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154)

공화(共和)

어느 날 수상으로서 결재받기 위해 튈르리 궁에 들어서니, 프로방스 백작이 대뜸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로베스피에르 경, 아랫것들이 짝짜꿍해서 그대를 음해하려 하는 거 알고 있나?"

"흠, 제겐 동지는 있어도 아랫사람들은 없습니다만."

"···자크 르네 에베르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일세."

에베르와 나폴레옹이라.

왠지 듣기만 해도 대충 어떤 그림인지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은데.

젊은 영웅 나폴레옹이 히틀러+괴링+만슈타인 삼위일체하고 에베르는 괴벨스+히믈러 노릇하면서 반대파들 마녀사냥 하는 그림인가.

[그 카이사르 놈이 기어이···!]

어허, 흥분하지 마시고 일단 무슨 이야기인지나 마저 들어보자고.

애초에 핵 추진 로켓 달고 화성으로 날아가고 있는 나폴레옹 코인에 줄을 대보려는 게 에베르 한 명 뿐일 리가 없잖아.

그리고 저 여우 같은 양반이야말로 두 사람을 음해 중일지도 모르는 건데 첫마디에 홀라당 발라당 넘어갔다가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뭐, 당연히 그럴 법한 이야기로군요."

"사안에 비해서 반응이 영 시원찮구만."

"별것 아닌 사안이라면 섭정께선 오히려 호들갑을 떠셨을 것이고, 막을 수 없는 사달이라면 조용히 몸을 피하셨겠지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내게 정보를 흘려 의심을 퍼트리거나 빚을 만들어두려고 하고 있다는 건.

"경계는 해야겠지만 아직 제가 움직일만한 상황은 아닌 거죠. 아마 몇 차례 접촉이 있었다던가, 낌새가 있다던가. 뭐 그런 식 아닙니까."

쾅.

프로방스 백작은 대꾸하는 대신 결재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정곡이구만.

"그리고 고작 그 정도로 호들갑 떨 생각은 없습니다."

벌써 헛바람이 든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생각하고 있다던가 하다면 진짜 비상사태겠지만.

그랬으면 당신이 되었건 푸셰가 되었건 둘 중 하나는 파리에서 자취를 감추거나 요직에서 물러났겠지.

하지만 두 사람 다 멀쩡히 있잖아?

무슨 일 터지면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움직여줄 탄광의 카나리아들이 남아있는데 나 혼자 벌써 겁먹고 의심해봐야 내 손해다.

앞으로 나폴레옹에게 줄을 대려는 야심가들이야 광주리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텐데 그때마다 의심할 순 없잖아.

"어차피 인간 세상에 파벌이라는 게 없어질 수야 있습니까. 다 끼리끼리 마음 맞는 사람끼리, 수지타산에 맞는 사람끼리 모이는 거죠. 저와 마음이 맞지 않는다면, 제가 그 사람들이 원하는 걸 제공해주지 못한다면 당연히 떠나야지요."

"···내가 지금 이간질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본데, 그게 아니라 난 그대가 실각할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는 걸세. 그대 같은 온건파가 떠나고 에베르 같은 놈들이 설치기 시작하면 이 허수아비 섭정직으로는 감당할 자신이 없거든."

"제가 온건파로 보이십니까?"

이래 봬도 저번에 원내에서 왕정 폐지 담론 처음 꺼낸 장본인인데?

물론 급진당 내에서도 온건파라는 분류에 속하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당신 같은 반동한테 온건파라고 불리는 건 좀.

"큭, 이제 와서 왕정 폐지 정도면 온건파지 뭘. 날 너무 얕보고 있는 거 아닌가, 로베스피에르 경."

···어라.

"난 형님과 달라. 최소한 누가 내 목숨을 위협하고 있는지, 누가 날 지켜주고 있는지 정도는 분간할 머리는 있네. 그대는 멍청한 형님이 무사히 퇴위할 수 있도록 도왔고, 저 무력한 꼬마가 젊은 혈기에 멋모르고 사형장으로 돌격하기 전에 왕정을 폐지해주려 하고 있네."

프로방스 백작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이게 온건파지 달리 무엇이 온건파란 말인가. 날 믿으라고 하지는 않겠네. 다만, 날 근시안적인 야심으로 목숨을 버릴 머저리라고 얕잡아보지는 말아줬으면 하는군."

"섭정님을 얕잡아 본 적은 없습니다만."

"되지도 않는 이간질이나 할 거라고 믿은 게 얕잡아본 거지 뭘. 내가 지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아도 되는 대단한 권력자로 보이나?"

···확실히.

만일 절대왕정 시절이었다면, 아직 원내에 잘난 혈통 덕분에 의원 노릇 하던 작자들이 가득하던 시절이면 몰라도 지금 프랑스 왕국의 섭정이라는 자리는 이름만 거창한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한창 전 유럽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군신 나폴레옹과 비할 바는 아니지.

나도 딴에는 전 유럽이 아는 유명인이라지만 그건 계몽주의자나 혁명가들 사이에서 유명한 거지, 정치의 ㅈ자도 모르는 시골 처녀들에게까지 프랑스의 젊고 잘생긴 영웅으로 이름을 날린 나폴레옹은 격이 다르다.

하물며 잠시 전쟁 탓에 자리를 비웠다고 하지만 나폴레옹은 파리 방위사령관 직위를 내려놓은 적 없다.

그럼 허수아비 섭정이 파리방위사령관이자 전 유럽이 아는 전쟁영웅을 음해하려 했다면-흠.

[즉각적인 왕정 폐지는 떼놓은 당상이겠군.]

그렇지.

프로방스 백작 일가의 단두대 쇼는 덤일 거고.

"실례했습니다."

이번 건 내가 당신을 얕잡아본 게 맞네.

솔직히 권력욕에 사로잡혀서 사나이 대장부가 모름지기 칼을 뽑았으면-어쩌고저쩌고할 불나방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역시 그들을 탄압하거나 멀리할 생각은 없습니다. 한 번쯤 만나서 이야기해볼 필요는 있겠지만요."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무른 친구였군."

"무슨 쿠데타 모의도 아니고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정도야 건전한 의회정치의 일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쿠데타라던가 황제즉위라던가에 도전하기 시작한다면 당연히 박살을 내줘야겠지만.

그냥 정적으로 끝난다면 덕분에 전략 나폴레옹 백지수표로 크게 한방 당겼으니 이만하면 서로 상부상조한 거지 뭘.

솔직히 천하의 나폴레옹이 민선의원이나 자문 위원으로 원내 입성하면 과연 어떤 논리로 대권을 노리려 들까 기대되던 참이다.

그리고 혹시나 내가 나폴레옹을 여의도 굴다리에 끌고 가는 데 성공한다면 나도 어디 나가서 당당하게 성공했다고 자랑해볼 수 있는 거? 아닐까!

어무이, 나 나폴레옹 먹었어!

[미친놈.]

아니 이 양반은 정신 기생체 원데이 투데이 본 것도 아니면서 왜 이러셔.

"나폴레옹 그 친구를 제가 키워주긴 했지만, 처음부터 누군가의 쇠창살에 갇혀있을 그릇이 아니었으니. 불사조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려 한다면 이만 놓아주는 수밖에요."

"좋아, 그렇다면."

프로방스 백작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도 그렇게 눈감아줄 수 있겠나?"

"···또 국외 망명이라도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그래서 내가 망명한다고 저 나폴레옹을 이길 용병대장을 구해올 수 있을 것 같은가? 자꾸 날 형님으로 아는군."

아, 하기야 그렇네.

차라리 나폴레옹이 쿠데타나 군사 반란을 일으키면 모를까 다른 놈들은 이제 감히 도전할 엄두도 못 내겠구나.

이것도 전략 나폴레옹의 순기능이구만.

"그게 아니라 왕정 폐지 다음을 말하는 걸세."

프로방스 백작이 나지막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보나 마나 개표 결과는 왕정 폐지겠지. 그 밖의 결과는 파리에서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 농민들은 용납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니 나를 놓아달라는 소리 아닌가. 내가 저들을 설득하겠네."

뜻밖의 제안이었다. 

하지만 합리적인 제안이기도 했다.

"대신에 루이 17세와 기타 부르봉 가문원의 신변 보장, 그리고 부르봉 가문의 참정권. 이 두 가지를 요구하겠네."

"전자야 당연하다고 치고, 후자는 누굴 위한 요구입니까?"

척.

프로방스 백작은 당연하다는 듯이 오른 엄지로 저를 가리켰다.

···햐, 이 양반 생각보다 되게 뻔뻔한데?

"로베스피에르 경, 그대도 알겠지만 왕정 폐지가 선포된다고 그 즉시 왕당파가 소멸하지는 않을걸세."

오히려 한동안은 핍박받고 박해받았다며 동정을 사 더욱 번성하게 되겠지.

프로방스 백작이 덧붙였다.

"내가 그들이 감히 파리에 총칼을 들이밀지 않도록 다독이고 달래겠네. 개표 결과에 순응하고 소년왕께서 무사히 퇴위라도 하실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도록 말이야. 대신에, 내가 왕정 폐지 직후 열릴 선거에서 방데 지방의 민선의원 자격으로 출마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게."

"그럼 당선이야 따놓은 당상이겠군요."

"당연하지. 그대도 그동안 법통파 행세하면서 농민들을 다독이지 않았는가? 이제 국민투표가 끝나고 나면 그대를 법통파라고 불러줄 사람은 더는 아무도 없게 될 테니, 내가 그 법통파를 이어받겠네."

흠-.

[···자네, 설마 받아들일 생각인가?]

솔직히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지?

이 섭정 양반이 지적한 대로 개표 결과 왕정 폐지가 선포되지 않는다면 파리에서 뒤집어엎을 테고, 반대로 공화정 건국이 선언된다면 농촌에서 뒤집어엎으려 들 거다.

물론 전략 나폴레옹 투하하면 어느 쪽이 들고일어나건 싸잡아서 짓이겨 버릴 수 있겠지만, 그러고 나면 누가 투표하려 들겠어.

오히려 한창 긴장이 고조되고 파리를 향한 불신이 부활할 때 프로방스 백작이 법통파를 이어받아 농민들이 다음 총선에서 몰표를 던지는 식으로 분노를 풀도록 유도한다면 나쁠 건 없다.

이 혁명정부와 선거 민주주의를 향한 고질적인 불신이 언젠가 나폴레옹 제정을 위한 양분이 될 테니까.

저 파리의 혁명가들은 부르봉 왕가를 남김없이 제거한다면 자연스레 구체제를 향한 향수도 사라질 거라 믿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무수한 역사적 사례들은 숭배할 대상이 사라진 민중은 새로운 숭배 대상을 찾아낼 뿐임을 보여준다.

그럼 괜히 프랑스의 농민들이 새로운 황제를 찾아 헤매도록 둘 바에야 법통파라는 이름으로 옛 부르봉조를 추억하도록 두는 게 낫겠지.

다만.

"새로운 법통파를 긍정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기꺼이 경청하겠네. 무엇인가?"

"첫째로, 저를 대신하여 앞으로도 방데 지역의 가톨릭 협동조합을 널리 퍼트려 주십시오. 둘째로, 지방을 대표하여 도시와 대립해주십시오. 셋째로, 파리의 중앙집권에 맞서서 지방분권을 내세워주십시오."

왕위를 요구하지 말라.

왕정복고를 추구하지말라.

이 두 가지 조건은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럼 우리 섭정 양반이라면 이게 무엇과 무엇을 거래하는 협약인지 눈치챘겠지.

[설마 진심은 아니라고 믿고 있겠네.]

아니, 진심인데? 

지금 상황에서 나폴레옹 제국도 아니고 혁명 공화국도 아니고 프로방스 백작에 의한 왕정복고가 터질 정도면 외치가 되었건 내치가 되었건 뭔가 단단히 잘못했다는 이야기인데, 그럼 유권자들의 심판을 달게 받아들여야지 뭘.

그거야말로 저쪽을 탓할 게 아니라 우리가 자아비판해야할 결과다.

[허 참.]

"이 세 가지 조건만 받아주신다면 장차 새로운 법통파가 원내에 진입할 수 있도록 저 또한 적극적으로 협조하겠습니다."

"그다지 어려운 조건도 아니군."

쾅.

프로방스 백작, 아니 루이 그자비에가 새로운 예산안에 결재도장을 내려찍었다.

그것이 오늘의 밀담을 향한 화답이기도 하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

암스테르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군."

후우-.

네덜란드 공화국 총독(Stadhouder) 빌럼 5세 판 오라녜나사우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녕 저 국민투표에서 프랑스 왕당파가 승리할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는 말인가?"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각하. 설령 승리한다고 한들 어찌 파리가 이를 인정하겠습니까."

"그래, 인정할 리가 없겠지. 빌어먹을, 나도 알아! 알지만 이대로 둬서는 안 된다는 걸 경들도 알잖는가!"

처절한 절규였다.

사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의아한 반응이었다.

저 영국이나 신성로마제국 같은 군주국이 아니라 엄연히 공화국을 자처한 그들 네덜란드가 이웃 프랑스의 왕정 폐지에 동요할 이유가 하등 없었으니까.

하지만 현 빌럼 5세의 정확한 지위는 공화국의 선출지도자가 아니라 어느덧 200년 전통을 자랑하는 경애하는 인민의 영도자, 공화국의 태양-풍차혈통이었던 바.

위대한 선조들은 풍차혈통을 결사옹위하는 우국지사들의 자발적인 선거 활동으로 반대파 후보들을 백주대낮에 사임하게(암살) 하시고, 회유(협박)하시며 공화국의 태양을 지켜오셨으나 빌럼 5세의 재주는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하였으니.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내치에서도 온갖 결점을 노출하다가 감히 풍차혈통을 축출하려고 한 애국당 폭도들을 장인어른의 나라 프로이센 덕택에 간신히 진압했던 빌럼 5세에게 프로이센의 패전은 심각한 문제 일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그 프로이센을 무찌른 프랑스가 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완전히 뿌리 뽑은 줄만 알았던 애국당 잔당이 곳곳에서 재기할 게 뻔하잖은가?

"도대체 이를 어찌하면 좋다는 말인가."

하다못해 장인의 나라 프로이센만 건재하였어도 이렇게까지 근심할 필요는 없었으련만.

무엇보다도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적이고 누가 봐도 공화국인 남저지대 괴뢰도당의 등장은 그들 북저지대 풍차혈통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렴 저지대인들에게 외세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애국당의 반란을 진압한 빌럼 5세와 한차례 좌절했음에도 외세의 후원을 끌어내 조국을 해방 시킨 앙리 중 누가 통일 공화국을 이끌 재목으로 보이겠는가?

이미 4차례에 걸쳐 전쟁을 치른 숙적 영국에 손을 내밀 수도 없고, 그렇다고 프랑스에 국민투표를 치르지 말라고 할 수도 없으니 빌럼 5세로서는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질 수밖에는 없었다.

"그럼···."

보다 못한 해군 장관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국왕, 아니 총독의 반짝이는 동공이 그를 향하자 용기를 얻은 장관이 말하기를.

"카리브해역에서 프랑스를 도와보시는 건 어떠실는지요."

"지금 저 폭도들을 도우란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런던에서도 유럽이 아니라면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건 좀."

빌럼 5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지금 공화국의 총독이 할 말이냐는 반발이 나올 법도 했으나, 막상 이 자리에 모인 참가자 중 이를 트집 잡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북저지대는 귀족들과 일부 부유한 상인들만의 과두공화국이었으니까.

가난뱅이나 농노들이 감히 정치에 참여하겠다 설친다면 이는 틀림없이 애국당 잔당이오, 공화전통을 파괴하고 풍차혈통을 축출하려는 반공화적 왕당파임이 틀림없었다.

"그게 과연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지금 저 폭도들에게 힘을 실어줬다간 자칫 애국당 놈들이 또다시 들고일어날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심지어 브뤼셀에 애국당 잔당이 숨어들었다는 풍문까지 돌고 있다면서?"

"그렇기에 더더욱 파리와 화친한 시늉을 하셔야만 하옵니다."

"화친한 시늉을 해라?"

그제야 들어줄 마음이 들었는지 빌럼 5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렇사옵니다. 만일 공화국이 파리와 대립하려 한다면 저들은 브뤼셀에 더욱 힘을 실어주려 할 것이며, 이는 애국당의 부활을 꿈꾸는 폭도들에게 좋지 않은 신호를 줄 것이옵니다. 하지만 각하께서 파리와 화친하신 척을 하게 된다면-."

"당분간은 조용해지겠군. 프랑스에서 먼저 브뤼셀을 부추기지 않는다면 말이야."

제법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어차피 영국이야 네덜란드와 경쟁하는 것과는 별개로 런던의 안보를 위해 이 지역에서 분란을 일으키려 하지는 않을 터.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야 조금 전 참패했으니 한동안은 옴짝달싹 못 할 거고, 그럼 브뤼셀만 파리에서 책임지고 조용히 만들어준다면 마땅한 후원자를 찾지 못한 애국당 잔당들도 덩달아 조용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프랑스에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보자는 건데···.

"···프랑스를 믿을 수 있겠나?"

태양왕 이래로 협상보단 승전이 쉽다는 게 프랑스식 외교일 텐데.

또다시 그들 암스테르담에서 도와준 은혜는 생각하지 않고 모른 척 냅다 선전포고하거나 침략해버리면 그걸로 끝이잖은가.

"각하."

하지만 신료-아니 각료들은 오히려 그런 빌럼 5세의 과하다는 듯이 다그쳤다.

"그러면 왜 브뤼셀이 저 애국당 폭도들의 요람이 되었겠습니까?"

"···끄응."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만일 프랑스에서 언제나 그래왔듯이 병합해버렸다면 일단 영국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고, 애국당 잔당이 브뤼셀에 진을 칠 겨를도 없었을 테니까.

솔직히 그래서 믿지 않는다고 달리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날, 암스테르담은 마침내 노예무역 철폐를 결의하며 파리의 손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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