진출하려는 군인의 처신은 사뭇 다를 수밖에 없으니.
만일 지금 베르티에의 꼬드김에 넘어간다면 보잘것없는 시절부터 그를 신임하고, 요직에 발탁해준 로베스피에르와 척을 져야 한다는 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그는 로베스피에르와 맞선 라파예트와 뒤무리에가 어떻게 되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쾰른의 환영인파를 보라.
애써 눈을 돌리고 있긴 했지만, 저 모든 이들이 정말로 혁명에 열광하여 모여든 인파들일까?
만일 이렇게나 쾰른에 친 혁명파가 많았다면 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고 5년이 지난 지금까지 라인란트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났다거나 시도되었다는 풍문 한번 들려오지 않았는가?
결국 저들은 베르티에의 말대로 젊고 잘생긴 영웅 나폴레옹을 만나기 위하여 찾아온 이들임이 분명하다.
그럼 나폴레옹 사단이 지금껏 괴롭혀온 라인란트가 이정도라면 프랑스는, 파리는 어떠하겠는가?
꼭 쿠데타 같은 비겁한 수를 쓸 것도 없이 이 광신적인 지지에 기초한 합법적인 집권을 추구한다면 그 누가 그를 힐난하려 하겠는가.
할 수 있다.
그가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능히 이번 전쟁이 끝나는 즉시 로베스피에르의 그늘에서 벗어나 훨훨 날아오를 수 있다.
보다 높이, 어쩌면 로베스피에르보다도 높은 곳으로 날아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어쩌면 황-.
"거, 이 좋은 날에 둘이서 수군덕거리지만 말고 나도 좀 끼워주지 그러나?"
푸르륵.
순간 뒤에서 병사들에게 오와 열을 맞추던 뒤무리에가 다가와 비아냥거렸다.
"아니면 뭐 내가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라도 하고 있었나 보지? 좋아, 어디 한번 맞춰보겠네."
"아니, 그러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뒤무리에 장군."
"에헤이, 섭섭하게 왜들 이러는가? 그래도 영광스러운 전투를 함께한 전우들일진대."
베르티에 따윈 가소롭지도 않다는 듯이 뒤무리에가 코웃음을 쳤다.
하기야 군경력을 보건 계급을 보건 우습게 보이는 게 당연하기도 했지만-.
"허튼 생각하지 마라, 애송이."
나폴레옹만큼은 예외였다.
뒤무리에는 나폴레옹을 정면으로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보아하니 카이사르나 뭐 알렉산드로스라도 된 기분인가 본데, 우린 병풍으로 보이나? 서른도 안 먹은 코흘리개가 거들먹거리는 꼬락서니라니, 기가 막히군."
"지금 질투하시는 겁니까?"
"질투? 아니, 경험자로서 조언을 해주는걸세. 자네 파리를 감당할 자신 있나?"
"그건-."
있다, 고 답하려다 말고 나폴레옹은 불현듯 일상적으로 총성이 울려 퍼지는 철혈의 도시를 떠올렸다.
당장 지난날 부녀자들을 이끌고 뒤무리에와 대치했을 적에 그 폭도들이 나폴레옹의 지휘를 따르던가?
나폴레옹이 군인으로서 얼마나 빼어나건 간에 아예 남의 명령 따윈 들을 생각도 없는 거칠고 야만스러운 폭도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건 엄연히 별개의 영역이었다.
"내 지켜보겠네."
빠드득.
뒤무리에가 이를 갈았다.
"아마 라파예트 놈도 지금쯤 지켜보고 있겠지. 그놈도 질투라면 남부럽지 않은 놈이니까 말이야."
"아하, 보아하니 한번 당하신 정도로는 정신 못차리고 또 두분이 몰래 작당하고 계신 모양입니다?"
"풋, 마음대로 생각하게. 내 인생 선배로서 조언해두겠는데, 모든 프랑스인이 자네 편이라고 생각했다간 큰 코를 다칠 거야."
원래 높이 나는 새에겐 그만큼 짱돌이 날아드는 법이거든.
마지막 경고를 끝으로 뒤무리에는 자리로 돌아갔다.
"···엿들은 걸까요?"
그제야 발언권을 되찾은 베르티에가 나폴레옹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야망으로 날카롭게 빛나는 눈초리가 뒤무리에를 이미 적으로 간주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글쎄."
들었는지, 짐작했는지야 어차피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말 위에서, 그것도 저 많은 인파가 나폴레옹을 연호하는 와중에 이야기를 엿들었다-혹은 낌새를 눈치챘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그들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는 소리니까.
하기사, 군인으로서 둘도 없는 명예인 개선식 와중 새파랗게 어린 후배의 들러리로 전락한 뒤무리에로서는 그야 울화가 치밀 수밖에 없었겠지만.
'···내가 너무 서둘렀나.'
그제야 나폴레옹은 구태여 적으로 돌릴 필요 없었던 인물을 제 무신경함 탓에 철천지원수로 만들고야 말았음을 자각했다.
한패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누구보다 든든했을 노장을 처음에는 부녀자들로 희롱하고, 두 번째에는 개선식으로 농락해버린 것이다.
결국 의도한 건 아니라지만 사내대장부로서의 체면과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동시에 짓밟아버린 셈이 되었으니 뒤무리에는 절대로 나폴레옹을 용서하려 하지 않을 터.
"오늘 일은 못 들은 거로 하겠네."
결심을 굳힌 나폴레옹이 베르티에를 향해 분명히 선언했다.
"하오나 각하."
"어허, 서두르지 말게.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모르지도 않을 사람이 왜 이러는가."
그래, 아직은 때가 아니다.
나폴레옹은 젊고, 베르티에도 젊으며,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고도 까마득하다.
로베스피에르의 그늘 아래에서 차근차근 경험을 더 쌓고 기반을 다진 다음에 비로소 야심을 내비쳐도 늦지는 않을 터.
"고작 한번 승리했을 뿐이네. 앞으로도 이 나폴레옹과 한참을 더 함께 싸우고 이겨나가야 할 텐데 뭘 그리 서두르는가."
"···명심하겠습니다, 각하."
그제야 베르티에는 환히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조아렸다.
나폴레옹이 그를 제 오른팔로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삼인칭으로 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곧 고대 적부터 누구보다 존귀한 혈통만이 허락받을 수 있었던 오만한 화법이었다.
***
자코뱅 수도원.
"자네 어떻게 생각하는가?"
"뭐를?"
"로베스피에르, 그 친구 말이네."
에베르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췄다.
좌우로 바삐 움직이는 그의 동공이 결코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는 걸 암시하고 있었다.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말이야."
"이봐, 또 그 소리인가?"
당통이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이겼네. 뭐, 그런다고 우리의 혁명이 끝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제 한숨 돌릴 수 있게 되겠지. 한데, 이 기쁜 날에 꼭 이런 소리를 해야겠는가?"
"그럼 다 끝났으니까 꺼내야지, 전쟁도 끝내기 전에 이랬어야 했다는 말인가?"
에베르가 냉소했다.
잠시 전쟁 와중 당내 탄핵 여론이 득세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던 당통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어차피 이야기를 꺼내려고 작정했다면 차라리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이 맞다.
아예 처음부터 이런 이야기를 꺼낼 일이 없었다면 최선이었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이러라고 저 친구를 독재관으로 만들어준 게 아니잖은가."
쿵쿵.
에베르가 울화가 터진다는 듯이 가슴팍을 두드렸다.
"우리가 이겼네. 비단 전쟁에서만이 아니라 선거에서도 이겼고, 모조리 이겼지. 그럼 당연히 이제부턴 우리가 하고 싶지만 못해왔던 것, 생각해왔던 것 모두 이뤄졌어야 할 거 아닌가."
"이봐, 이 친구야. 제발 진정 좀 하게."
"진정? 우라질,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냐! 그래, 공훈을 따지자면 당연히 저 자식이 1등 공신이겠지! 그걸 부정하지는 않겠어! 그런데, 우린 그래서 그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놀았냐? 손가락이나 쭉쭉 빨면서 안전한 곳에 처박혀 있었냐는 말이야!!!"
쾅!
거친 발길질에 두 사람을 가로막던 탁자가 쓰러졌다.
"오를레앙, 그 개놈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몇이나 되는 동지들이 쓰러졌는지 기억나냐? 나는 그날 마라를 잃게 되는 줄 알았어!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 자코뱅 수도원에서 뼈를 묻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때 그 자식은 어디 있었지?
우리가 죽을 둥 살 둥 뒤무리에와 맞서 총격전을 벌일 때 그 잘나신 로베스피에르는 어디 계셨냐는 말이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는 알겠네."
다시 그 탁자를 일으켜 세우며 당통이 대꾸했다.
"한데, 그래서 어떻게 할 작정인 건가?"
"나폴레옹을 꼬드겨봐야지. 그놈은 아무 생각 없더라도 이미 그 아랫 놈들은 헛바람이 들었을거야."
"···지금 자네 손으로 카이사르를 만들어주겠다고?"
"안될 이유가 뭐 있나? 우린 이미 혁명을 위해 독재관도 세워봤잖은가."
그 망할 놈이 배신해서 그렇지.
에베르가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카이사르건 아우구스투스건 민중파였지. 다들 제 잇속만 생각하느라 눈치만 보는 사이에 민중을 위하여 절대권력을 휘둘러준 건 그 두 사람이었네. 시시한 탁상물림 놈들이 제아무리 부정해봐야 역사의 승리자는 그들이었고 무너져가는 로마를 다시 일으킨 건 부패한 원로원이 아니라 로마인의 황제였어."
"동의할 수 없네."
"오, 그래. 자네는 그렇겠지. 배부른 부르주아지가 배곯는 상퀼로트의 고통을 어떻게 알겠나? 파업이 일어날 때마다 성가시다고 투덜거릴 시간에 왜 저 파업이 일어나는지 생각은 해봤나?"
"물론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지는 못하네."
당통이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게 대체 절대군주와 다를 게 뭐란 말인가? 결국 이렇게 흐를 거면 우리가 도대체 뭣 하러 구체제를 무너트리고 혁명을 일으켰다는 말인가!"
"보편적 다수의 공공복리를 도모하고 신이 아닌 인간의 손으로 뽑힌 절대권력을 위하여."
"그 절대권력이 개인이 될 필요는 없네."
"선량한 개인은 존재할 수 있어도 선량한 집단은 존재할 수 없지."
"그렇기에 더욱 많은 안전장치가 필요한 것 아니겠는가."
"···자네도 그 친구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군."
에베르가 실망스럽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지? 저 친구가 샹 드 마르스에서 기적을 일으켰을 때만 해도 나와 함께하지 않았는가?"
"그때 내가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하는가?"
침묵.
당통이 침묵하는 에베르를 비웃으며 덧붙였다.
"내가 그날 왜 그 친구를 경계했는지 기억한다면 지금 그 소리는 못할 텐데."
"이봐, 진짜 이럴 텐가?"
"당연히 이러고말고. 난 그 친구의 무쇠 고집을 믿네. 전쟁통에 그 무수한 헛소리를 혼자서 감당해줬으면 이제 그만 철석같이 믿어줄 때도 되었지."
"선량한 황제를 말하는 내게 더욱 많은 견제와 안전장치가 필요하다고 반박한 주제에 그건 너무 자기 모순적이라고 생각하진 않는가?"
"그 친구가 바로 이 프랑스 최고의 안전장치야."
당통이 단언했다.
"독재관이 독재 권력을 배신했네. 이 세상에 그보다 더한 안전장치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황제가 아니라 시간일세, 에베르. 우리가 바로잡을 수 있어. 우린 썩어빠진 귀족들의 원로원이 아니야. 자유로운 민중의 민회지."
"그리고 그 민중은 우리에게 독재할 자유를 요구하고 있지."
"그렇게도 협치하기 싫은가?"
"당연히 싫고말고. 지금 우리에게 협치하지 않아도 될 힘과 지지세가 있는데 왜 이따위 소모적인 촌극에 시간과 열정을 낭비해야 한다는 말인가?"
쿵!
에베르가 또다시 두 사람을 가로막던 탁자를 걷어찼다.
하지만, 이번엔 탁자는 잠시 요동쳤을 뿐 허물지 않았다.
"그럼 잘 가게, 이 친구야. 다음에 만날 때는 적이겠군."
"친구는 무슨. 애초에 상퀼로트와 부르주아지가 대체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결국 두 사람은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 악수를 주고받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뒤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